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9)화(109/195)
#100
“전 당신이 꼭 색칠 공부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싫습니까?”
“……아니, 아니야. 줘. 우리 형이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해야지.”
난감해하며 거절하던 권지한이 윤서의 표정을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안고 있던 햅쌀이를 윤서에게 남겼다. 받아 들던 윤서가 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알 표면에 금이 가 있었다. 그것도 왜 이제야 눈에 보이나 싶을 만큼 꽤나 커다란 균열이었다.
“차, 찹쌀아. 잠깐 멈춰 봐.”
“네, 근처에 댈게요.”
차가 멈추고 윤서가 긴장한 채 햅쌀이를 살폈다.
“어? 뭐야. 햅쌀이 드디어 깨는 거야?”
권지한도 균열을 발견했다. 그는 색연필과 색칠 공부책을 내던지고 눈을 반짝였다. 찹쌀이가 갑자기 내부 등을 켰다.
“주인님, 햅쌀이가 눈을 뜨나 봐요.”
“어어, 챕쌀아. 햅쌜이 눈 떠나 봐.”
윤서는 정신이 없어서 이상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권지한이 웃음을 삼키는 것도 몰랐다.
윤서는 햅쌀이 밑에 푹신한 방석을 깔아 놓고 지켜봤다. 지금 색칠 공부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기상으로 어제나 오늘쯤 깨어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만약 균열을 눈치채지 못하고 권지한과 희희낙락 색칠 공부에 정신 팔린 사이 햅쌀이가 깨어났다면?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쩌저적.
균열이 커졌다.
“우와. 아이템이 탄생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야.”
권지한이 어린애처럼 감탄했다. 윤서는 침을 삼켰다.
“햅쌀아.”
윤서의 부름이 있자마자 금이 더욱 커지더니 작은 껍질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삐.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권지한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윤서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얀 알껍데기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깃털의 푸른빛이 비쳤다. 노란 부리가 열심히 나머지 조각들을 부쉈다. 삐윳, 삣, 삐잇. 쉴 새 없이 울면서 껍데기를 깨고 나온 것은 작고 푸른 새였다. 새는 먼저 권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조약돌 같은 까만 눈을 한 번 깜박이고는 윤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서 파닥파닥 날갯짓했다. 윤서가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윤서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몇 번 더 날갯짓한 작은 새가 날아올랐다.
10년 만의 재회다.
죽은 줄 알았던 나의 작은 새.
그 지옥에서 햅쌀이는….
내가 죽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는 이 아이템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
옆에 권지한이 없었다면 윤서는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햅쌀아….”
삐유….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삐윳삐윳!
“으앗.”
그런데 햅쌀이가 착지한 곳은 윤서의 손가락이 아니라 정수리였다.
삐유! 삐유우! 삐유삐윳!
“아, 햅쌀아.”
삐유웃!
“미안해. 잠깐만.”
작은 새는 윤서의 사과는 못 들은 척 까만 머리카락을 부리와 발톱, 날개로 마구마구 헤집었다. 작은 새는 매우 화가 난 듯했고 서러운 듯도 했다. 윤서는 화난 걸 이해한다는 듯 연신 사과했다.
햅쌀이는 그렇게 한참을 윤서를 괴롭히다가 나중엔 윤서의 손바닥 위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삐유유. 삐유웅. 삐융.
“미안. 네가 살아 있는 걸 알았으면 바로 찾았을 텐데.”
삐융!
“그러게. 눈치 못 챈 내가 멍청했다.”
삐이이. 삐이. 삐유. 삐유우우.
“응, 이제 떨어지지 말자.”
윤서는 작은 새를 소중하게 감싸 쥐고서 모든 투정을 들어 줬다. 햅쌀이는 서럽게 울면서 손가락 틈 사이에 부리와 머리를 파묻고 꽁지만 파닥파닥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지만 윤서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그렇게 주인과 아이템의 감동적인 인사가 끝나고 기회를 누리던 AI가 말을 걸었다.
“안녕, 햅쌀아. 나는 찹쌀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삐?
“차에서 똥만 싸지 말아 줘.”
“괜찮아, 찹쌀아. 햅쌀이는 아이템이라 똥 안 싸.”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삐유.
“안녕, 햅쌀아.”
이번엔 권지한이었다.
‘존재하는 넋’이 까만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권지한을 쳐다봤다. 잠시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이 오고 가고. 권지한은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내건 채 손가락을 내밀었다.
…삥.
햅쌀이가 도도하게 권지한의 손가락을 부리로 콕 찔렀다.
“인사해 준 겁니다.”
“진짜 귀엽다.”
“그렇죠.”
윤서는 아직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윤서가 손가락으로 햅쌀이를 조심스레 쓰다듬길래 권지한은 제 손가락을 떼어 냈다.
“…….”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S급 아이템. 제 주인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템. 마치 자아가 있는 것 같은 아이템.
‘존재하는 넋’은 너무나 신기한 존재인데, 권지한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그것이 아니라 윤서였다. 작고 동그란 새한테 쩔쩔매는 윤서. 자신을 의식해서인지 빨개진 눈가로 눈물을 참는 윤서. 아이템을 진짜 새처럼 조심스레 만지는 윤서….
