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2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21)화(21/195)
#18
윤서는 동굴 속에서 체감상으로 열흘을 넘게 헤매다가 결국 보스 몬스터 한 마리도 못 찾은 채 허무하게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그때 베이스캠프는 암울하고 침체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망적인 분위기였다.
“채, 채윤아.”
“서채윤 헌터….”
이도민과 같은 팀이었던 헌터들은 윤서를 발견하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윤서는 빠르게 그들의 행색을 훑었다. 안 보이는 얼굴이 여럿 있었다. 이도민 역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윤서는 어떤 불길한 직감 때문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도민과 같은 팀이었던 이강진이 얼어붙은 윤서에게 다가왔다.
“채윤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뭐가요?”
“미안하다….”
“뭐가, 대체 뭐가 미안한데.”
이강진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윤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넓지 않은 베이스캠프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이도민, 어디 있어. 장난치지 마. 빨리 나와. 당장 나오라고. 살아 있는 거 다 알아. 얼른 나오란 말이야….
손톱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흙구덩이를 파는 윤서를 이강진이 끌어안았다.
“그만해. 채윤아, 그만해라. 도민이는 이미 죽었어.”
윤서는 이강진의 품에서 솟구치는 울음을 삼켰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도민이 죽었다니.
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는, 친구를 잘못 둬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게 마지막일 줄 모르고 퉁명스럽게 대했다. 심리가 불안정한 애한테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도민은 죽었으니까.
“미안해, 채윤아. 미안해.”
“네 친구를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 미안해.”
“도민이의 숭고한 희생을 모두가 기억할 거야….”
함께 나갔던 이들이 윤서를 위로했다. 가장 어린 막내가 상처받을까 봐 윤서를 위안하고 있었다.
윤서는 소리쳐 울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가이아 시스템에 대한 분노이자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숭고한 희생?
정의로부터 눈 돌리지 않은 대가가 이것인가?
강자로서 책임감을 가졌기에 다수보다 먼저 죽었고, 그건 숭고한 희생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되었다.
윤서는 그때 결심했다.
‘이런 게 정의라면 난 더는 정의롭게 살지 않겠어.’
그러나 그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이도민의 팀에서 그 녀석만 죽은 게 아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해 지금도 죽어 가는 이들이 있다. 가족, 연인끼리 참전했다가 동반자를 잃은 리벤저들도, 그들도 세계를 지키기 위해 슬픔을 억누른 채 전투를 해 나가고 있다.
지금은 이 희미한 정의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했다. 대던전을 나가기 전까지는.
“이럴 때가 아니에요.”
윤서는 이강진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참느라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이도민이 죽었으니 이제 시간이 흐를 겁니다. 폭발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이 지형의 보스 몬스터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어요.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애도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지금은 친구의 죽음에 슬퍼할 때가 아니다.
친구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서 이곳에 들어왔고 윤서가 그 소원을 마저 이뤄야만 했다.
그리고 대던전을 나간 후에는 정의와 함께 목숨도 버릴 것이다.
“…….”
이강진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윤서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괜찮은지 살펴보는 듯했다. 윤서는 이강진이 보는 제 눈빛이 비참하게 흔들리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제 목소리도 형편없이 떨렸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현재 불안정하다 해도, 괜찮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슬퍼할 때가 아닌 것은 맞았다. 모든 리벤저가 괜찮지 않은 상태로 힘겨운 싸움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지평선>이 없어진 앞으로는 더욱 힘들 것이다.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 윤서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강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아. 이제부터는 내가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할 테니까.”
“네?”
“<가이아의 그림자>. 상대의 스킬을 복제해서 가질 수 있는 특수 스킬이야. 도민이가 죽기 전 내가 이 스킬로 <사건의 지평선>을 복사했어.”
윤서가 눈을 크게 떴다.
“가이아 스킬이라니, 형도 ‘선택된 자’였어요?”
윤서의 ‘형도’라는 말에 이강진 또한 무척 놀랐다.
“너도… 가이아 스킬이 있어?”
윤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스킬을 얘기했다.
당시에는 가이아 시스템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인류 도감>을 사용해도 상대의 이름과 나이, 성별만 뜨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에 누가 어떤 특성과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둘은 그제야 서로의 가이아 스킬을 공유하고, ‘선택된 자’ 입수 시 떴던 메시지도 동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강진은 자신에게 스킬을 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상대가 괜히 신경 쓸까 봐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도민이 죽기 전 내가 이 스킬을 사용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고, 이도민은 ‘숭고한 영웅’답게 기꺼이 허락했다고.
“도민이도 가이아 스킬이 있었어요. <가이아의 꿈>이라고.”
“그건 어떤 스킬이었어?”
“모릅니다. 몇 번을 사용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나중에 연습해 보자고 했는데….”
