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1)화(11/195)
#09
“윤서 씨는 정말로 이쪽에 관심이 없으시네요.”
윤서가 묻자 박수빈이 작게 웃고는 나직이 설명했다.
“화심 헌터로 C급 용병이에요.”
“C급?”
“네, 그래서 더 유명해졌지요. C급이 막 B급 범람 몬스터도 해치우고 했으니까요. 영상이 전 세계에 퍼져서 아마 여기 헌터들 중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사람일 거예요. 그러니까, 석영 헌터들 빼고서요.”
“윤서 씨, 화심도 몰라요? 기사 엄청 많이 나왔는데 관심이 없어도 너무하지.”
“윤서는 아마 여기 있는 이백 명 중 가장 무심하고 천하태평인 인간일 거야.”
“지금도 봐. 저 오빠, 우리 얘기 들으면서도 눈에 노관심이라고 써 있잖아요.”
둘의 대화를 듣던 다른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윤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만큼 무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절대 C급이 아닌 저 화심이란 자에게 <인류 도감> 스킬을 사용해 볼까 고민 중이었다.
“근데 화심 헌터도 상당한 노관심 주의자긴 하네요. 눈길 절대 안 마주치잖아.”
“말도 되게 없대요. 윤서 씨보다 한 단계 위일지도.”
“윤서 씨, 지지 마. 파이팅.”
“우리 길드의 무심 자부심, 파이팅.”
“그만들 하시죠.”
윤서가 길드원들에게 일갈하자 길드원들은 짧게 웃고는 곧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윤서는 화심에게 스킬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남에게 무관심한 것은 자신에게 무관심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는데, 이번엔 빨간 머리가 보였다. 화심에게 집중된 시선이 짜증 난다는 듯 표정을 구긴 홍의윤이었다.
“…….”
시선을 느낀 홍의윤이 곧장 이쪽을 노려봤다. 윤서는 눈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
석영 길드에서는 고위 간부들과 함께 무려 길드장 유준철이 직접 납셨다. 정부에서 여는 대던전 클리어 기념식 참석 명단에 석영 길드장 이름이 없고, 부길드장 도등수는 던전 레이드 중이니 당연히 길드장이 직접 올 거라고 모두 예상한 바였다.
창백한 낯빛의 남자가 직접 단상에 서서 연설을 진행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합병 내용은 20%에 불과했고, 대던전 내용이 80%를 차지했다. 애초에 묵념으로 시작한 연설이었다.
윤서는 건성으로 들으며 석영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 아저씨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과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누군가 아저씨를 감시 중이라면 괜히 얽히지 않는 게 나으니 윤서도 그쪽으로는 관심을 끊었다.
“대던전은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었습니다. 우리 석영에서도 수많은 선배 길드원들이 공략에 나섰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잊은 적 없습니다. 그 후 10년, 아직까지 대던전과 같은 등급의 포탈은 나타난 적 없지만 만약 나타난다면 우리 석영 길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선봉에 설 것입니다.”
석영 길드장은 참으로 불길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윤서는 어떻게든 연설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집에 가서 할 일들을 생각했다. 오늘도 쿠키를 구울까. 오븐에 넣어 놓고 기다리면서 스쿼트를 해야겠다. TV로는 드라마 재방송을 틀어 놔야지. 전편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이모의 아들의 과외 선생님에게 가발을 들켰다.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 불허였다. 어쩌면 과외 선생님도 가발이었을까, 까지 생각하던 중 연설이 끝났다. 다음은 각 길드장이 단상 위로 불려가 석영의 정식 길드원증과 명패를 받았다.
식순은 착착 진행되어 예정했던 시간에 오차 없이 끝났다. 식사까지 마친 후 말끔하게 생긴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기자님들에겐 안타깝지만 이제부터 헌터들만의 밤을 즐길 시간입니다. 석영의 새 가족분들, 포탈 스톤을 나눠 드릴 테니 준비되시면 경회루로 바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와, 포탈 스톤.”
“세상에 포탈 스톤을 한 명당 하나씩 준다고?”
여기저기 탄성을 내질렀다. 던전 부산물로 제작한 포탈 스톤은 지정된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가격이 상당했다. 강남에서 경회루 거리로 보면 C급일 텐데, C급이어도 개당 오백만 원 선이었다.
“참 나. 석영 세계 1위라고 자랑하나. 짜증 나네.”
“이제 우리도 석영 길드잖아요.”
“아, 맞다. 그렇지. 이제 우리도 포탈 스톤으로 출퇴근하는 시대가 온 것인가.”
“꿈 깨라, 이놈아. 포탈 스톤을 매일 두 개씩 소비하는 사치는 석영 길드장도 안 하겠다.”
이제 더는 길드장이 아니게 된 기상혁이 길드원들의 희망찬 꿈을 짓밟았다. 그는 석영 길드장은 철두철미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찬양해 댔는데 윤서의 옆에서 박수빈이 슬쩍 웃었다. 윤서가 바라보자 박수빈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석영 길드장님이… 철두철미한 분 같지는 않아서요.”
“아세요?”
“안다기보다는 그냥, 느낌이.”
윤서는 박수빈이 석영 길드장과 아는 사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캐물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자, 각자 옷 갈아입고 늦지 않게 와.”
