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3)화(133/195)
#121
햅쌀이는 아이템이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 말도 알아듣고, 감정도 풍부하며, 생각이란 것도 하는 에고 소드. 삐유, 삐유 우는 이 작은 생물은 윤서가 죽고 나면 단검으로 변한 뒤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귀속 아이템이란 주인이 죽으면 하루에서 열흘 사이에 사라져 버리니까.
그동안은 햅쌀이가 던전에서 죽은 줄 알았기에 귀속 해제 아이템을 구해 둘 생각을 못 했다.
‘타이밍 좋게 암시장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온라인상의 아이템 거래 사이트나 오프라인 아이템 거래 시장에서는 매물로 잘 나오지도 않는 희귀 아이템. 분명 이곳에는 있을 것이다.
“햅쌀아, 잠깐 인벤토리에 들어갈래?”
삐유우.
“잠깐만. 5분 있다 꺼내 줄게.”
삐유.
햅쌀이는 여전히 가시를 삐죽 세운 채 전투 욕구로 괴로워했다. 무기 아이템이라 그런지 피 냄새를 맡으면 유독 못 참는 면이 있었다. 윤서는 햅쌀이를 인벤토리에 넣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거리 곳곳에 있는 암시장 측 직원에게 귀속 해제 아이템은 어디서 파냐고 묻자 바로 안내해 줬다. 귀속 해제 아이템의 성공 확률은 10%에 불과했기에 넉넉하게 스무 개 정도 구입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던전 내에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암시장도 열리고….
새삼스럽게 너무나 달라진 세상이다.
누군가는 과거에 머물러 있으나 누군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최근 들어 자꾸 느껴지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
권지한이 무기의 성능을 테스트하고 돌아왔다. 네 개가 전부 성공적이었고, 역시나 ‘삭풍’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얼굴은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짧게 담소를 나누고 일어나 아이템을 구경했다.
한 명은 <관측자의 검>, 한 명은 <가이아의 눈>을 가졌다. 뭔가 비밀이 있는 특별한 아이템은 100% 골라낼 수 있다는 뜻이다.
둘은 눈을 번뜩여 가면서 거리를 돌았고 성능 좋아 보이는 아이템 몇 개를 더 골라냈다.
“형, 혹시 아이템 만들어 봤어?”
“네?”
“아이템 제작 상자가 있네.”
쇼핑을 마치고 카페로 돌아가려 할 때 권지한이 멈춰 서며 뭔가를 가리켰다.
‘아이템 제작 상자’
등급: C급
이 상자에 크기에 맞는 물건을 넣으면 아이템이 되어서 나옵니다.
무겁게 들고 다니지 말고 인벤토리에 넣어 다니세요.
제작 가능한 아이템 수 1/1
자그마한 나무 상자였고, 안은 비어 있었다. 아이템화라는 건, 특별한 성능이 추가되는 게 아니라 단지 인벤토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 작은 상자라 기껏해야 돌멩이 정도가 들어갈 것 같았다.
생명의 신이 관심을 가집니다.
죽음의 신이 흥미를 보입니다.
“형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지? 한번 해 봐. 재미있어.”
권지한이 사비로 상자를 구입했다.
두 사람은 카페 테이블에 작은 상자를 올려 두고 뭘 넣을까 고민했다.
“진짜 작네. 형이 먹는 약 정도만 들어가겠다.”
“약이요?”
“넣어 봐. 아이템 만드는 것도 은근 재미있는 경험이야.”
윤서가 신경 안정제를 한 개 넣었다. 그러나 등급 이상이라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떴다.
“C급으로는 약 같은 건 안 되는구나. 어디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걸 넣어야 하나.”
삐유!
햅쌀이가 상자 주위를 돌면서 기웃거리더니 슬금슬금 상자 안에 들어갔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햅쌀이는 흥미를 잃지 않고 냄새를 맡거나 발톱으로 긁으며 상자를 괴롭혔다.
“아, 여기 딱 들어갈 만한 크기의 물건 있다.”
권지한이 오른쪽 귀에서 검은색 피어스를 한 개 빼서 윤서에게 건넸다. 그의 첫인상을 껄렁껄렁한 양아치로 보이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검은색 피어스.
그런데 본인이 넣지 않고 윤서에게 건넸다. 꼭 윤서가 경험해 봤으면 하는 듯했다.
윤서가 피어스를 넣자 햅쌀이가 관심을 표했다.
삐유.
“삼키면 안 돼. 나와. 햅쌀아.”
삐잉.
햅쌀이가 나오고 뚜껑을 닫자 상자 안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뚜껑을 다시 열자 아이템화된 피어스가 나왔다.
‘내면이 탄탄한 사람만 착용할 수 있는 검은색 피어스’
등급: C급
이 귀걸이는 사람의 겉모습을 껄렁껄렁하게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은 분명 탄탄할 거예요.
내구도 10/10
“뭐, 뭐. 무슨 이딴.”
아이템 이름과 설명을 보고 당황한 윤서가 말을 더듬었다.
생명의 신이 당신의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합니다.
죽음의 신이 이건 아픈 게 아니라 쪽팔린 거라고 말합니다.
권지한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템 네이밍에 제작자 의식의 영향이 크더라고. 형이 날 그렇게 좋게 봐 주고 있었다니…. 알고 있어서 놀랍진 않네. 음. 내가 좀 내면이 탄탄하긴 하지. 사실 몸도 탄탄해. 나는 탄탄한 연하남이지.”
