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9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외전 2.(193/195)
외전 2.
딩동. 벨 누르는 소리가 났다. 윤서는 마카롱 위에 녹차초코 필링을 짜는 중이라서 문을 열 수 없었다.
“알아서 들어와요.”
“네에.”
문 건너에서 대답한 권지한이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왔다.
삐윳.
햅쌀이는 여느 때라면 권지한에게 후다닥 날아갔을 테지만 지금은 윤서가 모아 준 마카롱 꼬끄를 쪼아 먹느라 대충 인사만 했다.
“햅쌀이, 안녕.”
삐융.
권지한은 웃으면서 햅쌀이를 쓰다듬어 주고는 윤서의 옆에 앉았다.
“문밖에서부터 달콤한 냄새 장난 아니야. 우리 형, 오랜만에 베이킹 야무지게 했네. 질투 나는데.”
“손 씻고 저기 있는 봉투에 마들렌이랑 스콘이나 넣어요. 마들렌은 각각 두 개씩, 스콘은 하나씩.”
“오자마자 심부름시키기야? 뽀뽀 먼저 해 줘.”
윤서는 필링 주머니를 위로 세우고 권지한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안면 가득 웃음을 띤 권지한이 윤서의 입술에 키스했다. 햅쌀이는 꼬끄에 정신이 팔려서 다행히 보지 못했다.
손을 씻고 나온 권지한이 마들렌과 스콘을 봉투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레몬마들렌, 얼그레이마들렌, 호두크랜베리스콘이네. 맛있겠다.”
“저쪽 쟁반에 있는 건 여유분이니까 마음껏 드세요.”
“응.”
권지한이 냉큼 얼그레이 마들렌을 집어 먹었다. 윤서는 속으로 웃었다.
마들렌과 스콘을 구분하지도 못하던 권지한은 이제 딱 보고 뭐가 무슨 맛인지도 알 정도가 되었다. 홈베이킹이 취미인 연인이 있으면 이렇게 된다.
마들렌과 스콘, 마카롱을 모두 봉투에 담자 봉투가 총 열일곱 개 나왔다. 권지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낙엽이 열일곱 명이나 돼?”
“가족들 것도 만들었어요.”
오늘 윤서는 전 낙엽 길드원들을 만나기로 했다. 다는 아니고 박영범, 고희원만. 메시지로는 자주 대화를 나누지만 실제로 보는 건 6개월 만이었다. 그들과는 1월에 한 번 만났다.
윤서가 대던전에 들어가 있어서 잠깐 연락이 끊겼을 때 지사에서 근무하는 박영범과 고희원이 본사 길드장 집무실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던전에 들어가게 됐다는 말이고, 그 후로 한 달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니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두 사람이 석영 길드장 집무실 문을 겁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는 말을 듣고 윤서는 조금 놀랐고, 상당히 감동했다. 그래서 튜토리얼 종료 후의 여러 커다란 업무를 마치자마자 둘과 만났다. 던전 공략 때문에 한 달이나 연락을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핑계이기 때문에 변명을 고민했는데 권지한이 말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해도 돼. 수험 공부를 했다든가. 아니면 오지 탐험이라고 해도 믿을걸?’
‘미쳤어요? 그걸 믿겠습니까?’
‘해 봐. 누구 말이 맞나.’
윤서는 반신반의한 채로 둘에게 오지 탐험하느라 핸드폰을 정지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 오지 탐험. 그럴 줄 알았어요. 윤서 오빠 취미 진짜 다양하다.’
‘재밌었겠다. 그나저나 대던전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꿋꿋하게 취미를 즐기다니 역시 윤서 씨답네.’
윤서의 다채로운 취미 때문에 둘은 더 묻지도 않고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301개의 유언들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그때는 급하게 만나느라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고, 박영범과 고희원이 취미 생활에 쓰라고 준 뜨개질 실만 한 품 가득 받아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꽤 본격적인 홈베이킹을 한 것이다. 이왕 하는 김에 다른 길드원들 것까지 전부.
“서채윤이 직접 만든 빵이라니 이게 얼마나 호사인지 본인들은 모르겠지.”
권지한이 퍽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고는 남은 마들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여섯 시에 만난다고 했지? 영화 보러 갈래?”
“변장 아이템 갖고 왔어요?”
“당연하지.”
“가요.”
권지한이 열일곱 개의 선물 봉투를 커다란 쇼핑백 하나에 모조리 담고 일어났다. 윤서도 얇은 여름 겉옷을 챙겼다.
삣. 삐윳.
햅쌀이가 꼬끄를 쪼면서 둘을 곁눈질했다. 이 달콤한 걸 계속 먹고 싶은데 두 인간이 외출하려고 하니까 불안한 것이다. 꼬끄도 포기 못 하고, 권지한과 윤서도 포기 못 하는 햅쌀이가 연신 궁둥이를 흔들거렸다.
권지한이 웃으며 사진 찍는 동안 윤서는 넓적한 쟁반에 꼬끄 몇 개를 주워 담았다.
삐윳!
햅쌀이가 쟁반 위로 날아올랐다. 윤서는 쟁반 채로 차에 올라탔다.
“주인님, 어서 오세요.”
“응. 영화관으로 가 줘.”
“네. 주인님의 어리고 귀여운 연하 애인분도 어서 오세요.”
“아주 훌륭한 인사야, 찹쌀아.”
삐융!
“햅쌀아. 뭘 먹고 있는진 몰라도 내부에 부스러기를 흘리지는 말아 줘.”
삐윳!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권지한이 윤서에게서 쟁반을 가져가서는 앞 시트를 젖히고 그곳에 내려놨다.
삐융삐융융. 삐융융융.
“햅쌀이가 정신을 못 차리네. 마카롱에 마약 탔어?”
“탔겠어요?”
“그럼 형…. 우리 햅쌀이 굶긴 거야?”
“이번에 좀 덜 달콤하게 만들긴 했어요. 권지한 헌터 입맛에도 맞을 테니까 한번 먹어 봐요.”
“응.”
권지한이 대답하고는 윤서에게 촉, 입을 맞췄다. 마카롱이 더 달든, 덜 달든 관심도 없어 보였다. 요즘 들어 이런 입맞춤이 많아졌다. 공공장소에서 하면 윤서가 기겁을 하기 때문에 둘만 있을 때는 이렇게 꼭 달라붙어서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영화 티켓 예매해야 돼요.”
“응.”
권지한이 한 번 더 짧게 입 맞추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둘이 볼 영화는 당연히 ‘반물질 폭탄은 어떻게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였다. 이미 세 번을 봤지만 질리지가 않았다. 사실 윤서는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자 역학 설명엔 관심이 없었지만, 권지한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좋았다.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반물질 폭탄을 설명하는 권지한이 잘생기고 멋있는데 그걸 큰 화면으로 보니 더욱 좋은 것이다.
1시 영화인데 지금이 12시 30분이라 둘은 영화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나란히 앉아 뜨개질을 했다.
얼마 전에 권지한이 유명한 브랜드에서 나온 대바늘 세트를 두 개나 사 왔다. 각기 다른 사이즈의 대바늘 열 종류와 열 종류와 엔드 캡, 단수 링, 케이블과 케이블 커넥터, 줄 등. 그리고 이 모든 걸 수납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파우치까지 들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들로 골랐어, 형.’
실도 푸짐하게 구매했다. 1m 높이의 3층짜리 수납장이 실로 가득 찰 정도였다.
