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9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90)화(190/195)
#170
삐유삐유!
햅쌀이는 부리로 윤서의 살갗을 콕콕 찌르고, 발톱으로 머리카락을 뜯고, 날갯짓하면서 정신 사납게 했다.
“악, 악. 햅쌀아.”
삣! 삐이잇!
“아, 미안.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삐유유! 삐유! 삐! 삐유!
“그래, 내가 잘못했어.”
삐이!
햅쌀이의 울음소리가 너무 서러워서 윤서는 어떻게 반항하지도 못했다. 작은 새는 서럽고, 억울하고, 서운하고 온갖 감정이 뒤섞였는지 윤서를 공격하면서도 눈물을 계속 쏟아냈다.
사랑하는 사람의 꼴이 엉망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권지한이 박수를 쳤다.
“좋아, 권햅쌀. 잘한다! 나는 못 하니까 네가 대신 응징하는 거야.”
윤서가 응징당하는 와중에도 궁금해져서 물었다.
“왜 권씨인데요?”
“형이 우리를 버렸을 때 햅쌀이랑 많은 대화를 했어. 30초였지만.”
“30초….”
“충분히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지.”
“당신이 어떻게 햅쌀이랑 대화를 합니까.”
“그 순간만큼은 우린 하나였어.”
삐유우우!
햅쌀이가 권지한의 말에 동조하듯이 길게 울면서 윤서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쳤다. 독점욕 많고 잘 삐지는 귀속 아이템을 멋대로 남에게 주려고 한 죄로 윤서는 가만히 당해야만 했다.
***
그렇게 한참이 지나 햅쌀이의 응징이 멎은 후에야 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쳐 버린 윤서는 은하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햅쌀이는 ‘왕 삐진 새’로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은 잔뜩 삐진 눈초리로 윤서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은하수를 향한 게 아니라 윤서를 향해 앉은 자세였다. 윤서는 반려아이템 님의 심기를 위해 계속 머리와 목덜미, 날개, 배, 꼬리를 쓰다듬었다. 햅쌀이는 서러움이 아직 다 풀린 상태가 아니어서 가끔 간헐적으로 삐유! 삐! 울면서 부리로 콕콕 찍었는데 그때마다 어어, 미안. 미안. 하며 사과도 해 줘야만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권지한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나 거기서 도민이 형을 만났어.”
“…네?”
“출구 포탈에서 내가 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주고 우리가 검은 던전을 클리어하도록 힌트를 줬어. 그리고 나한테 형 잘 부탁한댔어.”
윤서가 권지한을 멍하니 쳐다봤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권지한은 윤서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윤서는 몇 분 후에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도민이가… 뭘 했다고요?”
“출구 포탈에서 내가 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주고 우리가 검은 던전을 클리어하도록 힌트도 줬어. 그리고 나한테 형 잘 부탁한댔어.”
권지한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윤서가 묻는다면 천 번을 더 반복할 수도 있었다.
윤서의 놀라서 동그래진 갈색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권지한은 햅쌀이가 퐁퐁퐁 눈물을 쏟을 때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나 윤서는 햅쌀이와는 달라서 쉽게 울지는 않았다.
“그랬군요. 그래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말투였다. 윤서는 눈을 감고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이 와중에도 햅쌀이가 쓰다듬이 멈추자마자 윤서를 공격해 와서, 결국 권지한이 이따 다시 하자며(‘그만하자’가 아니었다.) 말렸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윤서는 조금은 개운한 표정이었다.
최종 관문을 통과하고도 이렇게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는데…….
윤서는 등받이에 상체를 깊숙이 기대며 은하수를 바라봤다.
이제 튜토리얼이 끝났고, 가이아 시스템은 대대적으로 던전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다.
관리자가 되면 이도민의 자아는 어떻게 될까?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언제 한번 던전에서 ‘러브 인 한강’ 볼까요….”
“좋아. 빔 프로젝터 챙겨서 1화부터 마지막까지 정주행하자. 근데 이러면 도민이 형이 염장 당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좋아하면서 같이 볼 거예요. 그 녀석은 ‘러브 인 한강’ 광팬이거든….”
윤서는 시야가 가물가물해서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이런 은하수를 맨눈으로 구경하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텐데도,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사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으나 윤서는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성 후 처음으로… 아주 길었던 임무를 마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은 여유롭고. 무릎 위의 햅쌀이는 따끈따끈하고……. 권지한의 시선도 말랑말랑하고.
윤서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
그 모습을 보면서 권지한은 윤서를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우기 전 꼭 말해야 할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도민이 형이 우리 사이 인정한 거 맞지?”
“우리 사이가 뭔데요….”
“이제 우린 대던전 공식 연인이야. 누군가 배신하면 대던전이 징벌할 거야. 대던전의 징벌이라니 존나 무섭다. 평생 사귀어야겠네. 참고로 한 명 남겨 두고 먼저 죽는 것도 배신이야. 형은 영웅의 신이 되고 난 영웅의 신을 가호하는 신이 될 때까지 사는 거야. 알았지?”
“으음…. 뭐… 그러든가요.”
윤서가 하품을 했다. 권지한은 웃으면서 자도 좋다고 했다. 윤서는 자세를 고쳐 앉고 권지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딱 적당한 높이여서 편했다.
잠들락 말락 하는 윤서에게 권지한이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연애하는 거 공개해도 돼?”
“비밀로… 하죠.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알았어. 그럼 한 명한테만 말해도 돼?”
“그렇게 하세요….”
당연히 그 한 명이 유준철이겠거니 해서 순순히 대답했다. 말할 상대가 태재식이란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만, 아직은 까마득히 모르는 윤서는 권지한에게 편히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삐유, 하는 작은 소리와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자니까 이따가 마저 응징하자.”
응징을 안 하는 건 없는 거냐고.
윤서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한국은 11월, 슬슬 니트의 계절이니까 101번째의 니트를 권지한에게 만들어 줘야겠다. 그리고 눈 내리는 계절이 오면 함께 지리산에 올라가야지. 눈 덮인 지리산은 정말이지 이 우주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예전에는 아름다워서 슬펐는데, 이제 다시 가면 아름다워서 행복할 것이다. 좋아. 강진이 형의 영혼 가루는 눈 덮인 지리산에 뿌려야겠어.
무릎에 놓인 두 손을 권지한이 붙잡아 왔다. 윤서는 잠들락 말락 한 상태에서 권지한과 손가락을 얽었다.
이대로 잠들면 대던전에서의 일을 꾸게 될 것 같았다. 이도민이 드라마를 보자고 조르면 옆에서 이강진이 드라마 이야기 좀 그만하라며 이도민의 머리칼을 헝클이고, 툴툴대는 형태 아저씨와 운동을 강요하는 리타 누나, 자꾸 누나라고 부르라는 라 비지나.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서해 형과 효미 누나….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는 그런 꿈. 이제는 더 이상 악몽이 아닐 것이란 직감이 와서 윤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잠이 들었다. 권지한과 맞잡은 두 손의 온기가 심장까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