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6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64)화(164/195)
#148
“…….”
윤서가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자 권지한이 이상 행동을 보였다. 자기 머리를 잔뜩 헝클이면서 한숨을 내쉬고 욕을 몇 마디 내뱉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가 홱 들어 올렸다.
“미안. 화 안 낼게.”
윤서가 눈을 깜박였다. 똑같이 빈정거리고 싶은 걸 참으니까 상대 쪽에서 사과해 온다. 심지어 이쪽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말이 심했어.”
“아뇨…. 저도 이해합니다. 권지한 헌터가 다른 방안을 놔두고 저랑 똑같은 짓 했으면 열받았을 테니까요.”
“알면 앞으론 그러지 마.”
“네.”
“싸움 끝.”
“네, 화해 완료.”
두 사람은 깔끔하게 화해했다.
가상의 팝콘을 먹으며 둘을 구경하던 도등수는 한 쌍의 바… 까지 떠올렸다가 차마 서채윤 님에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어서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윤서 씨,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내일까지는 다 나을 겁니다.”
“마력은요?”
“100%입니다.”
“정말 빠르시군요. 그럼 오늘은 해도 졌으니 내일 아침 일찍 신전에 진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윤서 씨는 일단 들어가서 좀 더 쉬십시오.”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변 몬스터들 처리를 맡았던 리벤저들이 멀리서부터 야영지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엔 화심도 있었다.
윤서는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분명 화심의 목소리였다.
한번 그와 대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윤서는 바로 화심과 얘기하지 못했다.
박수빈과 수재희, 홍의윤, 알렉 등 친분을 쌓은 이들이 윤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캠핑카로 우르르 몰려왔기 때문이다.
“저는 힐러로 각성하고 이렇게 무력해 본 적이 없어요. 나름 힐러 중에선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던전 나가면 일단 부목 대고 붕대 감는 방법부터 다시 배울 겁니다.”
박수빈은 그렇게 말했고.
“옐레나 누나랑 저 조금만 기다려 주지 왜 단독 행동을 했어요? 결과적으로 보스도 해치우고 아무도 안 죽긴 했지만, 우리의 합류를 기다렸어도 보스도 해치우고 아무도 안 죽었을 거예요. 윤서 형은 우리를 못 믿는 것 같아요.”
수재희는 그렇게 툴툴댔다.
“씨발, 왜 혼자만 희생하려고 한 거야? 멋있으면 다야? 죽고 나면 멋있는 게 무슨 소용이라고 멍청하게!”
“윤서 헌터는 전투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네. 사방에 동료 수십 명을 놔두고 왜 혼자 싸우려 하는가.”
홍의윤은 대놓고 욕을 했고, 알렉은 돌려 말했다.
삐유삐유.
햅쌀이도 윤서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이틀 동안 자신을 인벤에 넣어놓은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 사방에서 얻어맞던 윤서가 힐끔 권지한을 쳐다봤는데 권지한은 도와주기는커녕 고소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뭘 봐. 얌전히 혼나기나 해.’
라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 하지 마세요. 형의 그 소행성 소환 스킬 존나 어마어마한 건 맞지만 끝나갈 무렵에는 리벤저들도 어느 정도 막아 낼 수 있었다고요. 없는 마력 끌어 가면서 지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피하고 막을 수 있단 말이에요. 다들 그런 실력이라서 신 리벤저가 된 거고. 그러다 다치면 힐러들이 치유해 줄 거고, 마력이 소진되면 마력 포션도 먹을 수 있고. 그런데 형은 둘 다 아니면서 형이 뭔데 그렇게 희생하려고 하냐고요. 꼭 혼자 싸우는 사람처럼. 기적의 미라클 엔젤 파워 실드 안에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요?”
특히 윤서의 단독 행동을 고스란히 겪었던 수재희는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윤서는 어째서인지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권지한한테서 이미 한바탕 들은 내용의 반복이라서일까?
혼나는 게 다소 억울한 면도 있는데….
왜일까….
가슴 속 응어리가 말랑말랑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입을 열면 이 먹먹한 기분이 말로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뭔가 뜨끈한 게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됐어. 이쯤 하면 아무리 형이라도 알아들었을 거야.”
그때 혼나라고 방치하던 권지한이 윤서의 표정을 확인하고서는 상황을 끝냈다. 내일 오전 중 신전 진입 예정이니 그들도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환자를 늦게까지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우르르 몰려왔던 이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적막이 찾아든 가운데 햅쌀이만 작게 울었다.
“형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만 괴롭혀.”
삐유.
권지한이 햅쌀이를 데려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윤서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권지한은 윤서가 생각하게 놔두다가 아, 하는 얼굴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캠핑카 내부 식탁에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을 세팅하고 인벤토리에서 온갖 요리들을 꺼낸 권지한이 윤서를 불렀다.
“밥 먹으면서 대화하자. 형 배고프지? 나도 배고파.”
윤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가 몰려왔다.