“헛소리하지 마세요.”
“나는 헛소리도 탄탄하지.”
권지한이 탄탄한 헛소리를 하면서 피어스를 집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권지한은 조금 불안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한 그였지만 윤서 앞에서는 그동안 잘못한 것이 있기에 한없이 작아졌다….
“과연 내가 이 피어스를 잘 착용할 수 있을지 볼까?”
권지한은 불안함을 감추며 피어스를 오른쪽 귀에 착용했다. 피어스는 제자리에 돌아간 것처럼 귓불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권지한은 처음부터 확신했다는 듯이 우쭐댔다.
“이것 봐. 완전 잘 들어가는 거 봤지? 내가 이렇게 내면이 탄탄해요.”
윤서는 다시는 아이템 제작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윤서의 얼굴이 푹 익었다가 서서히 원래 색을 찾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던 권지한이 아, 하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정말 내면이 탄탄하지 않은 사람은 착용할 수 없는 건가? 내면이 탄탄한지 아닌지 가이아 시스템이 어떻게 판단해?”
“기준은 모르겠지만 알아서 판단하겠죠. 가이아 시스템은 이미 <해치>로도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있잖아요.”
“그건 그런 특성을 지닌 소환수고. 아이템은 없잖아.”
“있습니다. …제가 하나 가지고 있어요.”
권지한이 눈을 크게 떴다.
“형도 이런 조건형 아이템이 있어?”
“네.”
“어떤 조건인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효과가 적용되는 조건입니다.”
“와. 아이템이 그걸 어떻게 판단하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선함과 악함을 나누는 거야.”
“못 나눌 게 뭡니까. 보편적인 기준이 있잖아요. 남의 것을 빼앗는 건 악함. 남을 돕는 행위는 선함.”
“형이야 물론 보편적인 기준에서도 주관적인 기준에서도 선한 사람이지만, 사람 사는 건 대부분은 선과 악 딱 두 개로 나누기에는 애매한 부분 같아. 가난한 사람이 굶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쌀을 도둑질하면 그건 나쁜 게 되나. 부자가 실컷 나쁜 짓 하며 돈을 모으고는 기부를 했고, 그 기부가 가난한 사람 백 명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그건 선한 건가?”
“…….”
“대체 정답이란 게 있을까 싶어. 가이아가 아무리 상위 존재라고 해도,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해도 이런 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렇게 그때그때 융통성을 발휘해야만 하는 애매한 조건은 없어지는 게 맞다고 봐. 혹시 그거 엄청 좋은 아이템이야?”
“S급 아이템입니다.”
“오, 그럼 절대로 없어지면 안 되지. 역시 그런 아이템도 있어야지. 우리 형 같은 사람한테 들어가서 다행이야. 어떻게 또 하나 더 안 떨어지나?”
단번에 말을 바꾸는 권지한의 모습에 윤서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권지한은 아이템을 보여 달라고 하려다가 윤서가 생각에 잠긴 걸 보고 햅쌀이를 귀찮게 했다.
“햅쌀아. 여기 돌아다니면서 좋은 거 있으면 하나 물어 올래? S급 아이템은 S급 아이템을 알아볼 거야.”
삐유?
“이게 말 못 알아들은 척하네. 귀엽게.”
삐융.
생명의 신이 생각에 잠깁니다.
윤서는 순간 자신의 상태가 메시지로 나온 줄 알았다. 생명의 신과 마찬가지로 윤서 또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이런 애매한 조건이라도, 선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약자도 강자도 쓸 수 없고. 오직 선한 사람만.
만약 자신이 아이템 제작에 관여할 수 있다면 그런 아이템을 만들 것이다.
***
밤 9시가 되자 문을 닫는 판매상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윤서와 권지한이 있던 카페도 문을 닫았기에 둘은 광장으로 사용 중인 붕괴된 교차로로 향했다.
물건도 다 샀고, 구경할 만큼 구경 다 했고. 나갈 일만 기다리던 헌터들이 교차로에 모여 있었다. 박강도 저쪽에서 일행과 함께 있는 게 보였다. 윤서는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권지한과 윤서는 도롯가에 철푸덕 앉았다.
“여기는 본래 외계인들이 살던 도시였을까?”
“그렇다기보다는 게임 지형에 가깝겠죠. 우리가 여길 다 붕괴시키고 나간다 해도, 여기에 던전에 생기면 처음과 똑같은 상태가 되니까.”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다는 우주론이 생각나네.”
윤서는 그런 우주론은 처음 들어 봤다.
“우리의 현실은 시뮬레이션이 아니겠지만 이 프록시마 b는 시뮬레이션이라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 시뮬레이션을 거쳐 간 외계인들이 우리 말고도 있었을까?”
권지한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던전에서는 지구처럼 하늘에 항상 하나의 태양이 떠 있거나 하나의 달이 떠 있지는 않는다. 태양은 때에 따라 두 개까지 떠오르기도 하고 달은 대체로 세 개가 떠오른다. 지금의 밤하늘에도 달이 세 개 떠 있었다.
“그렇지 않을까요. 우주엔 인류 말고도 지적 생명체가 무한히 있을 테니까.”
“만나고 싶기도 하고, 안 만나고 싶기도 해.”
윤서가 의외라는 듯 권지한을 바라봤다.
당연히 만나고 싶어 할 줄 알았다. 호승심 가득한 S급 헌터인 그는 얼른 외계인이든 뭐든 만나 이 가이아 시스템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