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9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외전 1.(192/19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7권 (외전)
외전 1.
삐유삐유.
“햅쌀아…. 조용히….”
삐융.
“진짜 조금만 더 잘게….”
삐유! 삐윳!
“…….”
작은 새가 머리칼을 콕콕 쪼아 대며 신경질을 부렸다. 역시 햅쌀이는 세 번 참아 주지는 않았다. 여기서 좀 더 지나면 양 날개로 얼굴을 파닥파닥 때리겠지만 윤서는 그냥 무시했다. 너무 피곤해서 어쩔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도 멀쩡한 S급 각성자인 그가 이렇게 잠에 취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제는 정말….
지잉, 지잉.
햅쌀이에 이어 이번에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실눈을 뜨고 보자 ‘남친’이라는 저장명이 떠 있었다. 자신이 저장해 놓은 이름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바뀌어 있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권지한’이라고 저장해 놓은 걸 계속 못마땅하게 여겼던 권지한이 윤서 몰래 ‘귀여운연하남친’으로 바꿨다. 물론 윤서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권지한’으로 돌려놨다. 나중에 또 핸드폰이 권지한 손에 들어갔다가 나오자 ‘연하남친’으로 바뀌어 있어서 또 원상 복구 해 놨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딴엔 양보한다고 수식어를 줄인 점은 귀여웠다.
‘이건 이대로 둘까….’
지잉지잉.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윤서는 전화를 무시했다.
딩동. 딩동. 마지막 차례는 초인종이었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사실 이미 집 앞에 와 있을 줄 알아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나를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런 꼭두새벽(현재 오후 12시 29분이었다.)부터….
사실 괴롭힌 건 아니고 서로 즐겼긴 하지만….
…….
사실은 권지한이 그만하자고 했지만 윤서가 강행했다.
잔소리하려고 이렇게 일찍 찾아온 걸까?
“으으….”
윤서는 치를 떨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혀엉.” 방문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햅쌀이가 몹시 반가워하며 파닥파닥 날아갔다.
“형. 뭐 해.”
권지한이 현관문 너머에서 꽤 다정한 목소리로 윤서를 불렀다.
어젯밤 내내 들었던 목소리였다.
“윤서 헌터님. 남자 친구 왔는데요.”
삐유!
“햅쌀아. 네 주인 아직 안 일어났어?”
삐윳삐윳삥!
“나 들어간다.”
곧이어 키패드 여덟 자리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권지한이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삐융삐융. 햅쌀이가 애교가 잔뜩 섞인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자 권지한이 어르고 달랬다. 그래그래. 형이 안 일어났어. 늦잠 자서 안 놀아 줬어. 서운했어.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윤서는 이불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오….”
낮은 탄식이 지척에서 들렸다.
“아직 이불에 파묻혀 있네.”
“…….”
“늦잠 자나 보다. 햅쌀아.”
삐융.
“그냥 용서해 줘. 우리가 어제 너무 끝내주는 밤을 보내서 그래. 대신 그만큼의 성과도 있었으니까 봐주자.”
그렇다. 어지간하면 피곤하지 않은 서채윤이 이렇게 잠에 취해 정오가 되도록 못 일어나고 있는 이유.
어젯밤 둘은…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
‘헌터 앤 스킬’
물론 게임을 밤새도록 한 정도로는 S급 각성자가 이렇게 피곤해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바로 그저께 S급 레드 던전 공략을 끝내고 돌아왔다는 점에 있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반년이 지난 현재.
‘어긋난 존재’들이 출몰하면서 던전은 그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각성자도 전보다는 많아졌고, 좋은 아이템 발생률도 증가했으며, 스킬의 위력도 강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보다는 헌터들이 혹사당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번 S급 레드 던전은 권지한과 서채윤이 함께 공략에 나섰음에도 무려 11일이나 걸렸고, 그사이 ‘헌터 앤 스킬’은 대규모 업데이트를 했다. 신 리벤저 수와 맞춘다고 신 몬스터를 300마리나 업데이트한 것이다.
지구로 돌아오면 당연히 죄다 공략 완료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돌아오자마자 게임에 접속해 보니 아직도 미공략 상태인 몬스터들이 있었다. 현재 ‘헌터 앤 스킬’ 내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잔윤 듀오’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고…. 윤서는 어떤 의미로는 던전 공략보다 혹독한 스케줄을 강행했다.
“그러게 내가 좀 쉬자고 했잖아. 더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우긴 건 형이야.”
빌어먹게도 권지한이 맞는 말만 하는 건 여전했다.
“이 형, 백 퍼 안 자는 것 같은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다는 직감이 딱 들거든 지금.”
권지한이 이불을 걷었다. 동시에 윤서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들켰지만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었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앞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권지한의 손은 언제나 따뜻해서 사람들 앞에서 쓰다듬지만 않으면 윤서도 가만히 쓰다듬 받는 편이었다. 깨울 생각은 없는 듯해서 눈을 감고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던 그때였다.
찰칵.
무시할 수 없는 카메라 셔터 음에 윤서가 눈을 떴다. 잿빛 눈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권지한이 빙긋 웃었다.
“아. 형 일어났다.”
삐윳!
권지한의 어깨에 앉아 있던 조그만 파랑새가 포르르 윤서에게 내려왔다. 윤서의 손바닥에 날아든 햅쌀이가 쓰다듬어 달라고 날갯죽지를 손가락 사이에 비볐다. 윤서는 작은 새를 만지작거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뭐 하는 겁니까. 당장 사진 지워요.”
“내가 뭘 찍었는지 알고 지우래?”
“또 SNS에 올리려고 그러죠?”
윤서가 권지한의 핸드폰을 홱 빼앗았다.
갤러리에 들어가서 방금 찍은 사진을 보자 화면 가득히 들어찬 햅쌀이가 나왔다. 파랗고 작고 토실토실한 동그라미가 쓰다듬 받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권지한이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 아이 사진 좀 찍었는데 그러면 안 돼?”
“햅쌀이라서 넘어가 주는 줄 아세요. 저번처럼 내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렸다간….”
“그때도 햅쌀이 찍은 거였어. 형 얼굴도 안 나왔고 그냥 어깨만 1cm 정도 걸린 것뿐이었잖아. 내가 아무리 그래도 형 정체는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나 입 완전 무거운 사람이야.”
“입이 완전 무거워서 태재식 아저씨한테 우리 사귀는 걸 밝혔나 보죠?”
“어쨌든 중요한 건 가이아에 맹세코 나는 단 한 명한테만 우리 사귀는 걸 밝혔다는 사실이지. 그 한 명이 전 세계인한테 까발려 버렸다는 게 정말 안타까워.”
“정말 뻔뻔하네요.”
“권뻔뻔한테 모닝 키스 해 줘.”
“그런 연인 같은 짓 자꾸 요구하지 말아 줄래요?”
“잊고 있나 본데 우리 연인 맞아. 무려 사랑의 신도 가호하는 커플이지.”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어졌다.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사랑의 신이라는 가호 신이 하나 더 붙어 버렸다…. 생명의 신과 죽음의 신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신으로, 가호 신이 된 후 줄곧 민망한 요구를 해 오고 있었다.
“형아, 뽀뽀.”
“미치겠네.”
“난 가끔 형이 반말하면 염통이 쫄깃해지더라. 무서운데 존나 섹시해.”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려는 윤서의 어깨를 권지한이 부드럽게 밀어서 다시 눕혔다.
“일어나라면서요?”
“모닝 키스가 먼저야.”
“…….”
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봤다. 권지한은 윤서의 뺨을 감싼 채 가만히 바라봤다. 윤서의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곧 침착함을 찾았다. 권지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잘생긴 얼굴을 얻다 들이밀어요? 라고 하고 싶었으나 윤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감았다.
둘의 콧날이 맞닿았고, 마침내 입술까지 닿으려는 그때….
삐유삐유!
“…….”
“…….”
삐융? 삐융!
