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1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17)화(117/195)
#107
‘일단 오늘은 오늘 일을 생각하자.’
윤서는 도리질을 치며 오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생각했다.
신 대던전 발표로 사람들은 얼마나 혼란에 빠질까, 지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것들.
유준철은 지원자가 10년 전보다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
사실 윤서도 알고 있었다. 1,203명? 아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건 정의롭고 가치 있는 행위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윤서야, 너는 어때?’
‘도민이의 숭고한 희생을 모두가 기억할 거야.’
‘어떤 강자는 약자를 모른 체했고, 어떤 강자는 약자를 보호했지. 나는 후자가 되고 싶은 것뿐이야.’
‘너보다 약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보살펴라. 이게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머릿속에 여러 사람의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윤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삐융. 삐유삐유.
“응, 그래. 고마워.”
윤서는 위로해 주듯이 목덜미에 몸을 비비는 햅쌀이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며 심호흡한 뒤 복도를 걸었다. 브리핑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A급, S급들이니 걸음 소리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윤서 형. 윤서 형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수재희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수십 명의 인원이 윤서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윤서 씨.”
“오랜만입니다. 윤서 헌터.”
눈빛은 뜨겁고 열렬하면서도 애써 평범하게 인사하는 이들에게 윤서도 가볍게 고개를 꾸벅하고서는 수재희와 박수빈의 사이에 앉았다.
“윤서 씨, 일찍 오셨네요.”
“저 놀리는 거죠?”
“아뇨, 정말로. 시작 전에 왔잖아요.”
박수빈이 생글생글 웃었다. 윤서가 좌중을 둘러 보니 유준철과 권지한 말고는 다들 온 상태였다. S급과 A급들 사이에 C급 화심도 끼어 있었다. 화심은 여전히 냉엄한 얼굴이었다.
“안녕, 윤서! 반갑다, 만나서. 옐레나다, 나는.”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퍼펙트 1팀에 합류한 S급 헌터 옐레나 이바노프였다.
‘옐레나 이바노프’가 아이템 ‘매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옐레나 이바노프’가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숨기고 있다. 윤서. 시스템 프로필. 서운하다, 나는. 팀이다. 같은. 이제부터.”
엄청난 도치법이었다. 윤서는 옐레나에 귀에 아무것도 꽂히지 않은 걸 발견했다. 수재희가 옆에서 큭큭 웃었다.
“옐레나 누나는 한국말에 자신이 있어서 통역기 같은 건 안 쓴대요.”
“한다. 잘. 한국말. 공부했다. 한국말. 된다. 없어도. 통역기.”
옐레나가 자신만만하게 코끝을 들었다. 그러나 윤서가 봤을 땐 몹시 통역기가 필요해 보였다. 특히 듣는 사람에겐 더더욱.
스킬 <인류 도감>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시스템 프로필을 열람합니다.
인류 도감: 옐레나 이바노프, 28세, 여성
등급: S급
특성: 마법사, 연금술사
(불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물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전격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땅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킬: <파이어 볼> B, <워터 댄스> B, <라이트닝 볼트> B, <스톤 플로우> B
고유 스킬 : <플레임 볼> S, <아이스 스피어> S, <선더 스네이크> S, <어스 퀘이크> S
∗ 그 외 스테이터스는 던전에서만 열람 가능합니다.
원소를 다룬다더니 정말로 게임에 나오는 마법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옐레나가 활짝 웃었다.
“영광이다. 되었다. 팀이. 같은. 부탁한다. 잘. 앞으로.”
“저도 잘 부탁합니다.”
“보고 싶다. 프로필. 제대로 된.”
“그건 곤란합니다.”
“알겠다.”
옐레네가 쿨하게 납득하고는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나 쿨한 태도와는 달리 선망 어린 시선은 계속 윤서를 향해 있었다. 규칙이 없었다면 당장 달려와서 질문을 와다다 쏟아 냈을 분위기였다.
“윤서 씨, 이 페럿이 혹시?”
삐유.
박수빈이 윤서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귀여운 페럿 한 마리를 발견했다. 페럿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네, 햅쌀이에요.”
“새 모습이 아니네요. 진짜로 자유 변형이 가능하구나.”
“와, 씨. 존나 귀엽다.”
동물을 좋아하는 수재희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햅쌀아, 안녕? 난 재희 오빠야.”
삐유?
“재희 ‘형’이 아닐까?”
“누가 봐도 암컷인데요. 저 소환사예요, 수빈이 형. 소환사의 감을 믿으세요.”
“자유 변형 귀속 아이템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제 주인의 성별을 따라갈 확률이 높지. 수컷일 거야.”
“그렇게 따지면 제 주인과 반대로 할 확률도 높다고요.”
“나도 남자애라고 생각해.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장난기 심한 여섯 살 남자애 같아.”
“저는 여자애 같습니다. 우리 딸애가 다섯 살이고 엄청 귀여운데 딸애랑 닮았어요. 우리 딸 사진 좀 볼래요?”
