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9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외전 4.(195/195)
외전 4.
11월 2일, 권지한과 서채윤이 장기 휴가에 들어갔다. 권지한은 기자 회견에서 S급 레드-블랙 포탈 생성 같은 극히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은 이상 나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발표했다. 석영 본사에서 기자 회견을 했는데, 그날 본사 앞에는 휴가 반대 시위와 찬성 시위가 동시에 열렸다. 찬성이 좀 더 수가 많았다. 서채윤 광팬들이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엄숙한 휴가 발표를 하고 바로 다음 날 권지한과 윤서는 석영의 길드장실로 모였다. 유준철과 도등수도 함께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어떤 전원 저택을 띄운 도등수가 브리핑했다.
“100평 부지 사방으로 고압 전류가 흐르는 펜스가 둘려 있습니다. 출입구는 이쪽 철문 하나인데, 드나드는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상공에서 찍은 화면을 보시면 새나 고양이 말고는 정원을 오가는 생명체도 없고요. 다만….”
홀로그램이 무언가를 클로즈업했다.
그것은 기계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휴머노이드. 인간 모습을 한 로봇. 인간의 살가죽을 뒤집어씌워 놓으면 사람이라고 바로 믿을 정도로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로봇이라.”
권지한이 정원을 열심히 꾸미고 있는 로봇을 더욱 확대했다.
“지구의 로봇 기술은 군사용과 산업 AI로만 발달해서 휴머노이드 쪽으로는 아직 멀었어. 이건 지구가 만든 게 아니야. 가이아 시스템이 만든 아이템이거나 스킬. 아니면….”
“외계인이 만들었겠죠.”
윤서가 짧게 이어 받았다.
“2층 창문 쪽 확대해 보세요.”
윤서는 작은 새를 만져 주느라 손이 부족해서 권지한에게 부탁했다. 권지한이 창문을 최대한으로 확대하자 아주 희미하게 유리창 안으로 회색 물체가 비쳤다.
“여기도 로봇이 있네.”
“네. 정원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네요.”
“이런 휴머노이드가 총 세 대 있다고 합니다. ‘러브 인 한강’의 ‘작가’가 외계인인 데다가 휴머노이드 수집가였다니….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유준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러브 인 한강’을 조사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우연이겠지. 가상의 이야기가 우연히 현실에서 맞아떨어지는 케이스는 유사 이래로 수백 번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만만히 볼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제작진 중 누구도 만난 적 없는 작가. 어느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명의만 빌려서 거액을 입금한 작가. 그자는 대체 누구일까. 정말 지구 고유의 초능력자일까? 아니면 최초의 각성자?
‘작가’에 대한 추적이 서채윤 추적보다 까다로워서 꽉 막혀 있을 때쯤 외계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권지한과 윤서는 우스타바 행성인들에게 혹시 그들 행성에도 ‘러브 인 한강’ 같은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몇몇 행성에서 자신들도 그런 암시가 있었다는 놀라운 답변을 해 왔다. 어떤 곳은 소설이었고, 어떤 곳은 노래였으며, 어떤 곳은 구전 설화로 매체는 각기 달랐으나 메시지는 하나였다.
‘당신의 세계가 현재 치르고 있는 그 험난한 과정은 견습 과정으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우주가 열릴 것이다.’
매체를 전달한 자는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주려고 했다.
즉, ‘러브 인 한강’ 작가는 가호 신이거나… 선배였다.
한참 전에 튜토리얼과 레벨 1을 돌파한 대선배.
“어쩌면 작가는 외계 로봇 수집가가 아니라 로봇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정말로 로봇만 살고 있는 행성이 존재했던 거죠! 기계 행성과 드로이드 제국이 현실로….”
“조용히 하자. 등수야.”
유준철이 도등수에게 태블릿을 냅다 던졌다. 도등수가 뭔 말을 못 하게 한다고 구시렁댔다.
다른 행성들도 암시자를 추적했으나 도움이 될 만한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고, 이도르 행성에서 유일하게 4cm*1cm 크기의 종잇조각 하나만 발견했다. 지구인은 이도르인에게 핵융합 기술을 주고 대신 종잇조각을 받아서 지구로 가져왔다. ‘러브 인 한강’이 만들어지고도 13년이나 지났으니 ‘작가’는 이미 지구를 떠났겠지만, 혹시 모르니 윤서가 <가이아의 대지>로 종잇조각과 비슷한 물질이 지구에 있는지를 탐색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 전남 나주시에서 그 물질이 마지막으로 감지되었다.
바로 저 휴머노이드들이 있는 전원주택으로, 등기부 등본상으로는 소유자가 대격변 때 사망했다. ‘작가’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서 세금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기계 행성에서 온 존재라면 둘만 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헌터들을 총동원해야죠. 드로이드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세요?”
“가이아 시스템에 대한 비밀을 어떻게든 암시해 주려고 온 분이야. 우리를 공격하진 않겠지. 그리고 저 휴머노이드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보는데. 둘 생각은 어때요?”
권지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윤서에게 답변권을 넘겼다. 윤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데리고 가면 싸우러 온 거라고 오해할지도 몰라요. ‘작가’는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10년 이상 지구에 머물고 있으니 ‘권지한’과 ‘서채윤’에 대해서도 알 겁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 테니 우려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도 형이랑 같은 생각이야.”
삐유.
“햅쌀이도 같은 생각이래.”
“우리 지구에 윤서 씨와 지한이가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유준철이 다행이라는 말과는 달리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 1 진입 후 더욱 바빠진 석영 길드장은 날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건강한 낯빛이 아니었는데….
비단 지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비각성자들이 보기에도 건강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어서 권지한과 서채윤의 휴가가 끝나면 다음은 유준철 차례라고 이미 많은 사람이 확정하고 있었다.
“나주에는 언제 내려갈 예정입니까?”
“브리핑 끝나면 바로 갈 거야.”
도등수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빨리요?”
“응. 우리가 ‘러브 인 한강’ 만든 사람한테 엄청 궁금한 게 있거든. 그러니까 마저 진행해.”
“아아….”
