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9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외전 3.(194/195)
외전 3.
유준철이 권지한과 서채윤의 장기 휴가를 수락했다. 가을부터 1년간 두 사람이 헌터 활동을 중지한다는 게 알려지자 많은 이가 걱정했다. 이제 막 레벨 1로 진입한 상황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래 쉬어도 되는 걸까? 본인들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러 매체에서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찬성과 반대는 대부분 50:50으로 나왔다. 윤서는 생각보다 찬성이 많아서 놀랐는데, 권지한은 오히려 생각보다 반대가 많다며 혀를 찼다.
한 달쯤 지나자 찬성이 80%를 차지했다. 석영이 열심히 언론 플레이 한 결과였다. 다만 그 마케팅 키워드가….
“신혼여행 같은 소리 하네. 제발 유준철 길드장한테 이딴 표현 좀 쓰지 말라고 하면 안 됩니까?”
윤서가 태블릿을 냅다 던지며 말했다.
현충원으로 이동 중인 차 안이었기에 창문에 부딪치려는 걸 권지한이 얼른 막았다.
“형, 창문 깨지겠어.”
“이런 걸로 안 깨지거든요.”
“주인님. 이제 절 버리실 건가요?”
“뭐?”
AI 찹쌀의 질문에 윤서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 내비 화면에 찹쌀이가 ‘ㅠㅠ’라는 모음 두 글자를 띄웠다.
“일부러 차를 고장 내서 바꾸시려는 거죠? 저는 이제 중고차 시장에 버려지나요? 누가 저를 원할까요? 제게는 주인님뿐인데 주인님은 저 같은 건 금방 잊고 새 차와 함께 칠렐레팔렐레 하시겠죠…?”
“칠렐…. 아니야. 안 버려. 앞으로 안 던질게.”
“네, 주인님. 조심해 주세요.”
권지한의 찰보리는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인데 자신의 AI는 왜 이렇게 예민한지 모르겠다. 윤서가 한숨을 내쉬자 하나밖에 없는 연인이 쿡쿡 웃었다.
삐융?
윤서는 소매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페럿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신혼여행이란 단어는 아닌 것 같아요.”
“그 단어가 대중한테 가장 효과적으로 먹혀서 그래. 온 세상 사람들은 다 아이아이러니까 그 점을 이용하는 거지.”
“아이아이러가 뭐예요?”
“아이아이 커플을 지지하는 사람들.”
둘의 커플 네임은 아이아이 커플이 되었다. 눕히면 ‘웅웅’이 된다고 웅웅이라는 표현도 많이 썼다. 석영은 아이아이와 웅웅에 저작권과 상표권 등록까지 끝냈다. 둘의 연애는 세상을 대통합시키는 평화의 상징인 동시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일 사업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렇게 번 돈은 다 헌터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으므로 윤서도 커플 인터뷰에는 종종 참여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가면을 쓴 채로 커플 화보집도 찍을 예정이었다.
“형이 정 찜찜하면 신혼여행 맞도록 만들어 버릴까?”
“어떻게요?”
“결혼하면 되지.”
“…….”
“동성혼 올해 말쯤에 통과 여부 나온다면서. 우리가 국내 1호 동성 부부 찍는 거야. 어때?”
“합법화만 이제 될 뿐이지 동성 부부의 수는 예전부터 많았습니다. 그리고 굳이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정체를 숨기는 입장에서 서류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으니까.”
한 3~4년 전까지만 해도 아포칼립스 뒷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전산상으로는 사망한 이가 살아 돌아다니거나, 산 사람은 죽어 있거나, 성별이 바뀌어 있거나 나이가 달라져 있거나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3년간 나라에서 아예 각 잡고 총인구 조사를 하면서 이제는 전산 체계가 명확하게 잡힌 상태였다.
“천재 해커를 한 명 고용해서 서채윤이란 사람을 한 명 만들어 버리면 어때?”
“천재 해커 입막음은 어떻게 할 건데요?”
“형의 팬클럽에서 영입하는 거야. 형한테 미친 사람들이니까 입막음할 필요도 없을걸. 서채윤을 위한 일이라는데 불법이든 뭐든 마다하겠어? ‘포 더 서’에 유능한 사람들 많다는데 알렉한테 한번 물어볼까.”
알렉은 ‘포 더 서’의 명예 자문위원장이 되었다.
말이 자문위원이지 그냥 스파이였다.
서채윤과 같은 팀에 있는 S급 헌터로서 서채윤이 오늘은 어떤 색깔 옷을 입었는지, 서채윤이 최근 언급한 음식은 무엇인지 같은 걸 ‘포 더 서’ 회원들에게 알려 주고는 했다. 그러면 그 색상의 옷과 그 음식이 다음 날부터 선물로 쏟아진다. 윤서는 선물을 받기 시작한 지 이제 2개월이 막 지났는데 벌써 인벤토리가 2/3 찼다. 인벤토리 총량이 권지한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웬만한 길드보다는 큰데도 말이다.
“전산에 서채윤이란 사람이 생기면 우리의 결혼에도 아무도 문제가 없지. 그럼 신혼여행도 핑계가 아니라 진짜가 되는 거고. 완벽한 계획이지?”
“헛소리하지 마세요. 아무튼 신혼여행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알겠으니까 그만하죠.”
삐융삐융.
햅쌀이가 윤서의 목덜미 부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얀 족제비가 뭔가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자 연인은 그들의 반려 아이템에게 동시에 시선을 집중했다.
“햅쌀아, 왜 그래? 형 옷 불편하면 나한테 와.”
삐융삐융삐유유융.
“왜 울지? 뭔데. 말 좀 해 봐.”
권지한이 손을 뻗었지만 평소라면 바로 건너왔을 햅쌀이가 여전히 서럽게 울면서 다시 윤서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권지한이 당황했다.
“왜 이러지? 어디 아픈 거 아냐?”
“햅쌀이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템이란 걸 잊지 말아 주세요. 그냥 심심해서 그래요. 장난감 하나 던져 주면 돼요.”
윤서가 가방에서 페럿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꺼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동그란 공이었다.
삐윳!
햅쌀이가 튕기듯이 튀어나왔다. 동그란 공을 길쭉하고 날렵한 몸으로 감싸서 물어뜯는 햅쌀이를 보며 권지한이 낮게 웃었다.
“우리가 애가 듣기엔 좀 어려운 대화를 했나? 우리도 이제 쉬자, 형. 색칠 공부 어때?”
“좋아요.”
둘은 인벤토리에 늘 담고 다니는 색칠 공부 책과 색연필을 꺼냈다.
둘의 데이트는 대부분이 이랬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지금처럼 어디로 이동 중이든…. 언제나 윤서의 유언 활동을 겸하고 있었다. 뜨개질을 한다거나 색칠 공부를 한다거나….
사실 색칠 공부와 뜨개질 둘 다 유언 분량은 끝났다.
그러므로 이제 ‘유언 활동’이 아니라 ‘취미 활동’이라고 표현해야 옳았다.
윤서는 권지한과 함께 많은 유언을 마쳤다.
등산 리스트도 클리어했고, 새벽 참돔도 잡았으며, 시 쓰기도 완료했다. 제빵 공장을 일주일 대여한 후 초코크랙쿠키를 5만 개 찍어 내서 기부하기도 했다. 당초 유언 분량 초과 달성이었다.
물론 아직 완료하기에는 택도 없는 유언도 있었으니, 대표적으로 스쿼트와 조깅이 있었다. 그 외에 맛집 줄 서기, 풍경화, 피아노 연주, 봉사 활동, SNS 팔로워 1만 명 만들기는 아직 못 했다.
‘SNS는 이제 곧 달성할 것 같은데.’
윤서는 생각난 김에 핸드폰으로 SNS에 들어갔다.
“권지한.”
“응, 형아.”
윤서가 평소의 호칭인 ‘~헌터’를 떼고 이름만 부르자 권지한이 애교 섞인 대답을 했다.
“변장 아이템 착용하세요.”
“지금?”
“네.”
“알았어.”
권지한이 순순히 안경을 착용했다.
찰칵.
윤서가 사진을 찍었다. 권지한은 허락 없이 사진 찍혔음에도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SNS 올리게?”
“네.”
윤서는 현재 B급 헌터 윤서의 SNS를 운영 중이었다. 권지한과의 외도설을 일축시키고 애니멀 호더라는 누명도 해명하기 위해서 일주일 전에 만들었다.
