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6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62)화(162/195)
#146
그 단어를 알고부터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존재가 정말 있다면 좋겠다고. 기절한 후 일어나 보니 어느 먼치킨이 이 미로 지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0년 전 윤서는 이런 바람이 부질없는 망상이라는 걸 몇 번이나 절실하게 느꼈다.
이제 눈을 떠야지. 일어나서 세 번째 지형을 공략해야지. 도민이가 죽은 세 번째 지형. 수백 가지로 갈라진 미로를 헤매며 보스를 찾고 또 해치워야지….
“…….”
다시금 뺨에 간지러운 감각이 들었다.
생명의 신이 일어났다고 확신합니다.
죽음의 신이 왜 눈을 안 뜨는지 궁금해합니다.
생명의 신이 인간의 섬세하고 복잡미묘한 심정을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합니다.
죽음의 신이 생명의 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대개 ‘보는’ 종류가 많은데 이렇게 의식 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올 때도 있다.
윤서는 생명의 신과 죽음의 신이 싸우기 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이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형, 일어났어?”
시야가 온통 희뿌연 가운데 권지한의 잘생긴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윤서는 더없이 안도하며 눈을 깜박였다.
“일어났네. 마력 고갈로 기절하면 대충 이 시간쯤엔 일어나는구나.”
권지한이 낮은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은….”
“죽은 없고 일단 물부터 마셔.”
권지한이 윤서의 상체를 부축해서 뒤에 기대게 하고, 미지근한 물을 입가에 대어 줬다. 몇 모금 마신 후 윤서가 무심코 눈을 비비려고 하자 권지한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냥 시야 선명해지길 기다리면 안 돼? 우리 형 참을성이 없네.”
권지한은 윤서의 손을 덮고 있는 이불 아래로 고이 잘 넣어 줬다. 윤서는 잇지 못한 질문을 마저 이었다.
“죽은 사람은요?”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형만 죽을 뻔했지.”
“다친 사람은?”
“다들 포션이랑 치유 스킬로 열심히 낫고 있어. 형만 답 없이 기절해 있었지.”
“권지한 헌터는… 다친 곳 없고요?”
“너무 멀쩡해. 형만 다쳤다니까.”
권지한의 목소리는 막 깨어나서 멍한 윤서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냉기가 흘렀다. 윤서는 참지 않고 바로 물었다.
“저한테 화났습니까?”
“설마. 형이 일부러 마력 고갈 걸린 것도 아니고 일부러 기절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화를 내겠어. 형 다치게 놔둔 나한테 존나 열받았을 뿐이야.”
“…….”
“질문은 끝?”
권지한이 너무 화나 보여서 윤서는 일단 입술을 닫고 눈만 감았다 떴다. 몇 번 반복하자 시야가 선명해졌다.
이제 보니 권지한의 눈은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오랫동안 쉬지 못한 사람처럼.
“며칠이나 지났죠?”
“이틀.”
“그럼 지금은 미로 지대겠군요.”
“아니야.”
“네?”
“미로 지대 아니라고.”
“설마 늪지대의 보스를 아직 다 못 해치운 겁니까?”
“다 해치웠어.”
“그럼 미로 지대가 열렸을 텐데 왜….”
“형 몸 상태에 대해서는 안 궁금해?”
시비를 거는 듯한 뾰족한 말투에 윤서는 목과 어깨 근육을 움직여 보고 팔과 다리도 흔들어 봤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멀쩡하군요.”
“…….”
권지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이 녀석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화를 내고 있는 거지?’
권지한은 제대로 대답해 줄 마음도, 설명해 줄 마음도 없어 보였지만 윤서는 일단 물어봤다.
“왜 화가 난 겁니까?”
“형 다쳐서 나한테 화났다고 계속 말하고 있잖아.”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다가 다쳤잖아요. 약자가 다치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닙니까?”
억울해진 윤서가 묻자 권지한이 화를 삼키듯이 가슴을 길게 들썩거리고는 더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게 된 지 꽤 됐어.”
“…….”
윤서는 왠지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나쁜 의미의 철렁은 아니었고… 그냥 기분이 좀 술렁술렁했다.
“형은 저 사람들보다 강하지만 약하잖아. 저 사람들은 팔 부러져도 치유 스킬이랑 포션으로 바로 낫는 인간들인데 형은 다치면 그냥 다친 거잖아. 어떤 의미로는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형이 제일 보호가 시급하단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 그런 인간이 존나 강한 스킬 갖고 있어 가지고, 아, 씨. 또 짜증 나려고 하네. 나 화병 생긴 것 같아. 이거 광증인가? 광견병인가? 아, 열받아 뒈지겄네.”
“지금 서채윤 보고 약하다고 표현한 거예요?”
“치유 내성 있는 서채윤은 약한 거 맞아.”
권지한은 말을 끝내고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막 쏟아 내기라도 할 것처럼 가슴을 부풀었지만 결국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윤서는 심장에 바람이 든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그 정의롭던 권지한에게 가치관 변화라도 생긴 건가?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저 묘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윤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예상대로 캠핑카 내부였고, 자신은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근육통이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서 쏟아지는 바윗덩어리들 속에 있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윤서는 시선을 느끼고 권지한을 올려다 봤다. 잿빛 눈은 서늘했고, 비스듬히 말아 올린 입술 끝은 명백하게, 미소가 아니라 비소였다.