윤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이강진은 이해한다는 듯 윤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둘은 다른 이들에게도 가이아 스킬에 대해 말했고, 스킬 보유자를 두 명 더 찾아냈다. 다름 아닌 리더 그룹의 나머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가이아의 눈>, 한 명은 <가이아의 마음>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이도민까지 포함하면 리더 그룹 다섯 명이 모두 선택된 자였다는 뜻이었다.
***
“너무 숭고해서… 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어.”
이도민이 죽고 나서도 공략은 이어졌고, 시간은 흘러갔다. 이강진을 비롯한 리벤저들은 이도민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특히 이도민과 같은 팀이었던 이들은 대던전 공략 막바지에는 거의 신성시했다. 윤서는 이들이 친구를 치켜세울 때마다 왠지 화가 나고 울컥하는 감정에 꽥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그 녀석만 숭고했습니까? 다들 숭고하게 희생했으니까 그 녀석만 올려치지 마세요.”
“채윤아, 던전을 나가면 꼭 도민이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자. 위인전이라도 쓰는 거야. 이도민 대평전 같은 제목으로.”
“쓰든가 말든가 그건 알아서 하고요.”
“알아서 하라니 너무 냉정하네. 단짝 친구인 네가 출판사의 대표가 되어야지.”
“그딴 거 안 합니다.”
“…….”
윤서는 친구가 죽었다는 걸 안 그날, 대던전을 나가면 자살하겠다고 결심했다. 동료들은 금방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윤서는 그들이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밤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리벤저도 종종 나왔고, 윤서처럼 공략을 마치면 죽을 거라고 미리 유서를 써 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동료들은 죽음을 계획한 막내가 무척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어처구니없는 유언 폭탄이 시작되었으니까….
미로 지대의 보스 몬스터들을 발견한 건 이도민이 죽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독을 뿌리는 촉수 몬스터, 형체가 없는 안개 몬스터, 상대의 모습을 따라 하는 도플갱어 몬스터였다. 촉수 몬스터는 윤서와 햅쌀이에게 무참히 도륙당했다. 안개형과 도플갱어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이었다. 윤서가 마력 고갈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실드를 펼쳐도 많은 리벤저가 죽었다.
마침내 세 번째 지형의 보스 몬스터 세 마리를 전부 죽었을 때 생존자는 윤서를 포함해 303명이 남았고, 윤서가 들은 유언은 총 220개였다.
“참돔 낚시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평생 낚시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다고요.”
“어떡하냐…. 걔가 딱 너를 콕 집어서 유언을 남겼는데….”
“그러니까 왜 하필 나냐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다 나한테 남기냔 말이야.”
“다들 막내가 너무 예뻐서 그렇지. 너무 화내지 마.”
이강진은 부들부들 떠는 윤서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건네고는 했다.
처음보다 1/4로 줄어든 인원으로 대던전의 마지막 지형에 다다랐다.
마지막 지형은 신전으로,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흘러간 시간을 계산하면 총 16일을 보냈다.
이도민은 마력이 많아서 <사건의 지평선>도 장시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스킬을 복사한 이강진은 평범한 A급 각성자만큼의 마력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지평선> 유지 시간이 길지 않았다.
“채윤아, 너는…. 너희 둘은 항상 이런 고갈에 시달렸던 거구나.”
이강진은 마력 고갈로 허덕이면서 윤서에게 씁쓸히 말하고는 했다. 그가 마력 고갈을 겪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자주 겪지도 않았으므로 그동안 어린애들 둘이서 고생한 게 새삼 가슴 아팠던 듯했다.
윤서는 그때쯤에는 얼른 공략을 끝내고 친구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몬스터를 쉴 새 없이 학살했다. 실드 스킬보다는 공격 스킬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의 귀속 무기 아이템 또한 몬스터의 피를 워낙 좋아하는 녀석이라 둘이서 몬스터들을 썰고 있는 장면을 멀리서 보면 광기에 미친 헌터와 마검 그 자체였다.
“여긴 애 교육에 안 좋아…. 이제야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애한테 좋은 환경이 아니야….”
이강진은 죽어 가는 생선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피에 젖은 윤서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리벤저들이 동조의 목소리를 냈다. <사건의 지평선>으로 멈춰 있던 시간을 합하면 이제 윤서는 어린애가 아닌데, 리벤저는 늘 윤서를 어리게만 생각했다.
신전 지형은 미로만큼은 아니지만 규모가 크고 함정이 많은 곳이었다. 어디를 잘못 밟으면 날카로운 창이 날아온다거나, 어딜 잘못 짚으면 크고 무거운 쇠구슬이 굴러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게임이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던전 스타일이라 할 수 있었다.
높이 뻗은 신전 기둥에는 신화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고, 천장은 간혹 돌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무너져 내려갔다. 이끼 쌓인 제단과 벌레가 둥지를 튼 석상. 제단 뒤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아래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암흑뿐인,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리벤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