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2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26)화(126/195)
#115
“…이 새끼가.”
무명에 가까운 어린놈이 ‘부길드장님’도 아니고 이름 석 자를 부르면서 따박따박 사실을 적시하자 조만이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나 많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덤벼들지는 않았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니었다.
조만이는 주위를 의식하면서 가까이 다가와 낮게 으르렁댔다.
“석영이랑 합병했다고 낙엽 따위가 진짜 보석이 된 것처럼 유세 떨지 마라. 어차피 이번 합병은 서채윤을 영입하기 위해 진행된 거였고 너희는 연막용이었다.”
누구보다 윤서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잠깐 입을 다물자 조만이는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권지한과 네 사이가 아무리 각별하다지만 너는 권지한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이상형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사람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힘을 드러내고 모두를 구해 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지.”
“그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예요?”
“크큭, 우리 레인보우 길드의 정보력이 이 정도다. 중요한 건 너와는 딴판이라는 거야.”
“한마디로 서채윤 같은 사람이군요.”
“그렇지.”
윤서가 미소 지었다. 조만이가 제법 마음에 드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
한순간 부드럽게 미소 짓는 미인을 보고 조만이가 주춤 물러섰다. 그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쁘던지 비아냥을 듣고도 흐뭇해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제 진입 1분 전입니다. 모두 포탈 앞으로 모여 주세요!”
매니저의 시기적절한 외침 덕분에 조만이도 이성을 찾았다.
“아무튼 기고만장하지 마라.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고 권지한의 이상형은 서채윤 님이시니까.”
조만이가 일갈하고는 포탈로 날아갔다.
조만이의 가느다란 몸이 사라지자 인터뷰를 마친 권지한이 검은 날개를 펼치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 저 아저씨. 부끄럽게 내 이상형이 형이라는 걸 왜 말하고 다니고 그러냐. 이러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생겼네.”
“당신이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알기는 했습니까? 그리고 아저씨라니요.”
윤서가 정색하자 권지한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굳이 부길드장이라고 호칭 붙여 줘야 돼?”
“그게 아니라 겨우 45살인데 아저씨라니요. 45살이면 아직 청년이죠. 한창때의 남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조만이가 남자로 보인다는 뜻이야?”
“멀쩡한 남자 맞죠. 그쪽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윤서 형. 멀쩡한 남자의 기준이 너무 관대한 것 같아. 그런 관대한 기준을 가지고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험난해. 잘 들어. 자고로 멀쩡한 남자라고 한다면….”
윤서는 더 듣지 않고 포탈로 날아갔다. 권지한이 따라오면서 계속 주절거렸다. 자고로 멀쩡한 남자는 <퀘이사>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올바른 신념을 지니고 몸도 착하고 나이도 어린 사람이어야 한다, 어필하는 권지한에게 윤서는 삭막하게 대꾸했다.
“그 기준이라면 저도 멀쩡한 남자는 아니네요?”
“…….”
오랜만에 권지한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인원 66명 : 폭발까지 250시간
더 이상 던전에 진입할 인원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던전 포탈이 닫힙니다.
생명의 신이 달려왔습니다.
죽음의 신이 느긋하게 걸어옵니다.
길드석 설치 가능 – 레인보우
현재 기온 –269℃
스킬 <여왕벌의 둥지>가 파괴되었습니다!
스킬 <레드 나인 레이스>가 파괴되었습니다.
스킬 <대화의 시간> 내구도 50/100
이번 던전은 눈보라조차 얼어 버릴 만큼 추운 빙하 지대였다. 보호계 길드원들이 만든 실드가 줄줄이 파괴되고 남은 하나도 내구도가 반절까지 떨어졌다.
윤서는 일단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하려 했는데 굳이 그가 손 쓸 필요가 없었다.
‘조만이’가 스킬 <온난화>를 사용합니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기온이 대폭 상승합니다.
현재 기온 5℃
남은 시간 15:59:59
협회에서 이번 던전에 괜히 조만이를 부른 게 아니었다.
“오, 역시 빙하의 왕. 굉장하네요. 유지 시간도 무려 16시간이나 되다니 이 정도면 아이템을 소모할 필요도 없겠어요.”
“부길드장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얼른 길드석부터 설치해라.”
“예!”
가장 많은 길드원이 들어온 곳이 레인보우라서 레인보우 길드석만 설치 가능했다.
헌터들이 좋은 위치에 길드석을 설치하고 여러 실드를 덧씌우며 생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동안 권지한과 윤서는 뒤에 동떨어져 있었다.
“형, 여긴 어디쯤일 것 같아?”
윤서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탁 트인 전경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빙하뿐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달은 하나만 떠 있으며, 생명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얼음 산맥’ 가기 전의 빙하 지대나 북극과 ‘악마의 평원’ 경계선에 위치한 ‘검은 설원’으로 보이는군요. 하지만 정확한 건 더 진행해야 알 것 같습니다. ‘둔지 사막’ 가운데의 얼음 섬일지도 모르니까.”