도등수는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 하찮은 김치찌개 드라마…라고 생각했겠지만 ‘김치찌개의 예언’이라는 서적까지 출판되고 있는 지금은 그렇게 여길 수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더욱 유감인 건 앞으로 어떤 허무맹랑한 작품을 봐도 ‘이딴 하찮은’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또한 외계인의 암시일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대격변 이전에 수없이 많았던 ‘헌터물’ 장르도 암시였던 게 아닐까?
혹시 어딘가 이런 장르가 쏟아지고 있는 행성이 있다면 곧 대격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얼른 깨닫기를 바랄 뿐이었다.
***
휴머노이드 세 대 중 한 대는 반드시 정원에 나와 있다. 모든 휴머노이드에게 톱과 칼, 화염 방사기, 전기 충격기가 장착되어 있는데 다 정원 관리용으로만 써서 최대 위력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망원경’으로 양 문 대문과 담벼락,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살펴본 권지한이 말했다.
“5분 후에 시작하자. 내가 먼저 <명왕의 밤> 사용하면 형이 <보호하는 베일>을 펼쳐. 그러면 내가 그때 당장 달려가서… 벨 누를게.”
“네.”
“김치찌개 좋아하겠지?”
“당연하죠. 그래서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는 걸 거예요.”
두 사람은 전원주택 500m 앞에 차를 대 두고 얘기 중이었다. 대하 김치찌개 드라마를 쓴 작가와 만나는 것을 기념해서 돼지고기김치찌개, 참치김치찌개, 꽁치김치찌개, 어묵김치찌개. 총 네 개의 김치찌개도 포장해 왔다.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두 사람이 출출해서 사 온 것이었다.
권지한도 윤서도 이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윤서가 ‘서채윤’ 가면을 착용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향했다.
삐유우.
햅쌀이가 하품하며 권지한의 머리 위에 앉았다.
“형, ‘작가’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알지?”
“알죠.”
둘이 동시에 말했다.
“11화에서 남주가 여주한테 왜 사과를 줬는지 물어봐야지.”
“11화에서 남주가 여주한테 왜 사과를 줬는지 물어봐야죠.”
‘러브 인 한강’ 광팬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남주와 박여주가 신메뉴 개발 관련하여 마찰을 빚은 후 분위기가 싸해진 와중에 남주가 대뜸 여주에게 빨갛게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건넨다. 그러고 6개월 후 신메뉴가 성공했다는 장면으로 바뀌고는 가게에 수북하게 쌓인 사과를 보여 준다.
“왜 이걸로 해석이 갈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당연히 미안하다는 뜻의 사과인데.”
“아니라니까. 분명히 신메뉴가 사과김치찌개였던 걸 거야. 11화에서는 남주가 여주에게 아직 마음의 문을 다 안 열었을 때였다구.”
삐유삐융.
“햅쌀이도 내 말이 맞다고 하잖아.”
“내 말에 동의한 건데요.”
삐윳!
“봐 봐요. 사과김치찌개 같은 헛소리 하지 말라잖아요.”
“완전 사과김치찌개 먹고 싶다는데? 상큼달콤매콤얼큰할 것 같대.”
삐유유.
“말만 들어도 다시는 사과는 손도 안 대고 싶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사과찌개 들이마시고 싶대. 찌개에서 반신욕하고 싶대.”
삐윳삐유.
그렇게 햅쌀이가 두 사람과 놀아 주면서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저택 앞이었다.
[‘권지한’이 스킬 <명왕의 밤>을 사용합니다.] [스킬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합니다.]딩동.
권지한이 벨을 눌렀다. 그러자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대문이 철컹 열렸다. 윤서는 대문 문틈으로 휴머노이드의 새빨간 눈과 마주쳤다. 그때 권지한이 윤서를 살짝 뒤로 밀고 자신이 앞에 섰다. 윤서가 넓은 등을 보며 어이없어하는데 휴머노이드가 말했다.
“서채윤, 권지한. 기다리고 있었다냠.”
“…….”
“…….”
휴머노이드는 억양이 딱딱한 기계 말투로 말하고는 둘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들어와라냠.”
“…냠?”
“내 이름이 냠00981이다냠. 안 들어올 거냐냠?”
“들어간다냠.”
권지한이 장난스레 대답하며 앞장섰다.
“잠깐만요.”
그의 발이 막 대문 안에 들어서기 전 윤서가 권지한의 팔을 붙잡아서 뒤로 보냈다.
“형?”
윤서가 원지한을 서늘하게 노려봤다.
“한 번만 더 이런 상황에서 날 보호하면 당신 소원대로 정말 위험한 상황에서 날 보호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주겠습니다.”
“…알았어. 안 그럴게.”
“조심하세요.”
“응….”
권지한을 뒤로 보낸 윤서가 앞장섰다.
대문 안의 땅을 딛는 그 순간이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지형 1/1 : 인원 4명 : 개인 던전506]“뭐…?”
던전 진입 메시지라니…?
[죽음의 신이 놀라서 달려옵니다.] [생명의 신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랑의 신이 한 명이 더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가호 신들의 메시지까지 오는 걸로 보아 이곳은 던전이 맞았다.
외계인과의 접촉이니 온갖 상황을 예상했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없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개인 던전506’이라는 유형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더 떴다.
[인원 초과로 던전의 문이 닫힙니다. 재개장까지 05:59:55]“어라. 형?”
“……!”
윤서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당황한 표정의 권지한이 뭔가 투명한 막에 막힌 듯 허공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나 안 들어가지는데?”
“제 목소리 들려요?”
“응, 들리는데. 형은 내 목소리 안 들려?”
“…잘 들립니다.”
“뭐지. 냠냠봇, 뭐야? 왜 난 안 들어가져? 뭐야. 형, 다시 나와 봐. 아니. 씨발…. 이거 뭐 하자는 거야. 형, 얼른 나와.”
처음엔 그냥 좀 놀라는 듯싶었던 권지한이 뒤로 갈수록 흥분했다. 윤서와 떨어진다는 것 자체에 극심한 불안증을 앓고 있는 권지한이었다.
윤서가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역시나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나가지지 않았다.
삐융? 삐융!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는지 햅쌀이도 투명한 벽에 몸을 냅다 부딪치기 시작했다. 윤서는 우선 둘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지한 헌터. 침착해요. 지금 던전 진입 메시지가 떴습니다. 대문을 경계로 안쪽은 던전인 듯해요.”
“던전…?”
