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4)화(14/195)
#12
마지막 멤버가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했다. 그는 바로 합병식 날 어마어마한 포스를 내뿜으며 등장하신 화심이었다. 세상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화심 역시 오자마자 간파 스킬을 사용했다.
‘화심’이 스킬 <염화의 눈>을 사용합니다.
‘화심’이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홍의윤과 같은 이름의 간파 스킬이었다. 재미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심심해하던 홍의윤이 잘 만났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며 막 화심에게 시비를 털려는 그때, 석영 직원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모두 모이셨군요. 이제 두 팀으로 나누겠습니다. 라스빈 헌터님, 김경태 헌터님, 라스트원 헌터님은 나가서 왼쪽 회의실로 가시고, 나머지 분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윤서는 박수빈과 찢어지는 게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왜 한쪽은 세 명, 한쪽은 일곱 명이지? 너무 수상해서 애써 표정 관리하는 윤서와 달리 박수빈은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윤서 씨, 우리 헤어지네요. 알죠? 낙엽 이미지에 먹칠하면 희원 씨가 윤서 씨가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하는 한복을 갖고 쳐들어올지도 몰라요.”
“저 한복 안 싫어합니다.”
“괜찮아요. 한국인이라도 싫어할 수 있죠.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겼지만. 우리 민족이 목숨 걸고 지켜 온 민족의 얼이지만.”
“안 싫어한다고요.”
“그럼 가 볼게요. 파이팅.”
윤서가 발끈했지만, 박수빈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윤서는 오늘 당장 개량 한복을 구매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원은 헌터 일곱 명을 복도를 꺾어서 있는 커다란 문 앞으로 안내했다.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길드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길드장? 석영의 유준철 길드장이요?”
“예, 유준철 길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와….”
이정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다른 이들도 눈을 움찔하거나 입을 벌렸다. 세계 1위 길드의 길드장과의 대면이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윤서 혼자만 낭패감으로 표정이 자꾸 침울해졌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문이 활짝 열렸다. 홍의윤이 호승심 가득한 얼굴로 가장 앞서서 들어갔다.
대기실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 중앙 소파에 안경 쓴 창백한 남자, 유준철 길드장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윤서를 비롯한 일곱 명의 눈길이 일제히 향한 이는 유준철이 아니라 그 옆에 앉은 사람이었다.
잘생겼으나 어딘지 서늘한 분위기. 체격은 크고 단단해도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남자.
실질적으로 현재 세계 1위라고 평가받는 S급 헌터 권지한이었다.
***
권지한, 현재 나이 22세.
그는 6년 전인 16세에 막 각성하자마자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던 몬스터 무리를 압도적으로 학살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전투계 헌터들의 주 업무는 던전 클리어와 범람 몬스터 처리로, 권지한은 대개 던전 공략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스킬에 대한 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인터넷에 널리 퍼진 동영상으로만 본다면, 그의 스킬은 그야말로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파괴적인 종류였다.
몬스터를 외부에서 무형의 힘으로 쥐어짜 터뜨리기도 하고, 내부에서부터 부풀어 오르게 한 뒤 폭발시키기도 했으며, 어떤 힘으로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선 검으로 도륙 내기도 했으니 같은 편인 게 다행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그 잔혹한 학살을 보면서 권지한의 스킬이 염력과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권지한은 어떤 답변도 내주지 않았으므로 추측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세상 그 누구도 권지한의 프로필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각성자들이 시스템 프로필을 숨기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이중 삼중으로 방어해도 세상에 널린 게 간파 스킬과 아이템들이니까. S급 헌터들조차 시스템 프로필의 일부만 숨기는 데에 그쳤고, 이 경우 대개 자신의 고유 스킬을 보호했다.
그러나 권지한은 아니었다. 그 어떤 스킬과 아이템을 사용해도, [‘권지한’의 시스템 프로필을 읽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떴고, 감히 저에게 간파 스킬을 사용했다는 걸 눈치챈 권지한의 화만 부를 뿐이었다.
유일하게 알려진 한 가지 사실은 권지한이 스스로 밝힌 ‘포식자’라는 특성이었다.
시스템 프로필과는 반대로 신상 명세는 잘 알려져 있었다. 어렸을 때 한동네에서 살아온 유준철과 형 동생 하는 사이고, 성격은 시니컬하면서도 호전적이다. 싸움을 좋아해서 같은 S급들에게 여러 번 싸움을 걸었다는 소문도 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으며 형제는 없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S급 헌터, 그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가장 경외하는 최강의 헌터 권지한.
그 홍의윤조차 긴장하여 바짝 얼어붙은 가운데 유준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석영 길드장 유준철입니다. 이쪽은 다 아시겠지만, 권지한 헌터입니다. 일단 들어와 앉으시지요.”