둘의 늦은 저녁 식사는 윤서가 환자라는 걸 의식해서인지 매운 것보다는 소화하기 쉬운 음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윤서는 우물우물 열심히 입술을 움직이면서 밥을 먹었다.
가만히 보던 권지한이 물었다.
“더 줄까?”
“네.”
그렇게 두 공기를 먹고….
“더 주세요.”
“…그래.”
한 공기를 더 먹었다. 반찬 그릇이 윤서의 젓가락질 공격에 점점 비어 가면 권지한이 얼른 내용물을 채워 넣었다.
“에휴, 우리 형. 유언이 아니었다면 식사도 잘 안 했겠지. 이렇게 뭐든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인데….”
“밥맛 떨어지게 왜 유언 얘기를 하고 그래요.”
“너무 고마워서 그래. 내가 진짜….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감사하고 고마워서라니 둘 다 같은 말 아닌가.
윤서는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권지한이 나직이 물었다.
“이제는 희생 같은 거 안 할 거지?”
윤서가 물김치를 그릇째로 들어 시원하게 마시고는 대답했다.
“아까 화해 완료한 거 아니었습니까.”
“싸우자는 거 아니야. 본래 희생이 옳다는 쪽은 나였고 형은 희생은 어리석다 파였는데 어째서인지 반대가 되긴 했지만…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나도 희생은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문제는 형은 10년 전에 머무르고 있어서 필요하지 않는 순간에도 희생하려 한다는 거지. 이 사람들은 그때의 사람들이 아닌데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알겠다고요.”
수긍했는데도 권지한이 미심쩍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윤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10년 전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이라서 그래요. 예전에는 전투가 끝나고 죽은 이들의 수를 헤아리면서 항상 생각했죠.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내가 이들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어떻게든 더 구할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사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고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죠. 알면서도 의미 없는 후회를 하면서 ‘어떻게든 더’를 외치다 보니 그 습관이 남아서…. 여기서는 내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윤서는 이제 할 얘기는 끝났다는 듯 입술을 닫고서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배도 부르고, 계속 담아 뒀던 속마음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참을 부동자세로 있던 권지한이 돌연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머리를 푹 숙였다.
“씨발….”
욕설 사이로 흐읍,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호흡이 가빠진다 싶더니 권지한이 중얼거렸다.
“눈물 날 것 같아.”
“…뭐요?”
“몰라. 짜증 나. 가이아 시스템 존나 싫고 눈물 나와.”
“…….”
광전사 특성을 받고서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기라도 했나?
윤서가 황당하단 눈초리를 했다. 권지한은 제 감정에 감당이 안 되는지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난 형이 진짜 좋은가 봐.”
윤서는 혹시 권지한이 반어법으로 말하는 건가 했는데 눈물 참느라 빨개진 눈가나 윤기 도는 잿빛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진심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생명의 신이 기특해합니다.
이걸 왜 기특해하지? 측은해해야 하는 거 아니고…?
아니, 일단 가호 신도 가이아 시스템의 일부인데 기특해하는 걸 보면 이미 저 신은 권지한에게 빠져서 이성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권지한 헌터….”
윤서는 초토화된 식탁을 가로질러 손을 뻗었다. 권지한의 보슬보슬한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자 권지한의 입술 양 끝이 한없이 내려갔다. 호두 모양이 생겨난 턱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본래 울기 직전에 누가 달래 주면 더 눈물이 나는 법이다.
윤서는 자신 대신에 울어 주려는 그가 고마웠다.
“…….”
권지한은 끝내 눈물은 보이지 않을 작정인지 콧구멍까지 벌렁벌렁했지만 윤서는 이미 권지한이 엉엉 본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윤서가 더욱더 열심히 쓰다듬자 스물두 살 어린애가 되어 버린 권지한은 완전히 허물어진 표정으로 윤서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권지한의 무릎 위에서 놀고 있던 햅쌀이가 파닥파닥 식탁 위로 날아올라 둘을 번갈아 봤다.
삐융!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햅쌀이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쫑쫑쫑 춤을 췄다.
저 작은 새의 마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윤서와 권지한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대던전인 걸 한순간이나마 잊게 하는 모습이었다.
***
권지한이 진정한 후에 식탁을 치우고 화심을 불렀다. 권지한에게는 화심과의 일을 말해 놓은 상태였다.
잔뜩 각오한 얼굴로 캠핑카에 들어온 화심이 둘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운동 중입니다. 거기 앉으세요.”
삐유삐융.
“…….”
권지한과 윤서는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이틀 넘게 기절해 있었던지라 유언 활동을 조금도 못 했다. 안 움직였더니 몸도 뻐근하고…. 근육통은 본래 운동으로 풀어야 하는 법이다.
윤서가 스쿼트를 시작하자 권지한도 자연스럽게 옆에서 스쿼트를 시작했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햅쌀이도 족제비로 변하더니 열심히 굽혔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화심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