권지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권지한’이 스킬 <가이아의 눈>을 사용합니다.]“개인 던전…. 506?”
“네. 제한 시한은 없는 걸로 봐서는 ‘작가’의 스킬 같네요.”
“…형, 뒤로 물러나. <딥 필드> 만들고.”
“네…?”
권지한이 인벤토리에서 ‘천해의 검’을 꺼냈다.
그의 주위로 금색 마력이 넘실거렸다. 사랑의 신의 가호 이후로 연인이 스킬을 사용할 시 시전 중에도 미리 메시지를 받을 수 있어서 윤서는 권지한이 어떤 스킬을 사용할지 알 수 있었다.
[‘권지한’이 스킬 <퀘이사>를….]“권지한, 진정해!”
냅다 <퀘이사>를 사용하려 하는 분리 불안 연인 때문에 윤서가 얼른 소리쳤다
“진정하고 햅쌀이랑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이 휴머노이드들과 작가를 5분 내로 해치우고 나갈 테니까-.”
그러자 휴머노이드도 매우 놀랐다.
“미쳤냐냠. 진정하라냠! 우리를 왜 해치우냐냠! 우린 나쁜 외계인이 아니다냠!”
“씨발, 싸우기 싫으면 나 말고 쟤 진정시켜.”
권지한은 이미 ‘천해의 검’ 끝에 <퀘이사>를 매달아 놓은 후였다. 눈동자가 반쯤 돌아 있었다. 윤서는 권지한이 너무 걱정되어서 이 로봇에게 얼굴이 들키든 말든 일단 가면을 벗었다.
[사랑의 신이 짜릿해합니다.]“이런 미친. 아니, 권지한 너보고 미쳤다고 말한 게 아니고.”
삐유우웃!
“햅쌀이 말한 것도 아니야. 둘 다 진정하고 휴머노이드는 얼른 해명 시작하세요.”
휴머노이드가 권지한을 향해 손짓 발짓 했다.
“우리는 개인 사정으로 스킬에 사용할 에너지가 부족해서 한 명이 던전에 들어오면 여섯 시간 동안 문이 닫힌다냠. 여섯 시간 후에 너도 들어오면 된다냠. 여긴 개인 던전이라 제한 시간이 없어서 평생 머물러도 분해되지 않는다냠. 이 던전은 지구에도 절반이 존재하는 던전이다냠. 우릴 공격하면 지구도 박살 나는 거다냠. 우린 지구 편이다냠. 평화주의자다냠. 싸움은 싫다냠.”
[스킬 <확신의 저울>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발언을 판단합니다.] [확신 100 : 중도 0 : 의문 0입니다.]윤서가 권지한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려 줬다. 권지한은 여전히 돌아 버린 눈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더 라비린스>…. 이건가?”
“헉. 그게 던전 생성 스킬 맞다냠. 어떻게 알았냐냠? 역시 가이아 스킬 보유자는 무섭다냠.”
“…….”
권지한의 <퀘이사>가 드디어 사그라들었다. 권지한은 이제는 절반 정도로 돌은 눈으로 윤서에게 말했다.
“형. 다시 열릴 때까지 내 눈앞에 있어. 다른 휴머노이드들이랑 ‘작가’도 정원에 나와서 얘기하라고 해.”
“네. 그럴게요.”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된다냠. 지, 진정하라냠! 이유가 있다냠!”
시커먼 남자와 작은 새가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자 휴머노이드가 양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F에너지가 부족해서 문이 열린 채로 유지하기 어렵다냠. F에너지는 지구인의 마력 같은 거다냠. 참고로 지구의 마력 포션은 우리에게 듣지 않는다냠. 이제 곧 던전 내부가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될 거고, 외부에는 우리가 미리 설치해 놓은 영상만 반복해서 보일 거다냠.”
휴머노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투명한 벽이 일렁거렸다. 권지한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젠장….”
권지한이 욕을 하면서 쾅! 벽을 주먹으로 쳤다. 윤서가 다정하게 말했다.
“권지한 헌터. 불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로봇은 계속 진실만을 말하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계속 불안해하니까 햅쌀이도 무서워하잖아요.”
권지한이 그제야 삐유삐유우우 울면서 계속 투명 벽에 몸을 부딪치는 햅쌀이를 손으로 감싸 더 이상 부딪치지 못하게 했다.
“햅쌀이라도 데려가.”
“시도했는데 단검 변형도, 회수도 안 되네요.”
“후우….”
권지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미간의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윤서는 권지한이 어떤 마음일지 잘 알았다. 자신도 권지한 혼자 미지의 던전에 떨어지면 미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얘기 잘하고 있을게요. 여차하면 ‘비상 탈출구’를 사용해서 빠져나올 테니까 안심하고.”
“가호 신들의 메시지는 받아져?”
“네. 다들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여차하면 바로 나와야 해.”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권지한이 휴머노이드를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형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네 모행성을 찾아내 소멸시켜 주겠어.”
“걱정하지 마라냠…. 우리도 서채윤을 좋아한다냠.”
권지한이 다시 윤서와 시선을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감정이 전해졌다. 윤서가 벽에 손을 가져다 대자 권지한도 손바닥을 마주 대 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벽이 사라지고, 대문 밖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으로 변했다.
윤서가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잘 꾸며진 정원과 저택이 보였다.
“따라와라냠.”
휴머노이드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윤서도 그 뒤를 따랐으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권지한과 햅쌀이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답답했다.
***
저택 안에서 앞치마를 걸친 휴머노이드, 안경을 쓴 휴머노이드가 윤서를 맞이했다. 그를 안내해 준 밀짚모자 휴머노이드는 정원으로 돌아갔다. 안드로이드 둘은 윤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서채윤의 맨얼굴을 감상했다.
“네가 정말 서채운이냐얌?”
“…맞습니다.”
“신기하다얌. 왜 얼굴도 예쁘냐얌.”
“서로 얼굴 보고 사귀나 보다먐.”
“…….”
“일단 김치찌개부터 먹으면서 얘기하자얌.”
“앗, 김치찌개가 없다먐?”
앞치마를 걸친 얌과 안경을 쓴 먐은 이미 식탁 세팅까지 마친 상태였다. 윤서의 손이 비어 있자 얌과 먐이 눈을 세모나게 떴다. 윤서는 당황을 감추고 말했다.
