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7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78)화(178/195)
#160
리오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허니만 내려보내고 저는 여기서 싸우겠습니다.”
“아뇨. 둘 다 가세요.”
“아뇨. 허니 혼자서도 충분히 박스를 지킬 수 있어요. 서채윤 님이라도 허니를 얕봐서는 안 됩니다.”
리오가 윤서를 응시했다.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로렌스 헌터는 얼른 내려가세요.”
“하지만….”
“허니, 가서 박스를 지켜.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서채윤 님께서 중요하다잖아.”
리오가 로렌스를 설득했다. 결국 로렌스가 불만에 찬 얼굴로 아래로 내려갔다.
윤서는 곧바로 리오에게 지시했다.
“리오 헌터는 얼음 쪽에 합류하세요.”
“…감사합니다.”
내쫓아진 것임에도 리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이 떠나자 화심이 말했다.
“서채윤. 너는 연기를 못 하는군.”
“…….”
그 박스가 중요한 건 맞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라 박스에 담았는데… 안에 뭐가 있냐면 바로 이도민의 신발이 있다. 윤서는 사적인 목적을 위해 강한 전력이 될 S급 헌터를 전선에서 대피시켰다.
생명의 신이 당신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화심 헌터는 텔레파시로 저한테 저쪽 상황을 알려 주세요.”
“나는 전투용이 아니라 중계용으로 데리고 온 거였군. 결국 너 혼자 싸우겠다는 건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아니. 아무리 너라도 혼자서는 무리다. 전투에 가담하면서 잘 중계하도록 하지. 걱정하지 마라. 타이밍 맞추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
화심은 로렌스와 달리 설득될 것 같지 않았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의 검을 힘주어 쥐었다.
이제 마지막 전투였다.
***
드래곤의 앞발은 팔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정도로 길고, 사람처럼 손가락이 다섯 개였다. 기다란 발톱은 독을 품고 있으며 다이아몬드처럼 딱딱했다. 윤서는 저를 향해 뻗어오는 드래곤의 기다란 발톱을 피해 <관측자의 검>을 휘둘러 발가락 하나를 단숨에 잘랐다. 이어서 브레스가 응축되는 소리에 몸을 굴러서 드래곤의 어깨 쪽으로 피한 뒤 방금 자른 발가락을 <염력>으로 전격 머리의 목에 쑤셔박았다.
크아아악!
독은 통하지 않겠지만, 날카로운 발톱에 드래곤의 외피가 찢어졌다. 윤서는 그 안에 <스파크>가 가득 찬 ‘넋’을 던져 넣었다. 드래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화심이 그 틈을 타 <기생> 스킬로 어떤 씨앗 같은 걸 집어넣었다. 회복력이 빠른지라 외피가 바로 수복되었다. 윤서는 넋을 <염력>으로 조종해 더 안쪽으로 파고들려고 했지만 피부의 두꺼운 층을 뚫지 못했다.
‘젠장.’
‘존재하는 넋’을 해제했다가 다시 소환해 손에 쥔 윤서가 어깨를 박차고 달려 목에 올라탔다. 단검 두 개로 목을 난도질하자 화가 난 드래곤이 브레스를 사방에 날렸다. 스치기만 해도 재가 되는 전격 브레스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신전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기저기서 굉음이 들리고 비명이 난무했다.
“서채윤! 거기서 나와라. 씨앗이 발화한다!”
윤서가 <염력>을 사용하며 훌쩍 뛰어내리자 드래곤의 어깨에서부터 덩굴 같은 게 솟아나는 게 보였다. 기생 식물 같았는데 드래곤의 거대한 몸집에 비해 크기가 작아서 큰 대미지는 못 줄 것 같았다. 드래곤이 신경질적으로 긴 팔을 이용해 식물을 뽑아냈다.
‘화심’이 스킬 <영원한 부활>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어깨에서는 또다시 덩굴이 자라났다. 한번에 대단한 대미지는 입히지 못했으나 스킬 이름처럼 ‘영원히’ 자라는 거라면 정말이지 엄청나게 잔인한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아악!
드래곤이 윤서를 향해 전류를 방출했다. 윤서는 <관측자의 검>을 휘둘려 그것을 받아쳤다. 그러자 이번엔 입을 쩍 벌리고 브레스를 응축했다.
스킬 <염력>을 사용합니다.
기회를 노리던 윤서가 입 속으로 몸을 날렸다. 화심이 “서채윤!” 하면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제 입으로 들어온 날파리 같은 존재 때문에 브레스가 흩어졌다. 윤서는 <관측자의 검>을 턱에 꽂아 드래곤이 입을 완전히 다물지 못하게 한 후 이빨에 매달린 채 ‘넋’을 드래곤의 내부로 날려 보냈다.
<염력>의 세밀한 컨트롤은 윤서의 주특기였다.
‘넋’과 윤서는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감응한다. 보이지 않는 드래곤의 내부가, 윤서는 마치 보이는 것처럼 단검을 조종해서 내부 장기를 파괴해 나갔다. 두꺼운 가죽과는 달리 여린 내장이 넋에 의해 찢겨 나갔다. 먼저 브레스를 만들어 내는 곳으로 추정되는 기다란 원통형의 장기를 파괴하고.