가장 첫 글은 햅쌀이 사진들이었다. 딱 봐도 ‘동물 팔자가 상팔자네’ 할 만한 모습으로 뻗어서 자고 있는 페럿, 고슴도치, 고양이, 도마뱀, 다람쥐… 등을 찍어서 자신은 반려동물을 방치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렸다.
두 번째 글은 권지한이 변장 아이템을 착용했을 때의 사진을 올렸다. 윤서가 보기엔 그 얼굴도 지나치게 잘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권지한의 얼굴은 아니므로. B급 헌터 윤서와 권지한은 그냥 친한 형 동생 사이이고, 윤서의 남자 친구는 안경 쓴 민간인이라는 걸 알린 것이다.
정보통을 맡고 있는 박영범, 고희원의 말로는 SNS 개설 이후 외도설과 애니멀 호더설은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점만 있지는 않았다. 윤서는 다른 의미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근데 형 팔로워 8천 명이네. 일주일 만에 짱 빠르다. 이제 유언까지 2천 명 남은 거지?”
“네…. 1만 명 찍으면 바로 닫아야죠.”
일주일 만에 팔로워 8230명을 달성. 그 이유는 명확했다.
홍의윤, 수재희, 옐레나 등 SNS를 즐겨 사용하는 S급 헌터들이 윤서를 팔로우하자 유명 헌터들을 일괄적으로 팔로우하고 있는 민간인들이 이 사람은 뭐길래 우리 헌터들이 팔로우하나 싶어서 덩달아 팔로우한 것이다.
“에이. 닫을 필요까지야 있나. 그냥 1만 명 찍은 다음 다른 헌터들 보고 언팔하라고 하면 사람들도 자연히 빠질 텐데.”
“글쎄요. 효과가 있을까요.”
“스타들의 SNS 교류를 보고 싶어서 팔로우한 거니까 자연스럽게 빠질 거야. 그래도 형을 계속 팔로우하고 있는 사람들은 귀여운 햅쌀이들 보고 싶어서 하는 거고.”
삐융.
햅쌀이가 이름이 불리자 바로 목을 빼 들었다. 윤서가 햅쌀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지금은 전 세계에 새 모습의 햅쌀이만 알려져 있잖아. 다른 모습도 이렇게 귀여운데. 자랑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햅쌀이라는 걸 아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이런 귀여운 존재가 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세계 평화에 더 기여하는 거지.”
윤서는 좋은 생각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계정은 계속 유지하도록 하죠.”
“응. 아, 홍의윤은 꼭 언팔하라고 해. 홍의윤은 팔로잉 수가 너무 적어서 형이 너무 튀니까.”
“네.”
“박수빈도 언팔하는 게 좋겠다. 그 인간은 SNS 안 하다가 형이 하니까 만들어서 팔로우가 형밖에 없잖아. 민간인들이 보기에 얼마나 수상하겠어?”
“박수빈 헌터는 공식 계정이 아니라 민간인들은 그게 박수빈 헌터 것인지도 모르는데요?”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지도 몰라.”
윤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 같았지만 권지한이 원하는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다. 권지한이 그제야 만족했다. 홍의윤과 박수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 팔로잉을 천 명 정도 만들어 버렸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던전 공략 중이었다.
“나도 형 찍어서 올리고 싶다. 색칠 공부하는 거 찍을래.”
“그래요. 대신 지금 말고 내일 올려요.”
“응.”
권지한이 알록달록한 동물원 그림책을 사진 찍었다.
이 사진은 내일 권지한의 SNS에 올라갈 것이고, 팬들은 또 서채윤과 아기자기한 데이트를 했나 보다며 사랑을 축복할 것이다. 둘만의 비밀스러운 럽스타그램이었다.
***
날씨 좋은 휴일이다 보니 현충원에도 사람이 많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과 단체 관람을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차 고요하기보다는 떠들썩했다.
올해 초 새로 조성된 구 리벤저들 묘역으로 향하며 권지한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무 어수선하네. 조용히 하라고 방송하게 할까?”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엄숙해야 할 곳이 어수선함에도 윤서는 싫지 않았다.
구 리벤저들은 외롭게 죽어 간 이들이라 오히려 이 소란스러움을 반가워할 테니까.
헌터로 활동하다 순직하면 현충원에 안장되는데 그 묘역 이름은 ‘순직 각성자 묘역’이다.
그러나 구 리벤저들의 묘역 이름은 ‘홍익인간 묘역’이었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 이들의 혼이 잠들어 있는 곳. 국민 투표로 정한 이름이었다.
홍익인간 묘역은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된 상태였고, 모든 비석 앞에 꽃이 최소 세 개 이상 놓여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못해 줄까지 서야 했는데, 관리인이 스무 명 단위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한 시간은 기다려야겠네. 형, 친구한테 연락해서 오면 바로 우리한테 오라고 해.”
“네.”
윤서가 오늘 만나기로 한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 어. 윤서야. 어디야?
“우리는 도착해서 줄 서고 있어.”
– 줄까지 서야 해?
“사람이 좀 많네.”
– 알았어. 난 금방 도착해. 네 그… 남자 친구분도 와 있고?
“응. 오면 바로 우리 쪽으로 와. 정직하게 맨 뒤에 줄 서지 말고.”
상대가 작게 웃으며 그래, 대답했다.
윤서는 전화를 끊었다. 그의 핸드폰에 ‘박지긋지긋’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사람. 이도민과 윤서의 친구. 박주홍.
권지한과 윤서는 우주여행을 마치고 바쁜 일이 끝난 후 박주홍과 만났다. 이전에 한 약속대로 현충원에서 만났는데, 막 홍익인간 묘역이 조성된 참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구 리벤저에게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카페로 향해야만 했다. 박주홍은 권지한을 B급 헌터의 평범한 비각성자 남자 친구로 알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동성과 연애한다는 사실보다 그냥 연애라는 걸 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윤서도 본인이 연애 중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으니 이해했다.
그때는 카페도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각자 바쁘게 살다가 오늘 겨우 날짜를 잡은 것이다.
“형.”
권지한이 윤서의 팔을 툭 건드리고는 뒤쪽을 턱짓했다.
바로 뒤에 줄을 선 아이 하나가 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윤서의 품 안에서 놀고 있는 흰 족제비를.
초등학교 고학년쯤 됐을 법한 아이가 엄마의 손을 흔들었다.
“엄마. 엄마. 아저씨들이 데리고 있는 거 이름이 뭐야? 존나 귀여워!”
“응? 너 엄마가 ‘존나’라는 말 쓰지 말라고…. 어머어머. 이게 뭐야. 어머나.”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흰 페럿을 발견한 어머니가 톤을 높였다.
“귀여워라. 페럿? 페럿 맞죠? 청년들이 키우나 봐요.”
“아, 네.”
“이름이 뭐예요? 몇 살? 수컷 암컷?”
“이름은 햅쌀이고 다섯 살입니다. 수컷이고.”
윤서가 대답하자 어머니가 안면 가득 미소를 띠었다.
“권지한이랑 서채윤 팬이구나. 맞죠? 저희도 너무 좋아해요.”
“엄마, 나도 햅쌀이 갖고 싶어. 엄마도 귀여워하잖아.”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동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이 아저씨들은 키우잖아.”
“아저씨들, 꼬마 애한테 동물 키우면 왜 안 되는지 말 좀 해 줘요.”
“맡겨 주시죠.”
아저씨들 중 더 키가 크고 안경을 낀 아저씨가 반려동물의 단점을 나열했다. 냄새나고, 털 날리고, 배변 문제도 있고 등등.
“아, 진짜 존나 귀엽다….”
정작 아이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길로 ‘만져 보고 싶어요’를 어필 중이었다.
“…….”
윤서는 아이에게 햅쌀이를 만져 보게 해도 좋을지 고민했다. 햅쌀이는 이미 아이가 자기를 귀여워하는 걸 알아 버렸다. 만짐받고 싶어서 허리를 길쭉하게 세우려는 걸 윤서가 손으로 막았다. 아이가 햅쌀이를 만졌다가는 더 키우겠다고 조를 것 같았다.
“우리 애가 한번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네.”
어머니의 요청이 있고 나서야 윤서가 페럿을 내려 줬다.
삐융삐융!
