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2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25)화(25/195)
#22
확실히 윤서가 보기에도 권지한은 호전적인 스타일이긴 했다. 특성 자체도 포식자고, 무려 ‘파괴의 신’이라는 이름의 가호 신의 가호도 받고 있으니 피 튀기는 곳을 찾아 스스로 걸어 들어갈 타입이다. 특성이란 건 기본적으로 성격과 비슷하게 결정된다. 그 사나운 눈초리의 어린놈은 세상에 던전과 몬스터가 없어지면 심심해서 말라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지한은 ‘레벨 업’을 한다. 성장의 한계가 없는 헌터에게 경험치를 얻게 해 주기 위해서 석영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체는 계속 숨겨야겠군.’
윤서는 단단히 결심했다.
“이번 던전도 서채윤 찾기의 일환일 거야.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조심해.”
“그런 줄 알았다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팀에서 빠질 걸 그랬군요.”
“어우, 야. 무서운 말 하지 마라. 너 아직 상태 이상 걸려 있잖아. 얼마나 남았어?”
윤서가 시스템 창의 하단을 힐끗 봤다.
상태 이상 : 치유 스킬 내성
남은 시간 : 788,201시간 57분 04초
“거의 끝나 가네요.”
“뭐? 진짜?”
“90년만 지나면 됩니다.”
“어휴우….”
태재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는 대던전에서 이 상태 이상에 걸렸을 때는 그저 치유 스킬에만 내성이 생긴 줄 알았다. 나중에 포션이 개발된 후 포션조차 안 듣는 걸 확인하고, 여기서 말하는 치유 스킬이란 가이아 시스템에 바탕을 둔 모든 치료 체제를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포션도 윤서에게는 맹물일 뿐이었고, 오직 지구상의 물질로 만든 약품과 인류의 의료 기술만이 윤서를 치료할 수 있었다. 마력을 조금이라도 지닌 자라면 비각성자도 잘린 팔다리를 포션과 치유 스킬로 회복하는 이 시대에 윤서 혼자 유리 세공품 같은 몸이 된 것이다. 물론 보통 유리는 아니고 방탄 유리 세공품이지만.
태재식은 윤서의 상태 이상 사실을 알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애써 위로했다. 그때 윤서는 이건 절대로 위로받을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치료하지 마. 서채윤에게 치유 스킬을 사용해!’
‘서채윤에게 마력을 써. 서채윤만이 희망이야.’
‘서채윤을 살려 내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리벤저의 살아날 확률을 빼앗고서 힐러들의 치유 스킬을 독점한 결과로 얻은 내성이었다. 살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 희생한 이들, 부상자들을 내버려 두고 윤서에게만 스킬을 사용한 이들. 모두 대던전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사람이 위로받는단 말인가.
감사해야 마땅한 상태 이상이었다.
“치유 스킬도 안 통하는 놈이 괜히 뼈 분지를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던전 다녀와. 가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팍팍 죽이고 있다 오란 말이야.”
“그게 쉽나요.”
“이왕이면 겁먹은 티도 팍팍 내 주고.”
윤서가 이마를 짚었다.
주위가 깨끗해졌습니다.
남은 시간 01:01
“일단 가겠습니다. 저 가면 도청 장치 없애고, 다른 후보자들도 한 명씩 불러서 짧게라도 얘기 나누세요.”
“왜? 빨리 가서 토끼 같은 딸래미랑 놀아 줘야 하는데.”
“저만 아저씨 만나면 의심할 겁니다. 지금 다들 퇴근 시간이니까 얼른 불러요.”
“그래, 알았다.”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또 스산해져서 혼자 팔짱을 꼈다. 태재식과의 대화가 불안감만 증폭시킨 채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윤서는 스산하고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약병 하나가 손에 집혔다. 인벤토리가 익숙하지 않아 결국 실물을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윤서는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서채윤을 찾는 이유가 정말 권지한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인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후보자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건 석영의 추적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태만했든가….
실드 트랩 성능을 멋대로 높이고 다녔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잠깐. 그럼 석영 길드장은 서채윤 후보로 화심과 김진해를 높이 치고 있는 건가.’
그 점을 이용하면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윤서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서 열심히 뇌를 굴렸다.
***
“…….”
윤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후 아무도 없던 복도의 허공에서 한 사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윤서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신하고 있던 남자는 바로 권지한이었다.
“형, 봤지?”
– …그래. 봤어.
권지한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히죽이며 U패드를 향해 말했고, U패드에서 유준철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채윤은 태재식과 친밀한 관계이고, 태재식은 서채윤이 누구인지 안다. 유준철은 후보자 중에 서채윤이 있다면 반드시 태재식을 만나러 올 거라 예상했다. 82층은 태재식의 영역이라 감시 카메라도 달려 있지 않았고, 그의 집무실도 3중 S급 실드가 쳐져서 밖에서 엿들을 수도 없었다. 도청 아이템을 설치하긴 했으나 태재식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크니 누군가 직접 감시해야만 했는데, 태재식과 서채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감시자는 권지한밖에 없었다.
그리고 권지한은 해냈다. 정말로 윤서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다. 물론 둘은 아직은 윤서가 서채윤임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U패드 영상 통신으로 윤서가 왔다 가는 걸 본 유준철이 한숨을 쉬었다.
–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조사한 바로 둘은 5년 전 실드 트랩을 대량 구매하면서 알게 된 사이니까.
“태재식 정도면 그런 자료는 얼마든지 가짜로 꾸밀 수 있지.”
– 윤서 헌터는 서채윤이라기엔 너무… 평범해. 좀 어려 보이고 미인인 거 말고는….
“평범하게 보이도록 잘 꾸며 놓은 거야. 방금도 봤지? 신경 안정제를 한 번에 다섯 개나 삼켰어. 정신이 불안정한 것도 우리가 예상한 서채윤 상태와 비슷해.”
– 신경 안정제는 헌터 열 명 중 다섯 명은 먹고 있을 거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태재식을 만나러 온 사람이 저 허여멀건 녀석 한 명밖에 없잖아.”
– 그건 그렇지만.
유준철이 한숨을 내쉬며 침묵했다.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윤서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확신하는 권지한으로서는 퍽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답답함은 각성 후로 한두 번 느낀 것도 아니고, S급인 자신에 비해 세상 사람 대부분은 멍청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더 유준철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권지한은 점점 이 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올라오는 이가 누군지도 알아챘다. 권지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딩동,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리고 열린 문에서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궈, 권지한 헌터?”
“…….”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박강이었다.
“네가 여기 왜 와.”
“아, 그….”
박강은 심기가 뒤틀린 듯한 권지한을 보고 영문도 모른 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태재식 이, 이사님과 약속이 있어서, 그, 그래서….”
“태재식이랑, 왜?”
“이, 이사님과 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서…. 죄송합….”
권지한은 미간을 구긴 채 지나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박강이 잔뜩 겁먹은 소동물처럼 경계하며 옆을 지나갔다. 체격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화면 속 유준철이 피식 웃었다.
– 만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네. 잠복은 계속해야겠다.
“귀찮게, 씨….”
권지한은 신경질적으로 U패드의 통신을 끊고 다시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지겨운 잠복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그동안 일곱 명의 후보자가 모두 태재식과 한 번씩 만났다. 게다가 도청 아이템을 찾아낸 태재식이 유준철에게 크게 성질을 내는 바람에 당분간 도청도 못 하게 되었다.
태재식이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았던 건지 작전이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