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2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24)화(124/195)
#113
윤서가 권지한의 옆에 털썩 앉았다.
드라마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편의점과 마트에서 파는 일반 주류로는 취하지 않고, 헌터 전용 술은 구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회식 때 말고는 술은 잘 마시지 않았다. 지금 이 캔 맥주도 헌터 전용 술이 아니라 그냥 보리색 음료나 마찬가지인데, 권지한이 냅다 카트에 넣어서 얼결에 사 왔다.
“어차피 취하지도 않는데 술은 뭐 하러 샀습니까?”
“분위기지.”
권지한이 씩 웃으며 슬쩍 엉덩이를 옮겼다. 윤서가 일부러 간격을 벌리고 앉은 딱 그만큼 가까워졌다.
“보기 전에 형 머리부터 말리자. 이러다 감기 걸려.”
감기라니? S급 헌터에게 감기라니?
윤서가 제정신이냐는 듯 권지한을 봤는데, 권지한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혹시 이것도 유언이야? 젖은 머리는 드라이기로 말리지 않고 항상 자연 상태로 말리기.”
“세상에 누가 그딴 유언을 남깁니까.”
“하긴. 리벤저는 형의 건강을 엄청나게 챙기니까 이런 건 남기지 않았겠지. 자, 뒤돌아. 말려 줄게.”
권지한의 커다란 손이 윤서의 어깨를 짚었다. 윤서는 화들짝 놀라서 권지한이 하란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위이이잉.
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머리칼에 바람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서의 오감은 제 어깨와 목뒤, 뒤통수를 스치는 단단하고 적당히 따뜻한 손의 감촉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리 진짜 작다. 큰 키 아니어도 비율 좋아 보이려면 이 정도 머리 크기는 가져야 하는구나.”
“저 키 안 작습니다.”
“작다고 안 했는데.”
“안 작다니까요? 제 키는 평균을 웃돈단 말입니다. 엄연히 큰 키입니-!”
윤서는 발끈해서 한바탕 쏘아붙이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권지한이 커다란 손을 활짝 벌리고 윤서의 정수리에 얹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봐. 손에 쥐여.”
“그, 그건 네가 손이 너무 커서. 얼른 떼요. 뭐 하는 거예요.”
윤서는 당황스러워서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권지한이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고서 끝까지 매달렸다. 아니, 매달린 게 아니라 윤서의 머리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었다. 윤서는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높아지는 체온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신체 변화는 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등 뒤의 커다란 남자의 심장 소리는 이미 윤서의 심장 소리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도 뜨끈뜨끈했다.
“…….”
윤서가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권지한도 알 터였다. 권지한은 윤서의 머리를 쥐고 흔드는 척, 실컷 보듬고 만져 댄 후에 천천히 손을 거뒀다.
“어느 정도 말랐으니 이제 드라마 볼까?”
권지한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탁하게 들렸다.
윤서가 홱 뒤를 돌아봤을 때 권지한은 여느 때처럼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기다려. 드라이어 넣고 올게.”
권지한이 TV장 가장 오른쪽 서랍에 드라이어를 콘센트 줄까지 돌돌 감아 잘 챙겨 넣고 다시 돌아왔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넘어갈 뻔한 윤서가 드라마를 재생하기 직전,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을 했다.
“대체 저기에 드라이어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까 손톱깎이 찾다가 열어 봤거든. 살림살이 괜찮게 해 놨던데? 물걸레 청소 포 나랑 같은 거 쓰더라. 그거 먼지 되게 잘 닦아 내지? 그 브랜드에서 나온 정전기 청소 포도 좋아. 정전기 청소 포는 없던데 내가 사 줄까?”
“주인이 씻을 때 멋대로 열어 봤단 말입니까?”
“형이 허락했잖아.”
“그건 그냥 손톱깎이 찾길래 왼쪽 서랍 열어보라고 한 거고요.”
“왼쪽에 서랍이 두 개 있길래….”
권지한이 입을 쭉 내밀었다.
“우, 씨. 형이랑 나 사이에 못 열어 볼 건 뭐야. 멋대로라고 표현하니까 섭섭해.”
“섭섭할 것도 많네요.”
“응. 섭섭한 거 또 있어. 형네 집에 컴퓨터도 없더라? 컴퓨터가 없으면 없다고 말했어야지. 알았으면 아까 마트에서 샀지. 오늘 게임도 하려고 했는데 못 하게 됐잖아.”
“뭐라고요?”
“지금 드라마 볼 때가 아니었네. 말 나온 김에 컴퓨터부터 장만하자. 내가 형 씻을 때 링크 찾아서 보내 놨으니까 거기서 사면 돼.”
윤서가 기가 막혀서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권지한이 테이블 위에서 윤서의 핸드폰을 가지고 왔다.
“자, 확인해 봐.”
윤서는 얼결에 받아 들고서 메신저 앱을 켰다.
권지한
http://sorimcompu.co.kr/1194191
이 그래픽 카드
형이 할 때보다 사양 높아져서 이 정도는 사야 돼
권지한
http://sorimcompu.co.kr/04022424
이것도 ㄱㅊ
권지한
http://sorimcompu.co.kr/5130300
모니터는 이거 두 개 게임 본격적으로 하려면 두 개는 있어야지
“내가 계산하고 주문하려다가 형이 원하는 모델이 아닐까 봐 안 했어. 오래 두고 쓸 건데 형 마음에 안 들면 나도 속상해서.”
