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1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14)화(114/195)
#105
이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윤서도 앞으로 계속 컨트롤 수련을 하려면 꾸준히 던전에 들어오기는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특별한 실력을 들키기보다는 이왕 들킨 사람들과 공략하는 게 나을 듯했다. 윤서가 바로 거절하지 않고 고민하자 리더가 얼른 덧붙였다.
“이번 주 목요일에도 3연던이 예정되어 있는데 같이 가시겠사옵나이까?”
아니, 그런데 말투가 왜 이러지?
“위치는 전부 이 근처입니다. 여주 근방, 오후 2시부터고요.”
“좋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윤서가 권지한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끄덕였다.
“저, 그럼 연락처를 알려 주시겠사옵나이까?”
아, 연락처.
여기까진 차마 생각하지 못한 윤서가 난감해져서 미간을 좁히는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더니 권지한이 스윽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010-0000-0000. 이쪽으로 연락해.”
“아, 예. 이쪽으로 연락드리겠사옵나이다!”
파티 리더가 얼른 U패드에 번호를 저장했다.
“저, 그럼 오늘 3연던 끝낸 기념으로 뒤풀이라도….”
“그쯤 하고 얼른 꺼져.”
권지한이 툭 내뱉었다. 눈빛은 부리부리하다기보다는 서늘했다. 모자챙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져 있어서 더욱 차가워 보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을 자아내는 남자가 표정까지 굳히고 있자 겁먹은 파티원들이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외치고서 부랴부랴 나갔다. 윤서는 예전 같으면 권지한의 이런 모습을 보고 건방지다, 싸가지 없다 했겠지만 이제는 자신에 대한 배려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쉽게 번호를 알려 줘도 되는 겁니까?”
“나 번호 세 개 있어서 괜찮아. 저건 쉽게 알려 주는 용도로 만든 거야.”
권지한은 언제 싸늘했냐는 듯 윤서에게 돌아설 때는 소년처럼 웃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야말로 그렇게 연달아 던전 들어가도 되는 거야? 토요일에는 S급 옐로우 던전도 예정되어 있는데….”
“토요일 던전에는 지장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장이 있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닌 거 알잖아.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권지한이 목소리를 낮췄다.
윤서는 조금 우스웠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세상의 절반은 서채윤을 꼽을 텐데. 지금 누구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걱정 마세요. 햅쌀이도 깨어난 이상 마력 고갈까지 갈 일은 없으니까.”
단검의 보석이 지잉- 하고 빛을 반짝였다. 윤서는 ‘존재하는 넋’에게 형태 변형의 자유를 허락했다.
삐윳!
다시 새로 돌아온 햅쌀이가 권지한의 주위를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권지한의 손가락을 내밀었지만 햅쌀이는 거기에 앉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쟤 어디 가? 가게 내버려 둬도 돼?”
“어차피 결계에 막혀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니 마음껏 날아다니게 두죠.”
이 F급 던전의 지형은 건조하고 삭막한 초원이었고, 면적은 축구장 하나 크기로 아주 작아서 이렇게 서 있으면 던전 결계가 바로 보였다.
“저 결계 밖에는 또 다른 던전이 있겠군요.”
“그렇겠지. 형, 자가 회복력을 너무 믿지 말고 마력을 좀 아껴 써.”
“…권지한 헌터, 지금 제 마력 총량 안 보입니까?”
‘권지한’이 스킬 <가이아의 눈>을 사용합니다.
윤서는 권지한의 스킬이 통하도록 <거짓 기억>을 마력 총량 부분만 해제했다.
마력 9500/9999
혼자서 던전 세 개를 연달아 공략했는데도 95%나 남은 윤서의 마력을 확인한 권지한이 혀를 내둘렀다.
“형은 왜 너무 강해서 걱정도 할 수 없게 만들어? 이래서 은거 먼치킨이란….”
“이젠 은거도 아니잖아요.”
“반쯤은 은거나 마찬가지지. 정체를 숨기고 있잖아.”
“아는 사람도 많은데요.”
“그럼 반은거 먼치킨이라고 하자. 이래서 반은거 먼치킨들이란….”
권지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윤서는 왜 이러나 했는데, 권지한이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형, 경험치… 이거 뭐야?”
“<가이아의 눈>으로 경험치도 보이는군요.”
“132억…. 132억이야, 이거?”
“네, 대충 그 정도 됩니다.”
“…….”
어떻게 그렇게 많냐, 역시 반은거 먼치킨이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권지한의 안색은 두려운 사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윤서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권지한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3년이었을 거라며.”
아.
