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4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40)화(140/195)
#128
유준철은 홀로그램에 몇 개의 글을 띄웠다. 다 외국어로 된 글이라 윤서는 읽지 못했다.
“그 테스트라는 것 또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테스트라기보다는 절차라는 쪽도 많고요. 예를 들어 개발 도상국 같은 거죠. 개발 도상국이 어느 수준의 1인당 GDP를 달성하면 선진국 반열에 오릅니다. 그러면 개발 도상국으로서 받고 있던 혜택은 없어지고 탄소 발생 수치라든지 각종 규제를 받게 되죠. 이처럼 우주의 관점에서 어느 수준의 문명 발달을 이룩한 지구도 선진행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차례가 왔다는 겁니다.”
“선진행성….”
“이와 달리 어긋남이라는 미지의 적이 지구에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에 급히 지구의 힘을 키워 주고 있는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면 보호라고 볼 수도 있겠네.”
권지한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암흑류 현상이나 우리 은하 주위에 있다는 거대 인력체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데. 이게 사실은 어긋남이고, 가호 신들이 우리와 어긋남이 가까워지는 걸 막아 주고 있었던 거라면….”
“…….”
“어긋남이 존재하는 우주 바깥의 차원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차원과 가까워졌고, 그에 따른 바이러스 때문에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몬스터들을 상대할 힘을 주기 위해 가이아 시스템이 급히 등장했다…. 이건가.”
“그래. 추측일 뿐이지만.”
“몬스터와 가이아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긴 했지만, 몬스터 등장이 더 빠르긴 했으니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네 생각에도 이 이론이 그럴싸하지?”
“흥미롭지만 아직 의문스러운 구석이 많아.”
권지한이 손가락으로 데스크를 톡톡 두드렸다.
“관측 가능한 우주 끝에 있는 천체들도 우리가 보는 모습은 138억 년에서 140억 년 전의 모습이잖아. 우주의 유아기 단계라는 걸 생각했을 때 지금 이 시각 그곳은 우리 우주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평범하게 별이 있고 행성이 있고 지적생명체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의 물리 법칙으로는 볼 수 없을 뿐 또 다른 우주가 형성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
권지한의 말을 시작으로 더더욱 윤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파동 상태와 상호 작용, 결 어긋남, 우주복사배경, 엔트로피, 열역학 뭔 법칙….
“……을 고려하면 어긋남의 영역이 지구 바로 옆에 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 윤서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준철이 의견을 물어 오길래 윤서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우주가 동그라미 모양이란 말인가요?”
“…….”
“…….”
열띤 토론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어 버린 윤서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약을 먹었는데도 머리가 아팠다.
“저는 이런 얘기에는 관심 없으니 이만 빠지겠습니다. 계속 대화 나누세요.”
“아, 형. 어디 가게.”
윤서가 일어나자 권지한이 의자를 급히 밀면서 따라 일어났다. 그러자 햅쌀이도 삐유, 울면서 권지한의 정수리 위로 파닥파닥 날아 앉았다.
“좀 더 얘기하자. 대화하다 보면 답이 나올 거야.”
“저는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야. 형 있어야 해. 형이 직접 듣고 왔잖아.”
“됐습니다. 똑똑한 분들이 알아서 해 주세요.”
“아.”
권지한이 윤서의 팔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권지한은 고민하는 것처럼 여러 복잡한 천체물리학 이론들과 다양한 우주 모습이 띄워진 홀로그램을 쳐다보고, 어정쩡하게 일어선 채 눈을 끔뻑끔뻑하는 유준철과 도등수를 쳐다봤다가 마지막으로 윤서에게 돌아왔다.
“트레이닝 룸 가는 거지? 형 혼자 우락부락해지게 둘 순 없지. 근육은 무조건 내가 더 많아야 해.”
“대체 그건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리고 지금은 트레이닝 안 해요.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러브 인 한강’을 보면서 좀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안 그래도 내일 선택된 자 검수할 거 생각하면 머리 아픈데, 제 머리로는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도 볼래. 40화 보자. 이남주가 감자김치찌개를 완성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전율이 일어.”
대회의실을 나가려는 윤서의 뒤를 권지한이 따랐다.
“지한아, 이렇게 그냥 가겠다고?”
유준철이 무척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윤서 형. 잠깐만.”
윤서는 권지한의 손을 떨쳐 내려면 떨쳐 낼 수 있겠지만 잡혀 준 채 권지한을 쳐다봤다. 권지한은 윤서의 갈색 눈을 보고서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는, 그를 붙잡은 채로 유준철에게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설득력 있다는 거잖아. 일단 이 정도만 알고 있을게.”
“그, 그렇긴 하지만 다른 주장들도 알고 있는 게 낫지 않겠냐. 대화하다 보면 또 번뜩이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유준철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권지한이 가방끈이 길진 않아도 이런 대화를 피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이런 주제에 관심 없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가이아 시스템의 비밀, 우주의 비밀에 대해서 누구보다 알고 싶어 하는 녀석이다. 권지한과 유준철은 둘이서 취하지도 않는 술을 기울이면서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초끈 이론 따위에 대해 주절거리고는 했다.
유준철이 아는 권지한이라면, 지금 이 주제에 의견을 제시하면서 깊이 파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윤서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자기도 같이 자리를 피해 버린다니?
권지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몰라.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내 주겠지. 우린 간다.”
권지한이 윤서의 팔을 붙잡은 채 대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은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
“…….”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유준철과 도등수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유준철은 그야말로 황망하다는 표정이었고, 먼저 입을 뗀 이는 도등수였다.
“실망하지 마세요. 솔직히 권지한 헌터도 22살에 불과하잖습니까. 이런 대화는 싫을 만하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싫어하지 않았는데.”
“그게 이상했던 거죠, 길드장님. 싫어하는 게 정상이고요.”
“…….”
도등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유준철은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싫어하는 게 정상이다.
유준철은 권지한의 어린 시절을 알았다. 건방지지만 어머니 말은 잘 듣던 어린놈. 요리나 집안일은 잘해도 공부에는 흥미가 없던 아이다. 각성 전에도 학업에는 딱히 뜻이 없던 녀석이 갑자기 우주에 흥미가 생겼을 리가 없다.
강자로서의 책임감.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복잡하고 싫은 주제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강자로서의 책임감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윤서를 따라가고 있었다.
우주의 진리는 버려 두고 고작 이상한 김치찌개 드라마를 보겠다고….
“…….”
유준철은 권지한을 붙잡지 않기로 했다.
그는 왠지 이런 변화를 앞으로도 겪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나쁜 변화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