“사용할 사람 없거든요. 저 게임 끊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시작해. 며칠 전에도 재미있게 했잖아. 보니까 올해 말에 대규모 업데이트 한다더라. 대던전 클리어하고 나오면 딱 그때쯤 될 거야. 미리 준비해 놓고 돌아오자마자 게임 하면서 스트레스 풀자.”
윤서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는 차분히, 침착하게 핸드폰 화면을 끄고 권지한을 바라봤다.
“안 합니다. 게임 시작할 생각 전혀 없어요. 며칠 전 했던 게 어지간히 재미있었나 본데 권지한 헌터나 실컷 하세요. 말리지 않을 테니까.”
“…….”
권지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홍채가 회색이다 보니 꼭 야생 동물의 눈동자를 연상케 했다.
“형, 혹시….”
권지한이 목소리를 깔았다. 분위기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윤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언이 정확히, 골드 메달을 따라는 게 아니라 골드 메달을 따고 나면 게임을 끊으라는 거였어?”
“…….”
윤서는 맥이 확 풀렸다.
“아닙니다. 무슨 만물 유언설 신봉하기라도 해요?”
“몰라. 나 유언에 노이로제 생겼나 봐.”
“생겨도 나한테 생겨야지 왜 권지한 헌터가 생깁니까?”
“그러게. 어떡할 거야. 책임져.”
권지한이 우는소리를 하면서 윤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잘생긴 이마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어깨에 닿자 윤서는 깜짝 놀라서 천장까지 튀어 오를 뻔했다.
그동안 권지한이 슬쩍슬쩍 어깨를 만지거나 무릎을 건드리기는 했어도 이렇게 과감한 접촉을 한 건 템 시장에서 덥석 들어 안았을 때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게임하지 말라는 유언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왜 안 하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권지한이 여전히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웅얼거렸다. 윤서는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어떻게든 억누르면서, 무심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재미가 없어서요.”
“재미없다고 하지 마. 존나 재미있게 한 걸 내가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 지켜봤는데.”
“…….”
윤서가 말이 없자 권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 사이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는데 이 거리를 의식하는 건 윤서, 자신뿐인 듯했다. 권지한은 거리감을 어디다 팔아먹고 왔는지 그저 억울한 투로 말했다.
“그때 형이 얼마나 재미있어했는데. 베스트로 뽑히니까 완전 신나서 입술이 여기까지 올라갔다고. 화면에 집중한 갈색 눈이 얼마나 이쁘게 반짝였는지 알아? 잔뜩 신이 나서 공략법 얘기하는 목소리도 얼마나 귀여웠는데 이제 와서 게임하는 형을 포기하라니 절대 그럴 수 없어.”
권지한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제발.”
“…….”
“입술 좀 깨물지 마. 내가 또 무신경했어? 내가 또 형을 괴롭힌 거야?”
권지한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은 윤서의 입술에 닿았다. 윤서는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또 형을 괴롭혔냐고?
윤서는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권지한이었으니까.
“자, 형. 주문하자.”
권지한이 윤서가 내려놓은 핸드폰을 다시 주워 들어서 윤서의 손에 꼭 쥐였다.
윤서는 한숨이 치밀었지만 실제로 내뱉지는 않았다. 권지한의 회색 눈에 담긴 어떤 절박함을 읽은 순간 한숨이 사라졌다.
대체 게임이 뭐라고, 게임을 하게 만드는 게 무슨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이렇게 절박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권지한이 원한다면 윤서는 사용하지 않을 그래픽 카드와 모니터를 열 개라도 더 주문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홈페이지 가입하기 귀찮으니까 권지한 헌터 아이디로 로그인하세요.”
“그래. 진즉 이랬어야지.”
권지한이 얼른 링크에 로그인했다. 윤서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윤서가 실제로 결제까지 마친 후에야 권지한은 안도했는지 조금 느긋해졌다.
“이제야 좀 편해졌네. 형은 하여튼 쉽지가 않아. 어차피 내 말 다 들어줄 거면서 왜 괜히 사람 마음을 졸이고 그러냐. S급 던전 갈 때보다 형이 이럴 때가 더 쫄깃하고 스릴 넘치는 거 알아? 나 심장 졸아들어서 손톱만 해지면 어쩔 거야?”
“그쪽 심장은 이미 밴댕이 소갈딱지라 괜찮습니다.”
“아, 반박하고 싶은데 진짜로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철렁철렁해서 이러다 심혈관 질환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제가 정말 심혈관 질환 걸리게 도와줄까요? 잘 해낼 수 있는데요.”
“웃기고 있네. 내가 진짜 아프면 형은-.”
“……?”
“…….”
권지한이 갑자기 말을 멈추길래 윤서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권지한은 어째서인지 조금 창백해진 낯빛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와씨. 큰일 날 뻔했다.”
“대체 뭐가요.”
“아니야. 우리 드라마나 보자.”
윤서는 미심쩍었지만 TV에서 ‘러브 인 한강’이 재생되자 곧 정신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