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2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23)화(123/195)
#112
“우리가 10년 전에 열 살밖에 안 됐다 해도 대던전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레이드 헌터들이라면 누구나 S급 레드-블랙 던전에 대한 공략 의지와 사명감 같은 게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죽음이 무서웠다면 애초에 헌터 생활 못 했어요. 두 분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 이 던전도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등록했던 거란 말입니다.”
이들의 눈빛은 결연했고, 말투 또한 확고했다.
이 던전도 죽음을 각오하고 등록했다고.
윤서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답답했다. 헌터라는 것들은 왜 다 이 모양일까? 고작 이런 던전도 죽음을 각오했으면서 왜, 굳이 왜 S급 레드-블랙 헌터에 지원하는 걸까?
그놈의 사명감이 뭐길래?
화가 나면서도 울컥하는 그때 권지한이 윤서의 어깨를 감싸고는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
“대던전만 던전이 아니지. 신 리벤저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계속 A급, S급 던전이 발생할 것이고 그중엔 레드 포탈도 있을지도 몰라. 사실 이 바깥도 위험하단 말이야. 10년 전에도 그랬듯이.”
권지한은 패기 가득한 어린 헌터들을 차분하게 설득했다.
“생각해 봐. 10년 전, 이석영이 대던전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 바로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를 빈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지. 그가 없었다면 리벤저 1203명이 전부 생존해서 대던전을 클리어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돌아갈 곳은 파괴된 후였겠지.”
권지한의 말대로, 석영 길드의 초대 길드장이자 현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이석영은 고위 헌터들 90%가 대던전에 들어간 사이 소수의 동료들과 고군분투하며 지구를 지켰다. S급 던전을 세 군데나 격파했고, 네 번째로 S급 던전에 들어갔다가 클리어에 실패해 소멸하고 던전은 폭발했다.
“이석영이 밖에서 죽었다고 아무도 리벤저의 죽음보다 가치가 낮다 말하진 않아. 너희 모두 죽음을 각오했다고? 그러면 신 리벤저가 대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너희도 이곳에서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이석영 헌터처럼. 뭐 판단은 결국 본인 몫이지만 말이야.”
“…….”
어린 헌터들의 얼굴이 뭔가 깨달은 것처럼 진지해졌다.
권지한이 이렇게 말해 버리니 윤서는 목숨을 좀 소중히 하라고 화내지조차 못했다.
고민에 빠진 헌터들이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어느 정도 사이가 멀어지자 권지한이 슬쩍 윤서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햅쌀아, 네 주인 표정 좀 봐. 살벌하다.”
삐유.
햅쌀이가 권지한의 목덜미 위에 찰싹 달라붙어서 땡글땡글한 눈으로 윤서를 쳐다봤다. 윤서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살벌했다.
윤서는 정말 답답했다. 대체 사명감이 뭐기에…. 그깟 사명감이 밥을 먹여다 주기라도 하나? 정의감과 사명감이 생존보다 중요하냐고.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고.
각성자들이란 것들은 왜 다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답답해했지만 사실 윤서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저들도 생존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대던전에 몸을 던지려는 것이다. 민간인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럼 각성자의 생존은 누가 책임져 주는 걸까.
영웅은 누가 지키는 거야?
“햅쌀이. 형한테 애교 시작.”
삐유?
“얼른 가서 애교 부려.”
권지한이 도마뱀을 떼어 내고는, 윤서의 오른쪽 팔에 붙였다. 주인에게 돌아온 햅쌀이는 옷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윤서가 팔뚝의 간지러움을 느끼며 앞을 보니 권지한이 이쁘게 미소짓고 있었다.
“…….”
이 녀석은 진짜 누가 지키냐…….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
윤서가 권지한의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돌아갈 때도 권지한이 집까지 바래다줬다.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할 때 권지한이 혀엉, 하고 불렀다. 흠칫 어깨를 떨면서 돌아보자 권지한이 남자다운 눈썹을 잔뜩 기울인 채 애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오늘 형네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
“뭐라고요?”
삐유.
“봐 봐. 햅쌀이도 나랑 같이 잤으면 좋겠다잖아. 응? 어차피 내일 S급 노랭이 던전도 같이 가야 하는데 그냥 나도 자게 해 주라. 내가 맛있는 것도 해 줄게. 지금 딱 저녁때잖아. 형아, 지한이 배고파.”
권지한이 커다란 체구로 애교를 부리며 졸라 댔다. 권지한의 어깨가 윤서의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윤서는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 때문에 홱 등을 돌렸다.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같이 자자고 하면 곤란합니다. 제 집에는 잠옷도 제 것 하나밖에 없고, 먹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다 사면 되잖아. 근처에 마트 있던데 안 돼?”
“일단 장부터 봐 오죠.”
권지한이 웃었다. 그렇게 둘은 마스크와 모자를 한 채 대형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으나 딱 금요일 저녁만큼 바글바글했다. 가판대에는 물건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쇼핑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자기야, 대던전 나타난다는데 막 물이랑 라면 쟁여 놓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까? 가스버너도 사고. 이참에 캠핑 도구 살래?”
“사자, 사자. 요즘엔 실내 캠핑도 유행이라잖아. 분위기 내는 거지.”
앞에서 대화하던 부부가 캠핑 코너로 향했다.
대던전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10년 전과는 너무 달랐다.
“형네 집에 고기 있어?”
“고기, 채소, 생선 종류별로 있는데 모두 소량입니다. 우리 둘이 먹으려면 더 사야 해요.”
“오, 골고루 사 놨네. 웬일….”