가장 앞에 있던 홍의윤이 주춤거리다가 한 발짝 내밀었다. 그리고 비상 경고라도 들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권지한을 쳐다봤다. 권지한은 ‘뭐’ 하는 뻔뻔하고도 건방진 얼굴로 홍의윤을 응시했다. 홍의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헌터들이 제각기 홍의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방에 들어가 앉았다. 암향과 함께 들어간 윤서는 앞선 사람들이 왜 놀랐는지 알았다.
‘권지한’이 스킬 <명왕의 밤>을 사용 중입니다.
명왕이 지배하는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당신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명왕의 밤…? 무슨 스킬이지?’
스킬 이름만 봐도 어떤 스킬인지 알 수 있는 게 있는가 하면, 전혀 짐작이 안 되는 종류도 있는데 <명왕의 밤>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뭔가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니 윤서는 대던전의 보스와 마주쳤을 때 말고는 본 적 없는 메시지였다.
‘시스템 프로필을 봐야 하나.’
윤서는 역시 그 권지한은 처음부터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남은 자리에 앉았다.
유준철이 안경을 한 번 추어올린 뒤 입을 열었다.
“저희는 여러분을 이미 아는데, 여러분끼리는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
“안 하셨다면 짧게 자기소개 시간이라도 갖지요.”
“그딴 걸, 왜…. 어차피 간파 스킬로 다 아는데.”
홍의윤이 권지한의 눈치를 보며 미약하게 반항했다. 그러나 이정인이 조금 긴장한 낯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하면서 반항은 무로 돌아갔다.
“이정인입니다. 헌터 네임은 페이지, 스물여덟 살. 각성한 지는 6년 됐습니다.”
“윤서입니다. 비전투계로 헌터 네임은 없으며 스물아홉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짤막하게 소개한 윤서 다음으로는 더벅머리의 차례였다.
“저, 저는 헌터 네임은 암향, 이, 이름은 박강입니다. 나이는 스물아홉…. A급 저, 전투계입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박강까지 소개를 마치자 유준철이 환기를 시키려는 듯 손뼉을 한 번 맞부딪쳤다.
“모두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지금 많이 당황스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각 길드에서 몇 명 차출돼서 몇 달만 강남에 다니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에 권지한 헌터까지 만나게 됐으니까요. 게다가 모인 멤버를 보면 범상치 않은 게 확 느껴지지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준철이 테이블 중앙의 장치를 건드렸다. 홀로그램이 펼쳐져 나왔다.
가장 첫 줄에 굵은 고딕체로 ‘퍼펙트’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사실 우리 석영은 세계 최강 헌터들로 공략 팀을 결성하겠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세워 왔습니다. 이 계획을 위해 국내외 A급 헌터들은 물론 S급 헌터들도 대거 영입했고, 여러 테스트를 통해 스물다섯 명의 정예 헌터들을 선별한 상태입니다. 정예 팀은 이미 작년부터 활동 중이나 아직 언론에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물론 이 퍼펙트라는 팀에는 권지한 헌터도 속해 있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윤서는 초조한 심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간신히 참았다. 유준철 외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헌터를 발굴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수많은 헌터의 프로필을 검토했고, 눈여겨보기 시작하니 진흙 속에 묻힌 원석들이 보이더군요. 우리 석영은 여러분들을 찾아냈습니다. 아마 자신은 원석이 아니라는 말은 못 할 겁니다. 여러분 중에는 진짜 실력을 숨긴 사람이 있다는 걸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 잠깐. 그게 무슨.”
홍의윤이 벌떡 일어났다가 권지한의 회색 눈이 스윽 향하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윤서는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진짜 실력을 숨겼다니? 이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 내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섣불리 반응하지 말자.
윤서가 입술을 깨무는 그때 이정인이 손을 들었다.
“자유롭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페이지 헌터.”
“이정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길드장님.”
이정인이 빙긋 웃었다. 양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길드장님의 발언이 저희를 감시해 왔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오해 마세요. 공들인 감시가 아니더라도 여러분 같은 원석은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이정인 헌터도 소문이 무성했지요.”
“제 소문이라면.”
“이정인 헌터가 소속된 세정 길드의 던전 공략 팀은 팀원 구성이 B급으로만 다섯 명이죠. 그 적은 인원만으로 클리어한 B급 레드 던전이 5년간 여덟 곳이나 되더군요. 아무리 팀원들이 비밀을 지킨다 해도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들키지 않기를 바랐습니까?”
“하아….”
“이정인 헌터의 고유 스킬 중 <꼭두각시 인형>은 정말 흥미로운 스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졌습니다. 이것 참 민망하네요.”
스킬명이 나오자 이정인이 바로 백기를 들었다. 길드장이 푸르스름한 입술 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