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7)화(137/195)
#125
“네, 같이 가요.”
“나 분명히 악몽을 꿀 거야.”
“제가 옆에 같이 누울게요.”
“엄마, 나 자장가 불러 줄 거야?”
“그럼요.”
“그래. 올라가자.”
그레이스는 윤서를 흘깃했다. 윤서가 흔들리는 눈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이스는 라 비지나의 휠체어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2층에 침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햅쌀이는 오랜만에 만난 라 비지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지 그녀를 따라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왔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목격하니 충격이 심했다.
라 비지나는 그곳에서 이강진과 더불어 리벤저가 크게 의지하던 이였다….
담담한 얼굴로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하고는 했고. 감정 동요가 크지 않으면서도 실력도 정신력도 강했기에 많은 이가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게 지긋지긋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의지가 되기보다는 의지를 하고 싶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걸까. 그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외국어를 사용하며 보냈기에 모국어도 잊고서 말이다.
“형.”
슬픈 상념에 젖은 윤서에게 권지한이 다가왔다. 햅쌀이를 정수리에 올린 권지한이 아까 그레이스가 라 비지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윤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서의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봤다.
“형은 약 언제 먹었어?”
“반나절 전에 먹었습니다. 지금은 딱히 약이 필요한 상태는 아닙니다.”
“정말? 머리 안 아파?”
“네.”
권지한은 심각한 얼굴로 윤서의 표정을 관찰했다. 미간에 만들어진 주름만 보면 아픈 사람은 오히려 권지한이었다. 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저 약한 사람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사람을 보고 그딴 표정 하지 마세요.”
“내가 어떤 표정인데?”
“곧 떨어질 마지막 잎새를 보는 얼굴입니다.”
설마…. 하며 권지한이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자기가 그런 표정이었는지도 몰랐다는 듯이.
권지한은 묘한 눈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곧 표정을 바꿨다. 평상시의 시니컬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의자를 끌어와 윤서의 옆에 앉았다.
“형 약 먹는 횟수 조금 줄어든 것 같아. 좋은 현상이겠지?”
“나쁜 현상은 아니겠죠. 그것보다 그쪽 생각엔 어떻습니까?”
“어……? 음…. 너무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
“네?”
“라 비지나 헌터가 그곳에서…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이니까 나도… 형을 알고부터 느끼는 게 많아. 나는 오만했고… 리벤저는, 그러니까 구 리벤저는… 정말 대단한 영웅들이었어.”
권지한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윤서는 권지한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제가 물어본 건 그 얘기가 아닌데요.”
“아니라고?”
“이강진 헌터가 말한 해야 할 일이란 건 검은 포탈과 관련된 일일까요?”
“아.”
권지한이 눈을 끔뻑끔뻑했다.
윤서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 가슴에 쌓였던 슬픔이 흩어지는 걸 느꼈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도 의문이다.
권지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글쎄…. 이미 사라진 포탈을 인간 하나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운데.”
“그럼 무슨 일이었을까요?”
“모르겠어. 이것도 오늘 계시에서 물어보라고 해야겠다.”
계시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세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도등수는 시간이 되면 공간 이동으로 곧장 호숫가에 도착할 것이다.
“계시에서 그런 것도 알려 줍니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들도….”
“일단 한번 물어보자는 거지. 형은 계시 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나?”
“네. 권지한 헌터는 본 적 있어요?”
“가이아의 가호를 받기 전 A급 예언자가 계시받는 건 두 번 봤는데, ‘선택된 자’가 된 이후로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참관한 적 없어. ‘선택된 자’ 두 명이 S급 예언자의 계시에 참관하는 건 가이아 시스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테니 분명 특별한 계시가 내려올 거야.”
다들 이렇게 얘기하니 윤서조차 이번 계시에 점점 기대가 되었다. 만약 특별한 계시가 없다면 크게 실망할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이강진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떴고, 검은 포탈은 사라졌고, 출구 포탈도 생겼는데 거기서 무슨 할 일이 있었을까?
사라진 검은 포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는 떠올릴 수 없었다.
***
시간이 되어 그레이스와 권지한, 윤서는 호숫가로 향했다. 햅쌀이는 별장에서 잠든 라 비지나의 곁을 지키게 했다.
이미 그곳에는 에우로페 길드원들과 도등수가 도착한 상태였다.
“서채윤 님, 오랜만입니다. 라 비지나 헌터는 잘 만나 봤습니까?”
도등수가 반가운 듯 인사하며 물었다. 에우로페 길드원들 또한 서채윤의 방문 소식을 미리 들었기 때문에 윤서는 치렁치렁한 로브를 걸치고 후드도 얼굴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뒤집어쓴 상태였다.
“네, 만나고 왔습니다….”
어째 라 비지나보다 도등수의 건강이 훨씬 안 좋아 보였다. 얼굴이 창백한 게 아니라 까매서 더 심각해 보였다.
“석영은 요즘… 바쁘죠?”
“말도 못 하죠…. 방금도 ‘선택된 자’에 대해 공표하고 연맹장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앞으로 가이아 스킬과 ‘선택된 자’ 검수 때문에 더욱 바빠지겠죠.”