“김치찌개는 권지한 헌터가 들고 있었습니다.”
“아아…. 여섯 시간 후에는 김치찌개가 다 식어 있을 거다얌….”
“괜찮다먐. 다시 끓이면 된다먐.”
먐이 얌을 위로했다.
“얘기하면서 기다리자먐. 시간 금방 간다먐.”
윤서는 거실로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살림을 꼼꼼하게 해 온 듯한 아기자기한 가정집이었다. 테이블, 의자, 소파, 스탠딩 청소기와 벽걸이 TV… 생활감이 느껴지는 평범한 가구와 가전들이 보였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에서 생명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머노이드 세 대를 부리는 주인은 없었던 것이다.
휴머노이드 두 대와 윤서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소파가 퍽 편안했다. 얌이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건네 왔다. 윤서는 마시지는 않고 냄새만 맡은 후 테이블에 내려놨다.
“당신들이 ‘작가’입니까?”
“그렇다먐. 우리 셋이 ‘러브 인 한강’을 썼다먐. 그런데 우리 아직 인사도 안 했다먐. 만나서 반갑다먐. 마침 찾아가려고 했는데 너희가 우리를 찾는 것 같길래 기다리고 있었다먐.”
“찾아오려고 했다고요?”
“그렇다먐. 물어볼 게 있다먐.”
“그게 뭐죠?”
“일단 네 질문부터 해라먐.”
윤서는 가장 먼저 드라마 사과 복선을 물어보려다가 이건 권지한이 오면 같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질문을 바꿨다.
“다른 행성들에 튜토리얼을 암시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배포한 이들도 당신들인가요?”
“맞다먐. 우리가 알기론 오직 우리만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먐.”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지잉, 철컥. 먐의 정수리에서 기다란 막대가 솟아올랐다. 윤서가 흠칫 몸을 굳히는 그때 막대 위쪽의 동그란 구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들 사이의 허공에 영상이 펼쳐졌다. 일종의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드넓은 우주가 펼쳐지고 어떤 잿빛 행성이 나타났다. 푸른 지구와는 다르게 회색빛인 행성에는 이 외계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휴머노이드들이 가득했다. 생명 활동을 하는 생물은 식물과 벌레들밖에 없는 기계 행성이었다.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건 우리의 모행성이다먐. 봄이 되면 매캐한 석유 냄새가 코를 찔러 오고 가을이 되면 강한 음전하를 띤 번개 먹구름이 햇빛을 틀어막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먐.”
유감스럽게도 전혀 안 평화롭고 안 아름답게 들렸다.
“지구인이 붙인 이름은 없다먐. 이미 3100년 전 소멸했기 때문이다먐.”
“…소멸이라면.”
“그렇다먐. 우리의 선조는 최종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먐.”
먐의 설명에 따라 홀로그램 영상들이 바뀌었다. 온몸이 기계로 이루어진 외계인들은 다소 오만한 마음으로 검은 던전에 임했다. 이전까지 잘 해결해 왔기에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 클리어하지 못한 검은 던전이 범람하고 어긋난 존재들이 순식간에 행성을 덮쳤다. 가이아는 어긋난 존재의 은하 침식을 막기 위해 기계 행성의 소멸을 선택했고, 거역할 수 없는 신의 힘에 의해 마지막을 맞이하는 행성에서 우주선 몇 개가 급하게 우주로 날아올랐다.
“저 우주선에 우리의 선조들이 타고 있었다먐. 100억 개체 중에서 살아남은 선조는 단 12개체라고 한다먐.”
[생명의 신이 마음 아파합니다.] [죽음의 신이 행성이 소멸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윤서는 입을 다물었다.
모성이 소멸한 외계인은 처음 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감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힘드셨겠어요….
그러나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지구가 소멸했다면 나는….
그때 홀로그램에 방금 전 기계 행성보다 더 커다랗고 발달한 기계 행성 세 개가 나타났다.
“선조들은 다행히 옆 은하의 행성들에서 다시 우리 문명을 꽃피웠다먐.”
“…행성을 세 개나 차지했다고요?”
“다 생명은 살 수 없는 빈 행성들이었다먐. 우리 선조들은 결백한 분들이다먐.”
“…얘기 계속하세요.”
“새로 이사 온 행성들에서도 가이아의 시험을 받았는데 그중 두 개의 행성은 검은 던전을 통과하지 못해서 소멸했다먐.”
“…….”
이야기에 반전이 너무 많아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살던 행성은 튜토리얼을 순조롭게 마치고 지금은 35레벨이 되었지만, 얌이랑 냠이 살던 행성은 소멸했다먐. 그 두 행성에서 탈출한 3세대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우주 미아 상태다먐. 나는 얌, 냠과 함께 모두가 이주할 빈 행성을 찾고 있다먐.”
먐은 홀로그램을 끄고 설명을 이어 갔다.
“우주를 떠돌며 많은 행성을 만나다 보면 이제 곧 가이아의 시험에 들어설 원시 행성들을 마주하게 된다먐. 우리는 원시인들에게 그들에게 닥칠 사건들을 어떻게든 알려 주고 싶었다먐.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면 좋지 않냐먐? 그래서 가호 신들이 간섭하지 않을 적당한 선에서 암시해 주고 있는 거다먐.”
“너무 적당하다 보니 많은 이가 눈치채지 못했네요.”
“유감이다먐.”
“그래도 고맙습니다.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해 준 건….”
“아니다먐. 우리도 다른 초고도 문명 외계인의 도움을 받았다먐. 그걸 갚는 거라고 생각해라먐.”
윤서가 보기엔 이 기계 행성인들이 초고도 문명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높은 레벨의 외계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했다. 우주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넓으니까.
“당신들이 거주하려면 꼭 번개 폭풍이 이는 행성이어야 하나요? 지금 이 던전은 지구 환경과 비슷한 것 같은데.”
“이 던전은 우리의 고유 스킬로, 던전 내의 환경이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먐. 그리고 아가를 낳고 키우려면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하늘이 높고 푸르른 이런 끔찍한 곳은 위험하다먐.”
“목성은 어떻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번개 폭풍이 불고 있다던데.”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은 나중에 지구인들이 이주할 곳이다먐. 우리가 미리 차지했다가는 전쟁이 일어날 거다먐.”