윤서는 권지한에게 간단하게 목도리 뜨는 방법을 알려 줬고, 권지한은 커플 목도리를 뜨겠다면서 열심히 뜨기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S급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래 천재인 건지 어렵지 않게 곧잘 해냈다.
둘은 집에서 데이트를 하든, 밖에서 데이트를 하든 차 안에서는 자주 뜨개질을 했다. 윤서는 니트를 110개까지 뜨고는 더는 뜨지 않았고 대신 가방이나 인형 같은 액세서리를 만들었다가 자선 바자회 같은 게 열리면 서채윤 이름을 달아서 기증했다. 권지한은 목도리만 열심히 파다가 이제 슬슬 질린 듯했다.
“나 이거 다 뜨면 뭐 뜰까. 니트 떠서 형 줄까? 니트 뜨는 방법 알려 줘.”
“햅쌀이 옷은 어때요?”
“그럴까. 고양이 옷? 페럿 옷?”
“둘 다 뜨죠.”
“좋았어. 우리 셋이서 같은 옷 입고 다니면 좋겠다. 모두가 우릴 보는 순간 가족이란 걸 알게 될 거야.”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더 주지시키는 거지. 세상 모든 사람의 뇌 속에 때려 박는 거야. 권지한과 서채윤, 햅쌀이는 가족이다.”
“…….”
윤서는 가끔 권지한이 뭔가 불안정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간혹… 아니, 종종… 자신이 이상형인지 묻고, 자기를 좋아하는지 묻고, 우리가 연인이고 가족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고…. 그럴 때마다 ‘안녕’이라는 금기의 단어를 내뱉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불안이 권지한에게서 흘러나왔다. 본인은 의식 못 하는 것 같아서 윤서는 일단 속으로 유의해 두고 있었다.
***
‘반물질 폭탄은 어떻게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영화의 장르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했고, SF이기도 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준비되지 않은 지구인 앞에 성큼 다가온 스페이스 오페라는 많은 지구인에게 충격을 안겨 줬다.
동시에 인류의 오랜 염원을 가시화했다.
그 염원이란 바로 외계 초고도 문명과의 만남.
인류가 처음으로 외계 행성의 주민과 마주한 건 튜토리얼 종료 후 2주가 지났을 때였다. 튜토리얼 행성인 프록시마 b에서 졸업하고 지구가 배정받은 던전 행성은 MACS 2129-1 은하의 MKI83 항성계 세 번째 행성인 MKI83-3이었다. 가호 신들은 이 행성은 지구를 포함해 21개의 행성이 던전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던전의 벽은 튜토리얼 때와 같으나 각자의 스킬 능력치가 향상되었기 때문에 종종 벽이 뚫릴 거라고. 그럼 외계 지적 생명체와 마주칠 수도 있다고.
많은 헌터들이 외계인과의 첫 조우를 자신이 거머쥘 수 있기를 꿈꿨는데, 그 영광은 핀란드 길드원들이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그리 이름 있는 길드는 아니나 핀란드에서는 대형 길드에 속하는 길드의 공격대가 S급 그린 던전에 들어갔다가 처음으로 외계인과 마주친 것이다.
그들은 인간과 비슷한 몸통에 길쭉하고 흐물거리는 두 개의 다리를 가졌고, 머리에는 눈이 여섯 개에서 여덟 개까지 달렸으며, 최대 5m까지 늘어나는 팔이 두 개, 몸뚱이를 공중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한 튼튼하고 굵은 꼬리도 한 개 달렸다. 꼬리 끝은 사람 발가락처럼 다섯 갈래로 나눠져 있기도 했다.
“그들은 H9-00Q 은하 시수 항성계 네 번째 행성 메키넨에서 온 이들로, 이미 지구 시간으로 10년 전 튜토리얼을 통과한 선배 종족이었습니다. 메키넨인은 지구인에게 같은 행성 던전을 사용 중인 외계인들을 소개했고, 그들 덕분에 인류는 본격적으로 외계인과의 교류를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던전 행성을 공유하는 외계인들을 ‘우스타바(Ystävä:친구)’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큐 내레이션을 들으며 윤서는 우스타바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교류를 통해 습득한 과학 기술과 던전 아이템의 힘으로 각 행성의 대표자들 다섯 명씩 총 105명이 한 던전에 모였다. 지구를 포함해 스물한 개의 행성은 생김새, 언어, 문화는 완전히 달랐지만, 밀도, 공전 주기, 자전 주기가 완벽하게 동일했기에 만남이 가능했다.
지구에서는 한국의 서채윤, 권지한, 유준철, 유럽 헌터 협회장과 핀란드 시수 길드장이 참여했다. 핀란드의 입지는 국제 정세에서 그리 크지 않았으나 최초의 조우를 이뤄 낸 나라라는 점이 큰 이점을 차지했다.
지구와 같은 던전 행성을 공유하는 이들은 전부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윤서와 권지한은 관측자 덕분에 외계인과 일방적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다지 신기하진 않았다. 만약 그때 봤던 행성인들처럼 인간형이었으면 좀 신기했겠지만….
“그들은 마지막 테스트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여기서 권지한의 인터뷰가 나온다.
시니컬한 표정의 권지한이 석영 길드복을 입고 나와서 시니컬하게 설명했다.
“반물질 폭탄을 공개할지 말지 우리 쪽에서도 찬반 논의가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행성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 통역 아이템도 통역을 못 했고. 설명하는 데 아주 애를 먹었죠. 그들은 가이아 시스템이 항복한 사례는 처음 듣는다면서 매우 놀라워했고, 우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세상엔 셀 수 없을 만큼의 외계 종족이 있겠지만 일단 그들은 지구보다는 과학 기술 발전이 더뎠습니다. 즉, 외계 초고도 문명과의 만남은 지구인이 아니라 우스타바 행성인들이 이룩한 거죠. 우리로 인해 반물질 폭탄의 가능성을 알게 된 후 몇 개 행성에서 연구에 착수했다가 그 위험성 때문에 무기한 보류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그들의 행성들보다 먼저 다음 단계로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다음 단계, 즉 레벨 2의 던전.
튜토리얼이 끝나고 막 입성한 던전을 부르는 표현도 행성마다 제각기 달랐다. 레벨 1, 1단계, 1층, 1등급…. 지구는 레벨 1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가이아 시스템이 지구를 지구와 비슷한 수준의 행성들과 같은 던전에 배치했다면, 지구는 이미 튜토리얼을 종료하고 레벨 1에 들어선 지 10년에서 20년 된 행성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이를 두고 일정 주기마다 문명을 리셋해서 영원히 레벨 1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구가 가이아 시스템으로부터 이렇게 고득점을 얻은 건 전적으로 반물질 기술 덕분이었다.
반물질 폭탄은 한 항성계를 단번에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는 강력한 폭탄이다. 행성 하나가 아니라, 항성계 전체를 우주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외계인들은 지구인이 검은 던전에서 반물질 폭탄을 사용했고 지금은 가진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두 번째 반물질 폭탄은 제작하는 데에 최소 8년은 걸릴 터였다. 이 사실에 불안해하는 이들과 이 사실에 안도하는 이들이 공존했다.
시대가 이렇지 않았다면 너무 위험하다며 반물질 폭탄에 극렬하게 반대했을 비각성자들이 오히려 전자에 속했다. 비각성자들은 각성자들이 어긋난 존재로부터 그들을 지켜 줄 거라고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범람이 일어나고 있으니 당연했다.
영화 말미에 다큐 제작자는 권지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인류가 어긋난 존재의 위협에서 안전해질 수 있을까요? 외계와의 활발한 교류? 아니면 인류 자체 과학 문명의 발달?”