윤서는 이제야 권지한이 왜 이런 반응인지를 깨달았다. 대던전에서 3년을 보낸 것치고는 경험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건의 지평선>으로 소모된 시간이 얼마만큼인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윤서도 3년이라고는 말했으나, 3년이라고 하기에는 경험치가 너무 많이 쌓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석영 길드가 10년 동안 경험치 100억을 쌓았어. 그런데 혼자서 130억이 되려면 대체 얼마나….”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그때였다.
생명의 신이 출구 포탈 시간을 확인하라고 재촉합니다.
권지한에게도 같은 메시지가 뜬 듯 눈길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출구 포탈 시간은 5분가량 남았다. 시간 안에 나가지 않은 채 던전이 닫히면 던전 안에 있던 것들은 모두 소멸한다.
“햅쌀아, 이리 와. 나가자.”
삐유.
햅쌀이가 멀리서 대답하며 열심히 날아왔다. 권지한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이었다.
윤서는 포탈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던전 결계 쪽을 바라봤다.
“저쪽은 미카엘의 협곡 근처겠군요.”
‘미카엘의 협곡’은 행성 지도를 제작하면서 임의로 붙인 이름이었다. 권지한이 윤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저기가 그 협곡인지 어떻게 알아?”
“여기가 ‘황아 대초원’이니까요. 머리 바로 위에 해가 세 개 떠 있으니 저쪽이 북쪽이고, 황아 대초원의 북쪽에는 미카엘의 협곡이 있잖아요.”
“그럼 여기가 그 대초원인 줄은 또 어떻게 알고? 대초원만 여덟 군데가 있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부산물 정보를 보면 알죠. 상당히 자세히 적어 놨던데요.”
“형, 지도 그때 딱 한 번 봤잖아.”
윤서가 그게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권지한은 하, 하며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진짜 말도 안 된다. 경험치는 132억인 데다가 지나가듯이 한 번 본 것까지 다 기억해? 대체 어디까지 먼치킨일 거야. 진짜 미치겠다. 너무 속상한데 멋있어.”
윤서는 그럼 한 번 봤다고 기억하지도 못하냐고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윤서가 먼저 포탈을 빠져나오고 권지한도 얼른 뒤따라 나왔다.
“설마 다른 지형 이름들도 다 기억해? 예를 들어 이 던전 남쪽에는 뭐가 있을까?”
“절벽과 뱀의 둥지가 나오죠. 서쪽으로 쭉 가면 용암 지대, 그 너머는 바다. 동쪽에는 검은 흡혈박쥐가 떼로 몰려나오는 동굴이 있고요.”
“알겠다. 내가 모르는 암기 스킬이 있는 거지.”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니야. 나 진짜 놀랐다고. 형이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아니다. 정말 대던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있었던 거면 확실히 현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해. 작은 구원자 서채윤. 현자 윤서. 딱이네.”
“다시 한번 말해 두겠는데, 고작 3년 아니면 4년 정도입니다. 절대로 몇백 년 아니에요.”
윤서가 정색했지만 권지한은 들어먹지를 않았다. 함께 차에 올라 서울로 올라오는 도로에서도 계속 그런 얘기를 했다.
형은 똑똑하다, 천재다, 암기력이 가히 초월적이고 이해력도 높다, 현자다, 초천재 먼치킨이다 등등 끊임없이 칭찬을 듣자 권지한의 집 앞에 다다를 때쯤에는 윤서도 ‘사실 나는 노인이고, 유달리 똑똑한 건가’ 싶어졌다. 권지한의 집이 더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권지한은 이번에는 자고 가라며 떼쓰지 않았다.
“햅쌀아, 찹쌀아. 나 갈게. 수요일에 봐.”
삐윳!
“조심히 들어가세요.”
살갑게 인사한 그는 차 문고리를 잡아 돌리다 말고 문득 중요한 할 말이 남은 것처럼 윤서를 쳐다봤다. 햅쌀이의 목뒤를 긁어 주고 있던 윤서가 시선을 느끼고 권지한을 돌아봤다. 권지한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유언 중에 지도 외우기 유언 같은 거 있었어?”
윤서는 어이가 없어서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아무리 그 인간들이라도 그런 유언을 남겼겠어요?”
“충분히 남겼을 법한데. 참돔 9짜 10마리 낚시보다는 멀쩡하지 않나.”
“…….”
“아무튼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야. 나 진짜 갈게. 수요일에 봐.”
권지한이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찹쌀이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참돔 9짜 10마리 낚시보다는 행성 지도 만들기라든가 지도 외우기 같은 게 훨씬 건설적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당시 리벤저는 던전이 행성임을 몰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윤서는 다시 오래된 울화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