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화(13/195)
#11
“아, 싫은데. 왜 하필 접니까?”
– 내가 뽑은 거 아니야. 석영에서 콕 집어 주더라.
“제가 하던 일은요.”
– 석영에서 B급 헌터 두 명을 지원해 줘서 업무에 공백은 없을 거야. 기한은 말 안 해 줬는데 아마 2, 3개월은 될 거고. 당분간 그쪽으로 출퇴근해라. 수빈 씨랑 연락해서 같이 가든가.
윤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회사를 관둘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목적지를 변경했다.
“당분간 여기로 출퇴근할 거야.”
“네, 저장해 둘게요.”
윤서는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의 직감은 잘 맞는 편이고 특히 불길한 직감은 안 맞을 때가 드물었다.
‘나랑 박수빈만 콕 집었다고?’
만약 저만 선택했다면 수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겠지만, A급이면서 C급으로 정체를 속이고 있는 박수빈과 동반 선택되니 무척 의심스러웠다. 착잡한 윤서와 달리 길드 단체 채팅방은 들뜬 분위기였다.
고희원
젠장…. 부럽다 인정할 수 없서
경영 팀 김대리
우리 낙엽에 먹칠하면 안 돼요. 파이팅!
박영범
젠장….. 부러워 나는 인정 못 해
경영 팀 최우리
가는 사람이 윤서 씨여서 다행이다 ㅎㅎ 사고는 안 칠 것 같넹
고희원
윤서 오빠는 석영이든 아니든 관심도 없을 텐데 왜 내가 아니라 윤서 오빠예요?
공략 팀 수유
윤서 씨 당분간 못 보는구나. 축하하고 잘 다녀와요~
박영범
보나 마나 만사 귀찮은 얼굴로 스크롤만 내리고 있을 텐데 왜 내가 아니라 윤서 씨지?
다른 팀원들은 응원해 주는데 그의 팀원들은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있었다. 배 아파 죽는 둘의 메시지를 보니 윤서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곧 박수빈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서로 전화번호 교환을 안 했기 때문에 U패드의 길드 메신저로 전화가 걸려 왔다.
– 윤서 씨, 들었죠?
“들었어요. 저는 20분 후에 도착합니다.”
– 저도 그쯤 될 것 같네요. 만나서 같이 들어가요.
“네.”
– 앞으로 석영으로 출퇴근한다니까 설레지 않아요? S급 헌터들 당분간 레이드 일정 없는 걸로 아는데 지나가다가 꼭 마주쳤으면 좋겠네요.
박수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저주를 내뱉었다. 윤서는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만날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은 윤서는 아주 오랜만에 단체 방에 메시지 했다.
저는 그다지 가고 싶진 않은데 가게 됐네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고희원
이것 봐!!! 본인은 관심도 없자나!! 내가 가야 했는데ㅠㅠㅠㅠ
박영범
이럴 줄 알았어 ㅡㅡ ㅠㅠ 내가 대신 가고 싶다아아악!! 왜 내가 아니야,,
두 사람이 발광하자 비로소 힐링하는 윤서였다.
***
“윤서 헌터, 박수빈 헌터 맞으시죠? 중앙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10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로비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신분을 확인하곤 임시 출입증을 건넸다. 중앙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여섯 대이기 때문에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아.”
엘리베이터 안에 남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눈썹 밑으로 내려오는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까지 낀 남자는 윤서와 박수빈이 엘리베이터 오르자 구석에 등을 붙이고 섰다. 겁에라도 질린 모양새였다.
‘박강’이 스킬 <겉 희고 속 검은 이>를 사용합니다.
‘박강’이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상대가 바로 간파 스킬을 사용해 왔다. 박수빈은 간파 메시지를 봤는지 못 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무향 길드의 암향 헌터 맞으시죠?”
“아, 아. 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낙엽 길드의 박수빈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같은 길드의 윤서 씨이고요.”
“네, 네. 아,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박수빈이 소개해 버리는 바람에 윤서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인사했다. 갈색 눈으로 빠르게 상대를 스캔했다. 더벅머리 헌터는 가여울 만큼 바르르 떨었다. 눈은 마주치지도 못하고 엘리베이터 바닥만 내려다봤고,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실제론 체격이 크고 몸이 탄탄한 듯했다.
아무래도 계속 쳐다보면 더 부담 느낄 것 같아서 층수 버튼이나 누르려는데 102층이 이미 눌려 있었다. 박수빈도 불이 들어온 버튼을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암향 헌터도 102층 가시나 보네요. 혹시 오늘 픽업된 헌터 중 한 분인가?”
“아…. 네, 저희 길드에서는… 저만.”
“그렇군요. 반가워요.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되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저, 저도… 자, 잘 부탁드립니다….”
더벅머리가 엘리베이터 구석에 달라붙으면서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인싸와 아싸의 만남이었다. 보기도 안쓰러운 모습에 윤서가 그만하라고 박수빈의 팔뚝을 팔꿈치로 툭 쳤다. 박수빈은 능청맞게 말했다.
“윤서 씨, 우리 잘해 봐요. 희원 씨가 낙엽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요.”