권지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인류가 더 착해져야죠. 그래야 각성자가 더 많아지니까.”
“…….”
“착해져야 합니다. 혼자 편하게 나쁜 짓 실컷 하고 살면서 남이 지켜 주기만을 바라는 인간만 많으면 지구는 영원히 위험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다들 이미 알고 있잖아요. 착한 사람만 바보가 되는 세상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에요.”
그건 간단한 해답이었다. 1+1=2처럼.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공식이기도 했다.
***
영화가 끝나고 권지한과 윤서는 약속 장소 근처의 카페에 갔다. 권지한이 변장 아이템을 사용 중이어서, 햅쌀이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새 모습이 아니라 도마뱀 모습을 한 채 아이스 컵에 달라붙었다. 윤서는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리 형이 왜 깨작거릴까. 커피 말고 과일 주스로 시킬 걸 그랬나?”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마지막 인터뷰는 할 필요 없었어요.”
“…착해져야 한다, 그거?”
“네.”
“사람들이 뭔가 깨달을 수도 있잖아. 정의롭고 착해져서 각성자가 많아지면 우리 일도 줄어들 거야.”
“아직도 꿈을 꾸고 있군요. 그 정도의 훈계로 각성할 사람들이었다면 진즉 각성했을 거예요.”
“…….”
“다큐 보는 동안은 결연하게 결심했다 하더라도 결국 실천하지 않겠죠. 아무 소용 없는 얘기입니다. 그 시간에 당신이 좋아하는 양자 역학 불확실성의 원리나 더 설명하는 게 나았어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윤서는 선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오죽하면 가이아 스킬을 제외한 지구 최초의 L급 스킬 <작은 구원>의 ‘작은 구원자의 안전 가옥’이 오직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만이 입장 가능하겠는가. ‘작은 구원자의 비상 탈출구’ 또한 던전 내에서 클리어하지 않고도 지구로 이동할 수 있는 엄청난 공간 이동 스킬이지만, 던전에 함께 들어간 ‘나쁜 사람들’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던전에 남을 것이다….
언뜻 보면 각성자들만을 위한 스킬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았다. <작은 구원>의 보호 대상은 ‘각성자’가 아니라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윤서의 안전 가옥에 사냥꾼 조직 헌터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스킬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비각성자들은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착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자란 건 환경 탓이라며 억울해하는데… 그런 환경에서도 착하고 정의롭게 자란 이들이 존재하므로….
윤서가 비각성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좀 더 좋아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빵이 하나 있다면 윤서는 그 빵을 착하고 정의로운 이에게 줄 것이다. 그러면 그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약자에게 줄 것이고…. 그래서 윤서는 더욱더 영웅의 편으로 남고 싶었다.
“형, 나는 이런 세계에서 비각성자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 용감하다는 생각도 들고. 누군가 옆에서 응원해 주면 분명 각성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이런 세계가 뭔데요.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
윤서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도 별로…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착한 사람이 더 강해졌잖아.”
“강해지면 뭘 합니까? 그 힘으로 안 착한 사람들을 부려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오히려 목숨 걸고 몬스터나 처치하면서 나쁜 사람을 보호하고 있는데.”
“부려 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각성자가 되지 못했겠지.”
“나는 하는데요?”
“형도 못 해. 말만 이러지 절대 못 해. 내가 알아.”
“…….”
윤서가 심통 난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윤서의 기분이 저조함을 느낀 햅쌀이가 스스슷 기어 와 윤서의 팔목에 안착했다. 애교를 부리듯 팔목을 감은 도마뱀을 윤서가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권지한은 무슨 말로 윤서를 위로할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을부터 좀 쉴까? 어차피 장기 휴가 한번 내기로 했었고.”
“어긋난 존재들이 나타난 마당에 휴가를 허락해 줄까요?”
“누구한테 우리 휴가를 불허할 권리가 있어? 준철이 형?”
“길드장이니 대중의 여론을 눈치 보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우리 휴가를 반대하면 뭐 해. 우릴 뭐 헌터 자격 박탈시킬 거야, 감옥에 가둘 거야, 어쩔 거야. 우리가 이렇게 강한데 얼른 휴가 끝내고 돌아와라 울고불고 비는 수밖에 없겠지.”
내내 뚱한 표정이던 윤서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결국 각성자가 가진 힘을 이용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권지한 헌터. 지금 꼭… 저처럼 말하네요.”
“형처럼 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면 닮는다잖아.”
권지한이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장기 휴가 갈까?”
“…….”
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네요.”
두 S급 헌터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고생할 다른 헌터들 생각을 하면 선뜻 수락할 수가 없었다.
“정말 답답해요. 왜 착한 쪽이 힘을 가져서 더 고생해야 하는 건지….”
“형, 안 착한 쪽이 힘을 가졌다면 착한 우리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생했을 거야.”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쁜 사람들까지 각성했으면 지구는 11년 전의 대던전 때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권지한이 손을 뻗어 윤서의 손을 붙잡았다. 무의식중에도 햅쌀이를 계속 쓰다듬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고는 고개를 기울여 윤서의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우리가 장기 휴가를 내는 게 다른 헌터들을 혹사시키는 일이라고 생각 안 해. 오히려 우리가 솔선수범해서 장기 휴가를 내야만 해. 형도 알겠지만 지금은 크게 다쳐서 은퇴하지 않는 이상은 장기 휴가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내야 다른 헌터들도 낼 수 있을 거야. 우리부터 시작하는 거지.”
“…….”
이 또한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휴가 내죠. 가을이면 10월부터?”
“응. 10월부터 1년 정도 쉬자. 우주여행 했으니까 이번엔 국내 여행 어때? 나 여기저기 많이 가 봤는데 다 던전 공략만 하고 돌아와서 완전 서울 촌놈이나 마찬가지거든.”
1년이라니….
윤서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를 예상했기에 조금 놀랐다.
정말 1년이나 쉬어도 괜찮을까? 가능하긴 할까? 윤서는 10년이나 잠적한 전적이 있으므로 자신 있었지만, 윤서가 생각하기에 권지한은 못 해낼 것 같았다. 위험한 던전이 발생했는데 헌터 인력이 부족하다면 결국 나서고 말 것이다. 권지한은 뭐 이제는 형이 가장 우선이 됐다느니 말하지만….
“우리나라 공기 좋은 곳에서 보는 은하수는 어떤 풍경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형은 어때?”
“…그러고야 싶은데.”
“그러고 싶으면 끝난 거야. 그렇게 하면 돼. 준철이 형한테 휴가 얘기하면서 과학자들 착취하라고나 해야겠다. 헌터 없어도 잘 해낼 수 있게 무기를 많이 많이 개발하라고. 아이템 파밍 팀도 더 만들고 말이야.”
권지한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어투로 말했다.
정말 1년이나 쉴 수 있을까.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쉬지 못한다면, 윤서는 권지한 혼자만이라도 꼭 휴가를 내게 해 주고 싶었다. 권지한은 각성 이후 하늘 한번 올려다볼 여유도 없었던 S급 헌터니까. 세상 누구보다 휴식할 권리가 있었다.
***
약속 시간이 되어 윤서는 쇼핑백을 들고 일어났다. 권지한이 도마뱀에게 손바닥을 내밀자 햅쌀이가 스스슥 기어 왔다.
“다녀와. 여기 있을게.”
“기다릴 건가요?”
“응. 어차피 저녁 식사만 하고 헤어질 거 아냐? 아니면 뭐 더 늦어도 되고.”