윤서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보석이 장식된 단검은 윤서의 손 위에서 모습이 변했다. 파란 눈을 가진 까만 도마뱀이었다.
삐유.
햅쌀이가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빠르게 팔목을 타고 올라와 조끼 앞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아이템도 추위를 타나?”
“안 탑니다.”
“그럼 햅쌀이는 왜 그래?”
“관심받고 싶어서요.”
권지한이 짧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는 머리만 빼꼼 내민 햅쌀이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햅쌀이가 들어간 주머니가 앞가슴 주머니였기에 윤서는 움찔했다.
“너 전투할 때는 엄살떨면 안 된다. 알지? 우리 윤서 형 잘 지켜야 해.”
삐유!
햅쌀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크아아아!
몬스터들의 우렁찬 울음소리도 뒤따랐다. 하얀 털가죽을 지닌 거대 설인들이 쿵, 쿵 발을 구르며 달려들었다. A급 몬스터들이었다.
“힐러들은 후방으로! 전투 시에는 화염 스킬은 최대한 자제한다!”
“예!”
이번 던전은 ‘빙하석’이라는 던전 부산물 수집이 중점이기에 주변 지형을 최대한 보존하며 싸워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 근접격투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크아아!
“흐아압!”
몬스터와 인간이 전투를 시작했다.
윤서는 햅쌀이를 검 형태로 변형했다.
스킬 <스파크>를 사용합니다.
단검에 치직, 치직 전류가 맴돌았다.
윤서 또한 거대 설인과 직접 부딪치며 싸울 계획이었다.
크아아악!
겁도 없이 덤벼드는 거대 설인이 있길래 윤서는 얼음 위를 도약해서 정확하게 목적지에 안착했다. 웬만한 검은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굵은 목덜미에 <스파크>를 담은 단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일부러 베지 않고 찔러 넣어 혈관 속에 <스파크>를 퍼지게 했다.
크아아아!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콰앙,
육중한 몸이 빙하 위로 쓰러졌다. 윤서는 <염력>으로 얼음 파편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는 다른 놈의 등 위에 착지해서 검끝을 아직 남은 전류와 함께 쑤셔 박았다. 내장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전기 충격에 몬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뒤로 넘어갔다. 윤서는 그전에 이미 다른 놈을 공격 중이었다.
죽음의 신이 피 튀기는 혈전을 바라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없는 죽음들에 죽음의 신은 아쉬워하는 듯 했지만 A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제대로 컨트롤된다는 걸 확인한 윤서는 한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를 해치우다가 유독 몸집 큰 놈을 발견했다. A+급으로 판단한 윤서가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거대 설인도 윤서를 발견하고 팔을 힘껏 내리쳤다.
쾅!
엄청난 타격음에 주위에는 충격파까지 일었다. 일순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거대 설인의 주먹은 빙하에 박혀 있었고, 어느새 설인의 팔 위에 올라탄 윤서가 그대로 어깨까지 팔을 타고 올라와 목뒤에 검을 박았다. 단검은 푸른 보석이 달린 손잡이만 남기고 두꺼운 가죽을 단번에 뚫고 들어갔다. 윤서는 이번엔 <스파크>를 사용하는 대신 척추까지 주욱 내리긋는 것을 택했다. 피가 튀기는 건 싫으므로 <염력>을 사용해 막았다.
쿠웅.
거대 설인이 쓰러지고 윤서가 가볍게 몸을 밟고 빙하 위에 내려섰다.
권지한이 몬스터 시체들 사이에서 윤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형, 너무 화려하게 하는 거 아니야?”
“이게 화려하다고요? 피 한 방울 없는데.”
죽음의 신이 화려하기는커녕 심심하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이런 식이면 형이 최대 공로자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 권지한을 제쳐 두고 S급 옐로우 던전의 최대 공로자가 되면 형의 이름이 전 우주에 널리 퍼지겠는걸.”
“보스 몬스터는 그쪽한테 양보하죠.”
“고맙게 받을게. 아무튼 다들 형을 주시 중이니까 조심해.”
권지한이 뒤쪽을 눈짓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몬스터와 전투를 하면서도 연신 이쪽을 힐끔거렸다. 특히 조만이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어서 윤서는 착잡해졌다.
권지한은 검신에 묻은 피를 설인의 하얀 털에 쓱쓱 닦았다.
“형은 좋겠다. 피 닦을 필요가 없어서.”
“편하긴 합니다만 어차피 또 묻을 걸 왜 벌써 닦아요?”
“아, 저 사람들 도와주자고?”
교전은 거의 끝물이었고, 출몰한 몬스터들 중 가장 거대하고 강한 거대 설인은 방금 윤서가 해치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투에 가담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주 주말에 암시장도 가야 하고, 유럽에도 가야 하고, 할 일 많으니 던전 클리어는 일주일 내로 끝낼 겁니다.”
“좋아, 멋있었어. 오직 형만 할 수 있는 발언이었어.”
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훨씬 일찍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타 길드 연합 레이드에서 석영 레이드 기록을 뛰어넘으면 유준철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고, 레인보우의 이름값만 올라가는 일이라 딱 일주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