권지한이 말끝을 흐렸다.
윤서가 의아해서 올려다보자 진득한 회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유언이었지, 참.”
권지한이 짧게 한숨 쉬더니 대뜸 욕을 내뱉었다.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형이 들은 유언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눈물 날 것 같지?”
“…….”
윤서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추스른 권지한이 말했다.
“일단 채소부터 담자.”
카트를 밀면서 채소 코너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권지한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면 뭘 하나? 몸만으로도 시선을 이렇게 잡아채는데. 194cm라는 피지컬은 살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윤서는 왠지 우쭐대는 기분으로 권지한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권지한이 윤서에게 쓰윽 팔을 내밀었다.
“팔짱이라도 낄래?”
“미쳤습니까?”
“아니, 사람이 많아서. 나 미아 되면 어떡해.”
“헛소리하지 말고 채소나 담아요.”
권지한이 쿡쿡 웃으며 쇼핑을 시작했다.
윤서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권지한만 이것저것 담았다. 망설이지 않는 손길로 보아하니 생각해 둔 요리가 있는 듯했다. 이번엔 또 어떤 맛있는 걸 해 줄지 벌써 기대돼서 침이 고였다.
삐유삐유삐유!
윤서의 어깨 위에서 복작복작한 마트를 구경하던 햅쌀이가 윤서의 옷을 붙들고 뭐라 외쳐 댔다.
“왜 그래, 햅쌀아?”
삐유!
햅쌀이의 파란 눈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도마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장난감 코너였다.
“우리 햅쌀이한테 장난감 하나 사 줘야겠네.”
권지한이 카트를 밀었다.
장난감 중에서도 햅쌀이가 특히 열렬하게 반응한 것은 검 장난감들이었다. 어린이용이기 때문에 애들에겐 장검이어도 어른들에겐 단검 크기였고, 공교롭게도 딱 햅쌀이의 원형과 비슷했다. 까만 도마뱀이 검 박스에 찰싹 달라붙은 채 삐이삐이 울어 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권지한의 장난감 검을 카트에 담고는 눈물 닦는 흉내를 냈다.
“우리 햅쌀이 어떡해. 그동안 외로웠나 봐. 친구를 만들고 싶은가 봐. 형, 암시장 가면 예쁘고 잘생기고 착한 단검 하나 구해서 우리 햅쌀이 친구 만들어 주자.”
“그러면 좋겠죠. 햅쌀이처럼 형태 변형 무기 아이템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긴 나도 햅쌀이 말고는 본 적이 없긴 해. C급 이하 아이템 중엔 형태 변형 아이템이 있는데 그건 햅쌀이처럼 자아가 있진 않거든. 이런 에고 소드는 던전 내 VVIP 상점에서도 한 번도 나온 적 없어.”
“지금 사용 중인 그 흑검은 VVIP 상점에서 구입한 겁니까?”
“아니. 석영 아이템 제작부가 만든 거. 나는 상점에서 무기는 하나도 구입 안 했어.”
“그럼 주로 뭘 샀어요?”
“인벤토리 칸을 늘렸지.”
“아…. 그랬죠.”
그러고 보니 권지한은 저번에도 이렇게 말했다.
‘아마 전 각성자 통틀어서 내 인벤토리가 가장 넓을 거야.’
윤서는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그 작전’ 때문이군요.”
“맞아. 공간이 넓어질수록 늘리는데 들어가는 경험치도 천문학적으로 많아지는데, 내 인벤토리의 다음 단계는 경험치가 1000억이 든다더라고.”
“거의 구현 불가능이라 봐야겠네요.”
윤서는 제 경험치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132억 중 100억 정도는 대던전 경험치일 테니, 1년에 한 번씩 대던전을 공략하면 10년 후에는 1000억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어차피 필요한 만큼은 늘려 놔서 그냥 다음 단계는 포기했어. 형, 저기 동그랑땡 시식 시작한다. 먹어 보고 맛있으면 사 가자.”
“분명 맛있을 겁니다. 일단 사고 먹죠.”
윤서가 눈을 반짝 빛냈다. 마치 장난감 검을 보고 초롱초롱해진 햅쌀이 같아서 권지한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윤서가 씻고 나왔을 때 권지한은 이미 캔 맥주와 안줏거리를 테이블 위에 세팅해 놓은 상태였고, TV 화면에는 이미 그들이 재탕할 ‘러브 인 한강’ 31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색 잠옷을 입은 권지한은 윤서를 보고서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형, 이리 와. 내가 머리 말려 줄게.”
“권지한 헌터는 씻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군요. 꼼꼼하게 씻고는 있는 겁니까?”
“빨리 씻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 나 깨끗한 사람이야. 특히 이렇게 형네 집에 와 있는 만큼 온갖 군데를 뽀득뽀득 닦았지. 확인해 볼래?”
“당장 그 더러운 손 내려놓지 않으면 햅쌀이 못 안게 할 겁니다.”
권지한이 바지춤에 손을 올리자 윤서가 매섭게 경고했다.
“알았어. 자, 봐. 나 손 뗐다. 우리 햅쌀이 못 안으면 안 되지. 그렇지, 햅쌀아.”
삐유유.
까만 도마뱀이 권지한의 팔목 위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조그만 입으로 삐유삐유 울었다. 햅쌀이는 보통 새 형태로 있는데, 요 며칠 도마뱀 모습을 유지하는 걸 보면 이 모습이 퍽 마음에 든 듯했다. 그리고 권지한의 목이나 팔목, 머리 등 신체 어딘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권지한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