“아, 존나 귀엽다. 족제비는 삐융삐융 하고 울어요?”
“…네.”
“햅쌀이도 삐융삐융 울던데. 아저씨들 햅쌀이 말고 권지한이랑 서채윤 햅쌀이요. 작은 새가 삐융삐융 울어요! 제가 티브이에서 봤어요!”
“그렇군요.”
“존나게 귀여운 새예요!”
“…….”
윤서가 권지한을 한번 흘겨보고는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티브이에서 권지한이 ‘존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도 봤습니까?”
“네! 존나 많이 봤어요. 존나 개멋있었어요!”
발랄한 대답에 권지한이 크흠, 헛기침했다.
“손을 이렇게 모아서 길쭉하게 쓰다듬어 줘. 그럼 더 좋아한다.”
“네!”
아이가 권지한이 하라는 대로 하자 햅쌀이가 아이의 팔목에 몸을 비벼 왔다. 아이가 존나 부드럽고 존나 귀엽다며 좋아했다.
“…….”
“…….”
권지한은 윤서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이 말버릇 때문에 고생 심하게 하고 있을 것 같은 어머니가 물었다.
“혹시 물진 않죠?”
“무는 페럿도 있는데 우리 햅쌀이는 안 물어요. 만져 보세요.”
“응, 못 참겠다. 나도 만져 봐야겠어.”
어머니의 손이 쓱 들어왔다.
“진짜 귀엽다. 털이 엄청 부드럽네요.”
삐융삐융.
“어우. 키우면 안 돼. 털 날려. 안 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정신 차려.”
어머니는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는 듯했다.
“뭐야?”
“헐, 족제비 아냐?”
“페럿이라는데?”
페럿은 야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려동물이 아니므로 사람들의 눈길이 모였다. 당연한 순서로 근처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은 다 한 번씩 햅쌀이를 만져 보게 되었다.
삐윳!
드디어 입장할 순서가 되었을 때 햅쌀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권지한의 머리 위에 우뚝 섰다. 관심받고 행복해진 관종 페럿은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눈부실 정도였다.
권지한과 윤서를 포함해 앞뒤로 총 스무 명이 묘역 안으로 입장했다.
“자아, 아빠 보러 가자.”
“응!”
둘 뒤에 있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묘역 중간으로 향했다. 아이가 먼저 도도도 뛰다가 누군가에게서 뛰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멈췄다. 아이는 그들의 목적지가 어떤 비석 앞인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이곳을 찾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리벤저의 가족이었구나…. 애가 열한 살, 열두 살쯤 되어 보였는데….”
권지한이 중얼거렸다.
모녀의 뒤를 이어서 다른 이들도 각자 목표한 곳을 찾아갔다.
현충원에 참배하러 오는 이들은 관계없는 일반인이 절대다수였지만, 당연히 구 리벤저의 가족과 지인들도 있었다.
윤서는 저들 중 어떤 이들이 관계자일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주홍이가 늦네요. 전화해 볼게요.”
윤서가 친구에게 전화했다.
“어디야?”
– 아, 나 아까 도착했는데…. 줄이 엄청 길더라. 차마 앞으로 갈 수 없어서 그냥 뒤에서 기다리고 있어.
“일행 있다고 하고 오면 되는데.”
– 뭔가 새치기 같고 그래서. 너희 먼저 도민이 보고 카페에 가 있어. 미안.
“알았어. 천천히 와.”
윤서가 전화를 끊고 어깨를 으쓱했다. 권지한에게 통화 내용을 따로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S급 헌터는 지척의 통화 내용 정도는 얼마든지 들으니까.
그들은 대화하면서 비석 앞으로 걸었다.
“형 친구 되게 착하다.”
“그렇죠. 옛날부터 이렇게 미련했어요. 도민이도 비슷했고.”
“형이 엄청 답답했겠네.”
“꽉 막힌 호구 놈들이라고 욕하고는 했죠. 그때는… 착한 사람은 호구인 시대였으니까. 아.”
윤서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강진의 비석에 꽃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 비석이 이도민 것이었는데 그곳에도 꽃이 만발해 있었다.
곧 시들어 버리겠지만 지금만큼은 이곳에서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윤서는 먼저 이강진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인사를 건넸다.
“강진이 형, 안녀….”
“…….”
윤서가 힐끔 권지한을 쳐다봤다.
“끝까지 발음 안 했는데요.”
“알았어. 봐줄게.”
권지한이 가볍게 웃었다. 약병을 꺼낼 것처럼 보이지 않아 윤서는 안심하고 다시 이강진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형….”
윤서는 눈을 감았다.
이강진의 영혼 가루는 지리산에 뿌렸다.
새하얗게 눈 덮인 골짜기에 반짝반짝 오색 빛깔로 빛나는 별들이 내려앉는 모습은 꿈에서도 보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권지한이 옆에 있었는데, 권지한은 그때 이렇게 표현했다.
‘이곳이 우주 같아.’
윤서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우주다. 지구가 우주이므로 지리산 또한 우주니까.
윤서가 눈을 떴다. 권지한은 옆에 가만히 앉아 애도하고 있었다.
“권지한.”
“응, 형아.”
“그 얘기 강진이 형한테 좀 해 주세요. 인간은 별의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거.”
“그래.”
권지한이 조용히 읊조렸다.
인간을 이루는 원소의 일부분은 오직 별을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한다. 먼 옛날 초신성이 된 별이 폭발하면서 그 잔해가 우주에 흩뿌려지고, 그 잔해들이 또 다른 별과 행성, 생명을 만들었다. 그 폭발이 만들어 낸 원소들이 인간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별의 일부라는 아주 멋진 이야기였다.
윤서는 이 학설이 꽤 괜찮게 느껴졌다.
이강진은 새로운 별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그러하듯이.
우주의 일부로.
그리고 죽은 리벤저들도 모두. 어쩌면 우주 아주 먼 곳에서 이미 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삐융!
윤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삣. 삐융. 삐유삐유.
햅쌀이의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났는데…?
윤서는 순간 끼친 불안감에 일단 외쳤다.
“햅쌀아! 안 돼. 하지 마.”
삣.
햅쌀이가 꽃들 사이에서 머리를 쏙 내밀었다.
권지한이 작게 웃었다.
“귀엽다.”
“지금 칭찬할 때예요? 추모 꽃을 파헤치고 있잖아요.”
“애가 그럴 수도 있지. 형은 너무 엄하게 키워.”
“환장하겠네. 얼른 꽃들 정리나 해요.”
윤서가 얼른 햅쌀이의 흐물거리는 몸을 달랑 들어 올렸다. 페럿은 땡글땡글한 눈동자로 의아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러면 안 돼.”
삐윳?
“이거 강진이 형 추모하는 꽃이야. 강진이 형 알지? 갈색 머리에 눈썹 진하고.”
삐윳?
“너 그 형 머리에 자주 앉고 그랬잖아. 강진이 형이 진지하게 참모 회의하는 중에도 네가 머리칼에 둥지를 틀어서 얼마나 곤란해했는데.”
삐유!
햅쌀이가 바동거렸다. 윤서가 놓아주자 햅쌀이는 비석 앞으로 파바박 기어 와서는 딱딱한 바닥을 파고들려고 했다.
“이제 기억났나 보네.”
“이제라도 기억이 나야죠. 11년밖에 안 지났는데. 꽃들 정리 좀 도와줘요.”
“응.”
권지한과 윤서는 햅쌀이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꽃들을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정리했다. 둘은 이런 식의 수습에 익숙해졌다. 사고뭉치 자녀를 두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다. 홍의윤은 그런 둘을 보며 햅쌀이를 확실하게 훈육하라고 했지만 권지한과 윤서는 그냥 앞으론 이러지 말라는 말만 한마디 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햅쌀이의 버릇은 날로 나빠지는 중이었다.
꽃 정리를 다 마칠 때쯤 다른 비석 앞에서 저마다 애도하던 이들이 구 리벤저의 리더이자 마지막 던전의 희생자에게 애도를 표하러 모여들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지자 윤서와 권지한은 햅쌀이를 데리고 이도민의 비석으로 이동했다.
“도민이 형한테는 뭐 할 말 없어?”
“글쎄요. 여기다 대고 말한들 듣겠어요? 던전에서 말해야지.”
이도민은 던전 시스템이 되었다.
