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2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20)화(20/195)
#17
이도민은 마력과 스킬 재사용 시간이 허락하는 한 쉬지 않고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마력이 고갈되고 기절하면 스킬이 해제되었으며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쯤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시계는 이미 제 기능을 못 했기 때문에 가이아 시스템의 던전 진입 메시지에 뜬 시간만이 그들의 기준이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지형 1/4 : 현재 인원 851명 : 폭발까지 1100시간
보통 던전은 하나의 지형으로 끝이지만, 대던전은 특이하게도 지형이 네 군데나 되었다. 다행히 진입 메시지에 현재 지형이 떠서 그것을 보고 현재 단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지형의 보스 몬스터들을 만난 건 폭발까지 1,100시간 남았을 때였다. <사건의 지평선>이 아니었다면 남은 시간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터였다.
보스를 해치웠을 때 사람들은 이제 용암 지대를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던전은 지형마다 보스 몬스터가 한 마리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암 지대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그 뒤로 두 마리의 보스를 더 만났다. 대던전은 지형마다 등장하는 보스도 세 마리씩이었던 것이다.
리벤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고, 마침내 세 마리를 전부 처치했을 때는 30시간이 더 흐른 후였으며, 생존자 수는 811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용암 지대를 벗어나 간신히 발견한 육지는 독 안개로 뒤덮인 늪이었다. 늪의 두께는 3m에 달했고, 독을 내뿜는 몬스터들이 들끓었으며,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유해 물질이 내부로 들어와 장기를 썩게 만들었다. 발로 밟는 모든 곳이 늪이었기 때문에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용암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일단 정화 스킬을 사용하면 풀포기 같은 것도 뜯어 먹을 수 있었고, 마실 물도 있었으니까. 리벤저는 그곳에서 진영을 가다듬고 작전 회의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들어오기 전 예정했던 대로 팀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 1팀은 북쪽, 2팀은 남쪽, 3팀은 서쪽, 4팀은 동쪽을 맡는다. 연락은 하루에 두 번. 도민이는 <사건의 지평선> 쿨타임이 얼마나 남았지?”
“10시간 남았어요.”
“그래, 도민이는 채윤이랑 같이 가라.”
“형, 웬만하면 채윤이랑 도민이는 여기서 쉬게 하지?”
“채윤이 없이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애 혹사시키는 거 나도 마음이 안 좋은데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도민이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니까 채윤이 옆에 있는 게 좋고.”
늪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몬스터들과의 전투 중 윤서가 항상 쓰고 있던 가면이 깨졌다. 어차피 윤서는 생존자들과 동료애가 싹 튼 상태라서 그 후로는 맨얼굴을 드러내고 다녔다. 본명까진 밝히지 않았지만….
서채윤의 진짜 얼굴을 본 이들은 열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더욱 실감 나는지 윤서와 이도민에게 의존하는 걸 미안해했지만 그 외엔 방법이 없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너희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우리가 제일 강해서 이런 걸 어쩌겠어요.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유명한 말도 있잖아요.”
“고맙긴 한데 좀 재수 없다.”
윤서는 그것을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력 회복 속도는 남들보다 월등히 빨랐고, 마력 고갈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서 참을 만했으니까. 단, 이도민은 그와는 달랐다.
“윤서야,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스킬을 사용하지는 마. 적당히… 적당히만 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적당히 하면 다 죽어.”
“그러다 네가 죽겠어. 그건 정의가 아니야. 자기 학대란 말이야.”
“걱정하지 마. 나는 잘 제어하고 있으니까.”
용암 지대에서는 윤서와 똑같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력을 소진했던 이도민은 늪지대에 올라와서는 마력을 아끼게 되었다.
“나는 마력 고갈 상태가 되는 게 싫어. 그때의 내 머릿속이… 무서워.”
이도민은 그렇게 말했다.
마력이 총량의 20%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면 ‘마력 부족’ 상태가 되고, 10% 미만으로 떨어지면 ‘마력 고갈’ 상태가 된다.
마력이 10%가 되었습니다.
마력 고갈 상태에 돌입합니다.
상태 이상 : 마력 고갈
당시 윤서와 이도민의 시스템 창에 항상 떠 있다시피 했던 메시지였다.
마력 부족일 때는 몸과 정신이 피로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신력으로 버틸 수는 있는데 고갈 상태가 되면 그야말로 정신이 피폐해진다.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자해 충동까지 들다 보니 어떤 의미로는 외적인 부상보다 더 위험했다. 그 때문에 리벤저는 누군가 마력 고갈 상태가 되면 반드시 다른 한 명이 옆을 지켜서 자해하지 않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도민은 용암 지대에서는 어떻게든 버텨 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 힘들어했다.
