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2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24)화(24/195)
#21
안 그래도 발소리를 들었던 건지 아저씨는 이미 이쪽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윤서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콧수염을 기른 살집 있는 중년인. 윤서가 항상 콧수염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A급 헌터이자 석영 길드의 상무 이사인 태재식이었다. 예전엔 홀쭉했는데 볼 때마다 살이 붙었네 싶더니 이제는 배불뚝이가 되었다.
“얼른 들어와 앉아라.”
태재식이 창문 블라인드를 내렸다. 87층 높이 창밖에서 훔쳐볼 사람도 없는데도 신중한 행동이었다.
“사무실 넓고 좋네요. 난초도 뒀습니까?”
“상무 이사실에는 난초가 필수지.”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넌 여전히 건방지구나. 그리고 저거 조화야.”
“조화인 거 보면 압니다. 겉멋만 든 상무 이사실다운 풍경이네요.”
“너 시비 걸려고 왔냐?”
“아뇨. 아저씨가 불러서 왔습니다만.”
“으이구, 됐다.”
태재식이 혀를 찼다.
“임시 팀 된 거 축하한다.”
“그게 축하할 일입니까.”
“너도 들었겠지만 정예 팀으로 뽑히면 연봉 엄청 오를 거야. 복지도 우리 길드 아이템이랑 포션 공짜로 퍼다 주는 수준. 세계 톱 티어 길드에 들어온 김에 우리 여보랑 딸래미까지 해서 한턱 쏘는 거 잊지 마라.”
태재식은 으스대는 말투와 다르게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까지의 본론을 비껴가는 대화로 상황을 파악한 윤서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아이템 ‘낡은 양탄자’를 사용합니다.
도청 아이템 2개를 발견했습니다.
무효화하시겠습니까?
윤서는 무효화를 수락했다.
주위가 깨끗해졌습니다.
남은 시간 09:59
“이제 말해도 됩니다. 10분이에요.”
“역시 도청 있었냐? 몇 개?”
“두 개요.”
“하, 어제 싹 다 치웠는데 또 그새….”
태재식은 피곤한 낯으로 얼굴을 쓸고는 그제야 진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이놈아. 잘 지냈냐?”
“네, 아저씨는요?”
“나야 뭐 보다시피.”
태재식과 윤서는 12년 전까지는 모르는 사이였다.
대격변이 일어난 그날 아침,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윤서는 친구들과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평범한 30살 회사원 태재식은 출근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폭음과 함께 지하철이 크게 흔들렸고, 괴이한 울음소리와 찢어지는 비명이 사방을 메웠다. 처음엔 지하철 사고인가 했는데 이윽고 철근을 찢고 나타난 괴물들을 보고선 그게 아님을 알았다.
그날 아침 출근 시간대 신도림역을 막 지나 만석이던 지하철 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태재식과 윤서 그리고 윤서의 친구, 셋뿐이었다.
윤서에게 각성자로서 활동할 때 이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리라고 조언한 이도 태재식이었다. 덕분에 윤서는 아포칼립스 시기의 초기 최초의 헌터들 중 한 명임에도 개인 정보가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너 그래도 얼굴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는 나아 보인다.”
“아저씨도요. 살 좀 찌셨네요.”
“우리 여보랑 딸래미가 나만 보면 입에 뭘 먹여 대서. 여보가 나 살찌우는 낙으로 산대.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10kg은 쪘을걸.”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날은 태재식의 딸 돌잔칫날이었다. 석영의 고위 간부들은 물론 정부와 헌터 협회 사람들도 참석한 탓에 윤서는 인사만 하고는 바로 떠났었다. 석영 간부 중에는 서채윤과 동시대에 활동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윤서의 맨얼굴은 몰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주치기가 꺼려졌다.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죠. 여전히 물 적게, 맞아요?”
“응.”
윤서는 말과는 달리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스킬을 사용했다. <염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전기 포트의 물이 끓고, 인스턴트커피 두 봉지가 뜯겼다.
사람들은 권지한이 <염력>을 가졌을 거라고 단언하듯 말하곤 했지만, 윤서는 그가 <염력>이 없음을 알았다. 왜냐면 이것은 자신의 고유 스킬이니까.
일반 스킬은 여러 명이 중복해서 가질 수 있으나, 가호 신이 선사해주는 고유 스킬은 오직 한 명만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윤서의 스킬 중 <스파크>는 고희원과 박영범 등 많은 이도 가졌지만, 고유 스킬인 <염력>은 수십억 사람 중 오직 윤서만이 가졌다.
섬세한 컨트롤로 쪼르르, 뜨거운 물이 부어지는 동안 태재식이 통신으로는 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냈다.
“스트레스 줄까 봐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석영과 협회가 2년 전부터 서채윤을 찾고 있어.”
언뜻 태평스러워 보이던 윤서의 얼굴이 굳었다.
“라 비지나 헌터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서채윤 위치를 말하라고 회유에 협박에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말도 못 해. ‘계약서’를 썼기 때문에 발설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서채윤 추적 팀을 만들고 따로 뭔가 열심히 하더라고.”
