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8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81)화(181/195)
#162
윤서는 이강진을 떠올렸고, 이어서 그레이스의 예언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에 감정이 격정적으로 휘몰아쳤다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아…….’
손의 떨림이 멎었다. 쿵쿵 뛰던 심장도 정상 박동으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이건 잘못된 일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이건 오히려…….
선명해진 시야에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권지한이 보였다. 권지한은 햅쌀이를 보고서 활짝 웃었다.
“형, 햅쌀이 꺼냈네. 우리 햅쌀이 너무 너무 잘했어. 사람이었으면 최대 공로자 네가 먹었을 거야.”
삐유.
권지한이 윤서의 옆에 꼭 붙어 앉으며 햅쌀이의 가슴을 더욱 부풀게 만들었다.
윤서는 미소지었다.
그래, 이건 잘못된 일이 아니야.
그렇게 결론 내리자 웃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부산물 수집에 열중인 이들을 구경했다.
“권지한 헌터, 치유 마저 받으세요. 윤서 씨도요.”
박수빈이 의사 출신 힐러를 데리고 둘에게 다가왔다. 권지한이 먼저 윤서의 옆에 앉아 상의를 훌러덩 벗었다. 터진 옆구리가 아물다 만 상태였다. 박수빈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린애도 이렇게 말 잘 듣는데 어른도 잘 들어야지?”
권지한의 말에 윤서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 소매를 걷었다.
화상 치료를 다시 받는 그에게 사람들이 다가왔다.
수재희와 홍의윤.
수재희가 다가오자 햅쌀이가 삐유우 울며 그에게 날아갔다. 수재희는 햅쌀이를 감싸 쥐고 칭찬을 가득 해 준 후 둘에게 물었다.
“형들 저 검은 던전에 딱 둘만 들어가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다 대책 세우고 왔으니까.”
“어차피 가이아 스킬 보유자가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한다면서요. 걱정한다고 별수도 없고. 우리는 밖에서 형들이 나올 때까지 불안해하며 기다려야죠, 뭐. 그런데 화심 형도 들어가요?”
“아니.”
그건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권지한과 윤서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 화심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화심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
“서채윤. 저 검은 포탈이 스토리를 해제하는 마지막 매개체다.”
‘예상했습니다. 다들 나가고 나면 그때 해제하죠.’
“알겠다.”
‘검은 포탈에 같이 들어가겠습니까?’
윤서가 농담을 건네자 화심은 움찔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뒤통수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윤서는 화심을 데리고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데리고 들어가면 방해가 될 것이다.
“야, 너…. 이렇게 얼굴을 들켜도 괜찮아?”
홍의윤은 윤서가 정체를 드러낸 게 걱정인 듯했다.
“안 그래도 지금 조금 후회 중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왜 그렇게 기분파야? 너 다혈질이야?”
“홍이 형이 할 말은 아닌데.”
“뭐야?”
수재희가 중얼거리자 홍의윤이 눈을 부릅떴다. 수재희는 쿡쿡 웃었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요. 설마 다들 나가자마자 나불나불 불지는 않겠죠. 형이 치유 내성 있는 몸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빤히 아는 사람들이 형 곤란하게 만들겠어요?”
“네. 같은 위기를 헤쳐 온 299명의 전우를 믿고 있습니다. 전 계속 조용히 살고 싶으니 그저 믿을 뿐입니다.”
윤서가 모두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분주히 부산물을 수거하던 리벤저들의 뒤통수에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하다가 수재희와 홍의윤은 부산물 수집하러, 박수빈와 힐러는 다른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떠났다. 그 와중에 겁도 없는 홍의윤은 검은 포탈을 괜히 건드렸다가 파지직 하고 튕겨 나와서 수재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알렉과 커플, 옐레나가 다가왔다.
알렉은 이번 공략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리더 그룹으로서 전투와 생활 양면으로 애쓴 그는 어쩐지 공략 전보다 폭삭 늙어 있었다.
“리타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버틴 건지.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난 그 녀석의 발끝도 못 따라갈 걸세.”
“발가락 정도는 될 겁니다.”
“허어….”
“매일 스쿼트와 러닝을 하면 발목 정도는 되겠죠.”
“이거 나보다 윤서 군이 더 남매 같구만.”
“리타 누나는 제 누나 맞습니다.”
윤서가 미소 지었다.
“참고로 리타 누나는 제게 스쿼트 3백만 회와 러닝 5천 회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이 유언 들어주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침대에 드러누웠다가도 욕을 하면서 일어나 스쿼트를 이백 개씩하고 자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친남매분께도 꼭 추천하고 싶군요. 솔직히 가족으로서 유언을 분담해야 맞는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알렉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래. 알겠네. 나가면 분담하도록 하지….”
모든 상황이 열악했던 환경, 처절한 전투를 하다가 죽어 가면서 그런 유언을 남겼다는 게 어이없어서 웃을 만도 한데 알렉은 오히려 눈물을 흘려 버릴 것 같았다.
알렉은 검은 포탈에 대해선 묻지 않고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커플은 윤서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옐레나는 권지한과 윤서에게 나가면 대련 한 번만 하자고 씩씩하고 당찬 말을 건넸다.