천진난만한 파랑새의 지저귐에 윤서가 눈을 떴다. 햅쌀이가 어느새 윤서가 베고 있는 베개에 앉아 현재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연인의 애정 행각을 5cm 앞에서 감상 중이었다.
“그만하죠. 햅쌀이가 보잖아요.”
“혹시 에고 소드에는 진도 지킴이 기능도 있나?”
“헛소리하지 말고 몸이나 치우세요. 무거워요.”
삐윳. 삐윳!
그래그래, 알았어. 일어날게. 몸을 일으키려는 윤서를 권지한이 또다시 침대로 밀었다. 윤서가 눈빛으로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뚱한 표정의 권지한이 윤서의 뒤통수를 턱 붙잡아 왔다.
“그래도 뽀뽀는 해.”
“잠깐-.”
흡. 권지한이 무턱대고 입을 맞춰 오는 바람에 윤서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당연한 것처럼 혀가 안으로 들어왔다.
삐유삐유! 삐유! 삐융!
햅쌀이가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둘의 얼굴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다. 자기도 뽀뽀해 달라는 것이었다. 윤서는 나중에 실컷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지금은 연하 남자 친구와의 키스에 몰두했다.
***
씻고 나오자 권지한이 차린 거한 점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양을 보니 두 사람분이어서 윤서가 물었다.
“권지한 헌터도 아침 안 먹었습니까?”
“아침 먹었지. 일곱 시에…. 지금은 한 시가 되어 가고 말이야. 배고파 죽겠다. 얼른 먹자.”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 앉자 햅쌀이도 테이블 위의 자기 몫의 그릇 앞에 앉았다. 굳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면서 권지한과 윤서가 하는 건 꼭 따라 해야 성이 차는 고집쟁이 아이템을 위해 늘 햅쌀이 몫까지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둘은 먹으면서 대화했다.
“햅쌀이는 요즘 새 모습만 하네.”
“날아다닐 수 있어서 편하니까요.”
“새, 족제비, 고양이, 도마뱀, 날다람쥐, 고슴도치…. 혹시 인간 미니미 버전으로는 못 변하려나?”
“제가 ‘동물’이라고 인식하는 모습만 할 수 있어요.”
인간도 엄연히 동물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윤서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있어서 햅쌀이는 인간 모습은 취할 수 없었다.
“나도 얼른 햅쌀이 같은 아이템 갖고 싶다. 새 두 마리가 나란히 철푸덕 앉아서 맛있게 모이 쪼아 먹으면 진짜 귀여울 것 같지 않아?”
윤서는 보쌈을 입 안에 넣으며 잠깐 햅쌀이를 쳐다봤다. 햅쌀이는 즐거운 듯이 꽁지깃을 흔들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정말 귀엽겠군요.”
“그렇지? 가이아가 보고 있다면 제발 내 소원 좀 들어주세요.”
윤서는 피식 웃었다.
“아쉬운 대로 게임에서 펫 하나 더 사야겠는데. 밥 먹고 센터 갈 때까지 시간 좀 있는데 게임 할까?”
“당분간은 게임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네요.”
“오…. 이제 기록 세웠다 이거지.”
잔윤 듀오는 미공략 상태였던 보스 몬스터 열두 마리를 해치웠다. 게임 전체 기록으로 따지면 순위권은 아니었지만, 둘의 자체 기록으로는 신기록이었으므로 윤서는 이쯤 만족했다.
“잘 생각했어. 환자가 너무 앉아만 있는 건 좋지 않지.”
“누가 환자라고?”
“형이요.”
“환자였다고 정정 바랍니다. 지금은 다 나았으니까.”
“그래. 가서 붕대 풀어 보면 알게 되겠지.”
윤서는 전투 중 ‘어긋난 존재’의 그림자 창에 옆구리를 찔렸다. 그 순간에도 몸을 반 바퀴 회전해 다행히 장기는 비껴갔지만 옆구리 살점이 뜯겨 나가서 큰 출혈이 있었다. 멀리 있던 권지한이 순식간에 날아와 손을 덜덜 떨면서 상태를 살폈는데, 그 모습에 윤서는 신음을 꾹 눌러 참았다. 신음을 내 버리면 권지한이 공황을 일으킬 것 같아서였다.
사실 피만 철철 났지 위중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서도 권지한이 옆구리가 꿰뚫린 채로 피 흘리고 있으면 기겁했을 터였다.
“일단 먹어. 천천히. 뭐 내가 말 안 해도 꼭꼭 씹어 먹겠지만.”
“…….”
윤서는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보쌈을 꼭꼭 씹어서 삼켰다. 튜토리얼은 끝났으나 유언이 끝난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스무 번 이상씩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평생 그래야만 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
집에서 나온 시각은 1시 30분이었지만 권지한의 차에 올라탄 시각은 2시였다. 나와 보니 햇살이 너무 좋고 바람도 따뜻해서 한 바퀴 산책하고 오자 이 시간이 되었다. 윤서가 차에 올라타자 찰보리가 인사해 왔다.
“어서 오세요. 윤서 님.”
“안녕, 찰보리.”
삐유삐유.
“어서 와. 햅쌀아.”
삐융.
“석영 본사로 출발할게요.”
찰보리는 예전엔 인사할 줄도 모르는, 정확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AI였는데 권지한이 이름을 지어 주면서 시스템도 찹쌀이처럼 개선되었다. 찹쌀이처럼 시시콜콜한 잡담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였고 윤서는 창문을 조금 내려서 따뜻한 바람과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달칵. 그때 익숙한 소리에 윤서가 권지한을 바라봤다. 권지한이 작은 약통 뚜껑을 열어서 물과 함께 알약 두 개를 삼키고 있었다. PTSD 약이었다.
권지한은 대던전 이후 꽤 중증의 PTSD를 앓고 있었고, 상담 치료와 약 복용을 병행 중이었다.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둘은 어떤 신호도 없이 동시에 약을 꺼내 삼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윤서는 아무렇지 않았고 권지한 혼자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윤서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권지한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 여기 소름 돋았어. 쓰다듬어 줘.”
권지한이 팔을 내밀었다. 엄살 같은 어조와 다르게 정말로 팔뚝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윤서는 죄책감과 미안함, 안타까움에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권지한이 발작하듯이 공황 장애 증세를 호소했을 때는 본인도 원인을 몰랐다. 그러나 세 번 더 반복되고 정식으로 상담 치료를 받은 후에야 윤서의 입에서 ‘안녕’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의 ‘안녕’은 아무렇지 않았으나, 심지어 본인도 ‘안녕’을 입에 달고 살았으나 윤서의 ‘안녕’에는 기겁을 했다.
그 단어는 대던전에서 윤서가 권지한을 출구 포탈로 밀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상담사는 평생 권지한의 앞에서 ‘안녕’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는 건 좋은 치료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별의 안녕은 자제하되 반가움의 안녕은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말해서 익숙해지게 해야 한다고.
윤서는 그 말을 따르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뺨을 감싸는 손길에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형 사과하라고 꺼낸 소리는 아니었어. 우울해하지도 마. 표정 너무 심각하네.”
“권지한 헌터. 제가 평생 그 단어를 안 쓰고 살아갈 순 없어요.”
“알아. 그래도 나 6개월 만에 많이 나았잖아. 예전엔 약 먹어도 손이 덜덜 떨렸는데 지금은 약 먹으면 싹 가라앉는단 말이지. 공포 저항 아이템으로도 차도가 없었는데, 현대 의학은 신기해. 아무튼 나도 형이 평생 안녕이란 인사도 못 하도록 만들 생각은 없고 낫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슬퍼하지 마.”
권지한이 빙긋 미소 지었다. 청량한 소년 같으면서도 동시에 처연한 사내 같은 미소였다.
“이쯤 해서 형 약병 불시 점검이나 해야겠는데.”
윤서는 순순히 약병을 꺼냈다. 권지한이 신중하게 알약 개수를 헤아렸다.
“던전 나오고서 하나도 안 줄었네.”
“게임하느라 먹을 정신도 없었어요.”
“음. 사흘에 하나라. 이 정도면 훌륭해.”
