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6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69)화(169/195)
#152
윤서는 문득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을 받아서 옆을 봤다. 제게 푸른 이끼를 내미는 깡마른 손이 보였다.
‘서채윤. 이걸 먹어라.’
‘그거 독 제거했습니까?’
‘모른다. 그래도 먹어라.’
‘으아아, 우리 채윤이한테 왜 지랄이세요. 주세요. 독 제거해서 줄 테니까.’
‘독을 제거하고 나면 먹을 게 사라진다. 서채윤은 S급이라 독 좀 먹어도 안 죽는다. 배를 채우는 게 낫다.’
그렇게 무작정 이끼를 들이민 사람도 있었고….
‘나는 굶주렸다. 이렇게 표현하면 되나?’
‘맞습니다. 이제 한국말 잘하네요.’
‘나는 이제 한국말에 통달했다. 나가면 통역사가 될 것이다.’
‘응원할게요.’
‘야, 채윤아. 너 배고프면 이것 좀 먹을래? 맛은 없지만 독도 없어.’
‘서채윤. 배고프면 이것 좀 먹으라는군. 맛도, 독도 없다는군.’
‘이건 통역 안 해도 알거든요….’
정말 오랜만에 웃음을 흘린 적도 있었다.
윤서가 눈을 깜박이자 야위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다시 현재로 풍경이 돌아왔다. 수재희와 홍의윤, 박수빈은 김치볶음밥을 거의 마시고 있었고, 권지한은 반쯤 물병 뚜껑을 연 상태로 윤서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뭡니까?”
“아니, 물 필요한가 해서.”
“필요 없습니다.”
“그래. 무슨 생각 했어?”
권지한이 물병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윤서는 짧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기에 있는 이끼 말입니다.”
윤서가 벽에 촘촘히 달라붙은 진녹색 이끼를 가리켰다. 권지한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이들이 다 이끼를 쳐다봤다.
“응, 이끼가 왜?”
“저 진녹색 이끼는 조금 신맛이 납니다.”
“…….”
“아래쪽에 나 있는 보라색은 조금 맵고요.”
“…….”
“생각해 보니까 시거나 맵거나 했던 건 독이 다 제거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네요.”
“…….”
“그냥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밥 먹죠.”
“…….”
그렇게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어 버린 윤서는 다시 숟가락을 들고 깨가 솔솔 뿌려진 김치볶음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입술을 닫고 스무 번 이상, 냠냠.
꼭꼭 씹어 먹는 와중에 주위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
<스파크>로 태워 죽이고, <염력>으로 터뜨려 죽이고. 윤서는 크게 마력을 소진하지 않는 스킬을 사용하면서도 권지한과 비등한 수의 벌레들을 소탕했다. 약자들에게서 신경을 끊고 나니 더 날아다녔다.
“고생했습니다. 오늘도 부상자가 수십 명이라, 하루 쉬고 내일 오전 7시에 내려가겠습니다.”
도등수와 하급 헌터들이 전장을 수습하는 동안 권지한과 윤서는 차례대로 씻었다. 천장도 높고 땅이 넓어서 캠핑카를 여덟 대 대 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권지한과 윤서의 캠핑카였다.
“형, 앉아 봐.”
윤서가 씻고 나오자마자 권지한이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앉으니 권지한이 구급함을 가져와 윤서의 앞에 주저앉았다.
“발목.”
“발목 안 다쳤습니다만.”
“씁, 빨리 내놓자. 형. 힘으로 하기 전에.”
“힘으로 하면 날 이긴다고요?”
“아, 제발 좀.”
권지한이 애원하듯이 어깨를 틀어대서 윤서가 결국 오른쪽 발을 들었다.
발등부터 무릎까지 새파랬는데 그게 다 멍이었다. 전신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다리가 가장 심각했다. 전투 중에 바위에 다리를 부딪쳤기 때문이다. 윤서가 윽, 하고 신음을 내뱉자마자 박수빈을 포함해 여기저기서 치유 스킬이 날아왔으나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권지한은 윤서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신중한 얼굴로 치료했다.
“골절은 아니지?”
“네, 뼈에는 문제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진짜 아프겠다.”
“별로요. 비각성자였다면 다리가 부러졌을 겁니다.”
“비각성자였다면 다리가 부러졌다가 치유받고 멀쩡해졌겠지.”
“…….”
뭐야. 권지한 또 화 났나?
윤서가 권지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였다.
생명의 신이 ‘권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신이 왠지 눈치 살피라는 듯한 메시지를 보내서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권지한이 야무진 손길로 치료를 마쳤다. 그는 윤서의 바짓단을 가지런히 내리며 말했다.
“형, 나 지금 시스템 메시지 떴어. 분노 게이지가 찼대. 광전사 특성을 발동할 거냐는데.”
“네?”
“아, 재사용 시간이 아직이라고 저절로 취소됐다.”
“…….”
윤서는 왠지 으스스했다. 특성을 발동한다는 말도 처음 보지만 그것보다도….
“대체 왜 지금 분노 게이지가…?”
“몰라. 난 그냥 치유 내성 있는 우리 형 시퍼렇게 멍든 다리 치료했을 뿐인데 왜 떴을까.”
“…….”
“분노 게이지 초기화돼서 0부터 쌓아야 하는데 금방 쌓을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형 싸우는 거 보면 그냥 저절로 차더라고.”