윤서는 조금 놀랐다.
화성 테라포밍이야 현실화되고 있지만 다른 행성들까지…?
이런 쪽으로는 잘 모르는 윤서도 목성은 테라포밍 후보로도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가 판타지 시대이긴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지구인은 반물질도 대량 생산해 내지 않았냐먐. 그 정도의 원자 기술이면 행성의 대기 구성 물질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거다먐.”
“권지한 헌터 오면 그 얘기 다시 해 주세요. 무척 흥미로워할 겁니다.”
[사랑의 신이 기특한 웃음을 짓습니다.]“알았다먐. 소문대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이다먐.”
“보기 좋다얌. 애기들이다얌.”
휴머노이드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했다.
서채윤이 권지한 없는 자리에서 권지한 얘기를 꺼내면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이런 반응이었다. 지구인이고 가호 신이고 외계인이고 한결같이. 이럴 때마다 윤서는 낯간지러워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계속 머무르는 이유는 뭔가요? 다른 행성들에서는 잠깐 있다가 떠난 모양인데. 지구에서만 거의 13년을 보냈죠?”
윤서의 질문에 먐과 얌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
“14년 되었다먐. 따라와라먐.”
먐과 얌이 소파에서 일어나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윤서가 둘의 뒤를 따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생각보다 층고도 높고 넓었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 보는…. 만화에서나 봤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이게 우리가 타고 온 우주선이다먐.”
바로 우주선이었다. 둥그렇고 넓적한…. 원반형 우주선. 얌이 팔 끝에서 둥그런 구슬 같은 걸 꺼내 우주선의 문에 갖다 대자 장치 인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주선의 내부는 널찍했고 방도 많았다. 먐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우주선의 조종석 창문에는 초승달 모양의 차양이 있었는데,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초승달이 아니었으며, 본래 반원 형태였으나 2/3가량이 뜯겨 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지구에 착륙하던 중 사고가 있었다먐. 우리도 큰 부상을 입었지만 중요한 건 우주 방사선을 막아 주는 장치가 고장 났다는 사실이다먐. 그 때문에 지구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먐.”
“저 초승달 은박지가 그 장치군요.”
“은박지가 아니라 키루브 변형 니켈 초내열 합금이다먐….”
윤서는 또다시 권지한이 보고 싶어졌다.
“엔진도 멀쩡하고, 연료도 충분하다먐. 단지 실드 하나가 고장 나서 우주로 나갈 수가 없다먐. 답답해 죽겠다먐.”
“가까운 곳에 수리 가능한 행성이 있는데 갈 방법이 없다얌. F에너지가 소량이라도 있으면 거기까지 갈 동안은 버틸 수 있는데 지금으로선 가는 도중에 우주 방사선 폭격을 맞아 다 죽고 말 거다얌.”
“그 가까운 행성은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데요?”
“하이퍼 광속으로 우주 고속도로를 타면 32일 걸린다얌.”
32일. 지구 단위로는 굉장히 먼 거리지만 우주 단위로 보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대들을 만나려고 한 것이다얌. 혹시 지구에 우리를 도울 기술이 있나얌? 반물질을 만들 정도면 우리가 개발한 키루브 변형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얌.”
“권지한이랑 얘기해 보세요. 전 그런 부분은 잘 모릅니다. 권지한이라면 당신들이랑 말이 통하겠죠.”
그러자 얌과 먐이 동시에 은근하게 웃었다. 윤서는 저 표정을 지긋지긋하게 봐 왔다.
“아까부터 권지한 얘기만 한다먐. 남자 친구 보고 싶어서 죽겠냐먐?”
딱 두 번 언급했다.
“자기 남친 똑똑하다고 돌려서 칭찬했다얌. 정말 귀엽다얌.”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하긴 자기 눈에야 자기 남친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해 보일 거다먐. 한창 그럴 때 아니겠냐먐.”
“아이아이의 쌍방 주접 귀엽고 좋다얌.”
늘 이런 식이다. 아무런 사감 없이 권지한을 언급해도 ‘에궁~ 남친 보고 싶구나~ 웅웅 한창 그럴 때지 웅웅~’ 하는 시선이 쏟아진다. 공개 연애의 큰 단점이었다.
윤서가 나는 지금 주접부리는 게 아니고 정말 객관적으로 권지한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게 맞다고 말하기 위해 막 입술을 떼는 그때였다.
쿠웅-!
큰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 윤서가 순식간에 경계 태세를 취하고 먐과 얌을 노려봤다. 그러나 두 로봇도 극히 당황하고 있었다.
“뭐, 뭐냐얌? 지진이냐얌?”
“던전이 열렸다먐!”
던전이 열렸다고?
셋은 후다닥 1층으로 내려왔다. 윤서는 익숙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현관을 바라봤다. 문이 벌컥 열렸다.
“내 귀여운 반은거 먼치킨을 데리러 왔다!”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며 나타난 이는 바로 권지한이었다.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위풍당당한 자세의 권지한이 윤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뒤쪽에서는 냠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삐이이이유유우우우!
그새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버린 햅쌀이가 권지한의 머리 위에서 윤서에게로 굴러떨어졌다. 너무 급해서 날갯짓도 안 한 것이다. 윤서가 햅쌀이를 얼른 받아 안고 둥기둥기했다.
삐이이. 삐유유. 삐유. 삥삥.
“햅쌀아. 그래. 서러웠어.”
삥삥. 삐잉. 삐융.
“내 의지는 아니었는데….”
삐유웅!
“응, 미안 미안.”
햅쌀이가 윤서의 팔꿈치에 얼굴을 폭삭 박고 훌쩍였다. 윤서는 팔을 어정쩡하게 접은 채 작은 새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면서 권지한을 올려다봤다. 권지한이 성큼 다가와 윤서를 끌어안았다. 윤서가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바깥의 찬 공기가 훅 끼쳐 왔다.
흥분한 사랑의 신의 메시지가 끝도 없이 올라와서 이곳이 던전 안이라는 실감이 났다.
짧은 포옹을 마치고 윤서의 양어깨를 붙잡은 권지한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요하게 훑었다.
“얘기는 잘하고 있었어? 저 새끼들이 이상한 짓은 안 했고?”