“…….”
“왜 웃어?”
“연인이 둘 다 약을 달고 사는 게 웃겨서요.”
“나는 달고 살지는 않아. 형 입에서 발음해서는 안 되는 그 단어만 나오지 않으면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고. 형은 약을 달고 살고 있지만.”
“나도 복용 횟수는 많이 줄었는데요.”
“형은 한번 도지면 한두 개로는 안 가라앉는 게 문제야. 더 센 걸 처방받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중간한 약을 많이 먹는 게 나은지 오늘 가서 물어보자.”
“네, 그래요.”
권지한은 다정한 눈으로 윤서를 내려다보다가 뺨에 짧게 입 맞췄다. 대번에 햅쌀이가 난리 나서 제게도 뽀뽀를 종용했다. 권지한은 햅쌀이를 손에 쥐고 뽀뽀를 퍼부었다.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자 파란색 깃털이 폴폴 날렸다. 윤서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솜털 같은 깃털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수거했다.
이제 곧 석영 기부 파티가 있는데 그때 햅쌀이 깃털을 내놓으면 꽤 괜찮은 수익이 날 것 같았다.
***
“야, 저기 서채윤이랑 권지한 아냐?”
“뭐? 어디? 헉, 서채윤이다!”
“미친…. 개쩐다. 미쳤다….”
두 사람이 석영 건물에 들어서자 로비의 사람들, 민간인이고 각성자고 할 것 없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우리도 저거 봐야 하는데. 내일 보러 갈까?”
그 와중에 권지한이 한가하게 위쪽을 가리켰다.
석영 본사 로비에는 현재 흥행 1위인 영화의 홍보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반물질 폭탄은 어떻게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블랙 포탈 던전 공략을 가능하게 했던 반물질 폭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인류 문명 사상 단둘뿐인 반물질 폭탄 경험자 서채윤과 권지한의 인터뷰도 포함되어서 개봉하자마자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죠.”
“이왕 영화관 가는 김에 하루 종일 영화 파티 어때. 조조부터 시작해서 마감까지. 예매는 내가 할게.”
“그러든가요. 빨리 걷기나 하세요.”
서채윤 가면을 쓴 윤서가 권지한의 커다란 등 뒤로 쏙 숨은 채로 옷을 잡아 흔들었다. 권지한은 쿡쿡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윤서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서채윤을 향한 시선에는 선망과 동경, 흠모가 대부분이었지만 적지 않게 아련함과 안타까움도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는 했다. 동료를 모두 잃은 서채윤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선은 정확히는 ‘동정’이 아니었다. 뭔가 정말 막연한… 애틋함과 아련함, 그리고 존경심과 미안함까지 담긴 시선. 그래서 윤서는 더욱 어색하고 서먹했다.
삐유우. 삐융. 삐융삐융.
숨고 싶은 주인과는 다르게 관종 새는 그 조그만 것도 날개라고 활짝 펼친 채로 주위를 날아다니며 즐겁게 울었다.
“거기. 사진은 안 됩니다.”
“아, 안 찍었는데요?”
“핸드폰 주십시오.”
“아, 제발. 한 장만요. 딱 한 장만. 개인 소장만 할게요.”
“안 됩니다.”
누군가 사진을 찍자 경비원들이 당장 달려와 저지하고 사진을 삭제했다. 서채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항상 온몸을 싸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가 나타날 때마다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다.
“서채윤 헌터! 제발 여기 좀 봐 주세요. 한 번만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서채윤 헌터. 행복하세요!”
한번 소란이 일자 그 소란에 용기라도 얻었는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몸뚱이를 들이밀진 않고 멀리서 외쳐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도 사람이 많았으나 권지한과 서채윤이 올라타자 다들 둘만 탈 수 있게 양보했다. 심지어 이미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내렸다. 하나같이 울망울망한 표정이었다.
“병원 가시는 거죠? 얼른 올라가세요.”
“서채윤 헌터…. 제발 아픈 곳 없기를….”
안타까움 가득한 목소리에 윤서는 대충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어흑….”, “크흡….”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형, 손이라도 흔들어 줘.”
“미쳤습니까? 빨리 올라가기나 해요.”
“알았어.”
권지한이 쿡쿡 웃으며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자 햅쌀이는 축 처졌고, 윤서는 반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형 인기가 끝날 때까지 해야지.”
“지금 그렇게 뻔뻔하게 대답할 때예요? 당신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잖아요!”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신 대던전 클리어로부터 3일이 지나 있었다. 가호 신들이 얘기해 줬기 때문에 지구인들도 두 영웅이 죽은 게 아니라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둘은 지구 땅을 밟자마자 성대한 귀환 기념식을 치렀다. 윤서는 피로 누적으로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권지한이 모든 것을 밝힌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10년 전에 있었던 일부터, 신들의 우주를 지키기 위한 계획과….
서채윤은 포션도 치유 스킬도 통하지 않는 비각성자보다 못한 유리 세공품 같은 몸으로 신 대던전에 들어왔으며, 마지막 검은 던전은 이러이러한 선택형 던전이었는데 서채윤이 자기를 출구로 내쫓고 혼자 들어가서 희생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전부 까발렸다.
물론 윤서가 잠들기 전 미리 합의하긴 했다. 치유 내성까지 공개하기로. 그러나 담백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감정을 담아 구구절절하게 밝힐 줄은 몰랐다.
그 뒤로 세상이 뒤집혔다. 사람들은 서채윤을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고 가녀린, 보기에도 불안 불안한… 이를테면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이나 아기 고양이…,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는 죽겠지’의 그 잎새…, 소설 속 목숨을 바쳐 세상을 구하고 죽어 가는 영웅…,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투명한 이슬… 정도로 보기 시작했다.
동경과 선망은 여전했으나 그 시선에 가녀리고 약한 것을 보는 아련함과 애틋함까지 섞인 것이다.
수재희는 이 일을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BC, AD에 이어 SO 시대가 되었다고.
홍의윤이 SO가 무슨 뜻이냐 묻자 경건하게 대답했다.
‘Seochaeyoon Overprotection….’
진정 서채윤 과보호 시대의 도래였다.
윤서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한숨을 내쉬었다.
“치유 내성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어요. 검은 던전이 어떤 곳인지야 당연히 얘기해야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상태까지는 밝히지 않을 걸 그랬어요.”
“내 생각은 달라. 이 상황이 형한테는 훨씬 좋아.”
“더 좋다고요? 제정신이에요?”
“형 상태를 밝히지 않았다면 세상은 또 서채윤에게 의무와 책임을 요구했을 거야. 그건 절대 두고 못 보지.”
권지한의 말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으나 목소리는 다소 서늘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서채윤의 10년 잠적에도 꾸준히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으니까.
“근데 나도 이 정도로 과보호가 심해질 줄은 몰랐어. 세상 사람들이란 기본적으로 ‘서채윤 광팬’까지는 아니어도 ‘서채윤 광ㅍ’ 정도는 된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우리 형이 너무 인기 많아서 힘들다.”
“…권지한 헌터도 인기 많습니다.”
“말해 뭐 해? 나도 엄청나게 인기 많아. 단지 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뿐.”
“목숨은 다들 똑같이 걸었는데 저만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옳지 않아요.”
권지한이 피식 웃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다른 헌터들도 절대로 형이랑 동등한 취급은 받고 싶지 않을걸.”
권지한의 말뜻은 헌터들에게도 서채윤은 천상에 있는 영웅이라는 뜻이었지만, 윤서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하긴 민간인한테서 안쓰러운 시선을 받는 처지이니 아무도 원하지 않겠죠….”
외출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지친 윤서가 햅쌀이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권지한이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윤서는 권지한을 앞세우고 내렸다.
석영 본사는 비각성자 직원들을 위한 의료 시설도 갖추고 있다. 당연히 드나드는 환자도 비각성자인 비각성자 의료 센터 대기실에 작은 구원자, 살아 있는 전설, 지구 메시아 서채윤이 들어서자 당연히 시선이 쏟아졌다. “헛!”, “흐읍!”, “서채…!”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살아 있는 전설과 공개 연애 중인 일개 S급 헌터 권지한이 부드럽게 남자 친구의 어깨를 감쌌다.