수재희와 박수빈으로부터 시작된 햅쌀이 성별 논란이 퍼펙트 팀원들 사이에 뜨거운 토론 거리가 되었다.
“야, 아이템이잖아. 아이템은 성별 없어.”
의외로 가장 정상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홍의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삐유삐유!
햅쌀이는 저를 향한 관심에 신이 나서 윤서의 품을 벗어나 테이블 한가운데로 향했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더 해 봐. 더 해 봐.’ 하는 햅쌀이에게 한 헌터가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그는 허공에서 쓰다듬을지 말지 조금 망설였는데, 햅쌀이가 먼저 그 손가락에 얼굴을 부빗부빗했다. 헌터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손 여러 개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흠흠.”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서는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알렉이 투명 파일에 보관된 종이를 내밀고 서 있었다.
“이게 뭡니까?”
“흠흠.”
알렉이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하면서 검은색 매직도 같이 내밀었다. 윤서는 떨떠름하게 파일과 매직을 받아들었다.
감 사 패
알렉 스위치
알렉 스위치는 2054년 ~ 2061년
FOR THE SEO 유럽 지부 사무국장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감사패를 드림.
2061년 1월 4일
– FOR THE SEO 회장 제브라 해밀턴
“…….”
‘포 더 서’는 서채윤 팬클럽 이름이다. 윤서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알렉을 올려다봤다. 알렉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 뺨을 씰룩거리며 연신 눈짓했다. 얼른 사인을 하라는 것이다. 윤서가 매직펜의 뚜껑을 탁, 여는 순간이었다.
“헉, 아저씨,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사인은 금지라고 했는데!”
“알렉 스위치가 규칙을 어긴다!”
비리 행위를 발견한 커플이 마력까지 끌어 올리며 외쳤다. 수십 명의 분노한 시선이 알렉을 향하고, 브리핑실은 엉망이 되었다. 믿었는데 그러기냐, 누군 안 받고 싶어서 참는 줄 아느냐, 알렉 스위치를 감금하라…. 어떤 이는 이 기회에 규칙을 없애자고 했다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얻어맞았다.
“다들 내 얘기 좀 들어 보게. 나는 사인을 받으려는 게 아니네!”
“헛소리하지 마라, 외국인. 그게 사인이 아니면 대체 뭐냐?”
“이건… 서명일세. 서명은 사인과는 아주 다르네.”
“왜 아저씨 감사패에 윤서 씨의 서명이 필요하죠?”
“왜냐하면 이건 그러니까….”
알렉이 말을 더듬었다. 핑곗거리를 찾는 듯했으나 떠오르는 게 없는 듯했다. 그러게 어디 조용한 곳에서 사인을 부탁했어야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인을 부탁한 게 경솔한 행동이었다.
난리 통 속에서 윤서는 혀를 차고는, 감사패의 ‘알렉 스위치’ 이름 옆에 제 이름을 적어 넣었다. 사인이랄 게 따로 없었으나 그냥 적당히 사인처럼 보이도록 휘갈겨 쓰고 그 옆에 짧은 말도 덧붙였다.
‘리타 스위치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러닝과 스쿼트를 하고 있으니 알렉 헌터도 하세요.’
윤서가 그렇게 사인을 해 버리자 알렉을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행동을 멈췄다. 브리핑실에 적막이 찾아왔다.
“자, 여기요.”
“…고, 고맙네.”
이제 그들의 시선은 서채윤의 사인이 적힌 감사패로 향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시선이었다. 알렉이 얼른 사인지를 파일에 집어넣고 그걸 다시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로렌스 밀레’가 스킬 <네가 감히 눈독을 들여?>를 사용합니다.
‘리오 델리’가 스킬 <내 사람한테 접근하지 마>를 사용합니다.
커플이 스킬까지 사용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알렉 스위치’가 스킬 <창작>을 사용합니다.
알렉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알렉의 눈에 은색 마력이 감돌고 검은색 투구와 방패가 생성됐다.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일어났는데 대부분 커플의 편에 있었다. 러시아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수재희와 박수빈은 햅쌀이를 데리고 멀찍이 피했다.
S급, A급 헌터들이 대난동을 피우기 1초 전, 일촉즉발의 상황은 윤서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로 인해 정리되었다.
“다른 분들도 해 드릴 테니 종이랑 펜 가지고 오세요. 시간은 유준철 길드장이 도착할 때까지입니다.”
***
유준철과 권지한을 비롯해 석영 간부들이 도착했을 때 브리핑실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테이블이고 의자고 뭐고 다 부서지고 멀쩡한 건 오로지 윤서가 한쪽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의자 하나뿐이었다. 그 윤서의 앞으로는 열댓 명의 헌터들이 줄을 서 있었으며, 난장판이 된 브리핑실에는 헌터들이 가지각색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를 품에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이, 종이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는 이, 종이를 앞에 두고 큰절을 올리는 이….
“와.”
권지한이 난장판을 보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삐유!
햅쌀이는 권지한을 발견하자마자 누가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그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권지한이 손가락으로 마구마구 만져 주자 햅쌀이는 아까처럼 눈을 감고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