권지한이 대던전과 출구 포탈의 중간에서 이도민의 메시지를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메시지가 오간 적은 없었지만…. 새로운 시스템 관리자로서 바쁘겠거니 했다. 언젠가는 시스템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나중에 그 얘기 해 주자. ‘러브 인 한강’ 제작자에 대해서.”
“당연하죠. 도민이도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드라마 제작기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엄청 놀라겠지?”
“까무러칠걸요? 후후후.”
“후후후.”
“후후후.”
윤서가 수상하고 음흉한 웃음을 짓자 권지한도 연인을 따라서 후후후 웃었다.
삐융삐융.
이도민의 비석 앞에는 투명한 보관함이 있다. 보관함의 내용물은 군용 부츠였다. 햅쌀이가 보관함을 긁으며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권지한이 손을 내밀자 햅쌀이가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신발 바로 알아보는구나. 우리 햅쌀이. 내 신발은 물어뜯으면서 도민이 형 신발은 그리워하네.”
삐유우.
“그럼그럼. 물어뜯을 수도 있지. 나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잖아. 그렇지? 형이 우리 동거 허락만 해 주면 밤마다 햅쌀이랑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면 햅쌀이도 내 신발 안 물어뜯을 거고. 그치?”
삐유삐유.
“형, 봐 봐. 햅쌀이가 고개 끄덕인다.”
권지한이 햅쌀이 몸을 손으로 조종하며 말했다. 하체와 상체를 잡혀서 90도로 꾸벅꾸벅 끄덕이도록 조종당하면서도 햅쌀이는 좋다고 난리였다.
“동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요.”
“그 생각하는 시간이 벌써 3개월째에 접어들었는데요.”
“3개월 가지고. 인내심이 그렇게 짧았어요?”
“‘3개월이나’지! 앞으로 몇백 년 혹은 신이 되면 영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중에서 3개월이 얼마나 큰 시간을 차지하는지 몰라?”
윤서가 피식 웃었다. 요즘 권지한은 그들이 반드시 가호 신이 될 것처럼 얘기하고는 했다.
“도민이 묘비 앞에서 할 말이 아니네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와, 도민이 형 핑계를 대네. 할 말 없게 만드네.”
윤서는 도민이가 이런 대화를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동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거의 매일 붙어 있고, 붙어 있지 않은 날에도 게임을 통해 같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권지한이 같이 살자며 치대 오면 그럴 마음 없는 듯 틱틱거리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권지한이 얽히면 하여튼 생각한 대로 행동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도민이 앞에서도 괜히 튕기고 그랬는데.’
이도민과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는데, 그때는 이도민이 윤서보다 키가 많이 작아서 동네 골목대장 윤서를 졸졸 따라다니고는 했다. 항상 발그레한 얼굴에 동경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순둥이에게 윤서는 다정하기보다는 까칠했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동경하고, 동경받는 관계가 아니라 진짜 친구가 된 건 중학교 졸업 이후였다.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
한 번은 도민이 부모님이 딱 주말 이틀간 집을 비운다고 해서 친구들과 도민이네 집에 온갖 먹을거리와 놀 거리를 싸 들고 이틀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치고는 꽤 건전하게 놀았었는데 아마 다들 비슷비슷한 성향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민이는 성격이 온순한 편이었다. 가끔 예민해지긴 했지만 대체로는 순둥순둥했고, 그 나이대 남고생답지 않게 깔끔하기도 했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신발을 혼자 가지런히 정리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렇게 깔끔하더니 대던전에서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마지막을 맞이했다.
현재 보관함 속의 군용 부츠는 모형이었다.
진짜 신발은 묘비에 두지 못했고, 현재 석영의 연구실에 있다. 아마도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을 이상하고 신비한 신발이기 때문이었다.
연구진이 엄청나게 흥분해서 설명해 줬는데….
이도민의 신발은 양자 중첩 상태에 있다고 했다.
설명에 따르면 세상 모든 물질이 양자 중첩 상태가 가능하지만 그건 미시 세계의 이야기고, 입자와의 상호 작용이 빈번한 거시 세계에서는 양자 중첩을 입증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때의 거시 세계는 단순히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입자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상태가 확정된 모든 경우를 말하므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단세포 생물조차도 거시 세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려 군용 부츠 같은 커다란 게 양자 중첩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윤서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화가 났었다. 유품을 실험에 이용하겠다는 게 도의적으로 맞는 건가 싶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도민이라면 이 희귀한 물건이 그저 가만히 전시되는 게 아니라 분석과 연구 후 사람을 위해 널리 쓰이는 쪽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에 허락했다. 윤서로서는 석영 연구실이 현충원보다 더 보러 가기 쉬운 장소이기도 했고….
나중에 들었는데 연구진은 이강진의 영혼 가루도 분석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다만 윤서에게 제안하기 전 미리 알게 된 권지한이 굉장히 분노하며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했다고.
윤서가 그 부탁을 들었다면 이도민의 신발까지 빼앗아서 석영을 나왔을 것이다. 권지한은 윤서가 허락하는 선이 어디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이상 윤서에게 미움받을 일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윤서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다른 형, 누나들한테도 인사 안 해?”
“해야죠. 가요.”
윤서는 권지한의 손을 먼저 붙잡았다. 권지한이 눈을 깜빡이더니 곧 더욱 강한 힘으로 맞잡아 왔다.
윤서는 다른 구 리벤저들에게도 차례차례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이 녀석이 내 남자 친구라는 소개는 저번에 이미 했지만…. 놀랍게도 아직도 연애 중이라고.
아마 계속 연애할 것 같다고.
구 리벤저는 우주가 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진짜로 살아 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뭐? 우리 막둥이가 연애를 한다고?’
‘뭐? 심지어 일곱 살이나 연하라고?’
‘뭐? 우리 막내가 일곱 살이나 어리고 잘생기고 돈 많고 능력 좋고 다정한 사람을 꿰차서 이제 결혼하고 신혼여행까지 앞두고 있다고오오오오?’
“…….”
가만히 생각하던 윤서가 웃음을 지었다. 리벤저의 호들갑스러움을 닮은 바람 한 줄기가 윤서의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권지한이 윤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척하며 더 헝클여 댔지만 윤서는 그냥 가만히 놔뒀다.
***
권지한과 윤서는 현충원 내부 카페에서 박주홍을 기다렸다. 박주홍은 30분이 지나서 도착했다. 중키의 평범한 남자가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
“아냐. 너나 도민이나 새치기 못 하는 순둥이들이란 걸 내가 깜빡했지.”
“하하…. 순둥이는 아니야.”
“순둥이?”
권지한이 묻자 윤서가 설명했다.
“도민이가 한창 ‘러브 인 한강’ 영업할 때도 그 재미없는 걸 무려 3화나 본 녀석이에요. 가끔 우리끼리 쟤를 박순둥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대단하네. 나도 형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1화 보고 포기했을 텐데.”
“둘 다 놀리지 마. 그런데 윤서 너는 여전히 존댓말을 쓰네?”
박주홍은 처음 권지한을 소개받았을 때, 연하는 연상에게 반말하고, 연상은 연하에게 존대하는 특이한 모습에 놀랐었다.
“이게 편해서.”
윤서가 가볍게 대답하자 권지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형이 존댓말이 디폴트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런 공공장소에서 형이 반말 쓰면 내가 무지 힘들어졌을 거야. 가끔 반말할 때 존나 섹시하거든.”
“아, 그렇구나….”
박주홍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부를 주고받은 후 셋은 ‘러브 인 한강’에 대해 떠들었다.
현재 지구에는 뒤늦게 ‘러브 인 한강’ 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의 줄거리가 현재 지구의 상황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다.
대격변 이전에 방영된 웹 드라마 ‘러브 인 한강’. 그 스토리는 아주 괴상하다. 최고의 김치찌개 식당을 뽑기 위한 대회로 시작해서 사실은 새로운 김치찌개 우주 입성을 앞두고 그 선구자를 뽑기 위한 튜토리얼이었다는 내용으로 끝났는데, 이런 결말이 지구의 현 상황과 비슷했다. 심지어 드라마상에서 선구자가 되어 우주로 향하는 이들이 주인공 커플인데, 현실에서 인류 최초 태양계 밖 여행을 한 이들 또한 커플이란 점까지 닮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정부와 국제기관, 헌터 협회 등 많은 이가 ‘러브 인 한강’ 제작자를 찾았다.