“왜 굳었어? 안 들어가?”
“…사람이 많군요.”
“형이 막지 말랬잖아. 자기 때문에 비각성자들 불편해지는 거 싫다면서.”
권지한이 살아 있는 전설치고는 작은 등을 토닥였다. 윤서는 이 민간인들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게 암담했다. 그냥 나중에 다시 올까 싶은데 권지한이 말했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긴 많네. 혹시 세계를 두 번이나 구한 우리 형한테 차례 양보할 의향 있는 환자분은 없으신지. 오, 고개 부러지겠어요. 그만 끄덕이시고. 거기, 카메라는 안 됩니다.”
윤서는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삐유!
방금 핸드폰을 꺼내려다 만 외래 환자를 보고 햅쌀이가 파닥파닥 날아갔다.
햅쌀이는 사람들에겐 권지한 소유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관종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햅쌀이 사진은 찍어도 돼요. 실컷 찍으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냈다. 햅쌀이가 대기실 테이블 위에서 쏟아지는 셔터 음에 쫑쫑쫑 춤을 췄다.
환자들이 진짜로 차례를 양보하겠다고 말해 왔으나 권지한은 농담이라며 돌려보냈다. 두 각성자는 비각성자의 차례를 진짜로 빼앗을 마음 따위는 없었다. 윤서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비각성자들의 선망 어린, 그리고 애틋한 시선을 받으며 진땀을 흘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표정에 불편해하는 게 다 드러났을 것이다. 그런 윤서의 표정이 다 보인다는 듯 권지한이 히죽거렸다.
예약 시간에 맞춰 왔기 때문에 몇 분이 지나자 바로 이름이 불렸다.
“햅쌀아.”
삐융.
잔뜩 우쭐해진 작은 새는 그때까지도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윤서가 진료실로 들어가며 햅쌀이를 부르자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는지 깃털이 반질반질해진 햅쌀이가 어깨에 포르르 내려앉았다.
“어서 오세요, 서채윤 헌터님. 여기 앉으시지요.”
담당의가 거의 절을 할 기세로 서채윤을 맞이했다. 윤서는 가면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예전에 정체를 감추고 있던 시절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담당했던 의사와 간호사가 서채윤 전담 의료진이 되었다. 정체를 아는 이를 늘리는 게 부담스러워 선택했는데, 안 그래도 광팬이었던 인간들이 그새 광신도 수준으로 발전해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후회했다.
“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윤서가 상의를 들치자 간호사가 옷을 잡기 위해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권지한이 옷을 붙잡았다. 복부를 칭칭 감은 붕대가 드러났다.
의사는 붕대를 풀고 벌써 아무는 중인 환부를 살폈다. 햅쌀이도 기웃거렸다.
“확실히 S급이셔서 회복력이 빠르군요. 비각성자라면 반년을 운신해야 하는 부상인데 사흘 만에 이렇게….”
권지한이 쯧, 혀를 찼다.
“감탄할 일이 아니야. 차라리 회복이 늦는 게 낫지. 이렇게 잘 나아 버리니까 형이 자꾸 던전에 들어가는 거잖아.”
“하긴 그렇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알았으면 다음번에 우리 형이 다쳐서 오면 돌팔이로 치료해 줘. 최대한 천천히 낫게.”
“예…! 다음에 부상당하고 오시면 그때는 제가 의사 면허가 잘리는 한이 있어도 돌팔이 치료를…!”
의사가 의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결연하게 외쳤다. 간호사도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했다. 윤서는 당장이라도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 하나 싶어졌지만 어쨌든 소독을 하고 새로 드레싱을 감는 손길은 깔끔했다.
“다음은 왼쪽 손목을 봅시다. 복부가 이 정도면 손목도 거의 아물었겠군요.”
“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 나았어요.”
“형, 의사한테 보여 줘.”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필요 없는지 아닌지는 의사가 판단할 몫이지.”
권지한이 힘으로 윤서의 왼팔을 붙잡았다. 윤서는 권지한과 힘겨루기를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고 순순히 소매를 걷었다. 열두 바늘을 꿰맸는데 멍만 조금 남아 있었다.
“아니…. 사흘 만에….”
의사가 탄식했다. 권지한은 윤서의 팔을 들어 꼼꼼히 훑었다.
“형, 실밥은? 이거 녹는 실밥이었나?”
“제가 제거했습니다.”
“나한테 해 달라고 하지.”
“이게 뭐라고 그쪽을 불러요. 1분도 안 걸리는 일인데.”
“역시 같이 살아야겠어. 형이 내 집으로 오든가. 내가 형 집으로 가든가. 아니면 다른 집을 구하든가. 같이 살아.”
“왜 얘기가 그렇게 흐릅니까?”
“형이 혼자 실밥 빼고 있던 것도 모르고 주야장천 게임만 했던 내가 한심해서 그렇지. 같이 살면 병원에 올 필요도 없어. 내가 배워서 깔끔하게 드레싱 해 줄게. 나 요즘 의학 공부하고 있는 거 알지? 내가 집에서 치료해 주면 형을 향한 민간인 환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 느낄 필요가 없을 거야. 완전 좋지 않아?”
그건 확실히 유혹적이라 윤서가 망설이는데 의사가 벌떡 일어났다.
“두 분의 동거를 반대합니다…! 서채윤 헌터님은 전문 의료 시설을 갖춘 이곳에 계속 들락날락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간호사도 외쳤다.
“저 또한 반대합니다! 저는 서채윤 헌터님의 혈관을 0.03초 만에 찾아서 주사를 놓을 수 있습니다. 394명의 지원자로 연습했습니다!”
햅쌀이가 뭣도 모르고 인간들을 따라 했다.
삐융삥삐융!
윤서가 얼른 햅쌀이를 감싸 쥐고 말했다.
“알았으니 진정하세요. 바깥에 들리겠습니다.”
“석영은 방음이 완벽한 건물이니 걱정 마세요.”
“그런데 394명의 지원자라니 그건 무슨 소립니까?”
“예. 제가 서채윤 전담 의료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혈관 찾기 연습에 자신의 몸뚱이를 바치겠다며 394명이 지원했습니다.”
“…….”
권지한이 윤서의 옷소매를 다시 끌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전 세계가 시댁이야. 시댁 식구만 60억이라니 하…. 미치겠다. 영웅과의 공개 연애는 존나 험난해….”
윤서는 얼른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
권지한과 윤서가 본사에 왔다는 소식에 마침 새로운 유니폼을 시착하러 왔던 수재희가 내려왔다. 각성자를 마주치기도 어려웠던 비각성자 의료 센터에 인기 고공 행진 중인 헌터들이 셋이나 보이자 당연히 난리가 났다. 마침 길드에 있던 유준철이 직접 퍼펙트는 당장 너희 층으로 돌아가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200층이나 되는 건물의 모든 사람이 비각성자 의료 센터로 몰려들었을지도 몰랐다.
퍼펙트 대기실 중앙 소파에 다 함께 모여 앉았다. 다 함께라고는 해도 셋밖에 안 되었다. 로렌스 밀레와 리오 델리는 1년 휴가를 얻었고, 2팀과 옐레나는 던전 공략 중이어서 현재 인원은 알렉 스위치와 수재희, 화심밖에 없었다.
S급이란 게 밝혀진 화심은 2팀에서 1팀으로 올라왔다. 본인은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그렇다고 석영을 박차고 나가지는 않았다. 유준철이 어떤 조건으로 화심을 붙들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우리한테 올라오라고 하지 그랬어요. 의료 센터가 난리가 났잖아요.”
윤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올라오라고 전화했으면 절대 안 올라왔을 거면서. 휴무일에 굳이 직장 동료를 봐야 하냐는 게 형들 지론인 거 다 알거든요. 햅쌀아, 네 아빠들 너무 매정해.”
