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5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58)화(158/195)
#143
“지금 날 걱정하는 거라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니까 얼른 가서 보스 몬스터나 해치우고 오세요.”
“내 멋진 모습을 실물로 보여 주지 못해서 아쉬운데.”
“빨리 안 갑니까?”
“알았어.”
권지한이 제 머리 위에서 졸고 있는 햅쌀이를 감싸 쥐어 윤서의 손에 곱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하려나 했는데 이번엔 도등수와 수재희를 쳐다봤다.
“채윤이 형 잘 부탁해. 불안정하다 싶으면 약부터 먹이고 아니면 그냥 기절시켜.”
“형, 걱정 마세요. 제가 잘 기절시킬게요.”
아니, 약부터 먹이라잖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길드 대화 걸고.”
“네.”
윤서는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동쪽 팀에 합류하는 박수빈에게 말했다.
“권지한 헌터가 불안정하다 싶으면 목뒤를 내리쳐서 기절시키세요.”
“아….”
A급 힐러 박수빈이 ‘제가요…?’ 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길드 대화 걸고요.”
“네….”
“형은 내가 걱정되면 나한테 당부를 하지 왜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그래?”
지금까지 실컷 다른 사람한테 당부했던 권지한이 툴툴댔다. 윤서는 이러다 동쪽 보스 몬스터가 이동해 버리겠다 싶어서 그냥 권지한이 원하는 말을 해 줬다. 조심히 다녀와라, 기다리겠다 등등. 권지한이 흡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드디어 장갑차에 올랐다. 반면 동행인들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죽음의 신이 ‘권지한’의 전투를 구경하고 싶어 합니다.
그럼 권지한의 가호 신이라도 되든가.
사실 윤서도 구경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 것이다.
윤서는 이참에 죽음의 신이 권지한의 가호 신이 되어 스킬 하나라도 더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늪지대의 보스 몬스터들은 짐승형이 아니다. 보라색 액체 괴물인데 엄청나게 거대한…. 고층빌딩만큼 거대하면서도 종잇장만큼 얇아질 수도 있는 형태가 자유로운 괴물. 보라색 점액질 덩어리를 내뿜는데 이게 마치 염산처럼 모든 걸 녹여 버리기 때문에 실드가 필수였다.
‘그래…. 실드가 필수인데.’
실드하면 서채윤인데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대던전에서는 마력량 15% 정도면 당연한 듯이 전투에 합류했는데….
현재 인원 : 301명
윤서가 숫자를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바깥에서 쾅, 콰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포, 포탄을 날렸나 봅니다. 걱정하지 말고 쉬고 계세요.”
윤서를 감시, 아니, 보호 중이던 퍼펙트 팀원이 말했다.
중앙 지역이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보다야 안전하지만 어쨌든 잡몹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실드 트랩으로는 내부에서 생성되는 독을 차단하지도 못해서 힐러들이 계속 정화해야 했다. 지금도 수재희와 옐레나, 도등수 그리고 많은 헌터들이 싸우고 있다. 수재희는 <장산범>과 <레메게톤>의 악마들을 소환했고, 옐레나는 <선더 스네이크>와 <아이스 스피어>로 적을 섬멸했다. 도등수는 지구에서 가지고 온 장갑차를 원격 조종해서 적을 향해 포탄을 날리는 중이었다.
마력 1610/9999
<딥 필드>를 한 번 더 사용하는 건 아직은 무리고….
윤서는 쓸 수 있는 스킬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마력 포션 뒤에 꺼내 놨습니다. 필요하신 분들 가져가요!”
“마력 회복 스킬 사용 1분 전입니다. 모이세요!”
캠핑카 밖이 시끄러웠다.
서채윤이 치유 내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만에 하나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서채윤이 구해 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빨리 회복하자….’
윤서는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
박수빈
보스 발견
알렉 스위치
보스 발견
두 팀이 거의 동시에 보스를 발견했다. 윤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1페이즈 내에서 끝낼 예정이니 2~3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그사이에 마지막 보스도 발견하면 좋을 텐데.
윤서는 바깥이 소강상태인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시려고요?”
“바깥 상황 좀 보겠습니다.”
힐러가 서채윤을 졸졸 따라 나왔다.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실드 트랩은 대부분이 망가져 다시 수십 개를 꺼내 설치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헌터들 몰골이 죄다 피로에 젖어 있었다. 몬스터들은 팔팔한 놈들이 계속 밀려 들어오는데 헌터들은 그렇지가 않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윤서는 뭔가를 지시 중인 도등수를 발견하고 그에게 향했다.
“아, 서채윤 헌터. 마력은 얼마나 회복했습니까?”
“20% 넘었습니다.”
“회복 속도가 진짜 말도 못 하게 빠르네요. 다행입니다. 그래도 아직 마력 부족이니 좀 더 쉬세요.”
“부상자들은요?”
도등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두 명이 상태가 위중하고 스무 명이 운신이 어려울 정도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상태가 위중하다는 말에 윤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서가 부상자들이 쉬고 있는 막사를 바라보자 도등수가 한번 가 보시겠냐고 물었다. 윤서는 기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거길 왜 가.
갔다가 서채윤한테 유언을 남기고 죽으면 어쩌려고.
바쁜 도등수를 놓아주고 윤서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를 감시 겸 보호하던 헌터는 도등수가 잠시 빌려갔다.