“먹칠은 이미 한복 무도회로 당신들이 다 하지 않았을까요.”
“하하….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윤서 씨도 입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쁜 도령님 보지 못해서 안타깝네요.”
“저 스물아홉 살입니다.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입을 일 없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나라 민족의 얼이 담긴 한복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정말 실망이네요.”
윤서는 박수빈의 농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102층까지 올라가며 몇 명이 탔다가 내렸는데 암향이란 헌터는 낯선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히끅히끅 소리를 내며 간파 스킬을 사용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자 중에선 흔치 않은 타입이네.’
윤서는 남자에게서 뒤돌아 있었으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선명하게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읽었다. 아무리 소심했던 이라도 각성하고 나면 성격이 변하는데 이자는 윤서로선 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102층에 도착하자 하얗고 깔끔한 복도가 나왔다. U패드를 들고 서 있던 석영 직원이 다가왔다.
“암향 헌터님, 라스빈 헌터님, 윤서 헌터님 맞으시지요? 잠시만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대기실에서는 패시브 스킬 외는 사용 자제를 부탁드릴게요.”
직원이 그들을 대기실로 안내하고 떠났다. 대기실 문을 열자 커다란 소파와 간식 자판기, 전자레인지, 냉장고, TV에 간이침대까지 있는 깔끔한 공간이 나왔다. 윤서는 벽면에 마력 감지 아이템이 부착되어 있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로비와 엘리베이터, 복도에도 없는 아이템인데 대기실에만 붙어 있었고, 쉴 새 없이 붉게 빛났다.
‘이정인’이 스킬 <삐에로의 가면 뒤>를 사용합니다.
‘이정인’이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김진해’가 스킬 <생존 가치>를 사용합니다.
‘김진해’가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남궁심해’가 스킬 <심해아귀의 눈>을 사용합니다.
‘남궁심해’가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피만 안 튈 뿐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박수빈에게도 로그가 뜬 것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박수빈은 제각기 다른 자세와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열 명의 헌터를 응시했다. 그런데 의외로 간파 스킬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미 많이들 와 계셨군요. 우리가 늦은 건 아닌데 말이에요.”
박수빈이 사람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면 윤서는 이곳에 있는 몇몇 헌터들의 낯이 익숙한 걸 보고 하, 작게 숨을 내뱉었다.
합병식 날 대뜸 시비를 걸어 왔던 빨간 머리 홍의윤, 한복 입은 낙엽 길드원들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 했던 보조개남, 김서해의 두 동생들까지. 그 외에 모르는 얼굴은 세 명뿐이었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처음 뵙습니다. 헌터 네임 라스빈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페이지입니다.”
박수빈의 살가운 인사에 보조개남이 가장 먼저 웃으며 화답했다. 남궁심해와 김진해는 무시했으며, 홍의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사이 더벅머리는 후다닥 맨 구석 자리로 달려가 가방을 끌어안고 앉았다. 윤서 또한 적당히 중간에서 뒤쪽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연회장에서 남청색 도포 두르셨던 헌터님 맞죠?”
“알아보셨군요. 이거 쑥스럽네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왜 우리 길드는 그런 생각 못 했는지 후회했다니까요. 이제 한솥밥 먹게 되었으니까 다음부터는 저한테도 드레스 코드 공유해 주세요.”
“물론이죠, 페이지 헌터.”
“아, 이정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이정인 씨. 저도 박수빈이라고 불러 주세요.”
“하, 진짜. 다 큰 사내놈들이 징그럽게 구네.”
이정인과 박수빈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홍의윤이 대뜸 시비를 걸었다. 박수빈은 누가 싸움을 걸어도 유하게 넘어가는 성격인데, 이정인도 마찬가지인지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고는 순순히 사과했다.
“시끄러웠다면 죄송합니다.”
공손하게 인사한 둘은 번호를 교환하고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 겁이 많은 게 무슨 헌터라고, 쯧.”
홍의윤은 제 시비에 반응하는 사람이 없자 다시 지루해진 얼굴로 상대를 찾았다.
“넌 뭐야. 왜 야려. 한번 붙어 볼래?”
홍의윤이 대각선으로 세 칸 떨어진 곳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던 김서해의 막냇동생에게 시비를 걸었다. 김진해가 눈살을 찌푸리자 뒤에 앉아 있던 남궁심해가 일순 긴장했다. 그러나 김진해의 옆에 앉은 헌터가 진정하라는 듯 팔을 툭 쳐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오, 재미없는 새끼들.”
홍의윤이 김 다 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와 홍의윤의 눈이 마주쳤다. 합병식 날 <염화의 눈> 스킬로 이미 윤서의 만들어진 프로필을 훑었던 홍의윤은 윤서에겐 시비도 걸어 오지 않았다.
다행이었으나 윤서로선 심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들 특별한 뭔가가 있는 듯한 사람들이잖아. 내가 왜 이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단 말이야?
윤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심란하기보다는 설렜겠지만, 정체를 숨기는 사람이었기에 찜찜하고 꺼림칙했다.
‘설마. 자의식 과잉이겠지.’
이제는 서채윤 추적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저 형제는 가족이 리벤저여서 찾는 거고….
윤서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