수재희가 우는소리를 하면서 테이블 위에 손으로 동굴을 만들었다.
삐융삐윳.
햅쌀이가 딱 좋아하는 크기의 구멍에 작은 몸을 집어넣었다. 윤서는 방금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아빠들’이란 표현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알렉이 물었다.
“네.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부상 입었다고 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네. 솔직히 다른 녀석들이 다쳤다는 얘기를 들을 때보다 더 불안하다네. 우리도 이럴 정도니 권지한 헌터는 아주 무서웠겠구만.”
“그래서 내가 약을 달고 살지.”
권지한이 자그마한 약통을 흔들었다.
사실 헌터들이라면 대부분이 약을 복용 중이었다. 알렉과 화심도 각성 이후 늘 처방받고 있었다.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그동안 복용하지 않았던 권지한과 아직도 복용하지 않는 수재희가 특이 케이스였다.
“난 진짜 지한이 형이 막 상담도 받고 약도 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상담 잘 받고 있어요?”
“상담은 진즉 종료했다. 그리고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나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되나.”
“나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두려운 게 생기면 이렇게 돼.”
“형은 뭐가 두려운데요? 윤서 형이 다치는 거?”
“응.”
깔끔하게 인정하는 권지한을 윤서가 힐끔 바라봤다. 권지한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하면서도 시니컬한 표정이었다.
“우리 형이 치유 내성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무섭진 않을 텐데.”
“아이템 제작 부서에서 어떻게든 포션 개발해 내려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고 들었네. 믿어 보게나.”
“참 가느다란 구명줄인데.”
“형. 제 생각엔 정답은 보물 상자에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레인보우가 보물 상자에서 기어코 S-급 무기 템을 뽑았잖아요. 그거 300억 원에 팔렸대요.”
튜토리얼이 끝나면서 자연 발생 아이템의 수도 많아졌다. 그전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비각성자도 사용 가능한 아이템 또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아이템은 희미하게라도 마력이 존재해야 사용 가능했는데 이제는 마력이 아예 제로라도 사용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각성자용 아이템은 등급에 마이너스(-)를 붙여서 표현했다.
그 덕에 최근에는 대중교통이나 길거리, 공원 등에서도 자잘한 아이템을 사용하는 민간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실생활엔 딱히 필요 없는…. 지름 10cm의 구형 공간에 꽃잎을 뿌린다든가 무지개를 띄운다든가 하는 D~F급 아이템이 대부분이라 큰 혼란은 없었다.
반면 드물게 높은 등급의 비각성자용 공격, 방어형 아이템이 나오면 아주 비싼 가격에 팔렸다. 각성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에 0을 하나 더 붙인 가격이었다. 각성자들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일단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으니 금전적으로도 이득이고, 비각성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것을 반대할 각성자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요즘에는 비각성자용 아이템만 파밍하는 길드들도 우후죽순 나타나고 있었다.
“형들 그거 알아요? 석영에서도 보물 상자 파밍 팀 만든대요.”
“안 만들면 멍청이지. 돈벌이가 되는데. 그런데 넌 어디서 들었어?”
“저는 소식통이 있다고요. 후후.”
“태재식 이사로군.”
알렉이 조용히 확신했다.
“아무튼 파밍 팀에서 윤서 형한테 필요한 포션을 딱 찾아낼지도 몰라요. 상태 이상 소멸 포션이라든가 내성의 내성 포션이라든가.”
“뭐든 간에 빨리 찾아내야 권지한 헌터도 안정을 찾겠구만.”
윤서도 동감했다. 윤서는 예전에는 치유 내성이라는 상태 이상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처음 내성이 생겼을 때는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죽을 때까지 당연히 안고 가야 하는 구 리벤저의 흔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치유 내성을 없애고 싶다,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권지한이 불안해하니까.
치유 내성이 사라지면 권지한의 불안을 상당 부분 덜 수 있을 것이다. 윤서는 권지한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몸도 조금 더 아끼게 되었다.
그때 유니폼 시착을 끝낸 화심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이미 권지한과 윤서의 존재를 알았을 텐데도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오랜만이로군.”
“네. 유니폼은 잘 맞았습니까?”
“괜찮았다. 나는 군복이 편하지만….”
화심이 캐비닛에 유니폼을 정리하고 알렉의 옆에 앉았다. 알렉이 화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자 화심이 씩 웃었다. 화심과 알렉은 그사이 꽤 친밀해진 모양이었다.
삐유융.
수재희와 놀고 있던 햅쌀이가 화심에게 날아왔다. 화심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는 나만 보면 엉덩이를 들이미는군. 어쩌라는 건지.”
“그냥 쓰다듬어 주면 되네. 자네, 손가락 있지?”
“…….”
화심이 매우 어색한 손길로 햅쌀이를 쓰다듬었다. 알렉과 수재희가 킬킬 웃었다. 화심의 귀가 살짝 붉어졌으나 쓰다듬을 멈추지는 않았다. 햅쌀이는 능숙하지 않은 손길에 불만인 듯 날개를 파닥였다가 자기가 알아서 손가락에 쓰담받고 싶은 부위를 비볐다. 수재희가 너무 귀엽다며 거의 오열했다.
화심이 괜히 퉁명스레 윤서에게 물었다.
“네 짐들은 언제 다 가져갈 셈이지? 트레이닝 룸 하나를 다 차지했는데.”
“짐이요?”
“와. 깜박할 뻔했다. 맞아요. 온 김에 싹 다 가져가세요. 이러다 건물 무너진다고요.”
“대체 무슨 말입니까. 뭘 수거해요?”
“네 애인이 안 전해 주던가?”
“형 남친한테 물어보세요.”
윤서가 권지한을 바라보자 권지한은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남들이 날 보고 형 애인이나 남자 친구라고 하니까 기분 존나 째진다.”
“…짐이라니 무슨 얘긴데요?”
“사람들이 형한테 보낸 선물들. 본래 서채윤 앞으로는 선물 안 받다가 딱 이번 던전 들어간 날부터 받기 시작했거든. 엄청 많이 쌓였다는 얘기 듣고 안 그래도 오늘 인벤에 넣어 두려고 했어.”
“선물…?”
“가자.”
권지한이 일어나 고갯짓하자 윤서가 저항 없이 따라 일어났다. 다섯 명의 S급 헌터들이 한 덩어리라도 된 듯이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
“…….”
“입에 햅쌀이도 들어가게 생겼다.”
윤서의 벌어진 입술을 권지한이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러나 커다래진 눈은 가릴 수 없었다.
트레이닝 룸이 무려 30평인데, 이 공간이 가득 차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서채윤에게 보낸 선물들로….
예쁘게 포장된 것부터, 배송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포장지가 거의 벗겨진 것도 있었고, 크기가 사람만 한 것도 있는가 하면 햅쌀이만큼 작은 것도 있었다.
“이게 세미 종교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구요….”
수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권지한은 윤서가 멍한 틈을 타서 허리를 감쌌다.
“다 검수 마친 거라니까 안심해. 아이템화 할 수 있는 선물들만 받으니까 우리는 인벤에 담아 가기만 하면 돼. 아, 식품은 따로 보관 중이라니까 가면서 들르자. 대부분이 건강 식품이라는데 아주 환영이야.”
“사람들이 왜… 저한테 선물을 주죠?”
“고마워서 주겠지?”
권지한은 앞에 쌓인 선물 중 맨 위 선물에 붙은 편지를 떼어 내 윤서에게 건넸다. 윤서가 눈으로 빠르게 읽고는 고개를 들었다. 감동했다기보다는 황당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헌터들도 선물을 받나요?”
“당연하지. 우리 길드는 헌터 선물 담당 팀도 있어. 나도 받고, 수재희도 받고. 알렉이랑 화심도 받지.”
윤서가 화심을 바라보자 화심은 조금 부끄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선물을 받는다. 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편지를 읽으면 힘이 나지.”
