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7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73)화(173/195)
23. 마지막 관문
#155
윤서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모두에게 밝힐 생각이지만 아직 풀어야 할 기억 조작이 하나 더 남아 있었으므로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단, 캠핑카에 돌아와서 권지한에게만은 진실을 털어놨다.
권지한은 윤서처럼 담담하게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대던전 공략법을 들을 때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그건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윤서를 대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씨발, 무슨 그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어. 아, 존나 열받는다. 젠장 그런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됐는데.
그렇게 격한 감정들이 한차례 몰아쳤다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둘은 테이블 앞에 앉아 대화를 통해 그동안의 이상한 점들을 풀어나갔다.
“던전 진입 메시지의 인원수 301명. 그 한 명은 딸기가 아니라 형의 친구였던 거네.”
“그런 것 같습니다. <가이아의 꿈>의 스킬 보유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도민이가 가지고 있고,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그럼 지금 이도민은 어디에 있을까?”
“…….”
윤서는 아무도 없는 던전에서 깨어나 9년을 홀로 돌아다니는 이도민을 떠올렸다. 동료 둘을 제 손으로 죽이고, 친한 친구를 죽이려다가 의지하던 이한테 살해당한 마지막 기억을 가진 채 방황하는 이도민. 그건 상상만 해도 비참했다.
그러나 생존 여부만 놓고 본다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던전이란 건 프록시마 b에 가이아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실제로 지구에서 우주선을 타고 프록시마 b에 가면 수많은 던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던전 내부를 어떻게 리셋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만약 추론대로 폴더 안의 파일을 전체 삭제하는 것이라면….
‘이도민’이라는 파일은 <가이아의 꿈>으로 숨김 처리되어 있었고, 이에 가이아 시스템도 ‘이도민’을 삭제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도민은 폴더 비우기를 끝낸 던전 안에서 깨어난다. 프록시마 b 안에서도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있었을 테니까…. 그의 가호 신들이 도와주고, 독을 정화하거나 생존에 필요한 아이템이 생겨나고, 그러면 S급 헌터인 이도민은 9년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그 사람이 대던전 안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윤서가 의아한 듯 권지한을 쳐다봤다. 권지한의 말투가 다른 가능성을 염려에 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권지한 헌터 생각은 어떤데요?”
권지한은 윤서의 표정을 살피고, 윤서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리셋이란 건 던전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걸 뜻하잖아. 던전에 침입자를 받지 않았을 때의 가장 첫 상태로 돌아가는 것. 클리어된 던전은 두 번의 과정을 거쳐서 재탄생하는 게 아닐까. 첫 번째는 폴더 비우기. 그리고 두 번째는 초기화.”
“…….”
“이도민은 폴더 비우기 과정에서 살아남았어. 그러나 두 번째 과정 때 <가이아의 꿈>을 꾸고 있던 이도민도 함께 초기화되었다고 한다면?”
“아….”
윤서는 권지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쿠키를 만들 때는 버터와 계란, 설탕, 밀가루를 다 합쳐서 반죽한다.
이도민과 풀과 나무, 늪, 용암…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진 후 다시 던전을 구성하는 요소로 재탄생한 거라면….
이도민은 던전과 하나가 되었다.
던전인 동시에 인간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의식이 있기에 인간 형태는 유지 가능했겠지. 똑똑한 그 녀석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그렇게 던전이며 인간인 상태로 온갖 곳을 돌아다니다가….
“신발 두 개가 신전 벽을 향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죠.”
“…그랬지.”
결국에는 인간의 신체를 버리고 던전에 흡수되는 걸 선택했다. 인간의 의식도 점점 흐려졌을 테고, 이곳에서 홀로 사는 건 불편하고, 불행한 일이니까. 마지막에 전우 두 명을 죽이고 친구마저 죽이려고 했다는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가이아의 마음>의 스토리 매개체는 도민이 자체였겠네요. 도민이가 이 신발만 남기고 흡수되었기 때문에 이것만 남은 거고….”
천천히 신발을 벗고 신전의 벽에 깃드는 이도민의 모습이 그려졌다.
눈을 슬프게 내리깔았을까. 아니면 당당하게 치켜떴을까. 벽을 앞에 두고 얼마나 머물렀을까. 아니면 망설이지 않고 하나가 되었을까.
이도민과 윤서는 동네 친구였다. 부모님끼리도 아는 사이였고, 가족끼리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대격변 이후에는 친구인 동시에 가족이었고, 전우였다. 도민이가 마력 고갈 증상으로 괴로워한다는 걸 알았지만 윤서 또한 마력 고갈에 시달리고 있어서 보살펴 주지 못했다.
이도민은 이강진에게 죽는 순간 <가이아의 꿈>을 발동하며 안심했었을지도 모른다.
아, <가이아의 꿈>이 이럴 때 발동되는 스킬이었구나. 좋아. 괜찮아. 윤서가 내 스킬을 알아. 윤서라면 내 상태를 알아 줄 거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던전이 아니라 바깥이면 좋겠다. 모든 게 끝나 있었으면 좋겠어. 하얀 천장과 깨끗한 잠옷을 입고 푹신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거야. 잠시 그러고 있으면 윤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제야 일어났냐고 면박을 주는 거지. 윤서가 내 스킬을 아니까 괜찮아. 다시 눈을 뜨면 나는 현실로 돌아가 있을 거야….
그렇게 희망에 부푼 상상을 하다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이곳엔 <가이아의 마음> 보유자가 있고, 이강진이라면 서채윤의 기억을 조작하리라는 것을.
이게 마지막이란 걸, 살갗이 에는 듯한 차디찬 느낌과 함께 깨달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