함께 있을 때 알을 깨고 나와 준 햅쌀이에게 고마울 정도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
윤서는 정수리에 파란 새를 앉힌 채 석영 본사에 출근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50층까지 올라오며 수십 명과 마주쳤다. 엘리베이터에 탄 석영 직원들은 먼저 권지한을 발견하고 인사했다가 그 옆의 미인이 머리 위에 파란 새를 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멈칫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하는 표정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윤서는 권지한 뒤로 숨으려 했다. 내내 입을 가리고 쿡쿡쿡 웃던 권지한도 알겠다는 듯 넓은 등판으로 감춰 주려 했지만 실패했다.
삐윳!
관종 새 햅쌀이가 야단쳤기 때문이었다.
윤서는 결국 남은 50층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랄 때마다 햅쌀이는 동그란 가슴을 더 동그랗게 내밀면서 의기양양해했다. 엘리베이터가 100층에 도착하자 윤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내렸다.
“아, 형. 진짜 귀엽다. 오늘 길드 사내 커뮤니티에 들어가 봐야겠어. 분명 형 얘기가 올라와 있을 거야. 엘베에서 파란 새한테 머리카락 뜯기고 있던 미인 봤냐고 묻는 글 있으면 윤서 사원이라고 댓글 달아야지.”
“그런 글이 올라와 있으면 제발 삭제 부탁드립니다.”
윤서가 힘없이 호소하면서 퍼펙트 대기실 문 옆에 사원증을 댔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2팀 길드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권지한과 윤서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특히 윤서의 얼굴을 보고서는 경기를 일으키길래 윤서는 숨기고 있던 정체를 들킨 사람으로서 겸허한 마음으로 상대의 호들갑을 각오했다. 또 서채윤서라고 부른다거나 어버버 말을 더듬는다거나 하겠지? 사인도 요청할 것이다. 딱히 사인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름 두 자 정도는 성의 있게 써 줄 생각이었다.
두 길드원은 서로 마주 보고서는 무언가를 다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권지한 헌터. 윤서 헌터.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윤서 헌터는 수요일에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아, 일이 좀 있어서 오늘 왔습니다.”
“그렇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예상외의 깔끔한 인사였다. 서채윤을 뵙는다니 뭐니 호들갑 떨지 않자 윤서는 의아했다.
삐융.
햅쌀이가 아직 저를 눈치채지 못한 가여운 이들에게 가슴 털을 부풀리며 제 존재를 알렸다.
“…!”
“…흡!”
길드원들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의 뺨이 씰룩씰룩했다. 거의 경기를 일으킨 듯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딱딱하게 말했다.
“이 작고 귀여운 새는…?”
“‘존재하는 넋’입니다. 이름은 햅쌀이고요.”
“햅쌀이 님은 알 상태였던 게 아니었… 습니까? 도등수 부길드장의 말로는 아직 알이라고 들었는데….”
“오는 길에 막 깨어났습니다. 인사해 주세요.”
“그렇군요. 막 깨어나셨군요. 반가워, 햅쌀아.”
삐유!
“너는 정말 귀엽구나. 새파랗구나. 햅쌀아.”
삐윳!
“저희는 수련하러 가 보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평화롭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덜덜 떨렸고 말투도 무슨 한국말을 갓 배운 외국인처럼 어색했지만 내용은 평범한 인사였다.
2팀 팀원들이 사라지고 대기실에는 권지한과 윤서 둘만 남았다. 햅쌀이는 작은 날개를 펼쳐 넓은 내부를 날아다녔다. 이제 이곳이 내 영역인가- 하고 탐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꽁지깃이 까딱거리는 게 몹시 즐거운 듯했다.
윤서는 햅쌀이처럼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지난 던전 이후 처음으로 보는 건데, 무려 서채윤을 마주하는 건데 왜 호들갑을 안 떨지? 유니콘 보듯이 신기하게 봐야 하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사라질 리가 없는데?
윤서야 물론 이런 잠잠한 반응이 편했고, 앞으로도 주욱 이랬으면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에 조금 수상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권지한을 보자 권지한은 쿡쿡 웃으면서 벽을 가리켰다.
한쪽 벽면의 게시판에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9월 1일 수요일 윤서 헌터 오시는 날
☆주의사항 꼭 지켜 주세요~!☆
1. 서채윤이라는 이름 꺼내기 금지.
2. 사인 받기, 사진 촬영 금지. (영상도 x)
3. 윤서 헌터를 만나도 놀라지 말고 평범하게 인사해 주세요.
4. 과도한 말 걸기 자제해 주세요.
5. 음식은 줘도 됩니다~! (매운 거 좋아함)
6. 하얀 알을 안고 있거나 옆에 동물이 있으면 귀엽다고 인사해 주기. 이름은 햅쌀이입니다.
*모든 규칙을 지키며 침착하게 대하면 윤서 헌터도 놀라 달아나지 않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욕심내지 말고 서로 배려해 가면서 즐거운 덕질합시다~!
이게 뭐야? 무슨 야생 동물 출몰 시 주의사항이야? 뭐가 놀라 달아난다는 거야?
어이없어진 윤서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는데 멀리서부터 후다닥 복도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아하하….”
방금 전의 길드원 두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빠르게 걸어와 게시판에 붙은 공지문을 찢어서 등 뒤로 숨겼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안녕히….”
길드원들이 다시 인사하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쿡쿡, 쿡…. 권지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윤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