그래. 뭐, 나도.
치유 내성 걸린 권지한이 약자들 보호하겠다고 나대다가 다치고 기절하면 존나 화날 것 같긴 하다.
‘후.’
작게 한숨 쉰 윤서는 일단 구석에 떠있는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지형 4/4 : 현재 인원 301명 : 폭발까지 1639시간
…응?
현재 지형 4/4
다시 봤으나 쓰여 있는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곳은 마지막 지형이었다.
***
윤서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도등수가 바로 보러 왔다. 다른 이들은 야영지 근처의 잡몹을 정리 중이라 오지 못했다.
도등수에게 권지한에게서 듣지 못한 상황 설명을 부탁하자 그가 간략히 말했다.
“윤서 씨가 기절하고 얼마 안 되어 동쪽 팀도 보스를 해치우고 중앙 지역과 합류했습니다. 그때 윤서 씨는 전신에 부상을 입고 기절한 상태라 권지한 헌터가 화가 많이 났는데… 아무튼 그 와중에 서쪽 팀도 보스를 해치우고 세 번째 지형이 열렸습니다. 세 번째 지형은….”
여기서 도등수가 권지한을 힐끔 봤다.
“…50시간 만에 클리어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지형인 신전 앞에서 진입을 준비 중이었고요. 윤서 씨를 어떻게 강제로라도 깨워야 하나 논의하고 있을 때 딱 타이밍 맞게 눈을 떠 주셨군요.”
“미로를… 50시간 만에 클리어했다고요?”
윤서는 신전 다음으로 미로 지대가 제일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다. 우선 보스를 찾으려면 미로를 헤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팀도 잘게 쪼갤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서채윤의 힘 없이 단 이틀 만에 클리어했다니?
정말 먼치킨이라도 등장한 건가?
도저히 믿기가 어려워서 아직도 기절 중인 건가 의심스러워진 윤서가 얼굴을 꼬집으려고 할 때였다.
“허, 씨. 뭐 하는 짓이야. 안 그래도 형 뺨에 상처 나서 예민한데 멋대로 꼬집기까지 해? 진짜 나 회까닥 도는 거 보고 싶어?”
권지한이 윤서의 손가락과 뺨 사이에 얼른 손바닥을 갖다 대서 윤서는 애꿎게 권지한의 손등만 꼬집게 되었다.
윤서는 실수로 병아리를 꼬집은 기분이 들어서 얼른 손을 털어 냈다. 꽤 힘을 줘서 아팠을 것 같은데. 권지한을 쳐다보자 권지한은 역시나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자기 얼굴을 이렇게 아프게 꼬집으려고 했단 말이야? 나가면 피학적인 성격부터 어떻게 좀 치료받자. 바로 심리 상담 센터에 예약 잡는다.”
권지한도 혀를 차면서 손을 도로 가져갔다. 그때 권지한의 손바닥과 윤서의 뺨이 스쳤는데, 이상한 감각이 든 윤서가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뭐 얼마나 크게 다쳤다고 이런 걸 붙여. 윤서가 바로 떼려는데 옆에서 권지한이 음산하게 말했다.
“뗄 생각 하지 말고 가만히 둬.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면 차라리 내 얼굴을 꼬집든가.”
윤서도 음산하게 대꾸했다.
“그 잘생긴 얼굴을 어떻게 꼬집습니까. 그쪽 화난 거 알아서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그딴 말은 못 참아 주겠군요. 내가 꼬집으면 영원히 흉이 질 수도 있으니 그 미모 잘 간수하세요.”
생명의 신이 역시 가족애는 보기 좋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신이 토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신들 반응이 왜 이러지?
“…….”
그 와중에 권지한은 분노가 좀 가라앉은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다행이었다.
윤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등수에게 물었다.
“미로 지대를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에 탈출한 겁니까?”
“아, 그건….”
도등수가 권지한을 바라봤다.
그 표정은 존경과 감탄,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뭔가… 질린 얼굴 같기도 했다. 권지한은 화가 조금 풀려서인지 설명할 마음이 생긴 듯했다.
“형, 일어날 수 있어?”
“네.”
“그럼 나가자. 직접 봐야 믿을 것 같아서.”
“무슨 말이죠? 저는 직접 보지 않아도 당신이 하는 말은 전부 믿습니다.”
생명의 신이 가족애에 감명받습니다.
죽음의 신이 토합니다.
“아, 그렇지. 형이 날 신뢰하는 거 아는데, 내가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일어나자.”
권지한이 먼저 윤서에게 붙잡으라는 듯 팔을 뻗었다. 윤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진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축까지는 필요하진 않았지만 탄탄한 팔뚝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
아이템 ‘망원경’을 사용합니다.
윤서는 <타락한 영웅의 날개>를 펼친 권지한의 품에 안긴 채 ‘망원경’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하….”
그저 감탄만 나왔다.
앞쪽에는 10년 전에 봤던 그 끔찍한 신전이 있고, 뒤쪽에는… 황량한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다.
제3 지형. 분명 나무가 빽빽이 자란 산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지평선뿐이었다.
뜨거운 지옥 불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대규모 지각 변동으로 땅이 뒤집힌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