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7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70)화(170/195)
#153
세 명은 이동하기 전 도등수와 알렉에게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겠다고 알렸다. 화심이 가이아 스킬 보유자인 것도 알고 있고, 대충 얘기를 들은 도등수와 알렉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길드 대화를 보내라면서 보내 줬다. 홍의윤과 수재희, 박수빈이 어딜 가느냐고 졸졸 따라오기는 했지만 권지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쫓아냈다.
신전 지하 1층의 낡은 기둥을 돌아 다 무너진 석상 몇 개를 지나고 삼십 분 정도 걸었을 때 화심이 발을 멈췄다.
“저곳이다.”
화심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 윤서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 있는 것은 놀랍게도… 낡은 신발이었다. 신발 한 켤레가 신전의 벽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서는 저 헤지고 낡은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이도민….”
대체 이도민의 신발이 왜 여기에 있지?
스토리 이름 때문에 이도민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되리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신발이라니.
클리어 후 사라졌던 대던전에 10년 전의 물건이 남아 있는 것도, 세 번째 지형에서 죽은 사람의 것이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놀라웠다.
윤서는 놀라서 굳은 반면 권지한은 빠르게 달려가서 겁도 없이 신발을 주워 들었다.
“이게 이도민의 신발이라고?”
“미쳤어요? 무슨 함정인 줄 알고 그걸 주워 듭니까?”
윤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권지한이 얼른 바닥에 내려놨다.
“함정 같아 보이진 않아서.”
“조심 좀 하세요.”
생명의 신이 당신은 걱정이 많다고 걱정합니다.
정작 생명의 신이 제일 걱정이 많았다.
화심과 윤서, 권지한은 신발을 가운데에 놓고 섰다.
삐융.
작고 하얀 새가 익숙한 신발에 고개를 갸웃하며 기웃댔다. 익숙한 냄새라도 났던 건지. 그러나 결국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채 권지한에게 돌아왔다.
화심이 눈앞에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내 눈에는 이 물건에서 나오는 빛이 보인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 있지. <가이아의 마음> ‘서채윤과 이도민’ 스토리 매개체. 던전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 특수한 스킬의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이도민은 미로 지대에서 죽었는데 왜 여기 와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스토리를 해제하면 네게 조작당한 기억이 돌아올 테고, 그럼 알게 되겠지.”
“…….”
“지금 바로 해제해도 되겠나?”
윤서는 대답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정신 조종을 할 수 있다는 <가이아의 마음> 보유자가 갤럭사이아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왜 여기서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죽음의 신이 당신은 걱정이 많다고 혀를 찹니다.
그래. ‘선택된 자’를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지.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자를 불신하는 건 에너지 낭비이다.
“네, 지금 바로 부탁합니다.”
“잠깐.”
이번에는 권지한이 가로막았다. 권지한은 진중한 표정으로 아공간에서 안락의자를 꺼내고는 쿠션과 담요도 손에 들었다.
“형, 앉아.”
“…….”
“아, 형 또 충격받아서 기절하거나 하면 나 광전사 될 것 같은데.”
윤서가 순순히 앉았다. 치사한 협박이 아니더라도 앉을 생각이었다. 윤서가 앉자 권지한이 담요를 무릎에 덮어주고 쿠션을 안겼다.
“준비됐나?”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심이 윤서에게 손을 뻗었다.
‘화심’이 스킬 <가이아의 마음>을 사용합니다.
화심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윤서의 머릿속으로 흘려 들어갔는데 아무런 촉감이나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심’이 당신에게 적용되어 있던 기억 조작을 해제했습니다.
윤서가 의자 팔걸이를 힘주어 붙잡자 권지한이 그런 윤서의 손을 붙잡았다. 둘의 손가락이 서로 얽혔다.
삭제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생명의 신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신이 가만히 지켜봅니다.
관측자가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 · ·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지고…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
***
이도민은 늪지대에서부터 이미 아슬아슬했다. 마력 고갈 상태가 계속되며 공격적인 성향이 생겼는데 그게 남들에게도 향하고 본인에게도 향했기 때문에 누군가 반드시 그의 옆에 있어야만 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고.’
‘세상은 멸망해.’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도민은 오로지 절망과 비탄, 슬픔, 비난만을 말하다가 나중에는….
‘이제 <사건의 지평선>은 쓰지 않을래.’
<사건의 지평선> 사용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왔다.
‘이걸 쓰든 안 쓰든 어차피 다 죽어.’
‘마력 고갈 되기 싫어. 이제 안 할래.’
‘하기 싫어. 나한테 강요하지 마!’
