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5)화(135/195)
#123
권지한이 윤서에게 햅쌀이를 건넸다. 햅쌀이는 언제든 단검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근처 헌터들은 권지한을 알아보고 언제 나서나 힐끔거리던 차였다. 권지한이 새로 산 검을 뽑은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자 그를 가운데 두고 헌터들이 자리를 내 줬다. 홍해 갈라지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인류는 가이아의 오점이며 우주의 티끌이다. 가이아 시스템과 스킬, 던전, 몬스터. 모두 인류 청소를 위해 나타난 것이다! 10년 전 인류 말살에 실패한 우주 신께서 이제 다시 청소를 하려 하시니 우리는 우주를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할 것이다!”
광신도들도 권지한을 발견했을 테지만 보스 몬스터 보호와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비뚤어진 신념이지만 저 의지만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념과 의지, 숭고한 희생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지한’이 스킬 <먹이사슬>을 사용합니다.
“허억.”
“흐익…!”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털썩, 털썩 주저앉더니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들뿐 아니라 암시장 측 헌터들도 덜덜 떨면서 무릎 꿇었다.
어떤 거대한 두려움이 다가오는 기분일 터였다.
저 종말론자들은 분명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살을 각오하고 앞에 섰으니까. 그러나 <먹이사슬>의 힘은 그런 각오를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신념과 의지, 각오, 그 어떤 본능보다도 위에 있는 것.
거스르겠다는 마음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먹이사슬>의 힘이었다.
권지한은 바짝 엎드린 광신교도들을 지나쳐, 인간들과 똑같이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는 보스 몬스터에게 다가갔다. ‘삭풍의 검’이 저항할 의지조차 없는 보스 몬스터를 향해 휘둘러지고 곧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떴다.
그제야 <먹이사슬> 스킬의 효과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숨을 가쁘게 내쉬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지배됐던 정신이 아직도 풀려나지 않았는지, <먹이사슬>에 직격타를 당했던 검은 로브들은 한동안 정신 차리지 못했다.
삐유.
‘존재하는 넋’조차 겁먹고 윤서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이제야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 대단한 스킬이야. S급 스킬로 등급 업 하면 나한테도 효과가 있을까?’
윤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권지한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
암시장을 나온 둘은 포탈 스톤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암시장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 보도되지 않았으나 이제 곧 속보가 뜨기 시작할 것이다. 두 사람은 유준철을 깨워서 알려야 하나 했다가 출근하면 그때 유준철에게 얘기하기로 했다.
“잠깐, 형. 이거 가져가.”
헤어지기 전 권지한이 윤서를 돌려세우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윤서가 얼결에 받아 들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그것은 바로 연고였다.
가이아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오직 인류의 기술로 만든 연고.
“아까 내가 너무 힘줘서 잡았지. 미안. 이거 바르고 얼른 나아.”
이건 대체 또 언제 샀단 말인가?
윤서는 바람 빠진 숨을 내뱉었다.
“필요 없어요. 이미 다 나았-.”
윤서가 손목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집어넣었다. 푸르스름한 멍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쪽팔렸다. 나이 때문인가.
“이것 봐. 진짜 속상해. 왜 자꾸 형한테 잘못만 하지. 앞으로는 내가 좀 더 조심할게.”
권지한이 불쑥 윤서의 손목을 쥐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가락으로 멍 자국을 문지르기까지 했다. 윤서는 정말 힘을 준다면 권지한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녀석 앞에서 약해 보이긴 싫지만, 걱정받는 건 나름 괜찮은 기분이었다.
***
이튿날, 평균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이른 오전 석영 길드장 집무실에 세 명이 모였다.
윤서와 권지한은 암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고, 이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앞으로의 일정이 일부 수정되었다.
“갤럭사이아라는 사이비 교도들은 앞으로도 대던전 공략 멤버들을 죽이기 위해 테러를 저지를 것이고, 어떻게든 공략을 방해하려고 일을 벌일 겁니다. 각 길드마다 대던전을 대비하여 포션과 스킬 쿨 타임 해소 아이템 등을 준비 중인 걸로 아는데 연락해서 보안에 유의하라고 하세요.”
“예.”
“신 리벤저 후보 중에 사이비 교도가 더 있을 겁니다. 미친놈들이 대던전에 진입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미리 솎아 놔야 합니다. 아직 리스트는 확정되지 않았죠?”
“그제 마감하고 지금은 연산 작업 중이라 아직 확정된 이들은 몇 없습니다. 우선 500명 정도로 도출한 뒤 이들 대상으로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군요.”
이번 주 중으로 최종 명단을 완성하려고 했는데 사이비 교도 골라내는 과정이 추가되면서 모든 일정이 일주일씩 미뤄졌다. 이건 컴퓨터만 돌려서 되는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한테 심문 스킬을 사용해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S급 자폭 아이템의 최근 거래 내역도 파악하세요. 대던전에서 다 같이 죽겠다고 자폭하면 곤란해집니다. 갤럭사이아 교단 말고도 종말론을 믿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다수 존재하는 걸로 아는데, 미리 파악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할 일이 많군요.”