피비린내 때문에 햅쌀이는 꺼내지 않았는데 절실하게 꺼내고 싶었다. 먼 곳에서 몬스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쉴 틈을 주지 않고 몰려들고 있었다.
‘아, 젠장.’
위중하다는 두 명이 자꾸 신경 쓰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건 허황된 꿈인 걸까? 여기까지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죽음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윤서는 절대로 그런 마음은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건 복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명도 죽어서는 안 돼요. 그러면 영원히 복수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패배한 거예요. 공략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실패입니다.’
대던전에 들어오기 전 윤서는 권지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이 대던전과 검은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죽어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이라도, 절대로.
바위에 가만히 앉아 상념에 잠긴 서채윤을 리벤저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윤서도 가면 속에서 지나가는 리벤저들을 힐끔거렸다. 이제 보니 화심도 여기에 있었다.
화심은 다친 곳은 없는 듯했고 차림새도 말끔했다. 화심 옆에는 <꼭두각시 인형>이라는 꽤 인상적인 스킬을 사용했던 임시 팀의 이정인도 있었는데, 이정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연신 포션을 들이켜고 있었다.
‘어디 다쳤나.’
윤서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끼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약병을 꺼내서 약 세 개를 삼킬 때까지 물병을 주는 손길은 없었다.
‘아.’
물 없이 약을 먹고 심장을 진정시키던 중 이정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정인은 서채윤이 윤서라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윤서는 괜히 찔렸다. 이정인은 벌떡 일어나 구십 도 각도로 인사했다. 윤서가 고개를 살짝 숙여서 받아 주자 이정인이 활짝 웃었다.
‘저도 좋아하는 헌터 있는데.’
‘당연히 서채윤이죠.’
과거의 대화가 떠오른 윤서는 왠지 양심이 따끔거렸다.
윤서는 화심과 이정인이 캠핑카로 돌아가고 나서도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김서해의 두 동생은 어떻게 됐을까. 박강은?
…인원수는 줄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서서히 모이고 있는 몬스터들이 괴성을 내질렀는데 아직 안전한 수준이라서 리벤저들은 일단 휴식을 취했다.
“형, 딱딱한 데 앉지 말고 여기 앉아요. 저 지한이 형한테 죽어요.”
수재희가 의자 두 개를 번쩍 들고 왔다. 윤서가 의자에 앉자 수재희가 모닥불을 피웠다.
현재 인원 : 301명
윤서는 습관적으로 인원수를 확인했다. 거의 10초에 한 번씩 확인하고 있었다.
두 팀은 보스와 맹렬한 전투 중일 것이다.
계속 이렇게 인원수에 변화가 없기를 바라는데 지척에서 리벤저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와이프가 만삭이라며?”
“내일이 출산 예정일이야. 우리 콩알이 태어나면 아빠가 얼마나 용감한 헌터인지 말해 줘야지. 참, 너는 내년에 결혼한다고 했지?”
“이거 이거, 나는 예비 신랑이고 그쪽은 예비 아빠였구만. 우리 예비 부인님 웨딩드레스 사진 볼래? 항상 이렇게 할머니의 유품인 브로치에 넣어 가지고 다니거든.”
“그래, 보여 줘. 그리고 내가 항상 아버지 유품인 회중시계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우리 콩알이 초음파 사진도 구경하고.”
…….
“어후, 씻어도 피 냄새가 안 사라져. 얼른 나가고 싶다. 넌 나가면 뭐할 거야?”
“보상금으로 우리 어머니 호강시켜 드려야지. 어렸을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 우리 삼 남매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몰라. 이제라도 효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너는?”
“나는 나가면 친구랑 화해하고 싶어. 오해가 쌓여서 앙금이 생긴 채 들어왔거든. 지금은 그 녀석에게 후련한 마음으로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봐, 괜찮아요?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괜찮습니다. 큭…. 이제 곧 우리 딸 생일인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죠.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오. 이 레이드만 끝나면 지구로 돌아가 그 녀석한테 고백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버텨야지.”
…….
아니…. 이렇게 연달아 사망 플래그를 파바박 꽂아 버린다고?
“형, 왜 그래요? 불안해요? 방금 약 먹은 거 아니에요?”
윤서가 갑자기 다리를 달달 떨자 수재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른 두 팀이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고 돌아오면 좋겠군요.”
“그러게요. 아, 맞다. 형.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요?”
“형이랑 같이 싸워서 영광이었어요.”
“…….”
“이곳에서 나가면 제가 한턱 쏠게요. 꼭 다 같이 살아남아요!”
수재희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10년 전 리벤저 중 웹소설을 엄청나게 읽던 효미 헌터로부터 수많은 사망 플래그를 들었던 윤서 혼자 속으로 욕설 섞인 고함을 내지를 뿐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쿨 타임 포션 드시고 모이십시오. 이제 슬슬 모인 몬스터를 해치워야 합니다.”
도등수가 실드 트랩 경계에서 헌터들을 소집했다. 대화하는 사이 몬스터들이 꽤 많이 몰린 탓이다. 수재희가 읏쌰, 하며 일어났다. 이번엔 윤서도 거들기 위해 일어서는 그때였다.
“……!”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어떤 불길한 존재감에 그대로 멈춰 선 윤서가 실드 바깥 저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