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2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27)화(127/195)
#116
윤서와 권지한이 합세하고, 교전이 끝나자 헌터들은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대체 어떤 스킬을 사용한 겁니까?”
“당신 정체가 뭐야. B급 보조 헌터 아니었어?”
“거대 설인의 가죽을 단숨에 꿰뚫는 무기라니 한번 구경 좀 합시다.”
예상한 바였기에 윤서는 난감해하지도 않고 권지한의 뒤에 쏙 숨었다. 권지한 또한 윤서를 가린 채 사람들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심기가 좋지 않음을 드러냈다.
“우리 형한테 접근하지 마. 형은 평범한 B급 헌터고, 몬스터들은 내가 준 무기로 해치운 거야.”
“권지한 헌터가 준 무기였군요. 하지만 몬스터를 죽인 스킬은…?”
“그것도 내 스킬이야.”
“권지한 헌터의 마력은 검은색 아니었습니까? 저 헌터는 푸른 마력이 감돌던데요.”
“너, 뭐야? 우리 형을 존나 유심히도 봤네? 관심 있어?”
권지한이 질문한 헌터를 노려봤다. 세계 최강 S급 헌터가 잔뜩 인상 쓴 채 노려보자 상대가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우리 형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지. 짜증 나게.”
“…….”
“오늘은 형이 S급 던전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해서 특별히 데리고 온 거니까 형한테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이나 해. 우리 형은 내가 보호할 거고, 내가 형의 몫까지 해치울 거야. 우리는 유달리 특별한 사이거든.”
유달리 특별한 사이인 남자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S급 던전에 데려왔다는 뜻이었다. 낮은 등급의 던전들은 체험 관광형 레이드도 있지만, S급 던전을 관광용으로 쓴다는 발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권지한이니까.’ 하고 납득했고, 어떤 이들은 어이없어했다.
생명의 신이 둘의 진전된 관계에 놀랍니다.
생명의 신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며 뿌듯해합니다.
죽음의 신이 그 가족과는 다른 가족일 거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신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들이 난리네요.”
“나도. 생명의 신이야 늘 말이 많지만 파괴의 신이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파괴의 신은 어떤 신입니까?”
“좀 유치하고 어린애 같아. 피 좋아하고, 사람 다치는 거 좋아하고.”
“죽음의 신과 비슷하네요.”
생명의 신이 폭소를 터트립니다.
죽음의 신이 가호를 그만두겠다고 협박합니다.
윤서는 문득 신들이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이 신들이 지구의 신들이라 생각했고, 나중에는 외계인이라 생각했다가 지금은 어떤… 우주를 다스리는 상위 존재 개념이라 막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검은 포탈 메시지에서는 마지막 관문이 끝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가이아가 그대와 함께한다고 했다.
이건 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일까?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고 나면 이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말이 많고 다정한 생명의 신, 피를 좋아하는 다혈질 죽음의 신. 항상 묵묵히 바라보는 관측자와 시스템의 창조주 가이아까지.
질문과 호기심이 윤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전에는 이런 궁금증 따위는 갖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호기심을 둘 자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들의 존재가 궁금해졌고, 이건 그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래가 윤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몇 차례 전투 후 안전지대를 찾기까지 50시간이 걸렸다. 각자 캠핑카와 텐트 등 숙박 시설을 꺼내며 휴식을 준비할 때 조만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캠핑카 안으로 들어가려던 윤서가 먼저 기척을 느끼고 권지한에게 눈짓했다. 권지한이 밖으로 나왔다.
“뭐야, 아저씨? 할 말 있어?”
“낙엽의 윤서와 할 말이 있다.”
“우리 윤서 형 낙엽 소속이 아닌 지 오래야. 석영의 윤서라고 불러 줘.”
조만이가 권지한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다. 나는 낙엽의 윤서와 대화하고 싶다.”
“날 통해서 해.”
“저자는 정말 평범한 B급 헌터가 맞나?”
“우리 형은 평범하고 조금 호기심 많은 B급 헌터지.”
“웃기지 마라. 그 움직임은 노련한 헌터의 움직임이었다. 얼음 표면의 마찰력까지 계산해서 정확하게 몬스터의 급소에 착지하는 B급 헌터가 어디 있지?”
“여기.”
“지금 말장난하는 건가?”
조만이가 버럭 성질을 냈다. 권지한은 세상에서 가장 건방진 자세로 귀를 후볐다. 윤서가 한숨을 내쉬고는 권지한을 밀어 내고 앞으로 나왔다.
“제 시스템 프로필을 보지 않았습니까? 혹시 등급 읽는 법을 모르는 건가요? B급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을 텐데요.”
“시스템 프로필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제가 등급을 속일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는 나도 모르지. 그러나 네가 정체를 속이고 있는 건 확실하다.”
확신 가득한 말투에 윤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만이 또한 대던전 공략에 지원했기에 대던전에 들어가면 정체를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 들키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때 조만이가 이어서 말했다.
