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0)화(130/195)
#118
“안녕, 잘 잤어?”
윤서가 주차장으로 나오자 권지한이 차 문을 열어 주며 방긋 웃었다.
삐유!
윤서에게 안겨 있던 햅쌀이가 바둥거렸다. 윤서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햅쌀이는 권지한의 품에 뛰어들었다. 권지한이 차 문을 닫으며 햅쌀이를 받아 들었다.
“어, 오늘은 고슴도치네. 진짜 귀엽다.”
삐유. 삐유우. 삐유.
“햅쌀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럽게 울지? 무슨 일 있었어?”
있었다.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무기 사러 갈 거라고 말해 놨거든요. 미리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 많은 데서 발광할까 봐 말했는데 그때부터 이 상태네요.”
“아하…. 질투하는 거구나. 햅쌀아, 형 무기가 아니라 내 무기 사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삐유우우우.
“근데 서러워하는 게 엄청 귀엽다. 안 달래 주고 싶네.”
고슴도치가 가시도 세우지 않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서럽게 우는 모습이 귀엽긴 귀여웠다.
“얼른 출발이나 하죠. 가깝습니까? 얼마나 걸려요?”
차에 탔는데도 찰보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윤서가 묻자 권지한이 씨익 웃었다. 왠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가까운지 먼지 아직 몰라.”
“모른다니요?”
“손 줘 봐, 형.”
“…?”
윤서는 의아하면서도 일단 손바닥을 내밀었다. 권지한이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윤서의 손 위에 올렸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작은 봉투였다. 윤서가 봉투의 접힌 부분을 뜯었다.
‘그림자 암시장 초대장’
등급: S급
사용 가능 날짜: 9월 12일 06시~07시 (한국 기준)
그림자 암시장의 초대장입니다. 초대장을 찢으면 암시장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됩니다.
횟수 1/1
아이템 제작자: 세인 스테이시
윤서가 작게 감탄했다.
“초대장이 포탈 스톤 역할을 하는 겁니까?”
“응. 돌아올 때의 포탈 스톤은 거기서 사야 해. 돈 충분히 있지? 없으면 내가 사 줄게.”
“그 정도 돈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템 만든 사람은 외국인인데 왜 날짜는 한국 기준인 거예요?”
“암시장뿐만 아니라 웬만한 국제 이벤트들은 다 우리나라 기준이야. 대던전 발생 시간도 한국 기준이잖아.”
“하긴 그렇군요.”
“준비됐으면 가자.”
권지한이 자신의 초대장을 꺼냈다. 햅쌀이는 여전히 권지한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윤서가 먼저 초대장을 찢었다.
포탈 스톤으로 이동할 때와 똑같은 감각이 느껴지고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구두 아래로 바삭한 모래가 밟혔다. 윤서가 서 있는 곳은 해변이었다.
화창한 햇빛, 푸르른 하늘과 솜뭉치처럼 떠다니는 하얀 구름, 잔잔한 에메랄드빛 바다. 무더운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온화한 봄 날씨였다. 윤서는 권지한도 바로 옆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 U패드를 켰다. GPS를 확인하니 이곳은 남태평양의 한 섬으로 나왔다.
삐유!
햅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권지한의 품에서 뛰어내리고 모래 위를 신나게 헤엄쳤다. 권지한은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가슴을 부풀었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날씨 진짜 좋다. 딱 이런 데서 살고 싶다. 형, 혹시 유언 중에 ‘남태평양 섬 별장에서 휴양하기’ 같은 건 없었어?”
“그런 건 없었습니다. 암시장은 저쪽인가 보네요. 저쪽에서 사람들 기척이 느껴집니다.”
윤서가 섬의 안쪽,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경치 구경 좀 하다 가자.”
“네.”
둘은 모래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고슴도치를 빼내고 바닷가를 한가롭게 거닐다가 일곱 시가 되기 3분 전에 암시장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랄프 스테이시 주니어’가 아이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거울’을 사용합니다.
‘랄프 스테이시 주니어’가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숲 가까이 다가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D급 던전 녹색 포탈 한 개와 외국인 남자가 보였다. 이름으로 보아 암시장 직원인 듯했다.
직원의 뒤쪽의 넓은 들판에는 텐트와 캠핑카 등이 있었고, 앞쪽에는 다양한 국적의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대충 봐도 수백 명은 되는 듯했다. 권지한을 알아봤는지 헌터들 몇몇이 수군거렸다. 윤서는 모자를 눌러쓰면서 헌터들의 얼굴을 훑었다.
석영의 A급, S급 헌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초대장은 받았을 테니 어제 열렸을 때 이미 다녀갔을 것이다.
‘미르 길드장도 왔구나.’
윤서가 얼굴을 아는 S급 헌터도 보였다. 미르 길드의 길드장인 조미르. 서채윤으로서 활동할 때 몇 번 같이 싸운 적이 있었다.
윤서는 어제 유준철에게서 대던전 지원자 중 진입이 확정된 이들의 명단을 받았는데, 조미르의 이름도 리스트 앞쪽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권지한 헌터님, 윤서 헌터님. 암시장 방문을 환영합니다. 권지한 헌터님은 여전히 시간에 딱 맞춰 오시네요.”