“형.”
권지한이 윤서를 툭 쳤다.
조만이가 멀리서 윤서를 빤히 바라봤다. 무시하던 사람이 존경하던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그는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꾸벅하는 것도 아니고 돌려 버리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각도로 삐그덕거리다가….
“…….”
윤서를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다시 허리를 편 그는 수하 길드원들에게 여러 지시를 하며 멀어졌다.
임시 팀 멤버들은 모여 있었다. 남궁심해가 김진해의 머리를 큰손으로 쓰다듬었고, 이정인은 박강과 대화를 나눴다. 다들 너덜너덜한 복장이었는데 박강의 한복은 유난히 깔끔했다. 역시 한복은 좋은 것이다. 그들은 윤서의 시선을 느끼고 눈인사를 해 왔다.
윤서는 언젠가 김서해의 두 동생이 참돔 새벽 낚시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그 옆에 권지한이 있다면 좋겠다. 낚시는 꽤 즐거운 취미 생활이니까 말이다.
크리스 카일은 눈에 불을 켜고서 부산물을 쓸어 담고 있었고, 푸르카는 힐러들 옆에서 부상자들을 보살폈다.
그 힐러들 중에 갤럭사이아 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러 들어온 사이비 교도들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힐러들은 이미 교도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풍경이었다.
삐유.
수재희한테 가서 실컷 귀여움받던 햅쌀이가 돌아왔다. 권지한이 얼른 햅쌀이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햅쌀아. 다른 남자한테 가지 말라고. 나한테만 귀여움받으란 말이야.”
삐이.
“고생 많았어. 너는 대던전의 최종 보스를 무찌른 용맹한 햅쌀이로 기록될 거야.”
삐!
윤서는 햅쌀이 부리가 이러다 하늘까지 닿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
그렇게 두 시간여가 지나고 도등수가 리벤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리벤저는 권지한과 서채윤에게 꾸벅,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갔다.
다들 떠나는 가운데 땀이 송골송골 맺힌 박수빈이 다가왔다. 햅쌀이가 삐유! 울면서 박수빈에게 날아가려는 걸 권지한이 모른 척 손으로 덮어 버렸다. 박수빈은 권지한이 그러든가 말든가 윤서를 향해 빙긋 웃었다.
“윤서 씨의 정체는 제가 책임지고 지킬게요. 나가서도 조용히 살게 말이에요.”
“수빈 씨의 권력이 그렇게 컸습니까?”
“그럼요. 나름 힐러 중에서는 세계 탑이라고요.”
처음부터 느꼈지만 어지간히 뻔뻔한 사람이었다.
“‘가이아의 손길’이라든가 ‘가이아의 빛’ 같은 스킬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저도 가이아 스킬 보유자가 돼서 검은 포탈에 들어가고 싶은데.”
“정말 무서운 얘기네요.”
“무섭다니요. 가이아 시스템이 듣고 있다면 꼭 고려해 주세요. 힐러가 한 명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심지어 가이아 시스템에 말까지 건다.
생명의 신이 ‘박수빈’에게 흥미를 갖습니다.
죽음의 신이 ‘박수빈’에게 흥미를 갖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지 않은 신들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윤서 씨, 정말 검은 포탈 대비는 다 되어 있는 거죠?”
“걱정 마. 우리 형은 내가 안전하게 지구에 데리고 갈 거니까.”
“저 윤서 씨와 대화 좀 해도 될까요?”
“내 허락 받아야 하는데 허락도 안 받고 지금까지 실컷 얘기했잖아. 이제 한도 초과야.”
“윤서 씨와 대화하는데 왜 권지한 헌터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왜냐면 내가 바로 윤서 형의 이상형이니까.”
박수빈은 이 말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가이아의 빛…. 얻고 말겠어….”
가이아보다는 탐욕의 신쯤이 박수빈에게 흥미를 갖지 않을까….
“수빈 씨.”
박수빈이 일어나자 윤서가 그를 불렀다.
“낙엽 길드원들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쪽에는 아직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윤서 씨 성격이라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밝혀서 실컷 놀려 먹고 싶겠죠. 실컷 놀려 먹다가 밝히거나.”
“…….”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의사들과 대기하고 있을게요.”
박수빈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인사한 후 출구 포탈을 빠져나갔다. 윤서는 왠지 실컷 놀림당한 기분이 들었다.
도등수는 가장 마지막에 나갔다. 검은 던전 공략 작전을 알고 있는 그는 딱히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지금까지 작전대로 잘 흘러왔으니 앞으로도 작전대로 잘 흘러갈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출구 포탈이 30분 남았을 때 대던전 안에 남아 있는 이는 권지한과 윤서, 화심밖에 없었다.
화심은 검은 포탈에 들어가기 위해 남은 게 아니라 기억 조작 해제 때문에 남았다. ‘마지막 관문 앞 서채윤’이라는 이름의 스토리.
“준비됐나?”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지한은 저번처럼 윤서의 손을 붙잡았다.
‘화심’이 당신에게 적용되어 있던 기억 조작을 해제했습니다.
삭제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눈부신 빛이 윤서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