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4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44)화(144/195)
#131
세계 헌터 연맹과 석영 길드는 신 리벤저로 300명이 선출되었다, 까지만 발표했고 이름까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본인이 신 리벤저인지 아닌지에 대한 공개 여부는 각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목숨을 건 레이드인 만큼 대부분이 자신이 신 리벤저임을 공개했지만 윤서처럼 밝히지 않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소중한 이들이 이미 죽어서 알릴 필요가 없는 이들이 그러했다.
이제 이 신 리벤저 300명이 함께 모여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데, 이런 대인원을 모두 수용할 만한 조직은 세상에 석영 길드밖에 없었다. 각양각색의 외양과 다양한 나이대의 헌터들이 한국에 입국해 석영 본사에 모였다. 그들은 서로 합을 합쳐 보고 스킬 조합도 하며 열정적으로 수련했다.
2주간 오직 대던전만을 대비하며 하드한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S급 던전들이 세계 여러 곳에, 꾸준히도 나타난 것이다. 마감 기한이 수 개월 남았지만 곧 대규모 전력 상실이 있으므로 대던전 진입 전에 최대한 정리하고 들어가야 했다.
A급 이하 헌터들은 트레이닝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여긴 유준철의 제안으로, 발생한 S급 던전들은 S급들이 정리하기로 했다. 총 세 팀이었다. 수재희와 알렉, 옐레나 등 S급들이 한 팀. 그리고 권지한이 한 팀, 서채윤이 한 팀. 권지한과 서채윤은… 각개 격파하기로 했다.
권지한은 S급 오렌지 던전 솔로 클리어 전적이 있지만 서채윤은 그런 기록이 없어서 처음엔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중엔 그런 걱정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권지한의 클리어 기록이 더 빨랐다가 나중엔 서채윤이 빨랐다가 권지한이 다시 앞질렀다가 서채윤이 역전했다가….
최종에는 S급 옐로우 던전 클리어 기록 45시간 30분으로 서채윤이 이겼다.
그렇게 며칠마다 두 명의 솔로 클리어 기사가 뉴스 창을 도배하니 이제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감 정도가 아니라 안전 불감증이 생겼는지 세계 주식 시장과 집값도 안정을 찾았다.
윤서 개인으로서도 S급 던전을 혼자 세 군데나 공략한 경험은 아주 값졌다. 권지한도 경험치를 많이 얻어서 꽤나 레벨 업한 모양이었다.
퍼펙트 팀원들 또한 다른 신 리벤저와 함께 트레이닝 중이었는데, 그들은 다른 이들 앞에서 은근히 권지한, 서채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우리가 같이 S급 옐로우 갔을 때 말이야.’, ‘서채윤 헌터가 여기서 트레이닝했잖아.’, ‘아, 서채윤 헌터가 식사를 참 맛있게 드시더라고.’라면서 다들 들으라는 듯이 뻐겨 대고는 했다.
특히 홍의윤이 가장 심했다.
“아, 서채윤이 또 기록 세웠네. 권지한보다 1시간 앞섰어. 두 사람은 참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단 말이야. 물론 나는 서채윤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전혀 뜬금없는 맥락에 서채윤과의 친분을 집어넣었다.
“그 연주곡이 ‘왕벌의 비행’이었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쳐 줬어. 뭐, 들을 만하더라고. 그리고 우리는 같이 밥도 먹었지. 나는 서채윤의 전화번호도 알고 있지. 서채윤이 초코크랙쿠키도 만들어 줬어.”
이런 유치한 자랑에도 신 리벤저들은 우와아… 하면서 홍의윤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사실 서채윤과의 친분이라면 홍의윤보다는 깊을 박수빈은 그냥 한숨만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전투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A급 헌터들도 S급 네이비 이하 던전이 생기면 우르르 몰려가 클리어했다. 단 충분한 휴식을 위해 횟수가 많지는 않았다.
그렇게 트레이닝과 레이드를 반복하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
10월 13일.
대던전 진입 하루 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대던전 기자 회견을 열었다. 정식 기자 회견 이름은 ‘북극 S급 레드-블랙 2차 던전 기자 회견’이었다. 북극에는 레이드 관계자 외에는 어떤 체류도 허가하지 않을 예정이라 한국에서 기자 회견을 크게 하기로 한 것이다.
S급 헌터들을 포함해 총 33명만 매스컴 앞에 섰고, 취재진 외에 수많은 사람이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신 리벤저는 당연히 서채윤이었지만 윤서는 앞에 서지 않았다.