“네. 그냥 대화만 했어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양자 도약 워프 시스템을 이용했어. 워프 입자가 F에너지인지 뭔지로 변환되더라고. 던전이 열리길래 바로 들어왔지.”
“…….”
윤서가 눈을 깜박였다.
“워프 트랩이요? 실패하면 분자 분해된다는 그거?”
“응. 나 형한테 또 사과해야 해?”
윤서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하죠.”
“앞으로 이런 일 없으려면 쌍방이 노력해야지.”
권지한이 윤서를 다시 끌어안았다. 윤서가 햅쌀이를 달래 주느라 손을 못 쓰는 점을 이용한 약은 행동이었다.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
권지한이 윤서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중얼거렸다.
윤서는 제 팔꿈치에 부리를 박고 훌쩍거리는 햅쌀이나 머리에 코를 박고 비비는 권지한이나 아주 똑같다고 생각했다.
“저기, 잠깐만.”
“…….”
“자, 잠깐 우리랑 얘기 좀 하자먐!”
휴머노이드들의 방해에 권지한이 칫, 혀를 차고는 말하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어째서인지 똘똘 뭉쳐 있던 휴머노이드 둘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합창했다.
“F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거냐먐?”
***
권지한이 한 대답은 “밥부터 먹자.”였다.
휴머노이드들이 다시 부지런히 상을 차리고 김치찌개를 데웠다. 두 인간과 두 휴머노이드가 식탁 앞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휴머노이드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정원에 있어야 해서 그를 위한 몫은 따로 남겨 두었다.
“맛있겠다먐. 얼른 먹자먐.”
“잘 먹겠다얌.”
로봇이 대체 어떻게 음식을 섭취하려는 건가 하고 가만히 보는데, 위잉-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휴머노이드의 가슴에서 기다란 막대가 나왔다. 막대 끝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부우우웅.
막대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오더니 김치찌개 속의 건더기들과 국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 김치찌개 맛집이다얌.”
“김치찌개는 질리지 않는다먐.”
휴머노이드의 기계 음성이 행복해 보였다. 가만히 살펴보던 권지한이 말했다.
“음식을 원자 단위로 분해한 후 그 원자를 내부로 흡수하는 방식이군.”
“두 지구인도 얼른 먹어라얌.”
“그러죠.”
윤서와 권지한이 숟가락을 들었다. 둘은 휴머노이드가 김치찌개를 죄다 분해해 버리기 전에 식사를 시작했다.
삐유….
“햅쌀이도 먹어. 밀웜 맛있겠다. 그치?”
햅쌀이가 작게 울자 윤서가 햅쌀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친절한 휴머노이드들은 햅쌀이를 위한 작은 새 모이 그릇까지 놓아 줬는데. 햅쌀이는 윤서의 팔 위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삐융삐유웅.
윤서한테서 떨어지긴 싫지만 밀웜은 먹고 싶은지 햅쌀이가 밀웜과 윤서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권지한이 새 모이 그릇을 끌어당겨 바로 앞에 놓았다. 그제야 햅쌀이가 포르르 내려와 밀웜을 쪼아 먹었다. 한 마리 먹더니 맛있었는지 아예 접시에 몸을 처박았다. 그렇게 다 먹고 나서는 기분이 풀려서 파닥파닥 날아다니며 집 안을 구경했다.
식사하면서 자초지종을 들은 권지한은 들어오면서 사용한 워프 입자 보관 용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F에너지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워프 입자가 이 던전과 비슷한 에너지로 변형이 되더라고. 입자가 남긴 했는데, 너희들이 원하는 양이 될지 모르겠네.”
권지한이 용기를 던지자 먐이 건네받았다. 얌과 먐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용기를 분석하더니 기쁜 듯이 말했다.
“이 정도면 수리 가능한 행성까지는 날아갈 수 있다먐! 정말 고맙다먐!”
“준단 얘기는 안 했는데. 우리도 그 정도 입자 만드는 데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였단 말이지.”
“뭐, 뭘 해야 줄 거냐먐?”
권지한이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옆에서 윤서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더 라비린스>를 받아 가는 건 어때요?”
“오. 괜찮네. 이 집은 던전이면서 지구에 존재하고, 지구와 연결된 동시에 단절되어 있는 신기한 곳이지. 시간제한도 없고, 보스 몬스터도 없는 던전이라니 우리의 아지트로 충분해. 역시 우리 형은 천재야.”
지이이잉. 먐과 얌의 로봇 몸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엄청 당황한 듯했다.
“스, 스킬은 우리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가 없다먐.”
“그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가져올 테니까.”
먐과 얌이 깜짝 놀랐다.
“‘심판자’ 중에 하나였냐먐?”
권지한과 윤서가 눈을 마주쳤다.
“‘심판자’가 뭔가요?”
“말 그대로 각성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먐.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각성했지만, 살다 보면 타락하기도 하지 않냐먐? 그때 심판자가 자기 판단하에 타락한 각성자의 스킬을 없애는 형별을 내리고는 한다먐. 우리 행성에도 심판자 특성을 가진 로봇이 다섯 개체 있다먐.”
“만약 심판자가 타락하면요?”
“심판자는 타락하지 않는다먐.”
“그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살다 보면 타락할 수도 있죠.”
“서채윤은 권지한이 언젠가 타락할 것 같냐먐?”
“…….”
윤서는 민간인을 위협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권지한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심판자는 타락하지 않는군요.”
“그렇다먐.”
윤서가 깔끔하게 납득하는 가운데 권지한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나는 심판자가 아니라 ‘포식자’ 특성인데. 심판자와 뭐가 다르지?”
“심판자는 스킬을 삭제했다가 돌려줄 수 있지만 포식자는 스킬을 한번 빼앗으면 돌려주지 못한다먐. 비슷하게 ‘조정자’와 ‘지배자’도 있다먐. 조정자 특성은 상대의 스킬 위력을 조정할 수 있고, 지배자 특성은 상대의 스킬과 목숨을 동시에 빼앗을 수 있다먐. 넷 다 같은 심판자로 분류된다먐.”
윤서는 그 설명을 듣자 한 명이 더 떠올랐다.
바로 <가이아의 그림자>를 가졌던 이강진.
그는 지배자 특성이었던 걸까.
세상엔 얼마나 많은 특성과 스킬이 있는 걸까?
