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4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45)화(145/195)
#132
기자 회견을 마친 신 리벤저는 가족, 지인과 이별의 시간을 보낸 후 저녁에 포탈 스톤으로 석영의 북극 기지에 도착했다. 북극에도 던전이 종종 발생하는데 다른 나라들은 자기 나라 관리에 바빠서 석영이 만든 기지였다. 즉 북극의 던전을 관리하는 조직은 석영밖에 없었다.
레이드 헌터 300명에 관계자 100명까지 수백 명 정도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곳이라, 이곳에서 하룻밤 잔 후 이튿날 오전 10시 조용히 대던전에 진입할 예정이었다.
윤서는 권지한과 2인실에 머물렀다. 먼저 씻은 윤서는 권지한이 씻는 동안 침대 위에 누워 푸른 새 모습의 햅쌀이와 손가락 장난을 쳤다.
“내일부터 실컷 피 먹게 해 줄게.”
삐융.
“그때처럼 <관측자의 검>이랑 쌍검으로 싸울 건데 괜히 질투하면 안 돼.”
삥.
작은 새가 윤서의 손가락을 부리로 쪼기 위해 날개를 파닥거렸다. 윤서가 두 손가락을 내어 줄 듯 굴다가 다시 회수하고, 내어 줬다가 다시 가져가고를 반복하자 새는 토라진 듯이 삐융삐융 울었다.
실체가 단검인 걸 알아도 외양도 하는 행동도 이렇게 귀여우니까 그 끔찍한 곳에서 미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절대 죽지 않는 작은 동물이 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윤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12시간 후면… 용암 지대의 몬스터들과 한창 전투 중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던전 경험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윤서는 벌써 지긋지긋했다.
“아, 개운하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권지한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 윤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햅쌀이가 먼저 삐유, 삐유 울면서 권지한에게 날아갔다.
“나 지금 막 머리 감아서 축축해.”
권지한이 제 정수리에 앉으려는 햅쌀이를 손으로 감싸 쥐고는 윤서에게 다가와 윤서의 옆구리 위에 얹었다. 윤서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권지한은 하얀 가운을 입었는데 상체가 다 드러났다.
삐융삐융.
성질이 난 햅쌀이가 윤서의 허리를 쪼아 대는데 윤서는 권지한의 두껍고 견고한 상체를 대놓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권지한은 물기를 어느 정도 닦고 나서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지고는 윤서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북극인데 별로 안 춥네. 바로 근처에서 용암이 이글이글 끓는 느낌이야. 뜨거운 열기 때문에 대흉근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이렇게 심각하다, 형.”
“싫으면 가운을 여미든가요.”
“아니야. 마음껏 구경해.”
권지한이 가운을 더 열어젖혀서 윤서는 마음껏 구경했다. 딱 봐도 웬만한 칼은 박히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몸이었다. 자잘한 흉터들이 험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여 주고 있었다.
권지한은 느른하게 웃으며 윤서를 보다가 말했다.
“자기 전에 게임이나 한 판 뜰까?”
마침 최신형 컴퓨터 두 대가 있어서 하는 말이었다.
“미쳤습니까. 그 시간에 내일 공략 시뮬레이션이나 돌려요.”
“하라고 둔 컴퓨터인데 왜 이렇게 질색해? 한 판만 뜨자. 아직 밤도 깊어지려면 멀었잖아.”
“대던전 앞두고 긴장도 안 됩니까?”
“긴장 해소용이라고 말하면 게임 할 거야?”
“안 해요.”
“긴장 안 해서 심심풀이용이라고 말하면?”
“그래도 안 합니다. 심심하면 트레이닝 룸 가서 체력 단련하세요.”
“형의 나한테 정의롭다고 뭐라 하면 안 되는 것 같아. 대던전 전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체력 단련을 하다니 너무 성실하고 착실하잖아.”
윤서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거 정말 모욕적인 말이군요.”
“한 판 뜰래?”
윤서가 막 대답하려는 그때 복도를 달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수재희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형들, 아직 안 자죠? 들어가도 돼요?”
“들어오세요.”
윤서가 대답했다. 수재희가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사람들 모여서 신 리벤저 특집 방송 보는데 형들도 같이-.”
“방송이요?”
“…….”
“수재희 헌터?”
수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지더니 입술을 뻐끔거렸다.
수재희의 눈에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윤서와 거의 헐벗은 채 탄탄한 몸을 드러낸 권지한이 담겨 있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겁니까?”
“저는, 그, 그러니까, 그.”
“아, 수재희. 지금 막 형이랑 한 판 뜨려는 참이었는데.”
권지한이 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수재희는 이제 온몸이 빨개졌다.
“하, 하, 한 판 뜬다고요?”
“뭐 여러 판이 될 수도 있고.”
“여, 여러 판….”
윤서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한다고 말은 안 했는데요.”
“막 대답하려던 참이었잖아.”
“안 한다고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아, 혀엉. 대던전 들어가면 한동안 못 할 텐데 좀 하자아.”
권지한이 그 큰 몸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수재희는 거의 터지려고 했다.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정 원한다면.”
“아싸.”
“수재희 헌터.”
“네?”
수재희가 화들짝 놀랐다. 윤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온 김에 셋이 같이 할래요?”
“허억.”
“잘하는 사람 있으면 더 불러도 좋고요.”
“저, 전… 전… 형들 같은 더러운 어른이 아니에요!”