종교계를 건드린다거나 사상 검증을 한다거나.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언론이 헌터계를 박살 내 버릴 듯이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석영이 워낙 꽉 잡고 있기 때문에 외국보다는 헌터계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은 석영이 도맡아 해야만 했다.
유준철은 대던전 공략 예정 멤버임에도 개인 트레이닝 할 시간은 꿈도 못 꿨다.
“지한아, 일단 언플부터 해 둬야겠다. 네 SNS에 암시장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올리는 게 좋겠어.”
“알았어. 갤럭사이아가 무조건 악의 축인 것처럼 쓰면 되는 거지?”
“너무 노골적으로 적지는 말고.”
권지한이 알아들었다는 듯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 없이 다다다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윤서의 핸드폰에 지잉- 알람이 왔다. 권지한의 SNS 업뎃 알림이었다.
JIHAN_S
오늘 던전에서 갤럭사이아라는 단체의 테러가 있었습니다. 갤럭사이아는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교로, 그들이 행하는 일은 종교 활동이 아닌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들 중에는 신 리벤저로 지원한 헌터도 있었기에, 지원자 리스트를 전면 재검토할 것을 헌터 연맹에 요청합니다.
꽤 강한 어조의 메시지였다.
“이제 대충 끝났군요. 그럼 훈련하러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두 사람이 일어나려고 하자 유준철이 얼른 붙잡았다. 두 사람의 본론은 끝났으나 유준철의 본론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실 두 분이 암시장에 들어간 사이 전남에 제한 시간이 9월 30일까지인 S급 폭발 타입 레드 던전이 발생했습니다. 일단 15일에 퍼펙트가 들어가기로 했고요.”
윤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S급 레드면 퍼펙트만으로는….”
“예, 그렇죠. 윤서 씨는 이번 주말에 그레이스 길드장의 예지를 참관하셔야 하니까… 권지한, 네가 들어갈 테냐?”
권지한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가야지, 뭐……. 선택권 없잖아.”
간다고는 대답하는데 엄청나게 떨떠름하고 탐탁지 않은 말투였다. 가기 싫다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유준철은 이렇게 대놓고 던전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권지한은 처음 봐서 조금 놀랐다.
그때 윤서가 나섰다.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윤서 씨의 마음은 이해하나 그레이스 길드장의 스킬은 쿨타임 포션이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아서 대던전 진입 전에는 이번 주말 말고는 기회가 없습니다.”
검은 던전의 진입 조건에 대해 물어볼 예정인 이번 계시에는 ‘선택된 자’ 한 명은 반드시 참관해야 했다.
“계시 시간이 한국 기준으로 일요일 밤이죠. 수요일에 진입하니까… 충분하네요.”
“……네?”
“마침 갤럭사이아로 세상이 시끄러울 테니 오히려 잘됐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야, 너는 또 왜 그러냐?”
유준철이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권지한의 얼굴을 보고 해괴한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권지한은 언제 뚱했냐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화에는 그 어떤 좋은 점도 없었는데 왜 저렇게 즐겁게 웃고 있나. 드디어 미친 건가?
그런 의문은 윤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윤서가 눈썹을 찡그렸다.
“권지한 헌터, 사실 갤럭사이아였습니까? 왜 그렇게 싱글벙글이에요?”
“아아.”
권지한은 그제야 제 표정이 어땠는지를 자각했는지 손가락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하지만 웃음을 지우지도 않았다.
“웃을 때가 아니지, 참. 미안. 그런데 뭔가 윤서 형이 적극적인 게 기분이 좋아서.”
“…….”
“형이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게 뭔가 꼭.”
권지한은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니까 뭔가 이 세상이 평화롭도록 유지하려는 것 같고 막.”
“…….”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는 것 같고?”
“…….”
“미래를 향해 걷는 것 같은 그런 느낌?”
“…….”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걸 우리한테 물어보면 어쩌라는 거냐.”
유준철이 혀를 끌끌 찼다. 권지한은 팔짱을 끼고서는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윤서는 권지한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나아가려는 의지’라는 표현에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네가 뭔 말을 하는 건지는 나중에 정리되면 윤서 씨한테 직접 말해 주고. 윤서 씨, 정말 들어가실 겁니까?”
“네, 들어갈 거고, 계시도 참관할 겁니다. S급 레드 던전 최단 기록 정도면 사이비 단체는 관심 받지도 못하겠죠.”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농담으로 여길 텐데 윤서 씨라서, 이것 참. 말릴 수도 없군요. 정말로 가능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유준철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결국 의심보다는 믿는 쪽을 선택했는지 퍼펙트 매니저에게 권지한과 윤서의 참여 소식을 알렸다.
“아, 상태 이상 해소 포션을 몇 개 만들어놨습니다. 아이템 제작부에 들렀다 가시죠.”
“알겠습니다.”
석영 집무실을 나오는 순간까지도 권지한은 싱글벙글했다. 너무 기분 좋아 보여서 윤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오해를 한 것 같다고, 그냥, 세상이 멸망하면 유언 들어주기가 힘들어서 멸망하지 않게끔 하려던 것뿐이라는 변명을 차마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