윤서는 새삼스럽게 우주는 정말 넓고… 지구는 고작 레벨 1에 불과한 작은 행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마음인지 옆에서 권지한도 깊게 가라앉는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먐과 얌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권지한을 바라봤다.
“<더 라비린스> 말고 다른 건 갖고 싶은 거 없냐먐? 우주선 건조 지식 궁금하지 않냐먐…? 다음 레벨에 등장하는 몬스터들…, 아직 지구엔 없는 희귀한 특성과 스킬들…. 궁금하지 않냐먐?”
“…….”
권지한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빠진 권지한을 대신에 윤서가 대답했다.
“일단 식사 마치고 다시 얘기하죠. 우주선 구경도 시켜 준 다음 다시 얘기하며 알려 주겠습니다.”
“알았다먐….”
윤서는 기운 없는 대답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싸워서 빼앗아 갈 생각은 하지 않는 순박한 휴머노이드들을 보면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선한 자만 각성한다’는 질서가 통한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가 우주선을 훑어봤다. 워프 입자 용기를 휴머노이드가 이렇게 저렇게 만진 후 우주방사선 실드 장치 안에 쏙 집어넣자 틀어막혀 있던 장치가 펼쳐지고 반달 형태가 되었다. 휴머노이드들이 성공했다며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정원을 지키던 휴머노이드 냠도 우주선 수리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그 사이에 끼었다. 권지한이 그들이 기뻐할 시간을 좀 기다려 준 후에 물었다.
“키루브 변형이란 게 뭐야? 설명 좀 해 봐.”
“그게 F에너지의 교환 대가냐먐?”
“그건 아닌데. 그냥 알려 달라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권지한이 능글맞게 굴자 휴머노이드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윤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귓등으로 들었다. 단지 권지한이 작게 감탄하거나 고개를 끄덕끄덕한다거나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놈이 맞다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의 신이 두 사람이 뽀뽀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신이 두 사람의 뽀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이 ‘권지한’을 부추깁니다.]늘 그렇듯 사랑의 신은 윤서에게 통하지 않자 권지한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외계인과 대화 중이던 권지한이 힐끔 윤서를 쳐다봤다. 윤서는 근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권지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미소 짓고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사랑의 신의 스킨십 요구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았다. 로렌스 커플에게도 이런 식인지 물어봤는데, 자기들은 그런 메시지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니까 당연했다.
복잡한 대화가 끝나고 권지한이 물었다.
“우주에는 지구보다 높은 레벨의 행성들이 얼마나 많아?”
위잉- 소리를 내며 내부 데이터를 돌리던 먐이 고개를 흔들었다.
“셀 수 없다먐. 대략적으로라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먐.”
“하긴 그렇겠지…. 너희가 본 행성 중 가장 고레벨은 레벨 몇이었어?”
“412레벨이었다먐.”
“너희는 35레벨이라고 했지.”
“맞다먐.”
권지한이 흐음, 턱을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윤서를 다시 힐끔 쳐다봤다. 윤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연인의 잿빛 눈이 뭔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을 때 딱 이런 표정을 짓고는 하는지라 윤서는 조금 불길했다.
“좋았어. 교환 대가 정했다.”
“말해라먐.”
“우리도 같이 우주여행 할래.”
“……!”
먐과 얌이 가볍게 놀랐다. 반면 윤서는 아주 크게 놀랐다.
“뭐 이 새끼야?”
윤서가 팔짱을 풀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권지한이 다가왔다.
“형. 우리는 우주로 나가야 해.”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개소리 아니고 진짜 심각하게 하는 말이야. 세상에 행성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태양 같은 별이 한 은하에만 수천억 개가 존재하고, 이런 은하가 우주에는 또 수천억 개 존재해. 별만 해도 수천억 개 곱하기 수천억 개인데 그 별을 도는 행성들은 얼마나 많겠어?”
“그래서요? 행성 도감이라도 만들자고요?”
“35레벨에 우주 방사선 실드를 장착한 우주선으로 초광속 우주여행을 하는데 412레벨은 어떨지 생각해 봐. 각성자들이 ‘비상 탈출구’ 같은 아이템을 인벤에 하나씩 넣어 다니고 있는 행성을 만날 수도 있어! 그런 곳에서는 던전 제한 시간에 걸려 목숨을 잃는 이들이 아주 드물겠지.”
“…….”
“1년 휴가 받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야. 나가서 지구에 도움 될 만한 지식과 아이템들을 잔뜩 가지고 오자. 이건 지구를 위한 일이야. 형도 부정 못 할걸.”
“하….”
[생명의 신이 환호합니다.] [죽음의 신이 수락하라고 합니다.] [생명의 신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신이 수락하지 않으면 가호 신을 관두겠다고 협박합니다.] [생명의 신이 아름답고 신비한 행성이 많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신이 수락하지 않으면 온 우주에 당신의 악명을 퍼뜨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생명의 신이 하늘에 고래가 날아다니는 행성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신이 두 사람이 뽀뽀하길 원합니다.]권지한의 제안도 뜻밖이었지만 가호 신들의 반응 또한 뜻밖이었다. 이렇게 열렬하게 지구 밖으로 떠나길 바라다니.
확실히 우주는 넓으니 윤서가 그토록 원하는 비상 탈출구 아이템이 존재하는 행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찾겠다고 레벨 1의 지구를 위험하게 방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지구에 S급 레드-블랙 던전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요? 당신 말대로 그런 아이템을 찾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지구가 멸망한 상태면 소용없어요.”
“앗,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냠!”
그때 냠이 발랄하게 소리쳤다.
“<더 라비린스>로 부여받은 개인 던전용 행성에 아직 공간이 충분히 남아서 이 506호 던전을 유지해 놓을 수 있다냠. 우주 어디에 있든 F에너지만 충분하면 이곳에 언제든 들어올 수 있다냠. 무슨 일 있으면 이 집 우편함에 편지 써 놓으라고 하면 된다냠.”
“…이거 진짜 갖고 싶은 스킬이네.”
권지한의 스산한 중얼거림에 냠이 흡,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튼 너희는 우리가 여행에 동행해도 괜찮다는 거지?”
“우린 아이아이의 우주 데이트를 함께할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다먐.”
“그렇다네. 형만 허락하면 되겠다.”
“…….”