<가이아의 마음>과 <가이아의 꿈>, <가이아의 그림자> 그리고 혹시 더 있을지 모르는 가이아 스킬 보유자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석영은 갤럭사이아 사건으로 일정이 늦춰진 데다가, 심문 스킬을 사상 검증에 이용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도록 ‘선택된 자’라는 특성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윤서와 권지한이 적막이 흐르는 별장에서 라 비지나와 만나고 계시에 대해 대화하는 사이 바깥은 특별한 특성 발표로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벌써 자기가 ‘선택된 자’라는 연락이 쇄도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백 명이 넘었어요. 미친 관종 새끼들도 있을 거고, 갤럭사이아 같은 사이비 교도들도 시스템 프로필을 속이고 어떻게든 명단에 끼려고 하겠죠. 이걸 다 간파해야 하는데 저희 인력만으로는 쉽지가 않습니다. 권지한 헌터의 <가이아의 눈>이 참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연락 주시면 권지한 헌터와 함께 가겠습니다. 어차피 유준철 길드장과 얘기 해놓은 상태입니다.”
“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역시 서채윤 님밖에 없습니다.”
감격한 도등수가 윤서의 손을 덥석 붙잡으려 했지만 권지한이 중간에서 손날로 쳐 내는 게 더 빨랐다. 도등수가 빨개진 손으로 히잉 거리며 물러났다. 정말 징그러웠다….
그사이 준비가 끝난 건지 에우로페 길드원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왔다. 그레이스가 로브를 부길드장에게 넘겼다.
스킬 <관측자의 검>을 사용합니다.
계시받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윤서는 과정이 궁금해서 미리 <관측자의 검>을 사용했다.
긴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S급 예언자가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그레이스 엘리시아’가 스킬 <호수의 예언>을 사용합니다.
그레이스의 신체에서 은은한 은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력은 푸른 호수를 맴돌며 더욱더 색이 진해졌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레이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듯 흔들렸고 수면에도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윤서가 작게 감탄했다. 그때 예상 못 한 메시지가 올라왔다.
<관측자의 검>과 <호수의 예언>이 상호 작용합니다.
호수의 신이 우주의 관측자를 발견합니다.
<호수의 예언>으로 관측 불가능한 우주와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가능해집니다.
던전 밖에서 가호 신과 관련된 메시지를 받는 경우는 스킬과 특성을 얻을 때 말고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메시지는 각성 이후 처음이었다.
평소에 존재감 없던 관측자가 나온 것도, ‘관측 불가능한 우주’라는 생소한 표현도 너무 놀라워서 로그가 하나하나 뜰 때마다 깜짝, 깜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형? 뭐야? 무슨 일이야?”
권지한이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바로 물어봤다. 윤서가 주변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제 스킬과 예언 스킬이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군요.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험한 건 아니겠지?”
“가호 신의 스킬이라 제게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신인데?”
“‘관측자’인데… 앞에 ‘우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네요.”
“허어. 우주의 관측자라니 이름만 봐도 존나 특별한 신 같잖아.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긴 했지. 형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니 형한테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고. 그런데 위험한 건 아니겠지?”
윤서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가 권지한이 두 번이나 같은 걸 묻자 어이가 없는 바람에 오히려 긴장이 풀어졌다.
“혹시 관측자라면…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그 관측은 아닙니까?”
두 사람 주위에 있던 도등수도 대화를 들었는지 끼어들었다.
“무슨 역학이요?”
“양자 역학….”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겠나? 윤서가 도등수를 노려봤다.
“그럴 수도 있겠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관측하기 전까지는 파동 상태에 불과하고, 관측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물질로써 존재한다는 양자 역학의 그 관측을 이뤄 내는 관측자. 그렇게 치면 가이아보다 더 대단한 신일지도 몰라.”
“권지한 헌터는 그런 것도 압니까? 정말 모르는 게 없군요.”
“응, 가이아 시스템 스킬 중에 물리학 관련한 게 많으니까 조금 공부했지.”
“준비된 영웅이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윤서가 권지한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도등수는 자신이 말을 꺼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윤서의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쉿. 다들 조용히 하세요.”
에우로페 길드원이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 대며 말했다. 도등수가 꾸벅 사과하고, 세 남자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의 몸은 천천히 호수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긴 금발이 수면 속으로 완전히 잠겼을 때 윤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가이아 시스템 알림!
스킬 <관측자의 검>이 발동 중입니다.
<관측자의 검>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호수의 예언>과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관측자의 검> 사용자가 ■■■■ 지역에서 튕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확률 23%. 계속하시겠습니까?
이 또한 처음 보는 유형의 메시지였다. 글자가 깨져 있는 것도 수상했다.
“이번엔 또 왜?”
권지한과 도등수가 궁금하다는 듯 윤서를 바라봤다. 에우로페 길드원이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윤서도 이번엔 입 닥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윤서는 자신에게 뜬 메시지를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도등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역을 튕겨 나간다니 지구를 벗어난다는 얘기일까요? 한번 수락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미쳤습니까? 이게 어떤 건지 알고 수락해요.”
“아니, 그…. 다시 안 올 기회인 것 같아서….”
윤서가 정색하자 도등수가 쭈굴해졌다.
“뭔지도 모르는데 수락하는 건 미친 짓이지. 거절해, 형.”
권지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윤서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권지한의 성격이라면 이런 특별한 상황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본인에게 뜬 메시지라면 당장 수락을 누르지 않았을까?
“형, 내 말 들었지? 거절하라고. 빨리.”
권지한이 초조한 듯 윤서의 팔을 붙잡았다. 윤서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시간 초과!
빨리 눌렀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