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6)화(136/195)
17. 우주의 진실
#124
신 리벤저 명단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언론과 대중이 확정처럼 여기는 헌터들이 있었다. ‘퍼펙트’, ‘아테나’, ‘엔드리스’ 등 S급 옐로우 이상의 던전만 레이드가는 유명한 공격대. 그리고 SNS에 대놓고 신 리벤저 지원 의사를 밝힌 몇몇 헌터들. 그중에 홍의윤은 첫날 SNS에 글을 올린 후로 계속 신 리벤저 지원을 어필했고 나중에는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HELLHONNG
홍의윤으로 태어나
헬파이어로 자라고
신 리벤저가 되었다 –
이 홍의윤이 소속된 퍼펙트가 바로 가장 많은 이목이 쏠린 팀이었다. 물론 홍의윤 때문이 아니라 권지한과 서채윤 때문이다.
갤럭사이아 테러 사건이 있고 며칠 후 퍼펙트는 S급 레드 던전 공략에 나섰다. 석영에서는 권지한과 서채윤도 참여한다고 대대적으로 언론 보도를 했고, 세계 최강자 2인이 동반한 퍼펙트는 공략 기간 닷새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나왔다. 그에 대던전에 대한 대중의 자신감은 더욱 늘어났고, 이때를 틈타 멸망과 관련된 포교를 하려 했던 사이비 종교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렇게 훌륭한 성과를 내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윤서와 권지한은 던전을 클리어하자마자 아무도 모르게 유럽으로 떠났다. 세계 헌터 연맹 회장이나 유럽 헌터 협회장 등 고위직과의 약속은 따로 잡지 않았다. 윤서가 유럽까지 먼 거리를 온 건 그레이스의 예언 참관 그리고 라 비지나와 만나기 위함이니까.
에우로페 길드 본사는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나 예언자인 그레이스 길드장의 주 집무실은 호수가 있는 자작나무 숲 입구의 별장이었다. 윤서와 권지한이 포탈 스톤으로 별장 입구까지 이동하자 마중 나와 있던 그레이스와 에우로페 부길드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레이스는 윤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마침 정신이 맑으세요. 옛 친구가 올 줄 아셨나 봅니다.”
주어가 없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손수 별장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윤서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니 휠체어에 탄 채 벽난로 앞에서 멍하니 불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과거보다는 많이 말랐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서채윤은 나를 누나라고 불러라.’
16살이나 연상이면서 매번 누나라고 부르라고 서툰 한국말로 말해 오던 사람.
라 비지나.
그녀 역시 기척을 느꼈는지 휠체어 버튼을 눌러 각도를 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라 비지나 헌터.”
윤서가 먼저 인사했다.
“서채….”
라 비지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크게 뜨여진 눈, 살짝 벌려진 입술. 담담했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1203명이 들어가서 단둘만 살아남았다.
라 비지나와 서채윤, 대던전 생존자 두 명.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눈빛으로 모든 얘기를 전하려는 것처럼. 혹은 말하지 않아도 전부 알 수 있다는 것처럼.
그사이 권지한과 그레이스도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해후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를 죽이고 의자에 앉았다.
윤서 또한 라 비지나 앞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윤서가 막 입술을 떼려는데, 그새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라 비지나가 먼저 선수 쳤다.
“너는 10년 만인데도 변한 게 없군. 어제 보고 또 보는 것 같다.”
“라 비지나 헌터는 많이 변했습니다.”
“좀 그렇지.”
“네, 한국말이 많이 늘었어요. 이제 누나라고 안 해도 되죠?”
“…누나는 내가 생각해도 과했다. 인정한다.”
라 비지나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윤서는 일단 해야 할 일부터 했다.
“계약 해제하겠습니다.”
스킬 <확신의 저울>을 사용합니다.
윤서는 인벤토리에서 ‘<확신의 저울> 전용 계약서’를 꺼냈다. 라 비지나와의 서채윤 정체 발설 금지 계약서였다. 두 사람이 계약을 맺은 시기는 대던전을 나와 병원에서였다. 나란히 특실에 입원해 있을 때 윤서가 계약을 요구했고 라 비지나는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라 비지나’와의 계약을 해제하겠습니까?
계약 해제에는 상호 동의가 필요합니다.
윤서는 바로 동의했다. 라 비지나에게는 ‘윤서’와의 계약을 해제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라 비지나도 동의하자 푸른 빛이 퍼져 나가면서 계약이 해제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후, 이제 서채윤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군.”
“적당히 조절하세요. 정체는 들키지 않도록.”
“내가 얘기할 상대는 여기 그레이스밖에 없네. 그보다 ‘넋’은 잘 받아 갔는가?”
