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4)화(134/195)
#122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던 거 아닙니까? 가이아 시스템을….”
가이아 시스템을 정복하겠다고 말했잖아요.
말을 끝맺지는 않았지만 알아들었는지 권지한이 씩 미소지었다.
“그 생각은 변함없어. 그냥 우리처럼 테스트 대상이 된 존재들을 만나면 기분이 묘할 것 같아서 그래.”
확실히 그렇긴 할 것 같았다.
윤서는 이미 만나기라도 한 듯이 기분이 묘해져서 입을 닫았다.
“형, 기분 별로면 햅쌀이 배 만져. 되게 말랑말랑하다. 본래 고슴도치가 이런가?”
권지한이 햅쌀이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배를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말랑거렸다. 햅쌀이는 권지한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윤서도 저 뱃살 감촉이 얼마나 말랑거리는지 알아서 손을 내밀었다. 만지작거리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권지한의 긴 손가락과 제 손가락이 닿자 윤서는 햅쌀이 말랑 배의 또 다른 용도를 발견했다.
“손가락 왜 이렇게 차?”
권지한이 윤서의 손가락을 덥석 붙잡았다. 윤서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았어? 아니면 지금 춥나. 왜 차갑지.”
“그쪽 손이 뜨거운 거예요.”
“아아, 내 손은 뜨겁고 형 손은 차가우니까 어쩔 수 없다. 손잡고 있어야겠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권지한을 흘겼다. 권지한은 뻔뻔한 말과는 달리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대놓고 얽혀 들어왔다. 권지한의 손은 손가락 마디가 굵고, 단단했으며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퍼졌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손은 차갑고 권지한의 손은 뜨거우니까 손잡고 있을 수밖에.
권지한과 윤서는 그렇게 서로의 손을 쥔 채 대화를 계속했다. 던전과 우주, 가이아 시스템과 관련한 심오한 이야기부터 맛집 줄 서기 유언을 들어줘야 하는데 다음 맛집은 어디로 갈 것인지, 김치찌개 식당에도 얼른 가고 싶다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처럼 가호 신들도 조용하고, 햅쌀이도 새근새근 잘만 자서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눴다.
***
‘세인 스테이시’가 아이템 ‘시스템 확성기’를 사용합니다.
제15회 암시장이 종료되었습니다! 현재 보스 몬스터를 교차로로 끌어오는 중입니다. 출구 포탈이 교차로에 생길 예정이니 고객님들은 모두 교차로로 모여 주세요!
마침내 자정이 되었다. 권지한과 윤서는 이미 교차로였기에 이동하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는 세인 스테이시가 직접 잡나요?”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대부분 암시장 측 헌터가 잡는데, 가끔 흥분한 고객이 처치할 때도 있나 보더라고. 뭐 누가 처치하든 여기 모인 이들에겐 미미한 경험치이니 큰 상관은 없지.”
크아아아!
몬스터가 우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암시장 헌터들의 유인으로 쿵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보스 몬스터는 두꺼운 가죽에, 육중한 몸통, 긴 혀를 가진 외뿔 도마뱀이었다. D급 보스 몬스터는 잡몹 수준이었기에 윤서나 권지한은 긴장하지 않았다.
‘세인 스테이시’가 아이템 ‘시스템 확성기’를 사용합니다.
5초 후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겠습니다. 출구 포탈 위치는 교차로입니다. 방문해 주신 고객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암시장도 꼭 찾아 주세요!
‘세인 스테이시’가 아이템 ‘시스템 확성기’를 사용합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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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랄프 스테이시 주니어’가 스킬 <광화 융합>을 사용합니다.
‘아리엔디엔드’가 스킬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합니다.
콰앙!
공격 스킬과 실드과 만나 D급 던전에는 과한 폭발이 발생했다. 윤서는 ‘시스템 확성기’의 꽤 비싼 액수를 생각하면서 암시장이 돈을 많이 버는구나, 한가롭게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다. 거센 후폭풍에 윤서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권지한이 벌떡 일어나 윤서의 앞에 섰다.
‘권지한’이 스킬 <타락한 영웅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크게 펼쳐진 검은 날개가 흙먼지로부터 윤서를 보호했다.
교차로가 엉망이 되고 사람들은 당황스러웠다.
“뭐, 뭐야. 누가 실드를 사용했어?”
“누가 보스 몬스터를 보호했다! 누가 공격을 막았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소음 속에서 윤서는 흙먼지를 탈탈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윳! 삐윳!
잘 자고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깨버린 햅쌀이가 짜증을 내면서 권지한의 가슴을 발로 투닥거렸다.
“형, 어디 안 다쳤어?”
“…저한테 어디 안 다쳤냐고 물은 겁니까, 지금?”
“응.”
“안 다쳤습니다. 권지한 헌터는?”
