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8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82)화(182/195)
#163
마침내 서채윤이 최종 보스를 물리쳤을 때 이강진은 다른 이들처럼 드디어 모든 게 끝났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은 멸망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제 이 던전을 나가기만 하면 된다.
이강진은 허탈하게 서서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시체였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단 다섯뿐.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가 않군….”
마크 파심의 중얼거림에 이강진도 공감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서채윤을 품에 안은 채 출구 포탈을 기다리는데, 포탈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가 나타났다.
출구 포탈과 함께 나타난 것은 새카만 색의 포탈.
그때 이강진은 <가이아의 눈>과 <가이아의 마음>을 보유한 상태였다. 이전 소유자들이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갈 때 <가이아의 그림자>로 스킬을 훔쳤다. 어차피 그들은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는 <가이아의 눈>으로 검은 포탈의 선택지 두 개를 확인했다.
설명을 읽으며 그는 허탈해졌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이아 스킬 소유자들이 죽어 갈 때 마침 옆에 있었던 게 어떤 거대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혀, 형…. 이게 대체.”
서채윤의 흐릿한 눈에 푸른 빛이 돌고 있었다. 서채윤 또한 어떤 스킬로 검은 던전의 설명을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하는 녀석을 라 비지나가 잡아 눌렀다.
이강진은 고민했다.
검은 던전의 몬스터 전멸… 불가능하다. 가이아 스킬 보유자는 자신과 서채윤뿐. 서채윤은 치유 내성까지 생긴 상태.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가이아의 대지>를 훔친다면?
서채윤에게서 <가이아의 대지>와 <염력>, <오르트의 구름>, <딥 필드>를 훔치고…. 마크 파심에게서 치유 스킬과 마력 치유 스킬, 정화 스킬을. 가리스 로미오와 라 비지나에게서 공격 스킬을 훔친다면?
“강진이 형.”
이강진은 작은 부름에 크게 움찔했다. 이강진이 귀를 기울이자 서채윤이 말했다.
“제가 들어갈게요.”
“…….”
“어차피 치유 내성에 걸려서 이제 쓸모없어졌어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건 들어가서 소멸을 선택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채윤은 거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에서 주절주절 말했다.
“저 본래 던전 나가면 자살하려고 했던 거 알잖아요. 형들이랑 누나는 얼른 나가요. 그리고 내 유언 좀 들어주세요. 내가 유언을 299개나 받아서요, 빨리 말할게요. 그게 다 뭐냐면 참돔 9짜 10마리 낚시랑, 스쿼트 3백만 회랑 초코크랙쿠키 10만 개랑….”
“…….”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라 비지나와 다른 두 명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물었으나 이강진은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는 후련한 마음으로, 이도민이 죽고 나서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채윤아.”
“…손뜨개 니트 100장… 네?”
“미안하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리벤저의 귀염둥이 막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 녀석. 비록 애지중지해주지는 못했으나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다.
서채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강진은 주저하지 않고 <가이아의 마음>을 사용했다.
S급 레드-블랙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이만큼이 희생됐다. S급 블랙 던전은 얼마나 어렵고 끔찍한 곳일까. 더군다나 가이아 스킬 보유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데….
‘10년 후에도 클리어는 불가능해.’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10년 후 대던전이 다시 나타나면 사람들은 다시 서채윤을 들여보내려 할 것이다. 아니, 사람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서채윤은 분명히 이곳에 다시 들어오려고 할 것이고, 그때도 자신이 희생하려고 할 것이다. 보나 마나 뻔하다.
그래서 그는 기억을 잃어가는 서채윤에게 유언을 남겼다.
“여길 나가면 잠적해. 헌터 일은 그만두고 조용히 사는 거야. 대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채 그저 평화를 당연한 듯 누리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몬스터와 싸우지 말고 일상을 누려. 이게 내 유언이야.”
“…….”
서채윤은 대답이 없었다.
기억 조작을 완료한 이강진은 떨어져 있던 단검을 라 비지나에게 넘겼다. 라 비지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강진.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 것인가?”
“평화가 시작되는 상황이죠. 10년 한도의….”
“10년?”
“…아닙니다.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그것보다 얼른 일어나서 나가십시오. 채윤이는 라 비지나가 업는 게 좋겠군요.”
“이강진. 꼭 그대는 나가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채윤이를 데리고 나가세요. 햅쌀이는 가지고 있다가 채윤이가 깨어나면 주고요.”
“저 블랙 포탈은?”
“아, 저건.”
이강진은 세 명의 생존자에게 간단한 암시를 걸었다.
“블랙 포탈은 사라졌잖습니까. 무슨 조건이 안 맞는다고.”
“아아…. 그렇군….”
이강진은 라 비지나에게 정신을 잃은 서채윤을 업혔다.