“맞아요. 저도 편지가 제일 좋아요. 그리고 전 해돌이 주라고 동물 사료랑 장난감도 많이 와요. 형도 반려동물용 선물 많이 받았을걸요? 햅쌀이가 지한이 형 거라고 알려져 있어도…. 형 거나 마찬가지니까.”
윤서는 수재희의 발개진 볼은 무시하고 트레이닝 룸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대중에는 햅쌀이가 ‘새’로 알려져 있어서인지 확실히 새가 그려진 박스가 많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새장도 있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니까 들여보내면 삐윳삐윳 지저귀며 재미있게 놀 것 같긴 했다
“가면도 많군. 서채윤이 이런 가면을 썼으면 하나 본데.”
알렉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화려한 붉은 꽃이 달린 무도회용 반가면이 비닐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자 수재희도 노란 초승달 모양의 가면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30평 방에 권지한의 키만큼 쌓인 선물들을 헤치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와, 끝이 없다. 지금까지 의윤이 형이 활동하면서 받은 선물보다 두 배는 더 많은 것 같아요.”
수재희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윤서는 양심에 찔렸다. 약자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은 상당 부분 버렸으나, 10년간 잠적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서는 그 잠적의 피해자가 비각성자가 아니라 각성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홍의윤 헌터… 인기가 없어요?”
“의윤이 형 인기 많아요. 그냥 형이 너무 넘사벽일 뿐이죠…. 우리 길드에서 형이랑 지한이 형은 천상계고요. 저랑 의윤이 형, 옐레나 누나가 선물 진짜 많이 받아요. 수빈이 형도요.”
“암향을 빠뜨리면 안 되지. 한국에선 우리 외국인 S급들보다도 A급인 암향 헌터가 더 인기 많지 않은가?”
알렉이 웃으며 말했다. 수재희가 아, 맞다. 하며 손뼉을 쳤다.
“강이 형도 진짜 인기 많죠. 서채윤, 권지한과는 또 다른 의미의 국뽕이라…. 도포를 휘날리며 싸우는 모습이 영상으로 보면 끝내주더라고요. 스킬 이름도 막 <동지섣달>, <겉 희고 속 검은 이>, <삭풍은 나무 끝에> 이런 거고. 자주 쓰는 아이템도 ‘청사초롱’이고. 얼마 전에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갓’도 나왔더라구요. 개존멋.”
윤서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 달 전 박강이 범람 던전 처리에 나섰을 때 아이템이 드롭됐다. 그걸 윤서가 어떻게 알고 있냐면…. 권지한과 함께 ‘러브 인 한강’ 관련으로 조사를 하던 중 박강에게 전화가 와서 알았다. 자기에게 ‘갓’이라는 좋은 아이템이 생겼는데 이걸 서채윤 님에게 바치고 싶다며…. 권지한이 핸드폰을 가져가 대신 거절하고는 이런 걸로 서채윤에게 전화 걸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끊었다.
박강은 정말 심한 서채윤 극성팬이었다.
“아무튼 강이 형이나 저나 다 인간계 얘기죠. 윤서 형은 뭐 그냥…. 다른 세계 얘기지. 어휴.”
수재희가 오버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커플 템도 많네요. 형들 이 정도면 염천 커플도 이기겠는데. 아, 이젠 염천 부부구나. 아무튼 여기 있는 것들만 세도 이길 듯요.”
확실히 권지한 것까지 같이 보내온 것들이 많았다. 아까 알렉이 들었던 반가면도 검은 꽃이 달린 가면과 세트였다. 윤서는 선물들을 인벤토리에 넣으면서 권지한에게 어울릴 것 같은 건 따로 챙겼다.
“권지한이랑 서채윤이 연애한다니까 온 세상이 난리예요. 지구에 인류 문명이 탄생한 이후로 이렇게 전 세계 사람이 하나가 돼서 한 커플을 응원한 적이 있었을까요?”
“과장하지 마시죠.”
“과장 아닌데요. 온 세상이 형네 커플에 주접을 떨고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형들 때문에 대한민국 청년 중 연애하는 인구수가 그 전보다 200% 증가했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아니, 진짠데. 봐 봐요. 형, 여기가 형네 커플 공식 팬 사이트인데 회원 수가 1억 명이거든요? 국내 사이트인데 1억 명이라구요.”
수재희가 훌쩍 다가와서 핸드폰 화면 속 웹 사이트를 보여 줬다. 북마크 표시까지 야무지게 되어 있는 웹 사이트에는 ‘권지한, 윤서 커플 공식 팬 사이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팝업 창으로 ‘현재 커플 네임 투표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윤서는 황당했다. 나는 이 사이트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는데 어째서 공식이란 말인가?
“권지한 헌터. 당신도 이 사이트 알고 있습니까?”
“응. 석영은 공개 연애 중인 헌터 커플이 있으면 공식 팬 사이트를 만들어서 관리하거든. 공식 없이 사조직만 판치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이 생기니까 길드에서 관리하는 게 나아.”
“왜 나는 몰랐을까요?”
“형은 뭐 우리 연애 관련 수익성 사업만 빼고는 알아서 하라고 석영에 일임했잖아. 들으면 심란하니까 엄청 중요한 일 아니면 말하지 말라며.”
권지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저 선물을 인벤에 주워 담았다. 윤서는 앞으로는 말해 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듣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수재희에게 다시 핸드폰을 건네자 수재희는 화면에 커플 네임 투표 창을 띄웠다.
“형은 후보 세 개 중에서 뭐가 좋아요? 권서 커플, 씨씨(CC)커플, 아이아이(II)커플.”
그러자 알렉이 윤서가 묻고 싶은 질문을 대신해서 물었다.
“권서는 이름 따서 지었을 거고. CC는 뭔가? 둘은 대학도 안 나왔는데.”
“둘이 대던전에서 캠핑카 타고 돌아다녔잖아요.”
“그게 왜?”
“캠핑카. Camper Couple. CC.”
“허, 참….”
알렉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번엔 화심이 물었다.
“II는 무슨 뜻이지?”
“둘이서 우주여행을 했잖아요. 은하수를 여행했다고요.”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1). 히치하이커. Hitchhiker. HH. 알겠죠?”
“그럼 에이치에이치 커플이어야 하지 않나?”
“H 다음 스펠링이 I니까요. 아이아이 커플이죠.”
“…….”
정말 알 수 없는 커플 작명의 세계였다.
권지한이 윤서에게 어깨를 치댔다.
“형은 뭐가 마음에 들어? 나는 아이아이 괜찮은데. 어감이 귀여워.”
“다 싫은데요.”
“그래. 그럼 더 좋은 커플 네임이 나오길 기다려 보자. 수재희, 네가 SNS에 넌지시 말 좀 해 봐. 지한이 형이랑 채윤이 형이 다 탐탁지 않아 한다고.”
수재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저한테 준다고요? 홍이 형이 던전 나오면 질투하겠지만 제가 해 보겠습니다. 저는 형들의 연애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니까요! 후후후!”
수재희의 말에 권지한과 윤서의 눈이 마주쳤다. 윤서의 동그래진 눈이 깜빡깜빡하는 걸 보고 잠깐 웃은 권지한이 수재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네가 우리 연애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고?”
“네. 어우, 진짜. 입 무거운 제가 1호여서 망정이지. 형들 보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요? 살면서 형들처럼 어설프게 비밀 연애 하는 사람들은 본 적도 없어요. 아, 시트콤에서나 봤다. 그래도 저 형들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어요. 본래 개성 강한 사람들끼리는 오래 못 간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사랑의 힘이 다 이긴 거겠죠? 크. 형들의 연애를 가장 먼저 안 사람으로서 아주 기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다음 달이면 형들 사귄 지 1년째잖아요!”
“…….”
“헉, 설마. 지한이 형, 기념일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죠?”
수재희가 윤서의 눈치를 보면서 권지한을 타박했다. 사실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윤서도 전혀 모르고 있던 기념일이니까.
“음? 자네들, 대던전이 끝나고 연애를 시작한 게 아니었나?”
“맞습니다. 검은 던전에서 서로 마음을 고백했으니까요. 수재희 헌터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요.”