제작사인 외주 제작 업체는 이메일을 통해 대본을 받았고 작가와는 한 번도 직접 접촉한 적 없다고 했다. 출연 배우들도 마찬가지였고. 작가가 제작비를 지나치게 많이 지원했기 때문에 재벌 3세가 취미로 만드는 웹드라마 정도로 생각한 듯했다.
제작비 입금 계좌를 추적하니 63세 여성이었고 대격변 때 사망 처리되어 있었다. 보육원 출신으로 가족은 없고 빚이 많았다. 그녀의 명의로 된 대출만 네 개였는데 어느 날 한 번에 상환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외주 제작 업체에 드라마 제작 의뢰를 넣은 날이었다.
“‘작가’가 최수자 씨에게 명의를 빌려 달라고 하고 대신 빚을 갚아 준 거지!”
박주홍이 흥분해서 외쳤다.
“내가 듣기로는 권지한이랑 서채윤이 ‘작가’를 찾아다니고 있대. 이번에 신혼여행이니 뭐니 하면서 장기 휴가 내는 게 사실 ‘작가’를 찾기 위해서라더라. 그 소문이 진짜라면 이제 ‘작가’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어떤 사람일지 너무 궁금해.”
박주홍은 자신 앞의 두 사람이 그 권지한과 서채윤이라는 것도 모른 채 둘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꽁꽁 숨어 있어도 찾아낼 거라며 들떴다.
사실 권지한과 윤서는 소문대로 ‘작가’를 찾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 가을에 장기 휴가를 내면 그때 ‘작가’에게 직접 찾아갈 예정인데,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둘이 던전 다니느라 바쁜데 드라마 작가 정체 같은 걸 조사할 시간이 있을까?”
“S급 헌터들이잖아. S급 헌터들은 하루가 32.1시간이래.”
“…32.1시간?”
“응. 윤서 너는 헌터면서 왜 비각성자인 나보다 소문이 어둡냐.”
“…….”
권지한이 히죽히죽 웃었다.
“우리 형이 남들한테 벽 치고 다녀서 그래. 아주 훌륭하지. 나는 그 소문 들어 봤어. 특히 S급 헌터 중에서도 권지한이랑 서채윤은 시간을 인벤토리에 넣어서 필요할 때 꺼내 쓰고 그런다며.”
박주홍이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였다.
“맞아. 진짜 부러워. 나라면 자는 데에 다 쓸 거야.”
“그런데 사실 그건 헛소문이야. 우리가 석영이라 S급 헌터들이랑 마주칠 일이 많은데 그냥 똑같이 24시간을 살더라고. 이도민 형의 <사건의 지평선> 스킬이 지금까지는 시간을 조절한 유일한 스킬이야.”
“아, 그래? 헛소문이었구나….”
“나도 존나 실망했어. 시간 조종조차 못 하면서 무슨 S급인지. 각성자도 별수 없는 평범한 인간인가 봐.”
“그렇게까진 말하지 마….”
박주홍이 눈썹을 팔자로 기울이며 웃었다.
“그래도 부럽다. 나도 석영에 다니면 헌터들이랑 마주칠 일이 많았을까.”
낙엽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박주홍 또한 권지한을 석영에 근무하는 비각성자 남자 친구로 알고 있다. 여기에 따로 거짓말하고, 저기에 따로 거짓말하면 나중에 헷갈릴 수 있어서 통일했다.
“헌터들 별거 없어. 눈도 두 개뿐이고. 팔도 두 개고. 손가락도 열 개지. 마주쳐 봤자 우리랑 똑같다고 실망이나 할걸? 물론 서채윤 헌터님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휘황찬란 빛나는 별이지만.”
권지한이 윤서에게 눈가를 찡긋했다. 박주홍은 그 윙크에는 관심 갖지 않았다.
“진짜 부럽다. 서채윤과 같은 회사라니…. 윤서야, 너도 서채윤이랑 만나거나 얘기해 본 적 있어?”
“…없어.”
박주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활동 계속할 거면 주변에 벽 치지 말고 헌터들이랑 좀 어울리고 그래. 그쪽 업계 암투와 모략이 판친다면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헌터 업계에 암투와 모략이 판친대?”
“그렇다던데. 더 좋은 공격대 들어가기 위해서 리더한테 로비를 한다거나 경쟁자를 모함한다거나. 아주 치열하다며.”
윤서는 유준철한테 로비를 하고, 경쟁자를 모함하는 퍼펙트 팀원들을 상상했다가 속으로 웃었다. 만약 홍의윤에게 ‘같이 무슨무슨 헌터 묻어 버리죠’ 하면 홍의윤은 눈을 1초에 세 번씩 깜빡거리다가 손 붙잡고 석영의 심리 상담실로 찾아갈 것이다.
물론 암투가 판치는 곳도 있긴 하겠지만 일단 석영의 퍼펙트는 아니었다.
그때 권지한이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 드라마 작가 정체가 뭐라고 생각해? 뉴스에서는 최초의 헌터가 아닐까 추측하던데. 이석영 말고 대격변 이전에 존재했던 최초의 각성자.”
“아, 나도 그 설 들었는데 요즘은 최초의 각성자보다는 최초의 초능력자라고 많이들 표현하더라. 각성 시스템 이전부터 지구에 존재했다면 각성자가 아니라 초능력자라고 표현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그렇네. 외계인도 존재하는 마당에 초능력자가 없을 리가 없지.”
“우연히 맞아떨어진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어. ‘작가’는 그냥 상상력 좋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지. 대격변 이전에도 드라마 속 내용이 현실에서 비슷하게 일어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잖아. 극히 희박한 확률이지만.”
“우연이라. 음. 그래서 형은 어떤 소문을 믿어?”
“나는….”
박주홍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자기도 자각 못 했던 예지 능력자…? 꿈으로 꾼 내용을 드라마화했는데 그게 예지몽이었다거나. 너희는 어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윤서가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박주홍에게 동의했다.
“난 모르겠어. 짐작도 안 돼.”
권지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뚝 떼는 뻔뻔한 커플이었다.
사실 ‘작가’는 정말 의외의 인물이긴 했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던 예지몽 능력자나 최초의 각성자 같은 건 아니지만.
“정체가 뭐든 간에 도민이가 있었다면 엄청 흥분했을 거야. 헌터 일도 때려치우고 ‘작가’만 찾고 다녔을지도.”
박주홍의 목소리에 씁쓸함과 그리움이 담겼다. ‘러브 인 한강’의 작가 얘기를 하면서 이도민 얘기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윤서도 ‘작가’를 찾아다니면서 언제나 이도민 생각을 했다.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드라마가 가이아 시스템과 연관이 있는 드라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내가 말했지! 그 드라마는 뭔가 특별하다고. 드넓은 우주의 비밀과 사람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심오한 드라마라고. 이럴 줄 알았어. 뭔가 있을 줄 알았어!’
잔뜩 흥분해서 숨도 안 쉬고 칭송을 이어 갔을 얼굴이 눈에 선했다.
“윤서야. 너도 들었겠지만 도민이가 대던전에서 서채윤이랑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다잖아. 서채윤이 ‘러브 인 한강’ 팬이 된 데에 도민이 영향이 있지 않을까?”
“무조건이지…. 그 이유가 100%야.”
“서채윤이 ‘작가’에게 도민이 언급해 주면 좋겠네.”
윤서가 옅게 웃었다.
“도민이는 순수한 드라마 팬이어서 ‘작가’에게 자기가 얼마나 열렬한 팬인지 어필하진 않았을 거야. 그냥 당장 속편을 만들어 내라고 짤짤 흔들기만 했을걸.”
“맞아. 서채윤이 ‘작가’를 찾으면 드라마 속편을 만들게 하면 좋겠다. 도민이를 위해서라도.”
“…….”
윤서가 움찔했다.
그런 제안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속편…?
윤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갑자기 숙제가 하나 생겨 버렸다.
“그러게. 서채윤이 꼭 해 줬으면 좋겠네.”
권지한이 옆에서 큭큭 웃었다. 윤서는 박주홍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권지한의 발을 꾸욱 밟았다. 그에 권지한이 더욱 진하게 웃으며 윤서의 뺨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윤서는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고 박주홍은 떨떠름한 고구마가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
박주홍이 화장실에 간 사이 권지한과 윤서는 머리를 맞대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가려고 점찍어 둔 식당이 있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세 명 자리는 무조건 없을 듯했다. 뒤늦게 예약하려고 전화하자 예약은 이미 다 찼다고 해서 그 식당은 포기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고 싶진 않았기에 리뷰를 찾아보는 중이었다.