“네, 여기.”
윤서가 점퍼 주머니로 손을 쏙 집어넣더니 새근새근 잘 자고 있던 작은 새를 꺼냈다.
삐유.
햅쌀이가 신경질 내며 일어났다가 라 비지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삐유? 삐유!
“오랜만이로군.”
삐이. 삐이이이.
하얀 새가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라 비지나 주위를 뱅뱅 돌았다. 라 비지나가 가냘픈 손을 들자 햅쌀이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위에 착지했다. 라 비지나는 새를 소중하게 감싸 쥐고서 손가락으로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름이 햅쌀이었던가.”
“햅쌀이 맞아요.”
“햅쌀아. 누나라고 불러라.”
삐이.
햅쌀이가 서럽게 울면서 동그란 몸을 파닥거렸다. 라 비지나는 작은 새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흐릿한 눈동자에 따스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저는 햅쌀이가 죽은 줄 알았어요. 대체 왜 이제야 준 겁니까?”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대던전 소식을 듣고 불현듯 생각났지. 하마터면 서채윤이 대던전에 무기 없이 들어가게 할 뻔했으니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닙니다. 제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먼저였는데 죄송하네요.”
“고맙다니?”
“제가 기절한 사이 햅쌀이를 챙겨 줬잖아요.”
“이강진이 챙겼다. 이걸 가지고 나가라고 했지.”
“…네?”
“네가 기절했으니 나 보고 가지고 나가라고 했다.”
“강진이 형이….”
윤서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이강진은 분명 윤서가 기억하는 최후까지 살아 있었다. 마지막 보스를 해치운 뒤 나타난 검은 포탈. ‘조건 불일치’라는 이유로 포탈이 닫히고 이강진과 대화까지 했었다.
‘나도 봤어. <가이아의 눈>으로 전부 봤어. 내가 설명할 테니까 너는 좀 쉬어.’
‘다 괜찮을 거야. 이제 좀 쉬어. 나 못 믿어?’
그때는 이미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여서 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최종 보스는 사라졌고 출구 포탈이 나타났기에 윤서는 이강진에게 모든 걸 맡기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강진은 없었다. 윤서 외에 다른 생존자들… 마크 파심과 가리스 로미오, 라 비지나는 아직 마력 고갈을 앓고 있어서 이강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태재식이 서채윤의 정체를 숨겨 주고 있었으나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들킬 확률이 높아지므로 윤서는 생존자들과 서채윤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윤서는 처리해야 할 유언들을 정리하면서 생존 리벤저들이 마력 고갈을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대던전과 그곳에서 죽은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이강진의 최후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래는 윤서가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생존자 중 두 명은 자살했고 한 명도 자살 시도를 반복하다가 이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강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출구가 나타나고, 검은 포탈은 사라졌는데 왜 나오지 못했는지.
그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그날의 진실을 알려 줄 사람이 있었다. 윤서는 침착하게 물었다.
“라 비지나 헌터. 강진이 형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나오질 못한 거예요?”
“으음…. 머리가 아프군.”
“…갑자기요? 지금까지 잘만 대화해 놓고서?”
“지금까지 대화하느라 무리를 한 모양이다. 머리가 지끈거려.”
“햅쌀이 돌려주세요.”
“하지만 서채윤의 부탁이라면 이 극심한 두통을 어떻게든 견뎌 내 보도록 하지.”
라 비지나는 귀여운 작은 새를 더욱 소중하게 감싸 쥐고서는 말했다.
“검은 포탈이 사라진 후 이강진은 내게 ‘존재하는 넋’과 너를 맡겼다. 너는 기절한 상태였고. 그리고 우리에게 얼른 나가라고 했지.”
“…….”
“내가 당신은 나가지 않느냐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채윤이를 데리고 나가세요.’”
“그 일이라는 게 뭡니까? 검은 포탈과 관련된 건가요?”
“모른다. 나는 너를 업고서 바로 빠져나갔다. 그곳에 1분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라 비지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고 다른 이들이 포탈 앞을 기다렸으나 이강진은 나오지 않았다더군.”
“…….”
“서채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나는 더는 몰라. 우리는 그때 모두 마력 고갈 상태였고, 다들 혼란스러웠다.”
라 비지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햅쌀이가 라 비지나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만하세요. 머리가 아프신가 봐요.”
제삼자로서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스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라 비지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걱정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약은 언제 드셨어요?”
“한 시간 전에.”
“그럼 더 먹지는 말고. 안에 들어가서 쉬세요.”
“엄마도 같이 들어가자.”
그레이스를 엄마라고 부르는 라 비지나의 말에 윤서는 너무 놀라서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