“…….”
“햅쌀이랑 재미있게 놀고 있을게. 우리 걱정은 하지 마.”
권지한이 인벤토리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햅쌀이랑 논다는 말과는 달리 ‘러브 인 한강’ 제작자 정보나 더 뒤지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
“천천히 다녀와.”
권지한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윤서는 팔 한쪽을 카페에 두고 나오는 심정이었다.
약속 장소인 고깃집으로 가자 고희원과 박영범은 이미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어, 윤서 씨! 여기!”
박영범이 윤서를 발견하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여전히 딱 정시에 오네.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오빠, 딱 이 시간에 올 거 예상하고 고기 굽고 있었어요. 이제 먹어도 될 듯?”
“얼른 먹어. 먹어. 먹어. 탄다. 먹어.”
“그동안 잘 지냈는지-.”
“얘기할 틈 없어. 일단 먹어. 먹고 얘기해. 탄다!”
박영범이 호들갑을 떨면서 상추를 집어 들었다. 불판 위의 고기는 딱 때깔 좋게 익은 상태였다. 윤서는 오자마자 안부를 주고받을 시간도 없이 쌈부터 싸 먹어야 했다.
몇 점 먹고 나자 그제야 대화할 여유가 생겼다. 윤서가 쇼핑백을 둘에게 건넸다.
“자요. 다른 길드원들 것까지 만들었습니다. 먹든가 버리든가 하세요.”
“윤서 씨, 정성스럽게 베이킹해 놓고서 시크하게 주는 것도 여전하네.”
“진짜 귀엽다니까요.”
두 사람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고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헐. 초코쿠키가 아니라니 제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아요?”
“뭐? 설마 윤서 씨의 트레이드마크인 초코쿠키가…. 없네? 진짜 없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10년 동안 한결같던 초코쿠키 사랑 어떻게 된 거야?”
“윤서 오빠의 탈을 쓴 도플갱어 몬스터가 분명해요!”
“이것 참 정보 수집력이 떨어지는 도플갱어 몬스터로군!”
윤서는 이런 호들갑도 오랜만에 겪는다고 생각했다.
“초코크랙쿠키는 이제 지긋지긋해서요. 당분간은 안 만들 겁니다.”
박영범과 고희원이 크하하 크게 웃었다.
“하긴 몇 년이나 하나만 만들었으면 지긋지긋할 만하지. 사실 이건 비밀인데 기상혁 본부장 부인님이랑 딸래미도 초코쿠키 가져오면 안 먹는다더라고.”
“맞아요. 사실 이건 비밀이지만 저도 오빠가 쿠키 주면 가끔 안 먹고 옆집 준 적 있어요.”
“참고로 난 지겹지 않았어, 윤서 씨. 나는 희원 씨와는 달리 혼자 다 먹었어.”
“와, 이걸 배신을 때린다구?”
“나중에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빵집을 차려 볼까 해. 윤서 씨의 초코쿠키를 메인으로 말이야.”
“와, 이걸 이렇게 개오바를 하신다구?”
“희원 씨. 점점 말이 짧아진다.”
“뭐 어때요. 이젠 직속 팀장도 아닌데.”
석영에 합병된 후 두 번의 인사이동을 거쳐 박영범과 고희원은 부서가 달라졌다. 둘 다 여전히 내근직이었지만 박영범은 유지보수4팀 팀장, 고희원은 아이템 제작부 3팀 대리로 근무 중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박영범의 안경알이 챙- 하고 번쩍였다.
“왜, 왜 그러는데요?”
“내가 지금 위쪽에 우리 낙엽인들 우리 부서에 모아 달라고 계속 요청 넣고 있거든? 특히 고희원만은 반드시! 꼭! 필히! 결단코! 우리 팀에 넣어 달라는 중이지. 이번 부서 이동 때는 반드시 다시 네 팀장이 되고 만다. 두고 봐라!”
고희원이 세상이 곧 멸망한다는 소릴 들은 사람처럼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석영에서 들어주겠어요?”
“들어줄 것 같던데? 희원 씨만은.”
“…….”
고희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혼자 죽진 않겠다는 생각인지 윤서를 가리켰다.
“윤서 오빠는요? 저를 꼭 팀원으로 둘 거면 윤서 오빠도 끌고 와야 해요!”
“저는 왜….”
“윤서 씨는 너무 거물이 되어서 힘들어.”
박영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외근직은 내근직이랑 인사이동 방식이 아예 다르다더라고. 외근직 중에서도 던전 공략 팀은 전체적으로 모든 직무보다 위에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윤서 씨 달라고 해 봤는데 어우, 어림도 없더라.”
“윤서 오빠가 팀장님의 상사로 오는 건요?”
“안 그래도 내가 자존심 내려놓고 그 얘기도 해 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10년간 내근직으로 일해 온 사람한테 던전 공략 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보다 등급이 높고, 던전 경력도 많으니까 내 상사로 와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안 된대.”
윤서는 박영범과 고희원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하는 줄 몰라서 조금 놀랐다.
“윤서 헌터는 계속 던전에 들여보내겠다, 이러는데 이인선 팀장인가 그 인간 답답해 미치겠어. 아주 벽돌이야. 꽉 막혔어. 반년간 벌써 세 번 빠꾸해 놓고 이젠 내 내선은 받지도 않아.”
아마 이인선 팀장도 답답해 미칠 것이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그 윤서라는 헌터는 사실 S급 헌터라고 말도 못 하고 말이다.
“석영 놈들 미친놈들이에요. 아무리 훌륭한 실드 스킬을 가졌다고 해도 사람을 봐 가면서 던전에 집어넣어야지. 이렇게 호리호리하고 여리여리한 인간을. 오빠가 던전에 들어갔다고 할 때마다 걱정돼서 죽겠어요.”
“나도. 단챗 방에 한 사흘 정도 말이 없으면 바로 위가 아프다니까. 윤서 씨도 상부에 이 부조리한 배치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있지?”
“저는….”
윤서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계속 던전 다니기로 했습니다.”
“네에에에에에?”
“뭐어어어어어?”
“한 번 갔다 오면 며칠씩 휴가도 받고. 저희 팀은 B급 이하 쉬운 던전만 공략해서 괜찮아요. 그러니까 팀장님과 희원 씨도 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
“…….”
고희원과 박영범의 표정이 울망울망해졌다.
“크흡. 우릴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우리 윤서 씨 욕하는 것들 다 내 앞에 데려와! 옛 직장 동료를 위해 이런 선의의 거짓말까지 하는 사람을 누가 욕해. 누가 욕하냐고!”
“그러니까요. 겉모습만 보고 차갑다고 오해해서 멋대로 이상한 소문 퍼뜨리는 작자들 다 지금의 오빠를 봐야 해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감동의 물결을 이어 갔다. 저녁 시간이라 술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 고깃집이 시끌벅적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다 윤서는 뭔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본래 이런 쿨뷰티 계열이 마음속은 여리고 말랑말랑해서…”
“잠깐만요. 팀장님.”
“응응. 우리 말랑이 윤서 씨. 말해.”
“이상한 소문이라니 그게 뭡니까?”
“…….”
“저에 대해 무슨 소문이 돌아요?”
딸꾹.
박영범과 고희원이 딸꾹질을 하며 눈을 마주쳤다.
“…….”
“…….”