수재희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뛰쳐나갔다.
어쩐지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였다. 윤서가 눈을 깜빡이면서 권지한을 쳐다봤다.
더러운 어른이라니. 대던전 전날 게임을 한다니 실망한 걸까.
“쟤가 왜 저러죠?”
“몰라.”
권지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일어나 컴퓨터 두 대를 켰다.
윤서도 허리를 쪼고 있는 햅쌀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대던전에 들어가게 될 줄도 몰랐지만, 대던전 공략 전날에 게임을 하게 될 줄도 몰랐다.
하지만 긴장을 푸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윤서는 권지한에 대한 콩깍지가 상당히 낀 상태라, 권지한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제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10월 14일 9시 S급 레드-블랙 포탈이 나타났다.
북극 기지와 3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이미 기지에서 준비 중이던 신 리벤저와 관계자들은 바로 장소로 향했다.
수백 명의 도전자 앞에서 붉고 검은 포탈이 일렁였다. 그 검붉은 색은 앞에 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고 레드 포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음산했다.
세계 헌터 연맹, 석영 길드 등 여러 헌터 조직들이 빠르게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각 조직의 막사 안에서 수장들이 소속 리벤저들을 독려했다.
석영 소속 헌터들 또한 석영 막사 안에 모여 있었다. 300명 중 석영 소속은 98명이었다.
윤서는 포켓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얼굴에는 가면을 썼다. 석영 아이템 제작 부서에서 새로 옷과 가면을 만들어 줬는데, 옷은 피가 묻어도 저절로 증발하며 가면에는 음성 변조 기능이 달려 있었다
윤서가 권지한 옆에 서자 서채윤이 윤서라는 걸 아는 이들도, 서채윤이 윤서라는 걸 모르는 이들도 독려 중인 길드장이 아니라 서채윤을 힐끔거렸다.
‘가면 쓰길 잘했네.’
가면은 던전 안에 들어가면 벗을 예정이었는데 이 정도의 열렬한 시선이 계속되면 그냥 쓰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준철은 독려를 일찍 마무리하고 길드원들을 내보냈다. 자유시간을 얻은 신 리벤저들이 검붉은 포탈 앞에서 몸을 풀었다.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전화 통화를 했으며, 누군가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지막 인원 중에는 화심도 있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보는 듯한 아련한 눈이었다.
‘꼭 지원한 게 아니라 끌려온 것 같은데.’
막사 틈으로 살짝 본 윤서가 고개를 젓고는 막사를 닫았다. 시간이 될 때까지 막사 안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가 나가면 시선이 너무 많이 쏠리기 때문이었다.
윤서 말고도 권지한과 퍼펙트 팀원들 대부분이 막사 안에 있었다. 알렉과 도등수는 유준철과 대화 중이었고, 커플은 늘 그렇듯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며, 2팀 팀장과 박수빈은 전술을 검토하고 있었다.
다들 속으로는 긴장했어도 티는 안 내려는 모습이었는데 가장 어린 수재희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 있는 대로 티 내고 있었다.
“어우, 씨. 떨려. 미치겠네. 으아아아. 홍이 형. 형은 안 떨려?”
“던전 한두 번 가나. 왜 떨어.”
“짱 세다. 나 청심환 좀 갖다 줘.”
“그래. 여기 있다.”
“이거 요구르트인데?”
“아. 미안. 여기 있다.”
“형, 이거 박카스야.”
“아아, 그래. 여기 있다.”
“이거 페레로로쉐.”
“아아아, 여기 있다.”
“…….”
미니 자유 시간을 받은 수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박수빈이 짧게 웃고는 손수 청심환을 가져와서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던 홍의윤이 손을 덜덜 떨며 받자마자 얼른 삼켰다.
“윤서 씨도 갖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윤서는 청심환을 앞 포켓에 넣었다.
‘그렇게 크게 긴장은 안 되네.’
어제 게임을 해서일까?
대던전 포탈을 앞두고서도 공황 증세 같은 건 오지 않았고,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심심했다. 윤서는 허리춤의 단검을 매만지면서 햅쌀이를 동물로 변하게 할까 고민했다.
윤서를 가만히 지켜보던 권지한은 물은 필요 없겠다 싶어서 물병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형.”
권지한이 윤서를 불렀다.
“네.”
“낙엽 사람들한테는 인사했어?”
“어제 던전 공략으로 당분간 연락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찹쌀이한테는?”
“절전 모드 돌입하더군요.”
“그래. 그럼 나 형 프로필 읽어도 돼?”
“…….”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대화 중이던 알렉과 유준철, 도등수, 염장 떨던 커플, 청심환을 두 개째 삼키던 수재희와 홍의윤, 전술 토론 중이던 2팀 팀장과 박수빈….
모두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윤서는 현재 <거짓 기억>으로 시스템 프로필의 이름만 서채윤으로 바꾼 상태였다. 특성과 스킬은 사실 그대로라는 뜻이다.
다들 미친 듯이 보고 싶을 것이다.
서채윤의 진짜 프로필.
물어본 사람이 다른 놈이라면 표정을 구겼겠지만 권지한이라서 그러지 못했다.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어떻게 인상을 쓰겠는가.
윤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세요.”
“고마워.”
‘권지한’이 스킬 <가이아의 눈>을 사용합니다.
‘권지한’이 당신의 시스템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