“아, 역시 그렇지.”
“네…?”
“수재희 헌터. 말해 두겠는데 우리 1년 전에는 서로를 마음에 두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어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네요.”
“그, 그럴 리가….”
수재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윤서를 한 번, 재미있다는 표정의 권지한을 한 번, 다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윤서를 한 번 본 수재희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1년간 확신했던 진실이 무너져 내렸으니 충격이 큰 듯했다. 멍해진 수재희를 두고 윤서는 선물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수재희가 중얼거렸다.
“그, 그럼 사귀지도 않으면서 그, 그런… 행위들을….”
그런 행위라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서는 무시했다.
“어, 어른들은… 어른들은 더러워…!”
수재희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자리를 뛰쳐나갔다.
삐융삐융?
어리둥절한 윤서 옆에서 햅쌀이만 귀엽게 울 뿐이었다.
***
동료들과 헤어지고 권지한과 윤서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연구실에 들렀다. 석영 본사의 랩은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다. 각성 여부를 불문하고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다 싶으면 죄다 이쪽으로 끌어모았다. 로봇공학, 물리천문학, 나노신소재, 바이오메디컬…. 석영이 연구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윤서가 특히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양자 도약 워프 시스템 분야였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순식간에 공간 이동되는 아이템을 연구 중이었는데, 만약 개발에 성공하면 ‘워프 트랩’이라는 이름을 붙일 예정이었다.
“아니, 씨발. 이건 또 왜 수치가 이렇게 나와?”
“거기 프로치 잘 조이라고 했지? 관에 흡수돼서 분자 분해되어 봐야 정신 차리겠어?”
“아악. 그거 건드리지 마요. 기껏 진공 상태 만들어 놨더니!”
“뭐 하는 거야. 미친 새끼. 이 개병신 또라이 새끼! 바로 나. 크흐. 크하하하하.”
윤서가 커다란 전면 창을 통해 연구실 내부를 들여다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이곳은 올 때마다 항상 개판 5분 전의 모습이었다. 연구진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늘 분노에 휩싸여 있었고, 단 한 번도 얼싸안고 환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엄청난 진척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다들 화만 내고 있다.
“최 팀장 불러서 진행 상황 좀 물어볼까?”
“부르지 마세요. 어차피 설명 들어도 이해 못 해요.”
“저기 오른쪽에 팔뚝만 한 원통 보이지? 퍼렇게 빛나는 거.”
“네.”
“저게 워프 트랩 디자인인 것 같네. 앞으로 세세하게 수정 들어가겠지만 일단 디자인은 원통 형태로 정했나 봐. 저걸 작동시키면 높이 2m, 가로 1m의 링이 나타나는 거지.”
“생각보다 작네요.”
윤서가 실망하자 권지한이 미소 지었다.
“사람 정도는 충분히 통과 가능하니까 됐지 뭐.”
권지한이 윤서의 허리에 슬쩍 팔을 감고는 이어서 말했다.
“원통 내부의 파란 빛이 워프 입자Wof인데 트랩 크기가 더 크려면 입자도 더 많아야 하거든.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조그만 입자 하나를 만드는 데에 수억이 들어. 물론 반물질 하나에 비하면 존나 저렴한 가격이지만.”
윤서는 지금 저 링에는 입자가 몇 개 들어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직은 가이아 시스템을 따라가려면 멀었군요.”
“아니지. 가이아 시스템이 아니라 형을 따라가려면 먼 거지. ‘비상 탈출구’라니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상상했느냔 말이야. <작은 구원>은 스킬이 아니라 마법 같아.”
‘비상 탈출구’는 윤서가 ‘안전 가옥’에 이어 두 번째로 생성한 <작은 구원> 부속 스킬이었다. 스킬을 사용하면 닫힌 문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포탈이 닫힌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클리어되지 않은 던전에서 나올 수도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스킬인 것이다.
얻은 계기는 그렇게 엄청나진 않았다.
이 스킬을 얻은 것은 어느 날 권지한과 윤서가 석영 본사 로비에서 유준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러브 인 한강’의 작가에 대한 대화를 서로만 들릴 크기로 속닥대고 있는데,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차 한 대가 로비 정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급하게 내린 중년인은 막아서는 경비원들을 스킬까지 사용해서 밀쳐 내고 로비 안으로 구르듯이 들어왔다.
‘제발요…! 제발 도와주세요! 석영에서 워프 트랩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발, 무엇이든 할 테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중년인은 로비의 모든 이가 듣도록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마침 로비에 있던 권지한과 서채윤에게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중년인은 둘의 존재도 모르고 울부짖다가 사람들이 어느 한쪽에 집중한 것을 보고서야 눈치챘다. 중년인이 다급히 달려와 가면을 쓴 서채윤 앞에 다짜고짜 무릎 꿇었다.
‘서, 서채윤 헌터님. 권지한 헌터님! 저는 결정이라는 작은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지금 제, 제 길드원들이 D급 레드 던전에 들어가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한 시간은 3, 30분 남았는데. 아직 안 나와서. 예정대로라면 이미 여섯 시간 전에는 나왔어야 하는데. 아직. 아직도.’
윤서는 <확신의 저울>로 중년인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그사이 권지한은 윤서를 끌어당겨 제 뒤에 두고 중년인을 일으켰다.
‘안타깝지만 이미 닫힌 포탈은 열 방법이 없는데.’
‘하, 하지만 석영에서 워프… 워프 트랩을 만들고 있다고 들어서. 제발. 제발 저희 길드원들 살려 주세요. 제발…!’
‘아직 미완성입니다. 사용했다가 분자 분해될 확률이 99%라.’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우리 애들 구해 줄 수 있게 기회라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권지한 헌터님. 제발 부탁입니다…!’
중년인이 눈물 콧물 흘리며 애원했다.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었다. 권지한이 손을 들어 경비원에게 이 사람 데리고 가라고 시키던 그때였다.
‘몇 명이죠?’
서채윤이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중년인은 희망의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듯 다급히 대답했다.
‘일곱 명입니다. 한 명은 B급이고, 다른 녀석들은 C급, D급. 아. D급 녀석이 지금 열아홉 살입니다. 제발…. 서채윤 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포탈 위치는?’
‘가깝습니다. 구룡산이에요!’
‘일단 포탈 위치로 가죠.’
‘형?’
서채윤이 중년인을 일으키려 하자 권지한이 얼른 막아섰다. 권지한은 윤서의 팔을 잡고 중년인에게서 떨어졌다.
‘방법이 없지 않아? 뭘 어떻게 하려는 건데?’
‘나한테 영웅을 구하기 위한 스킬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
그들은 다 같이 포탈 위치로 이동했다. 구룡산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는 20분 남아 있었다. 20분 내로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일곱 명의 헌터들은 소멸하고 던전이 범람할 것이다. 길드장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권지한 또한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윤서가 혼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초조한 것이다.
‘형. 진짜 방법이 있는 거지? 나 좀 무서운데.’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나는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게 막 형 혼자 던전에 들어가고 그런 거면 안 돼. 절대 못 보내. 이번엔 형의 팔 하나를 날려서라도 막을 거야.’
‘알아요.’
윤서는 ‘안전 가옥’을 만들어 냈을 때와 비슷한 확신을 갖고 스킬을 펼쳤다.
[스킬 <작은 구원>을 사용합니다.] [‘작은 구원자의 비상 탈출구’영웅을 위한 비상 탈출구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
모든 영웅은 도망칠 기회가 있어야 한다.]
커다란 문이 떡하니 세워졌다. 권지한은 <가이아의 눈>으로 윤서가 설명하지 않아도 용도를 파악했다. 이게 뭔지 알 길이 없는 길드장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 댔다. 윤서는 길드장에겐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고 권지한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말로 던전이 나타났다. 던전 진입 메시지가 뜨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가호 신들이 기겁했다. 놀라고 감탄할 시간도 없이 얼른 길드원들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비상 탈출구’가 그들을 뒤따라왔다.