사실 윤서도 알고 있었다. ‘윤서’로서 석영 길드를 들락날락할 때마다 느꼈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힐끔거리는 눈길을. 처음부터 곱지 못한 시선들이었는데 최근에는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윤서는 전 퍼펙트 2팀 팀장이었던 이인선 팀장이 이끄는 공략5팀에서 B급 이하 던전에 다니는 것으로 위장하고, 실제로는 서채윤으로 A급 이상 던전에만 다니고 있었다. 공략5팀은 전 퍼펙트 2팀 멤버들로만 이루어져서 들킬 위험도 없었고.
자연히 석영의 다른 평길드원들과는 ‘윤서’로서 얽힐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적의를 보내오니 만사무심한 윤서도 점점 궁금해졌다.
“팀장님, 희원 씨. 말해 주세요. 대체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 겁니까?”
“아, 아니? 누가 그래? 유, 윤서 씨가 연인이 있는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는 그런 근거 없는 헛소문 같은 거 난 들은 적 없는데?”
“저, 저도 처음 들어요. 오, 오빠가 애니멀 호더라는 끔찍한 소문 같은 건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애니멀 호더라는 건 뭔지 모르겠는데, 연인이 있는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소문의 내용이 생각보다 악질이었다.
윤서가 이마를 짚었다.
“팀장님부터 말해 보세요. 제가 바람을 피워요? 누구랑?”
박영범은 괜히 안경테를 한번 추어올리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궈, 권지한 헌터 있잖아.”
“…권지한이요?”
“응…. 권지한의 연인은 서채윤이잖아. 윤서 씨도 알겠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지.”
“…….”
“그런데 그 권지한과 윤서 씨가 같이 있는 모습이 자꾸 포착된다네…? 그것도 막…. 친근하게…. 권지한이 네 어깨에 팔을 걸친다거나….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거나…. 한번은 네가 권지한 헌터의 머리를 쓰다듬은 적도 있다면서?”
“…….”
“그, 물론, 친구 사이에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나는 윤서 씨가 애인 있는 상대와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낙엽인들과는 다르게 석영 놈들은 윤서 씨에서 잘 모르니까 오해를 하고 있나 봐….”
하아….
윤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오해를 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내 남친 귀여워서 머리 좀 쓰다듬는데 해명을 해야 해?
…….
해명을 해야 한다.
윤서와 서채윤은 다른 사람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일단 전 권지한과는 친한 형, 동생 사이고요. 권지한과 서채윤의 연애를 세상에서 제일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란 것만 알아주세요.”
“응응! 물론이지. 윤서 씨는 절대 불륜 따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니까!”
“저도 믿어요. 오빠. 제 앞에서 헛소문 퍼뜨린 사람들 제가 명치를 갈겼어요!”
“명치를 갈기진 말고요…. 희원 씨, 애니멀 호더는 또 뭡니까?”
“오빠가 애니멀 호더라고….”
“그러니까 애니멀 호더라는 게 뭔데요?”
단어 자체도 처음 듣는 윤서였다. 고희원이 아까보다 덜 창백한 얼굴로 설명했다.
“애니멀 호더라는 건 동물을 수집하듯이 수십 마리씩 집에 들여놓고선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사람을 말해요. 오빠가 막…. 도마뱀, 페럿, 다람쥐. 고양이 고슴도치 등 여러 동물들을 입양하고는 며칠 만에 파양한다고…. 하루는 페럿 데려왔다가 일주일 후에는 고슴도치 데려왔다가 그리고 또 한 달 후에는 다람쥐 데려왔다가 이런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죠….”
아아….
햅쌀이다.
햅쌀이는 ‘권지한의 새 모양 아이템’으로 알려져 있어서 윤서는 새만 아니라면 햅쌀이가 어떤 형태든 자유롭게 취하도록 했다.
볼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반려동물 종이 달라져 있으니 수상해 보이긴 했을 것 같다.
윤서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해명을 기다리는 박영범과 고희원에게 차분히 말했다.
“제가 키우는 동물이 일곱 마리입니다.”
“네에? 진짜로 동물을 키웠어요?”
“네. 작년에 입양했고요. 절대 방치하진 않습니다. 방치하지 않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애가 사실… 한 번 버려졌던 애들이라 다들 분리 불안이 있어서 항상 같이 다녀야 하거든요.”
윤서는 햅쌀이를 10년이나 방치했었고, 마지막엔 버리려고 하는 바람에 애가 분리 불안이 생겼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그랬구나…. 우리 윤서 오빠는 유기 동물들을 입양해서 보살펴 주는 착한 사람이었어. 흐흑.”
“큽. 이럴 줄 알았다. 젠장, 아무것도 모르면서 윤서 씨 욕하는 석영 놈팽이들 절대 가만 안 두겠어!”
쉬운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박영범이 대뜸 윤서의 손을 꽈악 맞잡아 왔다.
“윤서 씨. 앞으로 내 앞에서 그딴 소문 퍼뜨리는 인간 있으면 내가 나서서 해명해 줄게.”
“그래 주면 고맙겠네요.”
“저도요! 우리들 낙엽 유지보수 팀 우정은 영원하다고요!”
“고맙습니다.”
고희원과 박영범은 그뿐만 아니라 낙엽 길드 단챗 방에 이 소식을 전했다. 윤서는 결백하다고. 앞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인간이 있으면 우리 낙엽이 의기투합해서 해치우자고.
기분이 좋아진 둘은 불판을 갈고 고기를 추가했다. 윤서는 집게를 건네받아 고기를 구우면서 권지한을 떠올렸다.
언젠간 이들에게 권지한을 소개해야지.
변장 아이템 없는 권지한을 데리고 와서 내 남자 친구라고….
“…….”
경악한 얼굴로 ‘불륜설이 진짜였구나!’ 할 것이다.
역시 정체를 공개해야겠다.
내가 서채윤이라고.
서채윤이 나라고….
‘오빠가 던전에 들어갔다고 할 때마다 걱정돼서 죽겠어요.’
‘단챗 방에 한 사흘 정도 말이 없으면 바로 위가 아프다니까.’
“…….”
역시 안 되겠다. 서채윤이란 걸 알리고 나면 이 심약한 인간들은 걱정과 불안, 스트레스 때문에 던전 공략 내내 앓을지도 모른다. 던전에 들어간 나보다 더 핼쑥해져 있을지도.
윤서가 혼자 피식피식 웃자 박영범이 휘둥그레 떴다.
“윤서 씨가 왜 이렇게 웃지? 고기 먹을 생각에 행복해?”
“요즘 시크 콘셉트 버린 듯해요. 근데 항정살이 미쳤네. 팀장님,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얼마 전에 우리 팀에서 회식을 여기서 했거든.”
“헐. 회사랑 차 타고도 30분 거리에 있는데 여길 왔다고요?”
“팀원 중 하나가 여기가 그렇게 맛있다고 울고불고해 가지고 와 봤지. 처음엔 외관이 그렇게 깔끔하지 않아서 기대도 안 했거든. 저기 문도 고장 나서 달랑달랑하고.”
“맞아요. 나 내가 고장 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런데 웬걸. 고기에 약이라도 탔나. 왜 이렇게 맛있는 거? 나 요즘 이사할까 생각 중인데 은평구로 올까 봐.”
“고깃집 때문에 은평구에서 살겠다고요?”
“엉. 여기 근처에 공원도 있고, 커다란 마트도 있고, 저쪽 아파트는 A급 실드 트랩에 이 고깃집 있는 상가만 해도 B급 이상이라 하더라고.”
“B급이면 꽤 괜찮긴 하네이아약!”
삐빅삐빅-.