크아아악!
크르륵!
머리 두 개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드래곤이 긴 머리를 크게 휘둘렀다.
“으악, 씨발. 이 새끼 왜 이래?”
“다들 피해라. 상태가 이상하다!”
이 드래곤의 몸집에 비하면 ‘존재하는 넋’은 이쑤시개 같은 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쑤시개가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와 식도를 타고 내장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때쯤이면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드래곤의 목이 세 개이고, 한 개씩 자를 때마다 페이즈가 바뀐다고 해서… 반드시 목만을 노릴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목이 멀쩡히 붙어 있어도 내장 출혈만으로도 죽듯이… 드래곤은 안쪽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서채윤. 뭐 하는 건가!”
“서채윤! 심상치가 않아. 당장 나와!”
“이봐!”
“대답을 해라!”
화심이 윤서를 시끄럽게 불러 댔다.
드래곤이 심상치 않다는 건 윤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만 넋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조종하기 쉽기 때문에 윤서는 드래곤의 내부에 있어야만 했다.
이 설명을 화심에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집중이 흐트러져서 넋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채윤!”
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 여기서 드래곤을 끝내겠습니다. 모두 피하라고 하세요.’
“뭐?”
‘집중해야 합니다. 조용히 하세요.’
“…….”
화심이 말이 없어지자 이번엔 신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생명의 신이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신이 죽고 싶으면 피하지 말라고 합니다.
관측자가 조용히 당신을 지켜봅니다.
윤서는 절대로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검은 던전에서 사용할 마력량을 생각하면 이제 여기서 멈추고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아아!
크아아악!
드래곤의 고통스러운 포효에 윤서가 몸을 떨면서 웃었다.
그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아니, 10년 전부터 울화와 울분이 차곡차곡 쌓였다.
한번도 해소하지 못한 채 꾹꾹 눌러 담고만 있던 것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분출되었다.
서채윤은 자제심을 잃었고, 이 드래곤이 화풀이 상대였다.
단검을 움직여 드래곤의 내장을 진탕으로 만들면서 희열이 느껴졌다. ‘그만해야 하는데.’, ‘이제 마력이 아슬아슬한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자제할 수가 없다.
충분한 대비책이 있고, 든든한 지원이 있으면 이렇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인데.
이 던전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다.
왜 나의 동료들은 유언만 남긴 채 죽어야 했을까.
라 비지나는 왜 던전을 나와서도 악몽에 잠겨 있는 걸까.
왜 강진이 형은 너무나 아끼는 동생을 죽여야만 했던 걸까.
왜 도민이는 의지하는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 있는 채로 던전에 버려져야 했을까.
왜.
왜 나는……!
10년간 아슬아슬하게 틀어막고 있던 둑이 터지고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스킬 <염력>을 사용합니다.
자제해야 하는데도 마력을 일으키고, 또 일으켰다. ‘존재하는 넋’을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자 드래곤의 몸부림이 심해지면서 <관측자의 검>에 매달린 윤서의 몸도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윤서는 오히려 검을 붙잡고 있었던 두 손 중 하나를 풀고는 상의 앞 포켓에 집어넣었다. 잭나이프를 꺼낸 윤서는 그대로 드래곤의 혓바닥에 찔러넣었다. 푸욱, 소리와 함께 뜨거운 핏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윤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파크>를 흘려보낸 뒤 발목의 스트랩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방금 것보다 조금 더 긴 나이프를 단단히 쥔 윤서가 드래곤의 입 안 점막을 마구 난도질했다.
왜? 대체 왜?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화가 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이 울음소리가 드래곤의 울부짖음인지 자신의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었다.
“형.”
그때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는 흠칫 놀랐으나 지금 들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나이프를 휘두르려고 했다.
“윤서 형.”
재차 들리는 목소리에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권지한이 ‘천해’를 <관측자의 검> 옆에 꽂아 놓은 뒤 나이프를 쥔 윤서의 팔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고요한 잿빛 시선에 윤서가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나이프가 아래로 떨어졌다. 권지한은 한팔로 윤서의 허리를 감아 일으켜 앉혔다.
이제 보니 윤서는 거의 드래곤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 가는 중이었다.
“나 아니면 죽을 뻔했네.”
권지한은 조금도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보다 당신이 왜 여기에.”
“형이 안 나오길래 들어왔지.”
“얼른 나가세요. 저도 때 되면 나갈 겁니다.”
“그 ‘때’가 바로 지금 같은데. 마력 멈추고, 같이 나가자.”
피를 다 닦아내고 왔는지 윤서는 유독 권지한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빛이 없는 지역인데도….
권지한이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윤서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주는 것이다.
윤서의 거친 호흡이 서서히 멎어갔다. 혼탁했던 눈동자도 점점 선명해졌다.
“왜, 설마 드래곤이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야?”
“…….”
“이미 드래곤의 내부는 진탕이 났으니까 형이 꼭 끝맺을 필요가 없어. 다 같이 외부에도 공격해도 분명 먹힐 거야. 이게 본래 작전이었잖아.”
권지한은 선뜻 움직이지 않는 윤서의 뺨을 부드럽게 쓸고,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