홀 출구에서 소지품을 돌려받은 길드원들에게 전 길드장이 그렇게 지시한 것이다.
“예!”
“연회장에서 봐요.”
윤서만 빼고 모두 당연하다는 듯 옷을 갈아입으러 흩어졌다. 따로 옷을 챙겨 오지 않은 윤서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 단체방에 드레스 코드대로 준비하라는 공지가 올라왔던 게 기억났다. 물론 윤서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넘겼다.
무슨 무도회장 가는 것도 아니고, 정장이면 됐지….
‘저 사실 헌터 연회 가는 거 처음이거든요. 첫 연회가 석영이 개최한 경회루에서의 연회라니 정말 감동적이에요. 그에 걸맞은 차림새를 해야겠죠?’
고희원이 꿈꾸듯 말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윤서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떨쳐 냈다.
***
불안은 항상 현실이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윤서 씨,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혼자 평범한 옷 입은 게 미안해서 그래?”
“우리가 부러워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이거 엄청 맛있다. 오빠도 얼른 와서 먹어요.”
떡케이크를 한 접시 가득 담은 박영범과 고희원이 멀찌감치 있는 윤서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윤서는 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친 인간들과는 생판 모르는 사이인 척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천진난만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낙엽 길드원들은 한복을 준비해 왔다. 연회장이 경복궁 경회루라는 이유였다. 여우 같은 박수빈도 개량 한복을 입은 채 뒷짐 지고서 허허 웃고 있었다. 물론 낙엽 길드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드레스와 정장을 갖춰 입고 있다. 윤서 또한 정장 차림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합병 축하 연회이지 가장무도회가 아니니까.
“길드장님, 갓 좀 치워요. 자꾸 저 찌르잖아요.”
“네 가체나 치워 봐. 그리고 나 이제 길드장이라고 부르면 안 돼, 희원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 기상혁 오빠?”
“토할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나중에 얘기해 봐야겠다. 정할 때까지 부르지 마. 윤서는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저쪽에 있었는데.”
“내 갓 좀 맡기려고 했는데, 에이 씨.”
나무 뒤에 숨은 윤서는 기겁하면서 기척을 더욱 숨겼다. 눈앞에서 타 길드원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이야기 나누는 게 들렸다.
“저 사람들 진짜 웃긴다. 낙엽 길드랬나요?”
“응, 총 열두 명에 B급 헌터 두 명 있는 곳. 있는 줄도 몰랐던 길드인데 존재감 제대로 인식시키네.”
“친해지고 싶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한복 입고 올 걸 그랬어요.”
“이정인, 너도 하여튼 웃기는 놈이야.”
이정인이라 불린 적당한 키의 남자가 칭찬이라도 들은 듯 활짝 웃었다. 양 뺨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특이하게도 눈 색이 분홍색이었다. 한국인답지 않은 눈 색을 보고 패시브 스킬이라도 사용 중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본래 홍채가 그런 듯했다.
“그런데 권지한은 결국 못 왔네요.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하필 이때 범람 벨이 울릴 게 뭐람.”
“이제 같은 길드가 되었으니 언젠간 볼 날이 오겠지.”
“권지한이 사실상 세계 최강이라고들 하잖아요. 같이 던전도 들어가고 싶어요.”
“권지한이랑 같은 던전에 들어간다면 S급일 텐데 괜찮겠냐.”
“각성자가 되었으면 한 번쯤 목숨 걸고 S급에도 가 봐야죠.”
“역시 이정인 너는 특이해.”
두 사람이 웃으며 멀어졌다.
권지한에 대해선 윤서도 알고 있었다. 비공식 기관이 조사한 헌터 랭킹에서 1위를 몇 년째 도맡고 있는 S급 각성자. 사람들은 방어 쪽으로 최강인 서채윤과 공격 쪽으로 최강인 권지한을 비교하며 누가 더 강할지를 토론하기도 했다.
“윤서 씨, 어디 있어? 이거 우리가 다 먹어 버린다.”
가장무도회 참가자들이 끈질기게 윤서를 찾았다. 윤서는 서둘러 경회루를 벗어났다. 최근 들어 가장 스릴 넘치는 순간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주변 조명과 달빛을 품은 잔잔한 물결,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궁궐 등 전경은 아름다웠으나 윤서는 그런 걸 즐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나마 오늘 막 합병을 해서 다행이었다. 어디 가서 낙엽 길드라는 말을 내뱉지 않아도 되니까.
‘집에 가고 싶다.’
궁궐의 인적 드문 곳까지 걸어온 윤서는 문득 이대로 집에 갈까 생각했다. 지금 가면 쿠키는 못 구워도 드라마 재방송 시간엔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우리 전부 석영에 흡수되는 결말이네. 그래도 형한테는 좀 기대했는데.”
어둠 속에서 미약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랑 나는 포기했어. 형은 어때?”
“…….”
“어머니가 형이 원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좋대.”
‘형제인가.’
윤서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다. 남들의 인간관계를 알아 버리는 건 사양이라 그대로 뒤돌아 가려고 했다.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럼 말해 봐. 서채윤 찾기는 아직 포기 안 한 거 맞지?”
뭐? 누굴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