갑작스레 울린 경고음에 고희원이 말을 삐끗했다. 그렇게 크진 않았으나 손목을 타고 진동도 느껴져서 많이 놀란 듯했다.
“와 씨. 깜짝이야. 이거 뭐였어요?”
“…희원 씨. U패드 보세요.”
“U패드? 아니, 잠깐….”
고희원이 U패드를 터치해서 경고음을 껐다.
그녀와 같이 U패드의 경고 창을 끈 박영범과 고희원, 윤서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헌터들에게만 주어지는 U패드에는 이런 알림이 와 있었다.
[범람벨 알림7월 20일 19:01
은평구 관진동 409-208
B급 (레드-오렌지-옐로)
지도 확인]
B급 옐로 이상 던전이 범람한 것이다. 지도를 확인하니 바로 이 고깃집 뒤쪽 골목으로, 고깃집은 범람 영향권에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심부였다.
삐이이이이-!
이번엔 더 큰 경고음이 건물 전체, 아니, 거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이거?”
“깜짝이야. 씨, 뭔 일 난 거 아니지?”
“어…? 이거… 이거 범람벨 소리잖아!”
고깃집이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한 명이 외쳤다.
“모, 모두 밖으로. 일단 외부로 나가야 해요!”
“잠깐. 고기 올려 두면 불나는데.”
“계산은. 계산!”
“으아악. 일단 나가. 다들 나가!”
고깃집에는 셋을 포함해 서른한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일제히 출입구로 달려 나가니 당연히 서로 부딪쳐 넘어지고 테이블에 걸려 넘어지고 난리였다.
“으악, 나 죽어!”
“엄마아, 살려 줘.”
패닉에 빠진 민간인들을 보며 박영범과 고희원도 패닉에 빠졌다.
“티티티티티팀장님, 어떻게 좀 해 봐요. 어른이잖아요!”
“뭐, 뭘 어쩌란 거야. 희원 씨도 어른이거든?”
“빨리요. 여기 우리 빼고 다 민간인들 같은데!”
“으아아 미치겠다. 희원아, 윤서야. 일단 사람들 막아. 내보내면 안 돼!”
“네! 저기요. 다들 나가지 마세요. 여기가 더 안전해요. 실드 트랩이!”
고희원과 박영범이 우다다 달려갔다. 그들도 헌터인지라 평범한 이들보다 힘이 좋았으므로 둘이 입구를 막아서자 아무도 뚫지 못했다.
사실 뚫을 생각도 못 했다.
출입구 바깥의 거리가 어느샌가 검은 안개로 가득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저녁이라지만 지나치게 어두웠다. 민간인들은 잔뜩 겁먹고 문 앞에서 달달 떨었다.
“아니, 무슨 안개가…. 이, 일단 나가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느 대담한 민간인이 문을 열려고 하자 박영범이 얼른 말렸다.
“나가면 안 돼요. 들어가세요.”
“제가 헌터 다큐 마니아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외부로 나가랬는데….”
“요즘에는 건물마다 실드 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안에 있는 게 안전합니다.”
“실드 트랩을 어떻게 믿어요!”
“실드 트랩을 왜 못 믿어요!”
민간인이 빽 소리치자 실드 트랩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고희원도 꽥 소리쳤다. 뒤이어 다른 이들도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윤서는 조금 뒤쪽에 서서 꿈틀거리는 검은 안개를 바라봤다. 안개 속에 몬스터가 있었는데 다행히 ‘어긋난 존재’는 아니었다. 여섯 개의 길고 두꺼운 촉수를 지닌 놈으로 C급이었다. 저 정도면 윤서는 손 하나 깜빡 안 하고 <염력>으로만 해치울 수 있었다. 윤서가 타이밍을 보는 그때 눈썰미 좋은 한 민간인이 안개 속의 거대한 촉수를 발견했다.
“아아아악!”
“뭐, 뭐야? 뭔데요?”
“아아악!”
“뭐냐고. 뭐냐니까. 저기에 뭐가 있는데?”
“아악!”
“말을 해, 이 사람아.”
“악악!”
공포 때문에 악만 내지르는 민간인의 고함을 촉수의 본체도 들었는지 안개가 꿈틀거리더니 거대한 촉수가 고깃집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뭔 악악거리기만 하고… 아악악!”
박영범이 목청껏 비명을 지르며 반쯤 열려 있던 문을 급히 닫았다.
쾅!
촉수가 아슬아슬하게 문에 가로막혔다. 정확히는 건물에 걸린 실드 트랩에 가로막힌 것이었다.
윤서를 제외한 모두가 숨도 쉬지 못하고 촉수만 응시했다.
“…….”
“…….”
촉수는 두께가 대형 트럭만 했고 길이가 얼마나 긴 건지 본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막혀 있으면 좀 다른 데로 가면 좋으련만 계속 고깃집 주위를 맴돌며 창을 툭툭 건드리거나 문을 흔들거나 했다.
이번엔 아무도 악을 쓰지 않았다.
박영범이 조용히 눈짓하면서 출입문에서 가장 떨어진 주방을 가리켰다. 고깃집 주인과 알바생, 손님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한 몸처럼 주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몇몇 민간인들이 핸드폰을 꺼내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이곳은 던전 범람 지역이므로 절반은 외계 행성이기에 신호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고희원과 박영범은 E급, F급이었지만 어쨌든 각성자였으므로 민간인들 사이에 껴서 덜덜 떨고 있을 순 없었다.
“미치겠네. 일단 내가 안정시킬게. 윤서 씨, 혹시 저 몬스터에 대해 알아?”
“C급이고 혼자 다니는 종류입니다. 이 건물 B급 실드 트랩은 잘 작동하고 있으니 안에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 고마워. 혹시 윤서 씨가 저 사람들 앞에서 브리핑해 줄래?”
“…….”
“장난해요? 오빠가 그런 외향적인 행위를 하겠어요?”
“그, 그럼 희원 씨가 할래? 본래 나서는 거 좋아하잖아.”
“팀장님. 낙엽 팀장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주세요. 얼른요. 사람들 울어요.”
“그래. 내가 해야 하는구나. 내가 해야지…. 그럼 그럼….”
박영범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민간인들 앞에 섰다. 여자 12명, 남자 16명이고 어린애나 노인은 없었다. 민간인들이 의아한, 그러면서도 기대가 섞인 시선으로 박영범을 올려다봤다. 박영범이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했다.
“저와 제 일행은 석영 길드 소속 각성자입니다.”
“아…….”
“세상에. 감사합니다…….”
몇몇 민간인은 얼마나 안도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현재 이 지역은 B급 옐로 던전 범람이 선포된 상황입니다. 보통 B급이면 클리어까지 한나절에서 하루 정도 소요됩니다. 이 건물의 실드 트랩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으니 밖으로 나가지 마시고 여기서 잘 기다리고 있으면 헌터분들이 우리를 구하러 올 겁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시고요….”
박영범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울고 있는 민간인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흑.”
민간인이 킁-! 하며 코를 풀고 박영범에게 다시 건넸지만 박영범은 촉수 몬스터를 살피는 척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무시했다.
고희원은 박영범보다 한층 더 밝은 목소리로 민간인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니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B급 범람을 겪을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겠어요! 그것도 여기가 범람 중심부라니까요? 다들 이럴 게 아니라 번호 교환하고, 나가면 단챗 방도 만들고 그래요. 이런 희귀한 경험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누가 앞에서 자기 범람벨 겪어 봤다고 깝치면 혹시 중심부에도 있어 봤냐고 한마디 던져서 압살시킬 수 있다니까요. 얼마나 쩔어요.”
