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1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18)화(118/195)
#108
권지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윤서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턱 얹고는 부드럽게 쓰담쓰담했다.
“형, 사인해줬어? 잘했어. 시간 나면 나한테도 좀 해 줘.”
“……?”
윤서가 어처구니없어서 올려다보자 권지한은 씩 웃을 뿐이었다. 윤서는 머리를 작게 흔들어 권지한의 손을 털어 냈다.
줄을 서고 있던 옐레나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달려갔다. 햅쌀. 나타나자마자. 권지한.”
“응, 누나. 나도 봤어요.”
뒤에서 수재희가 끄덕였다.
“쓰다듬는다. 머리. 윤서. 권지한이.”
“응, 누나. 나도 봤어요.”
옐레나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하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길드장이 도착했으니 사인 타임은 이제 끝입니다.”
윤서는 하고 있던 사인을 마친 뒤 펜 뚜껑을 닫았다. 아직 못 받은 사람들이 남았는데도 사인을 끝낸다 하니 당연히 반응이 격렬했다.
“제 것까지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달라. 사인! 나도! 기다렸다. 계속!”
발광하는 이들을 윤서가 쓱 훑었다.
“계속 요구한다면 다시는 사인 타임은 갖지 않을 겁니다.”
“……!”
“브리핑이 일찍 끝나면 남은 분들께도 해 드리겠습니다.”
“……!”
반항하려던 이들이 입을 합 다물고 줄을 해산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를 다른 회의실에서 교체해 오고, 일사불란하게 브리핑실을 복구했다. 그들 중에는 홍의윤도 있었다. 아직 사인을 받지 못한 홍의윤은 씩씩대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정리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유준철은 할 말을 잃었고 권지한은 큭큭, 낮게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 후.
퍼펙트 팀원들은 뒤늦게야 유준철, 권지한과 함께 들어온 간부들을 발견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이번에 들어갈 던전의 정확한 등급과 색상은 모르지만 당연히 S급일 테니 길드장이 직접 브리핑에 참여하는 건 납득 가능하다. 그런데 곽환기 고문, 무요철 이사, 이미환 이사 등 아포칼립스 때부터 활동해 온 저명한 고위 임원들에 이어 아이템 제작팀 팀장, 포션 제작팀 팀장, 공략팀 총괄팀장까지 동석한다니?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서채윤을 구경하려고 들어온 건가?
“길드장님, 저희 팀 매니저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이번 던전 브리핑은 팀 매니저가 아니라 제가 직접 진행할 예정입니다.”
급기야 길드장이 직접 브리핑한다는 얘기에 헌터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무섭게 왜들 이러시는 거야.’
‘어떤 던전이길래…?’
처음에는 얼른 브리핑이 끝나 서채윤의 사인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뭔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이들은 이제 사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유준철이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말하는 던전은 전원 참가가 확정된 곳이 아닙니다. 듣고 참가 여부를 결정해 주면 됩니다.”
“…….”
“10월 14일 북극에 S급 레드-블랙 던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
툭, 홍의윤이 필기하기 위해 쥐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 하던 행동을 뚝 멈췄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소리를 앗아 가는 스킬에라도 걸린 듯 무겁게 깔린 침묵 속에서 페럿 한 마리만 삐유, 삐유 울었다. 페럿과 손가락으로 놀아 주고 있는 권지한 또한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준철이 다시 한번 말했다.
“여러분이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저는 10년 전의 대던전이 또다시 등장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잠시만요. 대던전은 분명 클리어됐는데….”
박수빈이 황망한 얼굴로 윤서 쪽을 쳐다봤다. 비단 그뿐 아니라 브리핑실의 대부분이 대던전의 생존자를 보고 있었다. 윤서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였다.
유준철은 여러분,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설명은 제가 합니다. 질문도 제가 받습니다. 설명이 모두 끝나면 그때 차례대로 질문을 받을 테니까 일단 모두 집중해 주세요.”
유준철은 설명을 시작했다.
윤서에게 그랬던 것처럼 2년 전, 그레이스 엘리시아의 계시부터였다.
유준철이 얘기하는 동안 윤서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알렉의 경우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약간은 흥미진진해하는 것 같았다. 커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자기는 내가 지키겠다느니 말하고 있었다. 수재희와 홍의윤은 당장이라도 싸우겠다는 듯 결의에 찬 눈빛을 했다. 박수빈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좁아진 미간과 주름진 콧잔등에서 걱정과 불안이 읽혔다. 화심은 단단한 턱이 움찔거렸는데 불안한지 기대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윤서의 시선은 권지한에게서 멎었다.