암시장 직원도 권지한을 보고 무척 놀랐겠지만 직원으로서 프로페셔널하게 인사를 건넸다.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윤서 헌터님은 첫 방문이시지요?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형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네, 알겠습니다.”
직원의 손에 든 U패드와 아이템을 보아 본래 확인 절차가 있는 듯했지만, 권지한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둘은 따로 절차를 밟지 않았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던전에 진입하겠습니다. 모두 들어와 주세요!”
직원이 먼저 녹색 포탈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암시장이 던전 안에서 열리는 거였어요?”
“응, 이 정도는 되어야 암시장이지.”
권지한이 윤서의 손목을 붙잡고 포탈로 들어갔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인원 401명 : 폭발까지 20시간
생명의 신이 반가워합니다.
죽음의 신이 높은 등급의 던전을 바라고 있습니다.
D급 그린 던전의 내부는 마치 사람이 사라진 후 멸망해 가는 도시 같았다.
던전 중에는 숲과 동굴, 용암과 빙하 등의 대자연이 아니라 이렇게 인공 건축물이 나오는 곳도 있었다. 신전, 탑, 무너진 도로와 철길, 고층 건물. 흔한 지형은 아니었다.
“늘 이렇게 도시 지형 던전에서 열립니까?”
“아니, 저번에는 협곡이었어. 어제 열린 암시장도 해저 동굴이었을 걸. 지형보다는 포탈 위치랑 색깔이 중요하다더라고. 인적 드문 곳에 나타난 낮은 등급의 그린 포탈이면 암시장 후보가 되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더 이상 던전에 진입할 인원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던전 포탈이 닫힙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인원 611명 : 폭발까지 20시간
“611명이나 들어왔군요.”
“그중 100명은 판매상. 우리는 판매상이 준비하는 동안 잡몹들 해치우자. 자정이 되면 포탈을 닫고, 암시장 주최가 던전 보스를 해치울 거야. 우리는 잡몹만 죽이고 물건들 사러 가면 돼.”
윤서는 시간을 계산해 봤다.
지금이 7시 1분이니 자정까지 16시간 59분 남았다. 자정부터 폭발까지는 3시간가량이고….
“두 시간 안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죽는 거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실패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미르 길드장도 있고, 사냥꾼들도 왔을 테고. 지금 611명이나 들어왔는데 저번보다 100명이나 더 왔어. 대부분이 대던전에 지원 등록했을 테니까 공략을 준비하러 온 거겠지. 우리처럼.”
권지한이 여유롭게 웃었다.
“딱히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미르 길드장이나 사냥꾼들이 없다고 해도… 클리어 실패를 걱정하기엔 우리가 너무 강하죠.”
“그렇지. 형, 여기 잔머리 뻗었다.”
권지한이 윤서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동그란 뒤통수를 덮고서 문지르는 커다란 손바닥에 윤서가 눈을 흘겼다.
“저번부터 자꾸 제 머리 만지네요.”
“손에 딱 들어와서 만지기 좋아. 높이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착 달라붙어.”
“제가 연상인 걸 잊지 마시죠.”
“어우, 당연하죠. 늘 상기하고 있습니다. 형아도 내 머리 쓰다듬어 줄래?”
권지한이 싱긋 웃으며 윤서의 앞에 상체를 숙였다. 윤서는 제 앞으로 들이밀린 까만 정수리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손을 들었다. 쓱쓱….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불안감은 사라지고 그 빈 공간을 흡족함과 행복감이 채웠다. 햅쌀이가 너네 뭐 하냐는 듯이 삐유? 하고 부르지만 않았다면 자정까지 계속 이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
주위 몬스터들을 정리한 후 몇 분간 담소를 나누며 쉬다가 아이템 ‘확성기’로 판매 준비가 끝났다는 방송이 나와서 거리로 들어갔다.
판매전이 열리는 곳은 넓은 도로였다.
양평 아이템 시장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가판대가 널려 있고 사람들이 각자 로브나 모자를 쓰고서 물건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중 한 가판대에 ‘당신을 밤의 제왕으로 만들어 줄 무기! 당신이 찾던 바로 그 무기!’라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권지한 헌터, 저쪽으로 가죠. 밤의 제왕으로 만들어 줄 무기라니, 자신감이 넘치는데 S급 검이 있다면 좋겠네요.”
“…응?”
윤서는 눈만 깜빡이는 권지한의 팔목을 붙잡고 그곳으로 향했다.
‘밤의 제왕 방망이’
등급: S급
더 강렬한 쾌감! 머리가 날아갈 것 같은 흥분!
더 빠른 속도! 더 강한 강도!
아이템 제작자 : 빅토르 아이누제
이제 눈만 깜빡이는 사람은 윤서가 되었다.
가판대 위를 보니 전부 이런 류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손님들이 손에 들고서 구경하는 아이템은 길고 굵은 형태였고 판매자는 한번 전원을 켜면 하루 종일 움직인다며 열심히 영업 중이었다.
윤서는 바로 돌아섰다.
돌아서는 얼굴이 새빨갰다.
“왜, 형? 구경이나 하자며. 이거 별로 안 커 보이는데 특대형이네.”
권지한이 능글맞게 씨익 웃으며 가판대 위로 손을 뻗었다. 특대형 방망이 하나를 집어 들려는 권지한의 손을 윤서가 철썩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잡아 빠져나왔다.
“미쳤어요? 햅쌀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어디에 손을 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