결정 길드원들은 던전의 중간쯤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허윽. 어흑. 흑. 나, 나 이제 막 환각까지 보여….’
‘환각이요? 크흡.’
‘서, 서채윤이랑 권지한이 보이고 그래. 흐윽.’
‘어흐윽. 서채윤 님 한 번이라도 뵙고 죽었어야 했는데….’
‘범람. 크흡. 범람 대비는 다 해 놨겠죠? 흑. 근처에 양로원이 있던데. 흐윽.”
‘우리 길드장이 누구야. 당연히 대비는…. 허읍. 진수야. 나, 나도 권서 환각이…. 어…. 어?’
모두가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제한 시간까지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결정 길드장과 길드원들이 얼싸안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권지한과 윤서는 사이좋게 알약을 하나씩 꺼내 먹었다. 경이적인 스킬을 새로 발견한 건 축하할 일이었지만, 시간제한이 촉박한 던전에 연인과 함께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윤서는 그날 이후로 워프 트랩 개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헌터도 던전 공략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지구로 도망칠 비상 탈출 아이템을 모든 헌터가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야 했다.
‘<작은 구원>으로 워프 입자를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는 그때 권지한이 중얼거렸다.
“그 마법 같은 <작은 구원>으로 상태 이상 무효화 포션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권지한은 정말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윤서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의 연인은 꾸준하게 상태 이상 무효화 포션만을 외쳐 댔다. 만약 가이아가 ‘반물질 폭탄 1,000개+워프 트랩 1,000개 또는 상태 이상 무효화 포션 1개 중에 뭐 가질래?’ 묻는다면 권지한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포션을 외칠 것이다.
만약 권지한이 치유 내성인 상황이었다면 윤서 또한 그러했을 것이고.
삐유우.
햅쌀이가 대놓고 하품을 했다. 윤서는 웃으며 햅쌀이의 깃털을 간지럽혔다.
“이제 가죠.”
“응? ‘신발’ 안 보고 가게?”
“네. 지금 뭔가 실험 중인 것 같아서.”
권지한이 ‘신발’이 있는 랩실을 바라봤다. 윤서의 말대로 연구원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알았어. 가자.”
두 사람이 연구실을 나갔다.
“…….”
“…….”
둘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떠나자 과학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최 팀장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권지한과 서채윤이 또 점검하러 왔다. 다른 헌터들, 심지어 길드장이 올 때도 긴장을 안 하는데 저 둘만 오면 극심하게 긴장이 되었다. 특히 서채윤에게는… 항상 마음에 빚이 있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인류의 대부분은 ‘서채윤 광팬’까지는 아니어도 ‘광ㅍ’ 정도는 되었으니까.
***
집으로 돌아가면서 윤서는 팬들이 써 준 편지를 읽었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해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편지들을 몇 개 읽은 윤서는 뭔가 공통적인 키워드를 발견했다.
‘41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태해질 때마다 41이라는 숫자를 떠올리며 저 자신을 바로잡겠습니다….’
‘앞으로 하루에 41번씩 북쪽을 향해 절을 할 생각입니다….’
윤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41이에요?”
“…….”
권지한이 윤서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권지한의 회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윤서가 의아해하자 본래의 다정한 눈빛을 되찾았다.
“41은 11년 전 형이 대던전을 막 나와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몸무게야.”
윤서는 놀라서 입을 작게 벌렸다.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태재식이 오프 더 레코드라면서 인터뷰 중에 밝혔어. 그런데 그런 인터뷰를 무려 다섯 군데에서 한 거지. 자기들뿐만 아니라 라이벌 매체들도 들었다는데 누가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키겠어? 진짜 대단한 인간이야.”
“아니, 나도 몰랐던 사실을 대체 그 아저씨가 어떻게 아는 걸까요.”
“또 몰랐던 사실 더 아는 거 있는지 한번 물어봐 봐.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인간이니까.”
“그래야겠네요.”
“아무튼 형 몸무게가 알려진 후 ‘41’은 ‘1203’과 더불어 상징적인 숫자가 되었어. 각성자들의 희생과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를 상징하는 숫자.”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41kg이라. 아마 대던전에서 막 나왔을 당시에는 그보다 덜 나갔을 것이다. 그때도 못 받은 환자 취급을 너무 튼튼해서 날아다닐 것 같은 지금 받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스쿼트 500개 하면 나가떨어질 연약한 비각성자들한테서 이런 취급을 받다니….
삐유윳.
햅쌀이가 윤서가 들고 있던 편지를 부리로 쪼았다. 종이가 지익 찢어지자 윤서는 당황했다.
“햅쌀아, 안 돼. 다른 종이 줄게.”
삐윳삐윳.
“햅쌀아.”
“형, 그냥 찢으라고 해. 형이 그 편지 때문에 우울해하니까 복수해 주는 거잖아. 우리 착한 햅쌀이.”
권지한은 오히려 기특한 듯 햅쌀이가 좋아하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긁어 줬다.
윤서는 ‘우울하지 않았는데.’ 생각했지만 그냥 햅쌀이가 편지를 찢게 놔뒀다. 팬이 준 선물을 훼손하는 행위였지만 윤서는 이 편지를 준 팬보다 햅쌀이가 기분을 푸는 게 더 중요했다.
삐융!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복수를 마친 햅쌀이가 가슴 털을 부풀렸다. 든든한 아이템을 보며 윤서가 작게 웃었다. 가만히 보던 권지한이 불시에 윤서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윤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거예요.”
“남자 친구한테 뽀뽀 좀 했어.”
“앞으론 미리 말하고 하세요.”
“알았어. 미리 말해 둘게. 앞으로 형이 웃을 때마다 뽀뽀할 거야. 존나 예뻐서 참을 수 없거든.”
“…….”
윤서가 얼굴을 붉히자 그 모습이 귀여워서 권지한은 또 뽀뽀했다. 이번에는 눈가와 코, 이마, 뺨, 입술 등에 퍼부었다.
삐유유.
당연한 순서로 햅쌀이도 뽀뽀를 요구했고….
권지한은 선물 받은 새장을 나중에 유용하게 쓰리라 생각했다.
“형, 근데 있잖아.”
집에 도착했을 때쯤 권지한이 넌지시 말했다.
“그때 진짜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어?”
“그때요?”
“1년 전에 말이야. 수재희가 우리가 사귄다고 착각했을 즈음.”
“아….”
윤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런 쪽으로는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나는 이런 쪽으로도 완전 관심 가득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형이 내 이상형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내고 모두를 구하는 사람.”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게 뭐가 좋아요?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사건 사고를 회피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윤서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의문을 물었다. 권지한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힘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 들킬 뻔한 위기도 많았을 테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숱하게 겪었겠지. 그럼에도 가까스로 정체를 숨기는 데에 성공했는데, 결국에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힘을 드러내 버리는 거야. 그동안의 고난이 허무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여태까지의 노력을 포기해 버리는 것. 이게 멋있지 않으면 세상에 멋있는 게 뭐가 있겠어?”
권지한이 시원스레 입가를 올렸다.
윤서는 물론 그 말에 동의 못 하는 쪽이었다.
애초에 힘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정체를 드러낸 채 활동하는 사람이 백만 배는 더 멋있었다. 모두가 내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있으면 인생이 피곤해질 걸 알면서도 모든 걸 감내하고 사람들을 구하고 다니는 쪽이 더 멋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권지한도 알 테니까.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윤서가 안전벨트를 풀며 내릴 준비를 하자 권지한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형, 나는 갓을 안 써도 형의 하나뿐인 이상형이지?”
윤서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권지한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형과의 동거. 어때? 끝내줄 것 같지 않아?”
윤서는 초저녁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연인과 헤어질 마음이 없어서 가볍게 대답했다.
“동거는 좀 그렇고. 일단 오늘은 자고 가세요.”
“앗싸. 역시 안 될 것 같아도 말은 꺼내 봐야 한다니까.”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낸 사람치고는 하루 묵고 가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기뻐했다. 이럴 때 보면 어린 티가 나는 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