대신 권지한은 카메라 앞에 서기로 했다. 성격대로라면 시건방진 표정과 심드렁한 말투로 ‘아, 귀찮아. 이런 거 안 할래.’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또 한편 성격대로라면 카메라 앞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도 맞았다. 세상의 강자로서 마땅하게.
권지한은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고 결의 넘치는 목소리로 각오를 말했다. 모두를 안심시킬 만한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기자 회견 분위기는 초반에는 경건하고 엄숙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산만해졌다.
진행자가 마무리를 선언했을 때에는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서채윤은? 정말로 안 나온다는 거야?”
“어떻게 한 번을 안 나타나다니 너무 오만한 거 아닌가?”
“에이, 씨발. 서채윤 안 나올 거면 뭐 하러 기자 회견을 해.”
기자들은 서채윤이 기자 회견 후반에라도 등장하길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행자도, 성실하게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할 타이밍을 기다리던 헌터들도 당황했다. 대표단 중에는 홍의윤도 있었는데 그는 이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발끈할 기세였다.
“아, 아.”
그때 단상 위에 있던 권지한이 마이크를 툭툭 치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집중.”
“…….”
“바랍니다.”
권지한의 서늘한 시선이 기자들과 시민들에게 향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비각성자들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권지한은 군중의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모자를 쓴 채 지켜보는 윤서가 있었다. 모자챙으로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어떤 얼굴일지 짐작이 되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저 사람은 아직도 세상과 정의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찬 사람인데… 마치 온 세상이 서채윤의 환멸을 부추기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그랬지….’
아니, 한때도 아니다. 최근까지도 서채윤에게 구원을 맡겨 놓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더더욱… 세상이 더 이상 그에게 실수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건 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권지한은 단지 균열이 생겼을 윤서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권지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10년 전 저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아들과 대피소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리벤저가 결성되고, 소집되고, 대던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걸 어렴풋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사람들과 함께 박수 치면서 진입을 응원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불안했고, 얼마나 무서울까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늦잠 자고 일어나 친구들과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죠. 그다음 날은 반찬이 맛없어서 투정을 부렸고, 그다음 날은 몰래 밖으로 나가 새 옷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놀고, 먹고, 가끔 싸우고, 다시 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대던전이 클리어 되지 않자 어른들은 점점 불안해했습니다. 어린애들 놓고서 자살하는 어른들이 많아서 어린애들이 말리고 다녀야 했죠. 나중에 대던전이 클리어되었을 때 대피소의 많은 사람이 TV를 보며 원망을 쏟아 냈습니다. 왜 이제야 나오느냐 왜 늦장을 부리냐…. 그러다가 화면에 생존자의 모습이 나왔는데… 4명이더군요. 분명 1,203명이 들어갔는데. 엄청 커다란 탱크도 들어가고 전차도 들어갔는데… 4명만이.”
“…….”
“그때 TV 앞에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전율이 일었고, 슬펐고, 분노했고, 억울했고, 화가 났고, 동정했으며 감동했다가 다시 울분이 터졌습니다. 세상이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는데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서 한동안 웃지도 못했지. 사실 저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감정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거든.”
“…….”
“내일 300명이 대던전에 들어갑니다. 이들이 현실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여러분은 내가 대피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놀고, 먹고, 싸우며 일상 생활을 영위해 나가겠죠…. 그런 일상을 지키기 위해 지원한 300명입니다. 1,203명이 들어갔다가 단 4명만 나온 곳에 자진해서 들어가겠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단상 위의 헌터들도 말을 잃었다. TV 앞의 시청자들도 그럴 것이다.
권지한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두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당신들이 이들에게 해야 할 말은 서채윤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 채윤이 형한테도 실례고. 아무튼 이번엔 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말하세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다들 알고 있잖아요.”
권지한이 마이크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듣던 헌터들도 권지한을 따라서 허둥지둥 일어섰다. 본래 다 함께 인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는데 권지한이 성큼성큼 퇴장하는 바람에 진행자는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머지 헌터들도 무대를 따라 내려가려고 하는 그때 기자들 쪽에서 한 사람이 다급히 소리쳤다.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했어야 했던 말을 했다.
감사하다, 죄송하다, 잘 다녀와라, 모두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뒤따랐다.
“…….”
윤서는 구경꾼들의 맨 뒤에서 모자를 쓴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너도 소문 들어서 알겠지만 권지한 싸움광이거든.’
수개월 전 태재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싸움광이라고?
이렇게 말로 타이르는 싸움광이 어디 있어.
앞으로 누가 권지한 보고 싸움광이라고 하면 오늘 권지한처럼 말로 잘 타일러 봐야겠다.
돌아서는 윤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