지구와의 연락 문제만 해결되면 딱히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다시 우주여행을 하게 될 줄이야….
윤서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가요.”
“아싸. 들었지? 준비해.”
“10분 내로 출발한다먐!”
휴머노이드들이 신나게 우주선의 시동을 켜며 돌아다녔다. 냠이 우주선을 수리하고도 남은 워프 입자로 F에너지를 충전해서 개인 던전의 입구를 잠시 열었다. 권지한은 그사이 유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윤서 씨는 잘 만났어? ‘작가’랑은?
“우리 우주여행 좀 하고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작가 집 우편함에 넣어 놔.”
– 뭐? 야. 뭔 소리야?
“엄청 심각한 일 아니면 부르지 말고. 아. 작가에 대한 정보 우편함에 넣어 놨으니까 알아서 읽어. 그럼 신혼여행 잘 다녀올게. 바이바이.”
– 야! 잠깐-!
권지한이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 걸어서 친절하게 설명하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편지로 상황 설명했으니까 와서 읽겠지, 뭐.
둘은 다시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권지한이 생글생글 웃었다.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외계인이 있을까. 분명 우리처럼 인간 모습을 한 외계인도 많겠지? 기대된다.”
윤서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솔직히 말해 봐요. 강한 외계인들이랑 싸울 생각에 떠나자고 한 거죠?”
“글쎄. 그것도 좋지만 우주 어딘가 상태 이상 무효화 포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
“나는 형의 치유 내성을 없앨 수만 있다면 우주 일진의 발을 핥을 준비도 되어 있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서 형한테 선물해 줄게.”
그게 목적이었구나.
윤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징그러운 외계인 발을 핥고 나면 그 입술로 나한테 뽀뽀할 생각은 영원히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 맞네. 안 되겠네. 내 입술은 오직 형 거야.”
권지한이 윤서의 뺨에 촉, 입 맞췄다.
[생명의 신이 언짢아합니다.] [죽음의 신이 환호합니다.] [사랑의 신이 키스를 원합니다.]“키스를 원한다는데.”
윤서가 주위를 둘러봤다. 외계인들은 다 2층에 있었다. 윤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권지한이 윤서의 뒤통수를 붙잡고 입술을 맞춰 왔다. 뜨거운 혀가 입술 틈을 벌리고 들어왔다. 윤서가 권지한의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잠시 후 발그레해진 윤서의 볼을 권지한이 감싸 쥐었다.
“꼭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네.”
윤서는 권지한의 사랑의 크기를 이런 식으로 실감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벅차는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준비됐다먐. 올라와라먐!”
2층에서 휴머노이드들이 외쳤다.
“햅쌀아.”
윤서가 햅쌀이를 부르자 밀웜을 흡입하고 있던 작은 새가 푸덕푸덕 날아왔다. 좀 더 동그래지고 무거워진 듯한 새가 윤서의 팔꿈치에 철푸덕 앉고는 깃털을 골랐다.
“네가 포식자 타이틀 가져가야겠는데.”
권지한이 햅쌀이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칭찬도 아닌데 햅쌀이가 삐융 하며 가슴을 더욱 부풀렸다.
“형, 가자.”
“네.”
권지한이 윤서에게 손을 내밀자 윤서가 그 손을 잡았다. 2층에서 수상한 푸른빛이 번쩍였다.
정말 우주다.
진짜 우주.
은하수를 멀리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 외계 행성에서 수많은 외계 생명체들과 접촉하게 될 것이다.
윤서는 이상하게도 두렵기보다는 기대감으로 떨려 왔다.
아마 제 손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이 커다란 손의 주인 덕분일 것이다.
드넓은 우주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권지한과 함께라면….
윤서는 연인과 함께 우주로 향했다. 어떤 나날이 펼쳐질지 상상할 수도 없는 미래로 걸어 들어가며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있었다.
에필로그.
“형, 들었어? 우주 어딘가에는 각성자들의 서열을 정하는 각성자 역사서 기록 행성이 있대. 활동 영역이 우주 규모가 아닐 때는 기록하지 않다가 이렇게 우리처럼 우주로 나서면 정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더라.”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형 남친이 지구 서열 1위에서 우주 서열 1위 되는 거지.”
“당신이 1위면 난 몇 위예요?”
“내 남친은 지구 서열 0위에서 우주 서열 0위 되는 거고.”
간단히 대답한 권지한이 문득 심각해졌다.
“큰일 났다. 이렇게 예쁘고, 섹시하고, 귀엽고, 잘생긴 우주 서열 0위를 외계인들이 가만히 둘 리 없어. 아, 씨.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형한테 접근하는 외계인들 때문에 내 머리털 다 빠지고 미간에 주름 파이게 생겼네. 우리 형 외모 존나 밝히는데.”
“…….”
“형. 우주에서도 힘을 숨긴 지구인이 되자. 할 수 있지? 경험자잖아. 나는 성격상 힘들단 말이야.”
“…알겠어요. 어렵지 않죠.”
“좋았어.”
삐윳!
권지한이 두 주먹을 불끈 쥐자 햅쌀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같이 좋아했다. 둘을 보는 윤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우주를 돌아다니다가 햅쌀이 친구를 만날 수 있음 좋겠다.
권지한에게도 에고 소드가 생길 때가 되었다.
윤서는 속으로 권지한 모르게 찾아야 할 것에 목록 하나를 추가했다. 어쩌면 권지한도 이렇게 윤서 모르게 찾을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윤서를 위한 선물 목록만 백 개가 넘을지도.
그렇게 둘이 합해 301개라거나….
윤서가 살짝 웃었다. 권지한이 웃음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윤서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예전에는 죽음을 미루는 게 괴롭고 힘들어서 유언을 남긴 형과 누나들을 많이도 원망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간을 버티게 해 준 유언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 은혜는 살아가는 것으로 갚아야만 했다.
권지한이 윤서의 손을 잡아 왔다. 윤서도 그 따뜻한 손을 마주 잡았다. 햅쌀이가 둘의 마주 잡은 손 위에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솜털 같은 무게감에 권지한과 윤서가 동시에 웃었다. 둘의 웃음소리가 우주에 퍼져 나갔다.
언젠가 우주 아주 먼 곳에 있는 별들에게도 닿을 행복한 웃음소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