권지한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선 구급함을 원래 자리에 두고 돌아왔다. 윤서의 옆에 앉아 자고 있는 햅쌀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히는데 평소와 똑같아 보였지만 윤서는 속지 않았다.
윤서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특성을 발동하겠느냐는 메시지는 처음 보네요.”
“아, 나도 처음이야. 형도 이런 메시지 뜬 적 없어?”
“없습니다.”
권지한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형 특성 중에 ‘창조자’는 어떤 특성일까. 관련 스킬도 얻은 적 없다고 했지.”
“네.”
“내 특성은 게이지가 다 차면 발동되거든. 창조자 특성에도 그런 게이지가 있는지도 몰라. 뭔가를 미친 듯이 창조해 내고 싶은 마음이 일정 수치 이상 쌓여서 발동이 된다거나.”
“그럼 발동될 일이 없겠는데요. 딱히 만들고 싶은 게 없습니다.”
“치유 내성을 치유하는 포션을 만들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이 치유 내성을 고맙게 여기고 있으니까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맞아. 그랬지.”
권지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못마땅한 기색은 없었다.
윤서는 문득 권지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존재하는 넋’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나눴던 대화.
‘대격변 초기라서 이런 좋은 아이템을 얻었던 게 아닐까?’
‘어긋난 존재들이 무방비 상태의 지구에 갑작스레 나타나고, 이에 가호 신들은 급하게 인류를 지원해야 했으니까 일단 멸망의 위기를 타개하라고 엄청나게 좋은 무기를 뿌린 거지.’
그럼 이 특성도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까.
생명의 신이 하품합니다.
죽음의 신이 코웃음 칩니다.
아닌가….
둘은 특성과 관련된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각자 침대에 누웠다. 불은 끄지 않았고, 잠들 생각도 없었다. 윤서가 햅쌀이를 만지작거리며 천장을 쳐다보는데 권지한이 말했다.
“형, 지구로 돌아가면 우리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드라마나 보면서 쉴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나 지금까지 쉰 적이 없거든. 각성하고 나서 휴가를 낸 적이 없다는 게 지금 막 떠올랐어.”
“…….”
“형도 그렇잖아.”
“아뇨. 저는 10년간 충분히 쉬었-.”
“쉰 적 없어, 형도.”
권지한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부정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던전 나가면 장기 휴가 낼래. 안 된다고 하면 길드 나가고 용병이나 뛸까 봐. 이젠 덜 열심히 살고 싶어. 어디서 폭발 직전 던전이 발생해도, 범람 벨이 울려도 그냥 무시하고 형이랑 드라마나 보면서 말이야. 형한테서 뜨개질도 배우고, 베이킹도 배우고. 낚시랑 등산도 같이 다니고. 그렇게 세상일과 조금 떨어져서 살려고…. 조금 덜 정의롭게.”
“덜 정의롭게요?”
“응.”
“…….”
권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는데, 듣는 윤서는 그렇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권지한이 진심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을 하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변화라서.
윤서는 덜 정의로운 권지한도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덜 정의로워지고, 더 자유로워진 권지한을 옆에서 보고 싶었다. 다채로운 취미 생활을 누리는 그의 모습을.
굳은살 박인 손으로 대바늘을 들고서 ‘형, 겉뜨기랑 안뜨기 차이점이 뭐야?’ 묻고.
버터를 통째로 쏟아붓고는 ‘이거 왜 이렇게 안 섞여.’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낚시터 아저씨들과 어울리면서 ‘참돔 9짜가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요?’ 놀라기도 하고.
모양 구름도 더 찾으면 좋겠다. 햅쌀이를 닮은 작은 새라든가. 권지한이 키웠다는 진돗개 두 마리를 닮은 강아지 구름이라든가. 어디 경치 좋은 숲속 별장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푸르고 화창한 하늘을 한가롭게 올려다보며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윤서의 마음은 평안해졌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끝내고 죽었을 때를 상상하며 가까스로 평안을 찾았는데 이제는 그 반대였다.
정말 즐거울 것이다.
평화롭고 한가한 권지한을 옆에서 보는 건….
그리고 윤서는 권지한의 평화를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권지한 헌터.”
반응을 기다리는 권지한에게 윤서가 말했다.
“던전을 나가면 베이킹 알려 주겠습니다. 초코크랙쿠키 말고 다른 것도 구워 보죠. 뜨개질도. 낚시와 등산. 피아노도 같이 해 보고요.”
“색칠 공부도.”
“그래요. 색칠 공부도.”
윤서가 웃음 짓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실컷 즐기고 나면 다시 약자를 구하러 가세요. 깡패한테 괴롭힘당하는 어린아이는 자신을 도와줄 선량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
권지한이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윤서를 바라봤다.
“그럼 형은 어디서 뭐 할 거야?”
“나는 어린아이를 돕는 사람의 뒤에 있겠습니다.”
“…….”
“당신은 약자를 구하고, 나는 약자를 보호하는 선량한 사람을 구하는 겁니다….”
윤서가 미소를 지었다.
답답한 가슴을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이런 벅찬 기분을 느끼는지 윤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권지한의 변화가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권지한의 얼굴이 무척 귀여웠다. 윤서가 막 입을 열려는 그때였다. 캠핑카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소 빠른 걸음이었다. 두 사람 다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두 번 노크가 있고, 권지한이 들어오라고 하자 상대 쪽에서 문을 열었다.
“서채윤.”
화심이 여느 때보다 더 진중한 얼굴로 윤서를 바라봤다.
“매개체가 근처에 있다는 알림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