“다행이다. 나도 멀쩡해.”
윤서가 권지한의 옆에 섰다. 윤서가 안 다쳤다고 말했음에도 권지한은 윤서의 머리끝부터 발끝부터를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권지한은 이미 전투 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그 손목은 왜 그래? 멍든 거 같은데.”
“아.”
윤서가 손목을 들었다. 멍은 안 들 줄 알았는데 조금 푸르스름해져 있었다.
“이거 아까 그쪽이 붙잡은 손목이잖아요.”
“…….”
충격받은 듯 권지한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윤서는 혀를 차고는 주위를 살폈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보스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보스 몬스터 앞에는 검은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린 헌터들 다섯 명이 마치 보스 몬스터를 보호하듯이 서 있었고, 암시장 주최 헌터들은 그들과 대치 중이었다.
“너희들은 뭐냐! 당장 그 앞에서 나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보스 몬스터를 보호한다.”
외국인인 듯했는데 공용어나 마찬가지인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지금 네놈들이 무슨 정신 나간 발언을 하고 있는지 알아? 이제 곧 던전이 폭발한다고.”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인원 611명 : 폭발까지 3시간
3시간이면 얼른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디서 온 미친놈들인지는 몰라도 다쳐도 책임 안 집니다!”
‘랄프 스테이시 주니어’가 스킬 <핵융합>을 사용합니다.
‘아리엔디엔드’가 스킬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합니다.
‘로 빌라오 포우’가 스킬 <검은 방패>를 사용합니다.
콰아앙. 다시 한번 큰 폭발이 일었다.
스킬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합니다.
윤서는 자다 일어난 햅쌀이가 더 짜증 내지 않도록 그들의 주위에만 실드를 펼쳤다.
검은 로브 헌터들은 이번엔 실드를 펼치는 데서 끝내지 않았다. 그들은 공격 스킬을 쏟아부어서 암시장 주최 측과 그 뒤의 헌터들을 공격했다. 여기 모인 헌터 중에는 고위 헌터도 많으며, 그들이 실드를 펼쳐 줬기에 크게 당하는 이들은 없었다.
주최와 검은 로브의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주최는 아무래도 살인을 피하려다 보니 자연히 공격이 약해졌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은 자신들보다는 보스 몬스터를 보호하는 데에 집중했다. 자신들이야 얼마든지 다쳐도 상관없는 식이었다.
고객 중 한 명이 버럭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들은 어디 단체에서 나왔습니까? 사냥꾼 조직? 바라는 게 뭐요?”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종말?”
“우리는 이곳에 들어온 대던전 공략 헌터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종말을 위하여!”
“미친….”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윤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지한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권지한 또한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가이아 시스템은 시간 내에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지 못하면 실패로 간주하고, 던전은 ‘폭발’ 혹은 ‘범람’을 일으킨 뒤 소멸한다. 이 던전이라는 폴더 안의 파일을 전체 삭제하는 것처럼 내부에 있는 이들은 어떤 방어할 수단도 없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저들의 저항은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권지한과 조미르라는 S급 헌터도 있으니까.
“어이, 저 자식 중에 두 명 아리엔디엔드랑 로 빌라오잖아.”
“알아?”
“저 새끼들 본래 ‘가이아교’ 사제들이었는데 갈수록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느니, 인류는 없는 게 낫다느니 이상한 사상을 주장해서 퇴출당했어. 그리고 뭔가 ‘갤럭사이아’인가 이상한 이름의 교단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손님 중 누군가 말했다. 여기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할 각성자는 없었다.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 인류는 죽어야 한다…! 지금까지 몇 번의 리셋 기회를 놓쳐 버렸지. 이번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된다. 전 우주가 인류의 죽음을 바라며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은 사이비 광신도라는 게 까발려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개소리 연설을 시작했다.
“어이, 스테이시! 저 새끼들 그냥 죽여 버려. 까딱하다가 우리 전부 다 죽게 생겼다고.”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너희들과 함께 희생할 것이다. 오점이 사라진 새로운 우주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죽음은 숭고한-.”
윤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인류 도감>을 사용했다.
한 명은 A급, 다른 이들은 C급 헌터들이었는데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윤서는 권지한에게 손짓했다. 권지한이 가까이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형, 왜?”
“가운데 서 있는 검은 로브는 미국 헌터로, 신 리벤저 지원자입니다. 인터넷에서 봤어요.”
“…그래?”
생명의 신이 남은 시간을 확인하라고 말합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인원 611명 : 폭발까지 3시간
권지한도 생명의 신에게 같은 메시지를 받았는지 힐끔 허공을 쳐다보고는 인벤토리에서 ‘삭풍’을 꺼냈다.
“일단 정리할 테니까 나가서 얘기하자.”
“자폭하려 들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분명 자폭하려 들겠지. 하지만 시도할 수 없을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