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3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39)화(139/195)
#127
기다리던 소식에 윤서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앞서가던 권지한도 뒤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회색 눈에 대번에 흥미가 깃들었다. 윤서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권지한은 성큼성큼 왔던 길을 돌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윤서는 권지한과는 달리 딱히 그 추론이 듣고 싶지 않았다.
흥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솔직히 계속 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계의 비밀. 가이아 시스템과 우주의 비밀을 어떻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자꾸 이런 걸 궁금해한다는 게 싫었다.
‘형이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게 꼭 …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는 것 같고.’
권지한은 왜 항상 맞는 말만 하는 걸까?
윤서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의지가 생기는 자신을 외면하고 싶었고,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 윤서 씨? 지금은 시간이 안 되시는 겁니까?
유준철이 대답을 재촉했다. 사실 오늘 저녁엔 권지한과 둘이서 3연던을 하기로 했는데 어차피 저녁이라 시간은 충분했다.
윤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권지한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만히 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취소하지 않은 채였다.
시니컬한 표정은 ‘난 절대로 혼자 들으러 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권지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윤서는 꺼졌던 전등에 빛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윤서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의 비밀 따위 파헤치고 싶지 않지만… 파헤쳐야만 한다. 윤서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저 녀석 때문에.
미래에 대한 호기심보다, 의지보다. 그리고 이 호기심과 의지를 외면하려는 마음보다 더 무겁고 중요한 것.
바로 권지한이었다.
대회의실로 가는 동안 윤서가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가만히 보던 권지한이 윤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표정이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긴. 생각할 거리투성인데. 대던전 공략, 관측자와의 대화, 선택된 자 검수 등등…. 아, 우리 형 머리 아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네. 이걸 다 어떻게 처리하냐.”
공교롭게도 권지한이 얘기한 고민거리 중에는 윤서가 지금 이렇게 무거운 얼굴로 고민 중인 원인이 없었다. 물론 그것들 또한 복잡한 문제들이나… 대던전 공략법은 윤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관측자와의 대화는 알아 봤자 상관없는 일이며, 선택된 자 검수는 권지한과 함께 시스템 프로필을 읽는 것으로 간단히 끝날 문제였다.
윤서의 머리를 가득 메운 것은 그레이스 엘리시아가 이번에 받은 계시였다.
윤서가 관측자와 대화를 하는 동안 그레이스도 계시를 받았다.
간 섭 불 가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검은 포탈로 혼자 들어가는 건 이번에도 동일하며, 추가질문 ‘검은 포탈에 진입 조건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런 계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간섭 불가’는 각성자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을 때 내려오는 답변이었다.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으나 계시는 보여 줬는데…. 그레이스는 전과 동일한 광경을 봤다.
누군가 단 한 명이 검은 던전에 들어가는 모습.
“응?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네. 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 거야?”
“…그레이스 헌터의 예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아. 검은 포탈 진입 조건을 알려 줄 수 없다는 거?”
“아뇨.”
“속 터지려고 하는데 대체 뭐가 우리 형 예쁜 얼굴을 이렇게 심각하게 구겨 놓은 건지 좀 빨리 말해 주라.”
검은 포탈에 혼자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윤서의 최대 고민거리다.
왜냐하면… 인류는 검은 던전 공략으로 ‘그 작전’을 세워놨으니까. 이론상으로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작전.
그 작전대로라면 권지한과 윤서 두 사람이 검은 던전에 들어가는 모습이 계시에 나타나야 했다. 그러나 이번 계시에서도 검은 포탈에 들어가는 이는 한 명이라고 하니 윤서는 이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미도 모를 관측자의 말들보다 이 사실이 윤서에게는 더 중요하고 무거웠다.
“아, 형.”
윤서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하자 권지한이 포효했다.
그렇게 눈치 빠른 놈이 왜 이 고민은 눈치채지 못하나 싶어서 조금 뚱해진 윤서는 그냥 무시했다.
둘은 곧 대회의실에 도착했다. 안에는 유준철과 도등수 단둘만 있었다.
삐유!
권지한의 정수리 위에 있던 햅쌀이가 포르르 날아가 유준철과 도등수를 빙글빙글 돌더니 그들의 앞에 철푸덕 앉았다.
“오셨습니까.”
도등수가 손가락으로 햅쌀이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인사를 빠르게 주고받은 후 유준철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건 아직 의견일 뿐이고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저희가 보기엔 가장 그럴듯합니다.”
“말씀하세요.”
유준철이 테이블 가운데에 홀로그램 장치를 켰다.
지구와 태양계, 은하수….