“마력 고갈이 되면 꼭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아.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대한 어둠이 내 머리를 잠식하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동시에 아주 많은 생각을 하지.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윤서야, 너는 어때? 너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둘만 있을 때면 이도민은 항상 그렇게 물었다. 그때의 이도민의 눈동자는 불안함과 고통으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어서 윤서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일단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만 집중해. 나가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윤서는 이도민이 불안했다. 항상 의지가 됐던 친구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모습에 저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 힘들어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행인 건, 이도민은 자신의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이도민은 이강진을 비롯한 리더 그룹에 솔직하게 불안한 정신 상태를 털어놨다. 이강진은 힘들면 스킬을 사용하지 말라거나 그런 말을 하지 못했으나, 대던전을 나가면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즐겁고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자며,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면서 이도민을 위로했다. 이도민과 이강진은 대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나, 늪지대에 이르러서는 전우애가 싹터 있었다. 이도민은 이강진에게 많이 의지했다. 윤서는 그 점이 다행스러웠다.
***
늪지대에서 체류한 시간은 7일이었다.
이 7일이란 건 <사건의 지평선>의 바깥에서 봤을 때의 7일로, 리벤저가 실제로 겪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어떤 이는 70일이 걸렸다고 하며, 어떤 이는 700일이 걸렸다고 말했다. 윤서는 시간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현재 지형 3/4 : 현재 인원 597명 : 폭발까지 901시간
세 번째 지형은 미로 지대였다.
숲과 동굴이 함께 있는 미로 지대는 어떤 의미로는 용암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다. 들어설 때는 그저 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험준한 숲으로만 여겼으나 ‘체감상’ 여러 날이 지났다고 느낄 때쯤엔 이곳이 미로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분명 여기에 있었던 바위가 한 바퀴 돌고 나니 저쪽으로 이동해 있고, 공략 예정이었던 어떤 동굴은 눈을 뜨고 나니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산등성이가 생겨나 있다거나,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던 중에도 땅이 갈라지고 솟구쳐서 생이별하는 식이었다.
늪지대까지는 지도를 그려 나가고 있었지만 이 지형에서는 지도 제작도 손을 놓았다. 산이야 어쨌든 비행 스킬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바로 탈출 가능한데, 문제는 보스 몬스터의 서식지로 예상되는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다섯 갈래가 있고, 그 갈래마다 최소 세 갈래 이상의 갈림길이 있으며, 그 갈림길들의 끝에도 두 갈래 이상의 갈림길이 있는데, 그런 동굴이 수백 개였고, 날마다 구조가 변했다.
리벤저는 용암과 늪지대에서 보스 몬스터가 세 마리였기 때문에 미로 지형 역시 보스 몬스터가 세 마리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보스 몬스터들의 흔적만 발견할 뿐 실체는 한번 마주치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이때쯤에는 몬스터와의 전투로 죽는 이들보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자고 일어나면 나무에 목매달고 죽은 전우의 시신을 끌어 내리는 게 일과였다.
미로를 헤맨 지 ‘시스템상으로’ 19일이 지났을 때 이강진은 과감한 결단을 했다. 팀을 나눠서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미로 속에서 화력 분산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으나 다들 한시가 급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여 최대한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맞도록 팀이 꾸려졌다.
총 세 팀이었고, 윤서와 이도민은 이때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윤서가 보스 몬스터들이 있는 동굴에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가진 이도민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필드를 탐색하기로 했다.
“윤서야, 형들, 누나들 말 잘 듣고 다치지 말고 돌아와.”
“내가 할 말이야. 너 지금 마력 얼마나 남았어?”
“힐러 분들이 마력 치유 스킬을 써 주셔서 아직 넉넉해. …네겐 많이 미안해.”
“갑자기 뭐가?”
“나 때문에 여기 들어온 거잖아. 내가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너는 밖에 있었을 텐데…. 괜히 어쭙잖게 정의니 뭐니 환상만 가득한 친구 때문에.”
“언제는 대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건 비겁하다고 하더니. 생각이 바뀌었어?”
이도민은 종종 심리가 불안할 때면 ‘이건 정의가 아니야’, ‘왜 내가 희생해야 하지?’ 같은 비관적인 발언을 하고는 했다. 혹시 지금 상태도 불안정한가 싶어서 묻자 이도민이 피식 웃었다.
“글쎄. 그 생각은 여전해. 정의로부터 눈 돌리지 않았다는 걸 언젠간 너도 뿌듯해했으면 좋겠다.”
정의를 추구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서야 윤서는 내심 안도했다.
“아무튼 확실한 건 윤서, 넌 친구를 잘못 둔 죄밖에 없다는 거야. 나는 친구를 정말 잘 뒀고 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다녀오기나 해.”
윤서는 말랑말랑한 분위기에는 적응이 안 되어 투덜대며 친구를 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