한쪽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쪽 손으로는 하얀 페럿과 놀아 주고 있었는데, 표정은 퍽 진지했다. 그는 시선을 느낀 듯 바로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왔다. 윤서는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회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 눈빛은 자신만만했으며, 확신에 차 있었고, 다정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복수하자.’
권지한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윤서는 그가 말하는 복수가 막연한 환상과 소망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브리핑은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유준철은 대던전 지형, 출몰 몬스터 정보를 홀로그램 장치로 간단히 설명했고, 퍼펙트 팀원들은 신중하고 침착하게 몬스터들의 특징을 숙지했다. 아직은 레이드 참여가 확정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높은 집중력으로 브리핑에 참여하고 있었다.
윤서는 그 점이 신기했다.
이 사람들이 정의로운 헌터들이라는 건 잘 알지만 악명 높은 대던전이니 저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시간 동안 누구 하나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브리핑을 듣는 그들의 눈빛 속에는 고요한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때 윤서는 알았다. 이들은 검은 포탈까지 밝혔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참여 여부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바다 건너편에서 그들의 리더로부터 같은 소식을 듣고 있을 외국 헌터들도 이들과 같을까?
윤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1차 브리핑은 일단 마치겠습니다. 이제 곧 세계 헌터 연맹의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기자회견을 시청하시죠. 연맹의 발표 후에 S급 레드-블랙 던전의 지원 등록이 열릴 예정입니다.”
유준철이 브리핑실의 커다란 모니터 화면을 켰다.
“연맹이 며칠 전부터 뭔갈 발표한다고 요란을 떤다 했더니 대던전이었구나…. 길드장 형은 어디 가요? 여기서 같이 봐요.”
“연맹장의 발표가 끝나면 우리 석영도 곧바로 발표할 예정이라서.”
유준철과 간부들이 브리핑실을 나갔다.
팀원들만 남자 브리핑실은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우당탕탕,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윤서는 사안이 대던전인 만큼 소란스러워지는 걸 이해하려 했다. 이제는 정말 도망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까 싶어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펼쳐진 풍경은 예상과는 달랐다.
“…….”
힐끔힐끔.
“…….”
슬쩍슬쩍.
아까 사인을 채 받지 못했던 이들이 종이를 들고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인은 받고 싶은데 방금 대던전 얘기를 한 직후라서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곁눈질만 했다.
“줄 서세요.”
윤서는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줄을 서게 했다. 퍼펙트 팀원들은 환하게 웃으려다가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면서 다가왔다.
윤서가 들이미는 종이에 전부 사인을 해 주자 그들은 황홀함에 가득 차서 종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서로 사진과 영상을 찍어 주며 아주 난리가 났다. 감동에 젖은 얼굴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팔짱 낀 채 그 광경을 쳐다보는 윤서의 옆으로 권지한이 다가왔다.
“형, 괜찮아? 표정이 엄청….”
“…….”
“음,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맙니까. 내 표정이 왜요.”
“엄청 떫은 감을 억지로 먹게 생겼는데 저항하기는커녕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바보들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야.”
미묘하게 정확하다. 윤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들 대던전이 실감이 안 나나 봅니다. 아니면 현실 도피인 건지.”
“안 두려워하니까 이상해?”
권지한이 웃으며 물었다. 윤서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일하게 사인을 부탁하지 않은 박수빈이 말했다.
“이상할 거 없어요. 언젠가는 S급 레드-블랙 던전을 공략할 날이 올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두렵다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라는 느낌이랄까. 아마 다들 이런 기분일 거예요.”
“맞아요. 저도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형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과거의 영웅들을 위해 복수할 기회가 왔으니 절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윤서는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박수빈은 ‘올 것이 왔다’라고 말하고, 수재희는 ‘복수할 기회’라고 말한다.
아무도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맞서 싸울 각오를 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빠르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머리 한편에 언제나 대던전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던 S급 레드-블랙 던전의 재림을.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건 나 혼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제 나도 과거를 극복하고 앞을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닌가?
‘미쳤어.’
윤서는 언뜻 든 생각에 얼른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나한테 앞이 어디 있어. 미쳤지, 진짜.
윤서가 속으로 복잡한 사고를 하는데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박수빈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보다 윤서 씨는 괜찮아요? 처음 들었을 때 많이 놀랐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설마 윤서 씨도 대던전에 들어가는 건… 아니죠?”
너무 당연한 질문을 받은 윤서가 눈을 깜박였다.
“들어갑니다.”
윤서는 담담했는데 박수빈을 비롯해 수재희, 홍의윤, 알렉에 사인을 받고 기뻐하던 이들까지 전부 행동을 멈췄다. 다들 경악과 걱정이 섞인 표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