고희원이 민간인들 달랜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그때 윤서는 출입문의 헐렁거리는 이음새를 보며 실드를 사용했다.
실드가 상가 건물 전체를 감쌌다. 이제 이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다.
‘권지한이 알았을 테니까…. 한나절까진 안 걸리겠지. 세 시간 생각하면 될까.’
윤서는 가만히 남자 친구를 기다릴 생각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가 불판 위 고기들이 재가 되어 가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고는 테이블마다 불을 끄며 돌아다녔다.
***
잠시 후 촉수 몬스터가 침입하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고 안정을 찾은 민간인들은 이제 바닥이 아니라 의자에 둥글게 모여 앉아서 친목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고희원과 박영범도 있었다.
“헌터님들 본래 낙엽 길드셨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저희가 낙엽이었습니다. 우리 길드에 대해 아시나 봐요?”
“아뇨. 살면서 처음 듣습니다. 나뭇잎 길드는 들어 봤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실드 트랩을 설치해 주던 좋은 길드였다던데.”
“우리 길드 말고도 또 그런 길드가 있었다니 놀랍네요.”
“헌터님들도 좋은 일 하는 분들이셨어요? 사장님, 우리 헌터님한테 감사의 의미로다가 사이다 한 병 드리죠.”
“그럽시다. 아니, 아예 다 같이 사이다 한잔 걸치시죠. 고깃집 사장이 쏩니다!”
알바생과 사장이 사이다를 부지런히 날랐다. 특히 알바생은 은근슬쩍 더 비싼 음료까지 꺼내고 있었다.
흡사 동창 모임을 한 것처럼 어울리는 사람들과 달리 윤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고독을 씹었다.
사실 그냥 분위기만 잡고 있던 건 아니고,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저 비각성자들이 의외였다.
‘왜 나가서 몬스터를 해치우지 않으세요?’
아무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이…. 헌터들이 곁에 있어야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건가? 그래도 한 명쯤은 나가서 몬스터와 싸우라고 할 법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으니 신기했다.
“헛, 자, 잠깐만요. 팀장님!”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고희원이 무언가에 놀라서 소스라쳤다.
“깜짝이야. 왜 그래?”
“왜 그러세요. 헌터님?”
“아니, 저거 문 떨어져 나가는 거 아니에요? 아, 처음부터 불안불안했는데.”
고희원이 출입문을 가리켰다.
헐렁한 이음새와 그 부분을 툭툭 끈질기게 건드리고 있는 촉수를 발견하고 사람들의 낯빛이 변했다. 실드 트랩은 범위를 설정하고 그 범위를 보호하는 종류와 건물 자체를 보호하는 종류가 있다. 이 건물의 실드 트랩이 후자라면, 출입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구멍이 뚫리고 촉수 몬스터가 침입할 수 있게 된다.
이 정도는 민간인들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사장님…. 아니죠?”
“설마…. 아니라고 말해요. 빨리…!”
고깃집 사장은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셀카 영상을 찍었다.
“딸아, 아들아. 여보. 사랑해. 이 영상을 보면 얼른 빨리 우리 집 실드 트랩을 범위 보호 트랩으로 변경하고, 현관문 새로 달도록 하렴….”
“내가 미쳐. 이럴 줄 알았어.”
고희원이 유언을 남기는 고깃집 사장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아니, 실드 트랩은 건물주 소관이라지만 저거 문은 안 고치고 뭐 했어요?”
“범람벨이 울릴 줄 알았겠수. 알았다면 진즉 고쳤죠.”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은 범람 지역 한복판에 갇히는 경험을 하는 거 몰라요? 범람이 얼마나 흔한 일인데! 왜 미리 준비를 안 해. 왜!”
“희원 씨. 진정해. 그러다 사람 죽는다. 비각성자다.”
아까 전 민간인들을 달래며 한 말과는 정확히 정반대의 말을 내뱉으며 발작하는 고희원을 박영범이 침착하게 말렸다. 그러나 그 역시 울고 싶은 얼굴인 건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민간인들은 이미 울고 있었다.
“이제 저희는 다 죽은 건가요?”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고기라도 실컷 먹을걸….”
“엄마 보고 싶다…. 엄마아….”
울고 싶은 각성자들은 민간인이 그러고 있으니 울음을 삼켰다.
“다들 진정하세요. 우리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 뭐냐. ‘러브 인 한강’이나 보고 계세요.”
“이미 다 봤는데요. 요즘 그 드라마 안 본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재탕하세요. 재탕도 마친 분들은 삼탕하시고.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점이 보이는 드라마니까요.”
어쨌든 문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고, 그 방안을 생각해 내는 건 당연히 헌터들의 몫이었다.
고희원과 박영범이 민간인들과 떨어진 자리에서 머리를 맞댔다가 다시 뗐다. 박영범이 멀찍이서 무심하고 시크하게 팔짱 끼고 서 있는 윤서를 불렀다.
“뭐해. 윤서 씨도 와서 머리 맞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제가 실드 펼친 건 아시죠?”
“알지, 그럼. 우리가 윤서 씨를 못 믿는 건 절대로 아닌데 그래도 일단 출입문은 잘 달려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지, 희원 씨?”
“그럼요. 윤서 오빠 실력이야 알죠. 무려 석영 헌터인데. 그냥 출입문이 있는 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더 좋달까. 그런 거죠.”
“…….”
결국 윤서도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맞댔다. 맞대자마자 바로 방안이 나왔다.
“문을 안에서 붙잡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이 왼쪽, 희원 씨가 오른쪽을 잘 붙잡고 있으세요.”
“아니, 그런 신선한 아이디어를! 윤서 씨는 어떻게, 창문을 붙잡고 있게?”
“저는 고기를 먹고 있겠습니다.”
“세상에!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거죠? 꼭이에요. 절 위해 살치살을 구워 주세요.”
박영범과 고희원이 양문 출입문의 좌우에 자리 잡고 온몸으로 문이 흔들리지 않게 막았다. 촉수 몬스터는 검은 안개 속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갑자기 공격해 올지도 모르므로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10초 전, 몬스터는 이미 윤서의 <염력>으로 숨통이 끊어졌다는 것이었다.
몬스터가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죽으면 좋았겠지만, 바로 절명해 버린 나머지 박영범과 고희원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온 힘을 다해 문을 붙들었다. 그렇다고 윤서가 갑자기 ‘몬스터가 죽었습니다’ 하면 ‘어떻게 안 거냐’ 질문이 돌아올 게 뻔하니 그냥 둘의 뻘짓을 방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동창 모임 같던 분위기는 이제 숙연해졌다.
민간인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두 헌터를 바라봤다. 다시금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는 비각성자들이 겁먹어서 울고 있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들을 달래 주기엔 말재주가 없어서 그냥 고희원과 교대해야겠다는 생각에 막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민간인 한명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 저기….”
윤서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런데 혹시 헌터님들은 등급이…. 그. 몇 등급이신지….”
윤서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분들은 헌터는 아닙니다.”
“……네?”
“남자분은 E급, 여자분은 F급으로 석영 소속 사무직 각성자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공격 스킬, 방어 스킬이 없죠.”
“뭐, 뭐라고요?”
민간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식당이 넓지 않아 박영범과 고희원도 그 대화를 들었다. 박영범이 속으로 윤서를 원망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분위기 잡고 서 있는 미인은 무려 B급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맡겨 두고 침착하게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요?”
“아니, 사무직이면 사무직이라고 진즉 말했어야지. 그럼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진 않았지!”