이건 어린애의 어리광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살기 위해서….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스킬 사용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부는 이미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해서 마력 고갈에 돌입했을 때의 일이었고, 마력이 30% 이상으로만 회복되어도 바로 자신의 폭언에 주위에 사과한다거나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결론적으로 그는 <사건의 지평선> 사용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이도민은 그의 친구인 서채윤, 그가 의지하는 이강진 옆에서는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그가 쏟아 내는 감정은 서채윤과 이강진이 번갈아 받아 줬다. 하지만 그것도 나중엔 이강진 혼자만 받아 주게 되었다. 서채윤도 마력 고갈 상태가 반복되면서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혼탁한 눈빛을 할 때가 많아졌기 때문에.
모든 리벤저가 가장 어린 둘에게 과중한 책무를 부여한 것에 자책했다. 어린 소년들의 정신이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는데도 그걸 말릴 수도 없고, 오히려 부추겨야만 하는 현실. 모든 이가 힘든 시기였다.
당시 그들은 미로 지대에서 아직 보스를 한 마리도 못 찾은 채 헤매고 있었다. 리벤저는 어쩔 수 없이 팀을 나누기로 했다.
서채윤은 동굴 속 미로를, 이도민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필드를 수색해야 해서 두 사람이 대던전에 들어와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도민과 이강진, 휴스 사이로 그리고 몇몇 A급 헌터들이 같은 팀이었다.
당시 이도민은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 중이었고 아직 마력 부족 상태도 아니었다. 마력이 반절은 남아 있었을 때라 모두가 안심했다.
그런데… 산맥의 식인 덩굴과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잠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이도민이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이 형.”
“응?”
이강진이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쓱쓱 문질러 닦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 이제 <사건의 지평선> 안 쓸래.”
“뭐?”
“이건 의미 없는 짓이야.”
이도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선언하더니 스킬을 해제했다.
이강진과 동료들은 이도민의 마력이 40%는 남았을 걸 알았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표정을 굳혔다.
“도민아. 의미 없다니 무슨 말이야?”
“이런 발악 같은 건 의미가 없다고. 시간 낭비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이야. 어차피 공략을 실패하고 우리는 다 여기서 죽을 건데 말이야.”
“도민아…. 너 혹시 지금 마력이-.”
“40% 남았어. 난 정상이야.”
이도민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일어났다. 똑바로 선 그의 손에 검붉은 구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벤저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도민!”
“도민아, 왜 그래!”
“형들, 누나들. 괜찮아. 다 진정해. 더는 무의미한 시간 소모는 하지 않게 해 줄게.”
“이도민, 너야말로 진정해. 그런 스킬에 마력 소모하지 말란 말이야.”
“왜 안 돼? 나는 시간을 멈춰야 하니까?”
“도민아.”
“이제 싫어. 너무 힘들어. 마력 고갈은 이제…. 정말 사용하고 싶지 않은데….”
이도민이 고통스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낮았다.
“내가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 죽겠지?”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네 스킬이 없으면 우리도, 바깥에 있는 이들도 모두 끝이야! 지금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60억 명의 사람들이 전부 죽어 버린단 말이다!”
“아아….”
한 리벤저의 외침에 이도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언가를 떨쳐 내려는 것 같았다.
“그래…. 다 죽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더는 마력 고갈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도민아 일단 진정하고, 그 스킬 해제하고 여기 앉자. 형이 미안해. 우리 얘기를 좀 하자. 응?”
이강진이 부드러운 어조로 달랬다.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피를 닦던 검을 다시 고쳐 쥐며 생각했다.
이도민은 S급 헌터고, 자신을 비롯한 이들은 A급부터 C급까지였다. 제압이 가능하기나 할까? 여기서 어떻게 서채윤한테 신호를 보낼 방법은 없나?
“내가 서채윤에게 방금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금 전투 중이라서 전투만 끝나면 온다는군.”
아, 마침 이곳에는 휴스 사이로가 있었다. 휴스는 <가이아의 마음> 소유자로… 가이아 스킬 소유자들은 이미 용암 지대에서부터 서로의 스킬을 공유한 상태였다. 단 이강진만은 <가이아의 그림자>라는 스킬이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서채윤은 <가이아의 대지>를 가지고 있으니 전투가 끝나면 바로 올 것이다.
채윤이가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
이강진은 입으로는 이도민을 달래면서 머리로 제압할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머릿속으로 세우는 작전들은 소용없었다.
이도민은 이미 결정한 후였으니까.
“형들이랑 누나들의 고통은 내가 멈춰 줄게.”
이도민의 손에 맺혀 있던 검붉은 구체가 방금 60억 명의 사람들이 전부 죽는다고 외친 리벤저의 복부에 꽂혔다.
그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몸뚱이가 뒤로 고꾸라졌다. 치유 스킬이고 뭐고 필요 없는 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