본래 아무거나 잘 먹었던 윤서는 권지한과 함께 지내면서 나름 미식가가 되었다. 가끔은 서채윤과 권지한의 이름값을 이용해 1년 예약이 가득 찬 고급 레스토랑을 찾기도 했다. 그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서 이제는 역으로 두 사람이 자기네 식당에 들러 주길 바라는 셰프들이 많아졌다. 홍보에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두 영웅을 향한 팬심에서였다.
오늘은 권지한과 서채윤이 아닌 비각성자 남친과 B급 헌터였기에 식당 찾는 데에 난항이 있었다.
여기저기 다 찾아본 끝에 권지한이 좋은 곳을 발견했다.
“여긴 어때? 차 타고 10분 정도 가야 하는데 전이 바삭바삭하고 간장도 비법 간장이래.”
권지한이 블로그 리뷰 사진을 보여 줬다. 윤서는 노릇노릇 구워진 해물파전을 보자마자 말했다.
“당장 예약하죠.”
그렇게 맛있는 전집을 찾아 예약을 마치자 윤서는 급속도로 출출해졌다.
“이 자식 엄청 늦네요. 화장실을 만들어서 싸고 있나.”
“큰일 났다. 우리 형 배고프다. 상태 이상-공복 생기면 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나 먹히기 전에 얼른 주홍이 형이 와야 하는데.”
권지한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양팔을 엑스 자로 교차했다. 윤서가 피식 웃었다.
“너는 맛없어서 안 먹으니 걱정 마세요.”
“내가 맛있는지 맛없는지 형이 어떻게 알아. 먹어 봤어?”
“근육이 많잖아요. 본래 근육이 많으면 질긴 법이에요.”
“좋았어. 이제부터 근육 마이너스 트레이닝 시작해야지. 말랑 지한이가 되어서 꼭 형한테 먹히고야 말겠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윤서는 근육 없이 말랑말랑한 권지한을 상상해 봤다. 어깨도, 팔뚝도, 배도 말랑말랑한 권지한. 그러면 큰일이었다. 지금도 귀여운데 더 귀여워지면….
“젠장! 신 리벤저가 뭐가 그리 감사하다고 그 지랄들이야!”
옆 테이블의 호통이 윤서의 상상을 깼다.
“다들 대단한 은혜 입은 듯이 구니까 그 새끼들이 나대는 거 아냐! 구 리벤저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클리어하지도 못했을 것들이 떵떵거리며 다니는 꼴들 보면, 씨, 대가리들을 다 깨 버리고 싶어!”
“야, 야. 목소리가 너무 크다.”
“넌 억울하지도 않아? 대던전 클리어 기념식을 10월에 한다고 하는데! 대체 아무도 죽지 않고 나온 던전을 기념해서 뭐 해. 구 대던전을 기리고 애도해야지 개 같은 자식들이….”
“아니, 그냥 날짜만 옮겨진 거지 신 대던전만 기념하는 게 아니잖아. 기념식 이름도 ‘대던전 클리어 11주년’이고….”
“신 대던전 진입 날짜에 맞춘 게 신 대던전만 기념하는 거지 그럼 뭔데! 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취급하니까 사람들이 구 리벤저를 촌놈들이라고 하는 거 아냐.”
구 리벤저의 지인인 듯한 이가 아까부터 큰소리로 구 리벤저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신 리벤저와 구 리벤저를 비교하면서 한쪽을 비난하는 사람들.
아무도 죽지 않은 신 리벤저와는 달리 한 명 빼고 전멸한 구 리벤저를 기초 군사 교육도 받지 못하고 들어간 촌놈들이라고 표현하거나, 신 리벤저는 구 리벤저의 시체로 이루어진 다리를 건너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명예를 훔친 좀도둑들이라고 표현한다거나….
“저런 사람들은 인터넷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권지한이 중얼거렸다. 둘은 민간인들끼리 구 리벤저, 신 리벤저 파로 나뉘어 싸우기도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그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 저런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아.”
“걱정하지 마세요. 신경 안 써요.”
“…….”
권지한이 윤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우리 일단 나갈까?”
“네? 어정쩡하게 길 가로막고 기다리면 우리도 불편하고 사람들도 불편하잖아요.”
“아니, 나 지금 너무 초조해. 시스템 창 뜰까 봐.”
“무슨 시스템 창이요?”
“‘윤서의 이 세상 환멸도가 10% 증가했습니다’.”
“…….”
윤서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사이 권지한은 혼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우리 형이 기분이 풀리려나. 가슴 만질래? 이럴까 봐 오늘 아침에 잔뜩 펌핑해 왔는데.”
“헛소리하지 마세요…. 집에 가서 만지긴 만지겠지만.”
“그래. 가슴은 집에 가서 만지고. 일단 지금은 어떡할까? 이건 어때. 우리가 곧 갈 전집을 상상해 보는 거지. 자, 눈 감고.”
윤서가 눈을 땡글땡글 뜨고 있자 권지한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눈 감고 내 말 잘 듣고 상상하는 거야. 고소한 기름 냄새와 지글지글 전 부치는 소리…. 노릇노릇하게 익은 해물파전…. 젓가락으로 주욱 찢어서 짭조름한 간장에 찍은 뒤 입에 넣으면 바사삭 하고…. 아.”
윤서가 눈을 깜빡깜빡하자 속눈썹 때문에 간지러웠던 권지한이 손바닥을 뗐다.
“젠장. 그렇게 귀엽게 눈 깜빡이기 전법을 사용하다니….”
윤서는 딱히 전법을 사용한 게 아니라 얼른 집에 가서 가슴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아침에 잔뜩 근육 트레이닝을 하고 왔단 말을 이제야 하는 거지? 알았으면 박주홍과의 약속을 앞당기고 집에 일찍 들어갔을 텐데.
“그 새끼들은 영웅이 아니라 좀도둑 사기꾼 놈들이야. 그 새끼들을 떠받치는 녀석들은 호구 병신들이고.”
“야, 야. 제발 그만 좀 해. 다 우리 쳐다보잖아.”
“그만하긴 뭘 그만해. 누구든 반박하려면 하라고 해. 내 말이 맞으니까 다들 가만히 있는 거잖아!”
옆 테이블의 소란이 이어졌다. 권지한이 윤서의 표정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직 이상 없어. 다행이다….”
“…….”
“으음. 생각보다 환멸 게이지가 안 차네. 형의 마음이 확실히 평화를 찾긴 했나 봐. 사랑의 힘이란 굉장해.”
“만약 게이지가 차면 뭘 어쩌게요?”
여기서 당장 옷이라도 벗을 건지 내심 기대하며 묻자 권지한이 “궁금해?” 하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뭘 하나 봤더니 권지한은 인터넷 뉴스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의아해진 윤서가 물었다.
“뉴스는 갑자기 왜 보는데요?”
“사람들의 선행 기사를 찾아서 보여 주려는 거지. 1선행으로 10환멸도쯤은 그냥 상쇄될걸.”
기대와는 달랐으나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나 어제도 어떤 학생들이 길 잃은 어린애한테 떡볶이랑 어묵 사 줬다는 기사 봤는데. 뭐라고 검색해야 되지.”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리는 모습을 보며 윤서의 입매가 살며시 올라갔다. 권지한은 기사를 금방 찾아서 보여 줬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훌쩍거리는 초등학생 한 명을 둘러싸고 열심히 떡볶이와 어묵을 먹이는 사진이었다.
기사를 읽는 윤서의 표정을 살피던 권지한이 안도했다. 환멸도가 순조롭게 떨어지는 중이라며 가상의 시스템 창을 건드리는 모션까지 취했다.
윤서는 웃었다. 연하 남친이란 대단하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면 분노고 환멸이고 뭐고 사르르 사라지게 되니까.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지만. 아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저 씁쓸했다.
그 와중에도 옆 테이블에서는 욕설과 고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다들 눈살을 찌푸린 채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 사람은 분노가 대단한지 멈추지 않았다.
“씨팔놈의 신 리벤저 새끼들. 구 리벤저들 희생으로 얻어걸린 주제에 잘나가는 꼴들 보면 내가 속이 터져서…!”