“석영은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브리핑 며칠 전에 갑자기 두 명을 추가하고, 한 명은 권지한에 한 명은 이런 수상한 놈이라니. 그레이스 엘리시아가 이 던전에서 진귀한 아이템이나 보물 상자가 나오기라도 한다던가? 귀여운 작은 새가 나오는 보물 상자를 가져가려고 온 것인가?”
조만이는 엉뚱한 추측을 했다. 윤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하세요. 보물 상자에 대해서는 비밀입니다.”
“하! 역시 그랬군. 그 보물상자는 레인보우의 업적이 될 것이다. 네놈들은 손댈 생각도 하지 마라.”
조만이가 일갈하고는 홱 돌아섰다.
탐욕스러운 성격 덕분에 정체를 들킬 위기에서 벗어났다.
윤서는 조소하면서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권지한도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조만이의 기척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 권지한이 물었다.
“형 스킬 중에 <거짓 기억> 있잖아. 그걸로 조만이의 기억을 바꾸면 되지 않아? ‘저 헌터가 활약한 건 꿈에서의 일이다.’ 이런 식으로.”
“S급 각성자한테는 무리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안심이다.”
“안심?”
“형이 나한테 <거짓 기억> 심을까 봐 조금 걱정했거든.”
“내가 그쪽한테 <거짓 기억> 심을 일이 뭐가 있어요?”
윤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에 권지한은 코웃음 쳤다.
“솔직히 통했으면 지금쯤 몇 번이라도 사용했을 거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네? 처음 임시 팀으로 불려와서 형 프로필 봤을 때, 최대 공로자 됐을 때, 템 시장에서 실드 만들 때, <테라포밍> 쓸 때 등등. S급한테도 통했으면 벌써 몇 번이나 썼을 거잖아. 아, 형이 유언 때문에 살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챘을 때도.”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아깝군요.”
“진짜 너무한다. 아니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사실을 뭐 하러 부정하겠어요. 먼저 씻겠습니다.”
윤서는 욕실로 쌩하니 들어갔다. 권지한이 뒤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쓰는 캠핑카는 욕실 문이 떨어져 나간 상태인지라 <염력>으로 문부터 고정한 후 옷을 벗으려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죽음의 신이 억울해합니다.
죽음의 신이 가이아 때문에 성능을 높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신이 · · ·
윤서가 옷을 벗으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죽음의 신이 조용해졌습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고 조용해져?
수상한 느낌에 윤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생명의 신은 얼른 당신이 옷을 벗고 씻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신이 당신의 흉터를 보고 싶어 합니다.
“…….”
마치 가호 신들이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서는 옷을 마저 벗으며 여러 추측을 했다. 가이아 때문에 성능을 높일 수 없었다…. 가호 신들은 가이아 아래라는 것. 만약 비슷한 가이아 스킬이 있어서 그것보다 좋은 것은 주지 못했다는 뜻이라면 그 비슷한 스킬은 <가이아의 마음>이겠지.
대던전에서 <가이아의 마음>은 주로 텔레파시로 쓰였다. 독심술보다는 멀리 있는 리벤저와 소통하는 용도. 단 스킬 보유자였던 휴스가 마력이 얼마 없어서 자주 활용하지는 못했다.
샤워기 수도꼭지를 틀자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이 캠핑카 샤워실도 익숙해졌다. 윤서는 휴스를 떠올리자마자 따라오는 과거의 기억들을 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
조만이는 보물 상자가 있다는 의혹을 거의 확실시하고 있는지 시간이 생길 때마다 길드원들과 보물 상자를 찾으러 떠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석영 길드원 하나가 몰래 대화를 엿들었고, 레인보우 길드원들이 보물 상자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석영 길드원들은 권지한에게 우르르 몰려와 이 사실을 고했다. 권지한은 그런 계시는 없었으니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했으나 길드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서 얼음만 가득한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두 대형 길드가 그러고 다니자 약소 길드원들도 점차 수상한 눈길로 바라봤고 마침내 보물 상자에 대한 소문을 레이드팀 전원이 알게 되었다.
결국 권지한, 윤서 둘만 제외한 모든 헌터가 있을 리 없는 일확천금을 찾아 헤매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아니, 물론 있을 리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확률이 지극히 낮을 뿐….
보스 몬스터 공략을 하루 앞둔 지금 베이스 캠프에 있는 이는 권지한과 윤서 단둘뿐이었다.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를 시작하면 찾을 시간이 없었기에 다들 휴식을 포기하고 나간 것이다. 윤서로서는 눈치 안 보고 편히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윤서는 모닥불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한가하게 팔다리를 쫙 폈다.
“다들 체력이 대단하네요. 이런 추위 속에서 그렇게 싸우면서도 제대로 잠도 자지 않고 보물 상자를 찾아다닌다니. 아,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냥 집착이고 물욕이지. 나도 여기 보물 상자 있는 게 확실하다면 저 사람 중 하나가 됐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