생존자 네 명이 출구 포탈을 빠져나갔다.
이강진은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서채윤이 부르는 ‘강진이 형’은 다시는 들을 수 없겠지.
‘강진이 형.’
‘형, 강진이 형.’
조그만 것들이 나란히 삐약삐약대는 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막내들에게 못 할 짓만 하고 말았다.
마력 고갈에 시달리느라 제정신이 아닌 녀석을 죽이고.
저렇게 착하고 귀여운 녀석의 기억을 두 번이나 조작하고.
이강진은 뒤돌아섰다. 검은 포탈 앞에 도착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마음은 먹었으나, 각오는 했으나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희생과 죽음의 삶. 모든 게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세상엔 설령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이강진은 검은 포탈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윤서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이번 기억은 이도민 때보다 짧았다.
모든 기억이 들어온 윤서가 옷을 털며 일어났다.
“화심 헌터, 수고했습니다. 이제 나가세요.”
“…….”
윤서는 담담했는데 화심이 입을 가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봐, 넌…. 괜찮은가?”
이 괜찮냐는 물음은 나가도 괜찮냐가 아니라 그 비극적인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심정이 어떤가 하는 질문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권지한이 윤서의 상태를 확인했다. 윤서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검은 던전의 시스템 창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너는… 정말 강하군.”
생명의 신이 안타까워합니다.
죽음의 신이 뿌듯해합니다.
“우리 형이 존나 강하긴 해. 내 이상형이거든.”
권지한이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화심은 창백해진 얼굴로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이만 가겠다.”
돌아서는 화심에게 윤서가 물었다.
“화심 헌터, 그 노각성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화심이 걸음을 멈췄다.
“…그건 참 뜬금없는 질문이군.”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그 겁 없는 노인은 여기 들어오겠다고 지원까지 했다. 다행히 떨어졌더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제 나가서 무용담이나 말해 줘야지. 더 궁금한 거 있나?”
“없습니다.”
“그럼 이만.”
화심이 성큼성큼 출구 포탈로 향했다.
권지한이 윤서에게 귓속말했다.
“왠지 짜증 나는데 가이아가 가이아 스킬 회수해 가면 좋겠다.”
화심은 움찔했지만 끝내 출구 포탈로 나갔다.
***
이제 대던전에 남은 사람은 권지한과 윤서, 둘뿐이고 출구 포탈은 10분 남았다.
권지한과 윤서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서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권지한 헌터, 슬슬 우리도 결정할까요.”
“결정? 결정이라니 무슨….”
권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우리 작전 신뢰한다고 했잖아. 그냥 계획대로 들어가서 폭탄 터뜨리면 되는 거야. 다른 생각은 하지 마.”
폭탄.
권지한이 말한 폭탄은 지구에서 가져온 반물질 폭탄을 뜻했다.
‘사실은 인류가 오랫동안 계획한 일이 있습니다. 행성 지도나 우주선, 워프 홀 말고도 10년간 계획해 둔 것 말입니다.’
‘인간은 지금 뭔가를 만들고 있어. 그게 뭐냐면 폭탄 아이템 같은 건데….’
그때 얘기한 폭탄 아이템이 바로 반물질 폭탄이었다.
대격변 이전까지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은 1961년 구소련 때 만들어진 ‘차르 봄바’이다. 기술력이 부족해서 더 강한 폭탄을 못 만든 것이 아니다. 폭탄의 위력이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안 만든’ 것이다. 이미 지금의 무기로도 충분해서 더 강한 무기가 필요하지 않고, 유지하는 데에도 위험이 따르는 등 여러 전략적인 이유로 그 이상의 무기 개발은 중지했다.
그때의 ‘차르 봄바’는 50메가 톤급이었고, 대던전 최종 드래곤의 브레스 위력은 60~70메가 톤급이다.
60년대에 이미 인류의 무기는 드래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니 대격변 이후 각종 부산물과 아이템, 스킬을 사용해서 본격적으로 무기 개발을 시작하자 기가톤급은 우습게 만들었고, 인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템화 가능한 반물질 폭탄을 만들어 냈다. 100테라톤급의 소행성 충돌과 비슷한 위력…. 던전을 클리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로 넘어갈 수 없었던 던전의 경계마저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록시마 b라는 행성의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 한 개를 만드는 데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
연구를 주도한 곳은 한국이었는데, 이제 막 회복 중인 타 국가들은 처음에는 연구비에 쓸 돈 같은 건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10년 전 대던전 클리어 후… 많은 나라에서 연구에 협력하겠다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 액수가 아무리 천문학적이든 1201명의 죽음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므로. 이 폭탄 하나로 언젠가 미래에 1201명의 영웅을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돈을 들일 가치가 있으니까.
리벤저의 죽음이 모두에게 하나의 목표를 안겨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