“이봐요. 그만하시죠.”
“뭐야?”
“그만하라고요. 말이 심하잖아요.”
권지한과 윤서가 동시에 옆쪽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박주홍이 남자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넌 뭐야? 신 리벤저 가족이냐?”
“그쪽처럼 구 리벤저 지인입니다.”
“그럼 왜 끼어들어서 신 리벤저 편들어?”
“욕하는 건 되고, 편드는 건 안 됩니까? 신 리벤저도 목숨 걸고 들어간 건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긴 뭘 걸어! 서채윤 헌터가 미리 정답을 보고 온 덕분에 편하게 그 길만 따라간 새끼들인데. 젠장, 우리 어머니는 40년을 식당 일만 하다가 각성하셔서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급하게 대던전에 들어갔어. 빵빵하게 지원받은 신 리벤저 새끼들과는 차원이 달랐단 말이야.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야!”
윤서는 그가 말하는 구 리벤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대던전에 진입하자마자 죽은 이들 중 하나였다.
“대체 왜 우리 어머니가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데. 신 리벤저 새끼들이 구 리벤저의 죽음을 허망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아뇨. 신 리벤저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그게 더 당신 어머니의 죽음을 허망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겁니다.”
“하, 네가 뭘 알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 어머니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대던전에 들어간 분이니까.”
박주홍은 흥분한 남자와는 달리 담담하게, 그러나 확신 어린 어조로 말하며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분명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당신 어머니도, 내 친구도, 1202명의 죽은 리벤저들 모두….”
“…….”
“안 그런가요?”
“…….”
남자는 반박도 못 하고 입술만 짓씹다가 울컥,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하, 그 말이 맞는데. 그럼 뭐 해. 자꾸 인터넷에 그런 글들이 올라오는데. 당장 눈앞에서 그런 글을 보면 화가 치솟는데….”
“신 리벤저의 성공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절대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일부 비각성자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그게 됐으면 진즉 각성했지…. 제길. 어차피 너도 비각성자라면서.”
“…….”
박주홍이 처음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맞아요. 저도 비각성자죠….”
그 수긍에는 허탈함과 절망,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한이 담겨 있었다.
내가.
나는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가.
대체 나는 왜 각성하지 못했을까.
대체 왜…….
박주홍이 고개를 떨궜다.
권지한이 윤서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윤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이러다가는 깨물 것 같아서 어깨에 손을 올리자 윤서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고갯짓했다. 가서 저 슬픔과 비탄에 빠진 비각성자를 구해 오라는 뜻이었다.
“우리 형이 구해 오라면 구해 와야지.”
권지한이 윤서를 부드럽게 토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사실 너희 질투했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노릇노릇 바삭바삭한 파전을 다섯 판 해치운 후 여섯 판째를 주문했을 때였다.
박주홍이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 긴장한 얼굴로 윤서에게 말했다.
“너랑 도민이 말이야.”
“…….”
윤서가 젓가락을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권지한도 마지막 파전 조각을 윤서의 접시에 올려 주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박주홍은 카페 일 이후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려고 했지만 윤서와 권지한의 눈에는 무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 상태였다.
다행히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이자 파도처럼 몰아치던 감정도 많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이성을 되찾자 박주홍은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윤서에게 오랫동안 품고 있던 마음을 고백한 것이다.
“처음엔 아무도 몰랐잖아. 착한 사람만 각성한다는 거. 그때는 그냥 너희가 부럽고 멋있어 보이기만 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니까 질투를 안 할 수가 없었어. 숨긴다고 숨겼지만 너도 그렇고 도민이도 내 열등감과 질투를 진작에 눈치챘겠지. 정말 미안해. 실망시켜서….”
“미안할 일 아니야. 도민이도 너한테 실망 같은 거 안 했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박주홍은 입이 타는지 맥주를 한 번에 주욱 들이켰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표정이라 권지한과 윤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박주홍이 티슈로 입가를 한 번 닦고는 씁쓸히 말했다.
“항상 이 생각을 했어. ‘나는 왜?’ 나는 왜 각성을 못 할까. 나도 착한데. 나도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 괴롭히지도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지각 한 번도 한 적 없고, 설거지 심부름도 군말 없이 하고, 용돈 아껴 써서 부모님한테 선물도 사 드리고. 나는 그 흔한 무단 횡단도 한 적 없어.”
“…….”
“도민이랑 너는 무단 횡단도 했잖아. 차 안 온다면서 둘이서 후다닥 건너고 그랬어. 기억하는진 모르겠지만.”
“기억해.”
“이제는 안 하지? 위험하단 말이야.”
박주홍이 말 안 듣는 어린애 타이르듯이 말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박주홍이 말을 이어 갔다.
“어이없지만 나 예전에 착하고 순둥하다는 말 들을 때는 욕하는 것 같아서 싫었거든. 우리 어렸을 때는 착하다는 게 미련하고, 바보 같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엔 듣고 싶더라고.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각성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아닌데. 칭찬 스티커 기다리는 애처럼 ‘주홍 씨 착하네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의식적으로 착한 행동을 했어. 착하다는 게 칭찬이 되는 세상이 올 줄은 몰랐지.”
박주홍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너희를 질투한다는 사실조차 너무 부끄러웠어.”
“…….”
“도민이가 대던전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내가 부끄러움을 느낄 자격은 있나 싶더라. 사람들 살리겠다고 내 친구는 목숨을 걸었는데 나는 열등감이나 느끼고 있고. 진짜 한심하지?”
“아니. 도민이는 절대로 너를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윤서가 확신을 담아서 얘기했다.
마력 고갈 상태의 이도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이 아는 다정한 친구 이도민이라면 오히려 따뜻하게 박주홍을 안아 줄 것이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 주겠지. 그동안 고생했겠네, 하고. 그건 각성자의 특징이 아니라 이도민의 특징이었다.
그때 불쑥 권지한이 물었다.
“지금도 열등감 품고 있어?”
박주홍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은….”
“파전 나왔습니다.”
여섯 판째의 파전이 나와서 잠깐 말이 끊겼다.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직원이 서빙을 하고 가면 늘 그렇듯 분위기가 그전보다는 가벼워졌다.
“그러니까. 이런 적이 있었어.”
박주홍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랑 과자를 사서 나올 때 갑자기 던전 범람이 일어난 거야. C급 네이비 던전이었지. 나는 그때, 대격변 아포칼립스 시기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실물 몬스터를 봤어. 그 괴물은 징그러운 생김새는 둘째 치고… 한 손으로 자동차 지붕을 우그러뜨리고, 전봇대를 가볍게 뽑아서 도로 위로 던지더라고. 이쑤시개 뽑아서 내던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흉폭하게 날뛰는 몬스터 앞에 어떤 어린애가 있었어. 우리 동네에서는 번화가인 곳이라 사람이 꽤 많았거든. 다들 도망갔지만 그 어린애는 너무 놀랐는지 엎어진 채로 울기만 하더라고.”
“…….”
“나는… 도망치라는 목소리조차 안 나왔어. 내가 소리를 내면 괴물이 나를 눈치채고 공격할까 봐.”
박주홍이 눈을 감았다.
“괴물이 어린애를 덮치려는데, 그걸 보면서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어. 도저히 엄두가 안 나더라. 그냥 숨죽인 채 숨어 있었고… 그렇게 살아남았어.”
“…….”
“지금도 눈앞에 선해. 우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난 발걸음도 떼지 못하겠지. 얼른 누군가 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말이야.”
목소리에 괴로움이 가득했다. 윤서는 일단은 박주홍을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입을 열었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각성자처럼 스킬도 없고, 아무런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몬스터한테 달려드는 건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밖엔 안 돼.”
“하지만 너랑 도민이는 그렇게 했잖아.”
박주홍이 눈을 떴다. 윤서의 생각만큼 괴로운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윤서를 향한 동경과 존경이 담겨 있었다.
“대격변의 날,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는데 눈앞에선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몬스터들이 덤벼들어. 발톱으로 한 번 긁은 것만으로 사람 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팔을 한 번 휘두르면 건물 시멘트 벽까지 와르르 무너지지. 그런데도 너희는 도망치지 않았어. 너는…. 너랑 도민이는 어떻게 그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었던 거야?”
“…….”
“나는 그런 건 도저히 못 하겠어.”
박주홍이 중얼거렸다.
“도저히 못 하겠어. 나는….”