광활한 우주가 펼쳐졌다. 햅쌀이가 삐유, 하면서 홀로그램 속으로 뛰어들었다.
유준철이 입을 열었다.
“우주는 아주 빠른 속도로 가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
가장 깊은 어둠, 어긋남의 영역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 우주의 수호자, 별의 자격 박탈….
사람들은 그 애매모호한 단어들을 현대의 물리학을 통해 해석했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그것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에 따라 빛이 도달하지 못할 만큼 아주 먼 곳에 있는 천체는 절대로 관측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 우주의 끝에 어떤 천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으므로 지구는 그 천체를 절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인류는 빛이 도달해서 관측할 수 있는 범위를 ‘관측 가능한 우주’라고 칭했다. 인류가 흔히 말하는 ‘우주’라는 건 바로 관측 가능한 우주를 뜻하는 것이다.
이때의 범위는 어떤 특정 기준점에 따라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지구를 기준점으로 둔 관측 가능한 우주와 프록시마 b를 기준으로 둔 관측 가능한 우주는 서로 많은 범위를 공유하지만 결코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처럼.
“여기까지는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윤서 씨. 우주가 아주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면 그 어떤 기준점과도 빛이 닿는 범위를 공유하지 않는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이미 우주의 바깥에는 어떤 기준에서도 빛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있는 겁니다.”
“그런 이론도 있긴 하지.”
권지한이 동의했다. 도등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
윤서는 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청순한 눈망울이었지만 세 사람은 홀로그램의 새까만 영역을 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바깥, 어떤 빛도 없는 곳. 그곳이 가이아 시스템이 말한 ‘가장 깊은 어둠’이고 관측자가 말한 ‘어긋남의 영역’인 겁니다. ‘어둠으로 가는 길목’은 윤서 씨가 다녀온 우주 바깥과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관측자를 비롯한 가이아 시스템의 가호 신들은 그 경계를 지키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겠죠.”
“무엇으로부터?”
“어긋남으로부터.”
“어긋남이 대체 뭔데?”
권지한이 물었다.
유준철은 윤서를 의식해서 말을 높여서 설명했다.
“저희는 이 어긋남이 일종의 버그가 아닐까 합니다. 우주 바깥에 있던 것이 영역이 넓어져서 관측할 수 있는 세계로 건너왔을 때 어긋남이 일어나고, 그때 일종의 버그, 에러 현상이 발생하는 거죠. 이 현상이 어떤 종류일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고요. ‘선택된 자’ 입수 메시지와 검은 포탈이 나타났을 때 나타난 메시지 모두 무언가와 싸워서 평화를 지켜 내야 한다고 언급했던 걸 생각하면 인류의 최종의 적은 그 ‘어긋남’이라는 무언가일 겁니다. 버그를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버그를 저지할 능력이 없다면 자격이 박탈된다는 거군.”
권지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윤서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별의 자격이 박탈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10년 전 가이아 시스템은 지구의 자격을 시험했다. 그러나 검은 포탈 공략은커녕 진입조차 실패했고, 이에 두 번째 테스트를 실시하기로 한 거라면 이번이 마지막 테스트인 건지도 모른다.
윤서는 문득 대던전이 다시 나타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듣자마자 이렇게 생각했다.
‘검은 포탈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기회를 줄 테니까 대던전에 들어가라고 가이아 시스템은 말하고 있는 걸까.’
막연하게… 무의식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된 자’로서 해내야 하는 숙명을.
그러나 아직도 불분명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어긋남이라는 게 대체 어떤 종류의 적인지.
왜 수많은 별 중에서 하필 지구가 이런 시험을 받게 된 것인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면 관측자가 있던 경계에서 싸움을 하게 되는 건지.
‘설마 지구를 벗어나서 싸우게 되진 않겠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그럼 쿠키는 어떻게 구워? 러닝은 어떻게 해? 참돔 낚시는 어떻게 하냐고!
윤서는 점점 스케일 커지는 이야기에 머리가 아프려고 했다.
‘그냥 유언 때문에 죽는 걸 잠깐 미뤘을 뿐인데.’
약병을 꺼내 알약 두 개를 삼키는 윤서에게 권지한이 물병을 내밀며 말했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 신들이 계속 말했잖아. 그대와 함께할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신들이 믿을 만한 존재인지 의문이군요. 이게 정말 테스트였다면 오히려 증오스럽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평화를 위한 테스트였다는 말로 끝내려고 하면 화가 치솟고 말이죠.”
“확실히 그건 좀 그렇네. 신들 만나면 머리 한 대라도 후려갈길까.”
신성 모독적인 권지한의 말에 도등수가 피식 웃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