10년 전 대던전에서 살아 나온 리벤저는 네 명이었는데, 두 명이 죽어서 지금은 두 명만 남았다. 바로 유럽의 라 비지나와 한국의 서채윤이었다. 라 비지나는 힐러의 치유도 통하지 않는 영구적 신체 장애를 입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여 제대로 된 대화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채윤. 나는 한국말 말한다. 누나라고 부르시오.’
12년 전 한국이 전 세계를 이끌다 보니 한국어 열풍이 불었는데, 라 비지나도 열풍에 휩쓸린 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서툰 한국말로 그렇게 말해 오곤 했다.
‘나는 누나다. 라 누나다.’
‘누나가 아니라 이모겠죠. 양심이 있으면….’
‘이모가 뭐지? 누나라고 부르시오.’
‘그쪽이랑 저랑 16살 차이인데 가당찮은 말 그만하시죠.’
‘한국말 어렵군. 이해하지 못했소. 누나라고 불러라.’
윤서의 친구는 그녀의 끈질긴 협박에 결국 누나라고 불렀지만 윤서는 정말 가끔씩만 누나라고 불러 주며 애를 태우고는 했다.
“저 때문에 고생했겠네요. 뭔가 미안하군요.”
“그래, 알긴 아냐? 엉? 계약서만 아니었어도 확 다 불고 편해지는 건데, 으휴.”
“아저씨 말고 라 비지나 헌터 말입니다.”
“이 조그만 게 진짜.”
태재식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가 제가 한 대 쥐어박아도 윤서는 간지러워하지도 않을 거란 걸 알고 포기했다.
“아무튼 지금 네가 몸담은 임시 팀도 표면적으로는 세계 최강 정예 팀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채윤을 찾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널 포함해 임시 팀 일곱 명은 석영의 서채윤 추적 팀이 찾아낸 후보들이고. 후보를 찾기 위해 1년간 스파이도 잠입시켜서 일대일 마크했다는데 네 주위에 의심 가는 사람 있었어?”
“누군지 알 것 같아요.”
1년 전 등급을 속이고 낙엽에 들어온 박수빈이 분명하다.
애초에 믿지도 않아서 배신감도 없었다.
윤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제조한 커피 두 개를 태재식 앞에 갖다 놓았다. 태재식은 뜨거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 머그잔 하나를 순식간에 비웠다. 그는 머리를 헝클였다.
“갑자기 서채윤은 왜 찾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다른 데서 열나게 수색할 때도 가만히 있더니 말이야.”
“이유 안 물어봤어요?”
“길드장한테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 줘. 날 믿을 수 없대. 세상 사람들 다 죽고 나랑 자기만 남아도 나한테는 말 안 할 거래. 말하면 내가 죽은 사람들 다시 살려 내서라도 얘기하고 다닐 것 같대. 이게 말이 되냐? 날 대체 얼마나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윤서 안에서 석영 길드장의 안목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갔다.
“2년 전부터 길드장이랑 부길드장, 권지한. 이렇게 셋이 모여서 뭔가 수군수군하는 걸 보면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한데 뭔지를 모르겠어.”
“들은 게 없어도 추측은 할 수 있잖아요. 아저씨가 생각하기엔 무엇일 것 같습니까? 혹시 지구를 위협하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윤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뭔가 석영 같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그룹만이 알고 있을 대재앙이 닥친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과거의 대던전처럼….
만약 그런 거라면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게 옳았다. 그건 그가 정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윤서는 사실 아주 몹시 정의롭지 못한 편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 정의의 영웅이었다면 어떤 페널티가 있다 해도 10년이나 전투에서 빠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세계가 위기에 빠졌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유는 하나다.
겨우 평화를 찾은 세상이 다시 위기에 처하면 그들의 유언을 들어주기가 힘들어지니까.
아직도 들어주지 못한 유언이 너무 많아서.
그 이유뿐이었다.
“내 생각엔 권지한 때문인 것 같아. 싸우려고 말이야.”
“…네?”
심각하게 생각하던 윤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도 소문 들어서 알겠지만 권지한 싸움광이거든. 이건 길드 기밀이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데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거니까 다른 사람한텐 비밀이야. 사실 우리 길드에 S급만 다섯 명인 이유가 다 권지한 때문이야.”
태재식의 입은 그의 콧수염처럼 가볍기 짝이 없었다. 옛날부터 유명했다.
“권지한이 S급들한테 내기 싸움을 걸고 다녔어. 내가 지면 당신 길드에 들어가거나 당신 부하가 될 테니 내가 이기면 당신이 석영으로 들어오라고.”
“S급이 그런 얼토당토않은 내기를 받아 줍니까?”
“받아 주더라…. 생각해 봐라. S급이란 게 얼마나 오만한 족속들이냐? 새파랗게 어린놈이 건방지게 그런 조건을 붙이고 시비를 터니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겠지. 아, 물론 너는 착한 S급이지만. 그렇게 외국 S급까지 쓸어 모으고 나니까 더는 권지한과 싸우려는 S급이 없더라고. 패배자들이 석영에 끌려가는 걸 보고 지들도 위기의식이 싹튼 게지.”
“그래서 더는 싸울 상대가 없는 권지한이 서채윤과 싸우려고 한다는 거예요?”
“응, 서채윤은 여전히 세계 최강 헌터로 불리니까. 그렇게 싸운 다음 석영에 영입시키면 일거양득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