비각성자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들은 서로 시선으로만 대화를 나누고는 마음이 일치한 듯 우르르 출입문 쪽으로 몰려갔다. 윤서는 뭘 하려나 싶어서 가만히 바라봤다. 마침 밖에 촉수 몬스터의 모습도 안 보이고 하니 나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막아야 했다.
그러나 펼쳐진 풍경은 윤서의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거기. 왼쪽이 더 흔들거리니까 잘 틀어막아.”
“와, 씨. 나 집 가면 무조건 문 상태부터 확인한다.”
“올겨울 우리 부모님 댁에 실드 트랩 하나 놔 드려야겠어요.”
비각성자들 몇몇이 왼쪽, 오른쪽 문을 고정하는 데 힘을 보탰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전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들은 바깥 동태를 살폈다. 누군가 박영범의 조금 비뚤어진 안경을 다시 올바르게 씌워 주고, 누군가는 고희원의 땀을 닦아 줬다. 고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까 안쪽에서 기다리라니까요.”
“아니, 사무직이라면서요. 우리랑 뭐 그렇게 다르다고 자꾸 기다리래요?”
“그래도 저희가 힘도 더 세고.”
“그냥 힘만 더 센 것뿐이면서 뭘 맡겨 달라고. 이거, 이렇게 문 붙잡고 있으면 되는 거죠?”
“그러면 되긴 한데.”
“근데 꼭 잡고 있어야 해요? 테이블이랑 의자 쌓는 건 어때요?”
“테이블 백 개를 쌓아도 몬스터가 촉수로 한 대 후려치면 끝입니다. 문이 달려 있는 게 제일 안전해요.”
“알았어요. 우리가 좀 버티고 있을 테니까 둘은 가서 쉬어요. 벌써 10분이나 이러고 있었잖아.”
“흐읍……. 여러분 정말….”
박영범과 고희원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비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단톡방 이름이 ‘우협화(우정, 협동, 화합)’가 되는 순간이었다. 윤서는 이 감동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멀찍이 섰다.
‘인류가 더 착해져야죠. 그래야 각성자가 더 많아지니까.’
이 순간 그 말이 왜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권지한이 무지 보고 싶었다. 햅쌀이도.
그때였다.
바깥에서 콰아앙, 하는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순식간에 사방이 환해졌다.
고깃집 안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깥을 살폈다.
“범람 클리어. 범람 클리어. 다시 알려 드립니다. 현 지역 범람 클리어되었습니다.”
“우와아아! 우리가 해냈어요!”
“인류의 승리다. 몬스터깽깽이들아!”
민간인들이 환호했다.
“뭐? 벌써?”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시간 만에…?”
반면 B급 범람 클리어에 얼마나 걸리는지 헌터 소양 교육 때 배운 박영범과 고희원은 매우 놀랐다.
윤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B급 옐로 이상인데 벌써 클리어라니 너무 빨랐다. 반나절보다야 빠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한 시간도 안 되지 않았나?
‘권지한, 화가 난 건 아니겠지.’
윤서는 고희원과 박영범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클리어했는지 의아해하다 못해 불신 중인 두 사람은 출입문을 굳게 닫은 채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윤서 씨도 이상하지? 벌써 끝날 리가 없잖아. 몬스터가 환청을 듣게 하는 건 아닐까?”
“끝난 거 맞아요. 문 열고 나가면 됩니다.”
“진짜로?”
“네.”
박영범이 얼떨떨하게 문 앞에서 벗어났다.
“앗, 여러분! 신호가 터집니다. 전화가 걸려요.”
“뭐, 진짜요?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우리 딸 얼마나 걱정했을까.”
“아이고, 부재중 전화 온 것 좀 봐.”
민간인들은 대체 얼마나 연약한 건지 또다시 울먹이면서 가족과 연인, 친구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렸다. 박영범과 고희원도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민간인 중 몇몇이 둘에게 다가와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바람에 다시 넣어야 했다.
“헌터님들이 계셔서 저희가 패닉에 안 빠지고 잘 버텼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뭐 한 게 있다고요.”
“혹시 석영의 영웅함인가 뭔가 거기에 헌터님들 성함 쓰면 인센 좀 받으십니까?”
“영웅함은 무슨 영웅함입니까. 우리가 다 같이 영웅이었는데요.”
영웅함은 민간인이 칭찬하고 싶은 석영 헌터 이름을 적으면 매달 상위권에게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제도였는데 박영범이 그 좋은 기회를 거절했다. 고희원도 마찬가지로 그윽한 눈빛으로 인센 따위에 욕심내지 않는 각성자라는 걸 표명했다.
“헌터님들은 정말 참된 영웅이시군요…. 흐읍. 역시 각성자분들은… 정말이지.”
“거, 참. 영웅 아니라니까요. 하하…….”
박영범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서는 둘이 인센을 받을 기회를 거절하는 이유를 잘 이해했다. 내근직 각성자가 괜히 이름 올렸다가 상부에 찍히면 다시 헌터 재질 테스트하고 외근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윤서가 내내 서먹하게 굴었기 때문에 윤서에게 다가오는 비각성자는 없었다. 윤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권지한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
뜨거운 시선을 느낀 윤서가 핸드폰을 끄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안개가 걷히고 평소의 풍경으로 돌아온 바깥.
아스팔트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고 그 위에 권지한이 서 있었다. 변장 아이템을 푼 채였다.
권지한이 옷에 붙은 먼지를 털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자, 잠깐 저 사람은…!”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기 많은 히어로를 발견한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권지한….”
“궈, 권지한이야….”
“세상에…. 잘생겼어.”
윤서가 속으로 인정했다. 권지한이 어지간히 잘생긴 게 아니긴 하지.
“뭐야…. 키 개 커. 어깨 엄청 넓어….”
권지한은 모든 게 다 크다.
“범람 대박….”
범람 대박은 뭔데? 권지한을 볼 수 있다니 이런 범람은 대박이다 이런 건가?
“와. 마침 근처에 있었나 봐요. 어쩐지 너무 빨리 끝났다 싶더니.”
고희원과 박영범도 민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입만 헤벌린 채 보는 둘에게 권지한이 먼저 인사했다.
“박영범 팀장님, 고희원 대리님.”
“안녕하… 네? 저희를 아세요?”
“압니다.”
“저희를 아시다니. 저희를 아시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윤서 형이랑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아아아아. 완전 절친이죠! 저희가 예전에 같은 길드였어 가지고. 아, 물론 지금도 같은 길드지만!”
“거의 가족과도 같은 사이죠. 제가 먹은 초코쿠키만 5천 개는 넘을 겁니다!”
“그렇군요. 부럽네요.”
꽤나 매너 있는 자세로 둘의 호들갑을 받아 준 권지한은 다음으로 윤서에게 인사했다.
“안녕, 형. 우연히 지나가다가 범람벨 울렸길래 와 보니까 형이 여기 있었네.”
“…네. 고마워요.”
“아냐. 우리 사이에.”
박영범과 고희원이 눈을 초롱초롱 뜬 채 여길 보고 있었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이?’
‘방금 우리 사이라고 했어?’
‘권지한이 저렇게 웃는다고?’
‘대체 둘이 뭔데?’
‘권지한은 서채윤이랑 연애하는데?’
‘뭔데 뭔데 뭔데!’
민간인들의 이글이글한 열기가 느껴졌다.
권지한 또한 다른 의미의 이글이글 끓는 시선으로 윤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윤서는 여기서 나가면 권지한의 약병을 확인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잠깐 암담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외도설…. 더 불붙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