울먹이는 건가 했지만 박주홍은 울지는 않았다. 아마 운 적도 있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왜 나는 그때 움직이지 않았나 자괴감과 자책으로 휩싸여 엉엉 울음을 토해 내기도 했을 것이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다가도 불현듯 떠올라 가슴을 두드린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힘겹고 괴로운 인정이 있고 나면 비로소 성장이 시작될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하게 할 가장 첫 단계의 성장이.
박주홍이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파전을 주욱 찢었다.
“내 말은 각성자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이제 끝. 내가 분위기를 너무 무겁게 했지. 미안하다. 식기 전에 먹자.”
윤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박주홍이 윤서의 접시에 작게 찢은 파전을 올렸다.
옆에서 권지한이 괜히 목소리를 키웠다.
“와. 이렇게 큼지막한 새우를 우리 형한테 준다고? 완전 착한 거 맞는데. 지금 이 행위로도 각성감인데 말이야. 설마 주홍이 형, 혹시 우리 형한테 마음 있는 건….”
“넌 좀 제발 닥치고 처먹기나 해.”
윤서가 파전을 권지한의 입에 쑤셔 넣자 권지한은 파전을 우물우물 씹으며 “봐 봐. 우리 형 반말하니까 섹시하지.” 했다. 박주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서 하하, 웃었다. 그제야 비로소 테이블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윤서는 파전을 먹으면서 얼마 전 권지한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나는 이런 세계에서 비각성자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 용감하다는 생각도 들고.’
윤서는 지금까지 비각성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내 옆에 있는 영웅을 지키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조금은 비각성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번도 비각성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그들의 열등감과 불편함, 자책, 복잡한 마음들…. 그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비각성자 또한 대단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
박주홍과 헤어지고 윤서의 차에 탄 둘은 가장 먼저 장시간 인벤토리에 갇혀 있느라 삐져 버린 햅쌀이를 어르고 달랬다. 처음엔 찹쌀이랑 놀고 있으라고 차 안에 두고 가려고 했지만, 윤서가 차 문을 닫자마자 삐유삐유삐삐삐이삐이이이 울부짖으면서 창문에 달라붙고,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차 문을 긁는 등 난리 발광을 해서 인벤토리에 넣어야만 했다. 극심한 분리 불안이 생긴 햅쌀이는 윤서와 떨어지는 것보다는 윤서의 인벤 안에 들어가는 게 나은 듯했다.
“맛있어? 어구, 맛있지? 많이 먹어. 한 봉지 다 먹어도 돼.”
삥삥.
오동통하게 볼을 부풀린 다람쥐가 권지한이 주는 대로 간식을 받아먹었다. 윤서는 미안하면서도 귀여운 마음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AI에게 지시했다.
“찹쌀아. 우리 집으로 가 줘.”
찹쌀이가 출발하지 않았다. 얼른 집에 가서 권지한의 가슴을 만져야 하는 윤서가 의아하게 내비를 쳐다봤다.
“주인님, 햅쌀이가 간식을 참 잘 먹네요. 저도 간식 좋아하는데요. 편애는 좋지 않아요.”
“뭐?”
“저도 요바린사 급속 충전소의 DC 전류 좋아해요.”
“…알았어. 집에 가다가 들러서 충전하고 가.”
“네, 주인님.”
그제야 찹쌀이가 운행을 시작했다.
윤서가 사는 아파트에도 전기 차 충전기가 있었지만 요바린은 아니었다. 예전엔 업체를 가리지 않던 AI가 최근에는 미각이 까다로워졌다.
“찹쌀이도, 햅쌀이도 미각이 주인 따라가네. 큰일이야.”
“당신이 원흉이잖아요.”
“맞아. 바로 그거야. 앞으로 우스타바의 요리까지 배워서 형한테 해 주고야 말겠어. 그렇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지.”
“우스타바? 어떤 행성인이 알려 준대요?”
“세렌 행성이랑 이도르 행성이 다음 정기 회의에 레시피 책 가지고 온다고 했어. 지구 레시피 책이랑 교환할 거야.”
우스타바는 지구가 들어오기 전부터 1년에 2회 정기 회의를 열고 있었다. 본래 연 1회 하다가 상시 연락이 어렵다 보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1회 더 늘어났다고. 우스타바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고 있는 행성은 이도르 행성인데 그들은 얼른 레벨 2로 진입하고 싶어 했고, 지구와의 교류가 큰 발전을 가져올 거라 생각해서 그들보다 문명 수준이 높은 지구인에게 친절히 대했다.
“휴가 기간에도 정기 회의는 들어갈 건가요?”
“그래야지. 형, 귀찮겠지만 어쩔 수 없어. 외계 행성들과의 교류가 많아야 우리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니까.”
권지한의 눈빛이 꽤 진지했다. 윤서는 권지한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연 존재할까…. 그는 회의적이었지만 권지한은 분명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삐융.
햅쌀이가 윤서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윤서가 자동으로 손을 가져가 햅쌀이의 몸체를 감싸며 쓰다듬었다.
“본래 다람쥐가 이렇게 점프를 잘하나요?”
“우리 햅쌀이는 우리 닮아서 천재니까.”
삐융!
“나도 햅쌀이 쓰다듬어야지.”
권지한이 윤서의 손을 덮었다. 햅쌀이 쓰다듬는 척하면서 자신을 더듬는 이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도 자주 겪어서 윤서는 이젠 신경 쓰지도 않았다.
“형. 생각해 봤는데.”
“네.”
“형 친구 말 듣고 나니까 이상하더라고.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무단 횡단도 가끔 했고, 엄마 심부름도 구시렁거리면서 했거든. 선물도 딱히 안 줬어…. 물론 우리 집은 가난해서 용돈도 못 받긴 했지만 어버이날이나 생일날에 손 편지는 줄 수 있는 거잖아? 근데 난 학교도 안 들어갔던 어릴 때 말고는 자발적으로 쓴 적이 없단 말이지. 대체 내가 어떻게 각성했을까.”
윤서는 권지한을 쳐다봤다. 그는 마치 권지한이 이런 얘기를 하리란 걸 예상한 것처럼 담담하게 물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끔찍한 괴물이 처음 보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으면 달려가서 구해 줄 거죠?”
“…어떻게 안 도와줘?”
윤서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요.”
윤서도 마찬가지였다. 친한 친구랑 사이 나쁜 다른 친구 뒷담화를 하기도 했고, 엄마 심부름 싫다면서 어린 동생한테 미루기도 했고,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길바닥에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각성했다. 그런데도 각성했다.
대격변의 날, 만원 지하철 속에서. 그 지하철에서 각성한 사람은 윤서와 태재식밖에 없었다.
“근데 나는 형처럼 대격변의 날에 각성하지 않았어.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각성했지. 가이아 시스템이 정의하는 ‘선함’이 존나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그 기준으로 따지면 형은 제일 앞이고 나는 저 끝일 거야.”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각성했을 때 열여섯 살이었다고 했죠?”
“응.”
“그게 각성 최소 제한 나이었던 거예요.”
“최소 제한…?”
“네. 가이아 시스템은 열여섯 살보다 더 어린 나이의 어린애에게는 도저히 몬스터를 죽이는 짓은 시키지 못했던 거죠.”
권지한은 윤서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보더니 밝게 외쳤다.
“그럼 내가 최연소 각성자네!”
“…….”
“와, 씨. 내가 최연소라니. 최연소라니. 이건 당장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해.”
윤서는 떨떠름했다.
“최연소라는 데에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요.”
“왜 안 좋겠어? 드디어 먼치킨 서채윤 옆에 있을 명분이 하나 더 생겼는데. 내가 진짜 형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게 생겼잖아. 그래도 디스크 조각 모음 하듯이 형의 연인으로서 열심히 자격 모음 하고 있어. 남친 좀 쓰다듬어 줘. 장하다 해 줘.”
윤서가 피식 웃으며 권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하네요.”
“뽀뽀도.”
당연한 순서로 입맞춤이 따라왔다. 윤서는 손에 포옥 감싸인 채 열심히 세수 중인 햅쌀이를 한 번 쳐다봤다가 순순히 입술을 대 줬다.
역시 권지한은 자기가 귀여운 걸 아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귀여운 것만으로도 웬만한 선행보다 수치가 높아서 각성한 게 아닐까?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팔불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고 마는 윤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