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2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27)화(27/195)
#23
‘내성이 얼른 풀리기라도 했으면….’
그런 생각을 하던 윤서는 퍼뜩 놀랐다.
‘아니야.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돼. 내성은 리벤저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증거야.’
대던전에서 윤서는 거의 죽을 뻔했다. 아니, 사실 죽어야 했었다. 그를 억지로 살려 놓은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치유받아 마땅함에도 방치되어 죽은 자들도, 모든 마력을 소진해 윤서를 치유한 자들도. 그럼에도 좀 더 편히 살겠다며 ‘내성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는 건 너무 무례한 생각이었다.
윤서는 서둘러 약통을 꺼냈다. 대던전은 지금 이렇게 그가 신경 안정제를 달고 살게끔 한 원인이었다. 떠오를 때 바로 약을 먹지 않으면 나중엔 호흡 장애까지 왔다.
약병에 한 알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일단 입 안에 털어 넣은 뒤 인벤토리에서 새 약병을 꺼냈다. 윤서의 인벤토리에는 약병만 다섯 통이 있었다. 약은 인류가 만든 것이지만, 병은 아이템이라서 인벤에 넣을 수 있었다. 윤서가 생각하기에 가이아 시스템이 가장 잘한 업데이트는 이 인벤토리 시스템인 것 같았다.
‘지금의 시스템을 가진 채로 대던전에 들어갔다면 좀 수월하게 클리어했겠지.’
가이아 시스템은 성장하는 시스템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지금은 12년 전 아포칼립스 시기와는 아예 다른 시스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시스템 창은 구조가 조악했고, 설명도 불친절했다. 스테이터스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각성자들은 맨몸으로 몬스터와 싸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국은 각성자도 많고, 세계 최초의 헌터라 할 수 있는 석영 초대 길드장 이석영 덕분에 피해가 덜했지만 북한을 비롯해 이웃 나라인 중국, 일본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미국. 어디고 할 것 없이 몬스터의 지배를 받았다. 이석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그가 깨우친 활용법을 전파해 어떻게든 지구를 다시 재건하려고 힘썼다. 인류의 노력이 통해 어느 정도 피해가 줄었을 때쯤 대던전이라는 큰 재앙이 닥쳤다.
당시에는 일단 S급 헌터가 전 세계에 여덟 명에 불과했고, 스킬 설명이 불친절하여 직접 사용법을 알아내야만 했다. 아이템도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수상하게 생긴 바위를 놓고 아이템이냐 아니냐를 한참을 토의해야 했다. 당연히 인벤토리도 없었기에 헌터의 디폴트 복장은 포켓이 가득 달린 군복과 비슷한 테크웨어였으며, 내부가 넓은 가방에 수류탄과 권총, 붕대, 약 등을 가득 넣고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다.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차가 멈춰 서고 찹쌀이 도착을 알려 왔다. 윤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언젠가는 몬스터와 싸우게 되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그러나 던전에는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외부에서는 싸우다가 다쳐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지만 던전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던전에 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되다니 역시 사람 인생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더 살고 싶지 않았는데.’
윤서는 혀를 찼다.
“수고했어.”
“주인님, 던전에 들어가시죠? 언제 나오세요?”
“B급이긴 한데 파티원들이 강해서 며칠씩은 안 걸려. 오늘 밤이나 내일이면 올 거야.”
“조심히 다녀오세요. 실패해도 좋으니 다치지만 마세요.”
“응.”
찹쌀이의 다정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렸다. 한여름이지만 이른 아침은 제법 선선했다.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선선함이었다.
박영범
윤서 씨 정말 괜찮아?ㅠ 에휴 내근직을 던전에 들여보내고 지랄이냐ㅠㅠ
고희원
그니까요 어떡해,, 오빠 못 가겠으면 저 지금 당장 추락이라도 할게요
박영범
엥? 네가 추락하는 거랑 윤서 씨가 던전 들어가는 거랑 뭔 상관이야?
고희원
절 오빠 여친으로 소개하고 여친이 낙상으로 다쳤다고 하는 거죠! 그럼 빼 주지 않겠어요?
박영범
오오! 그럼 나도 같이 떨어질게 존경하는 은사가 다쳤다고 하면 빼 주겠지!
이른 시각에도 대화 창은 쉴 새 없었다. 윤서는 이들의 기상 시간을 알고 있었다. 한창 잘 시간인데 윤서 때문에 깨어 있는 듯했다.
정 걱정되시면 갔다 왔을 때 고기나 사 주세요.
박영범
당연하지ㅠㅠㅠ소고기로 사 줄게 아니면 몬스터 고기?
고희원
오빠 권지한 뒤에만 숨어 있어야 해요! ㅠㅠㅠㅠㅠ조심히 다녀와요ㅠㅠㅠ
박영범
나오면 제일 먼저 연락해라 그때까지 우리 잠 못 잘 거니까ㅠ
고희원
ㅠ애 물가에 내놓은 기부뉴ㅠㅠㅠㅠ
윤서는 피식 웃으며 대화 창을 닫았다. 정신 안정에 약보다 더 효과가 좋은 게 팀원들의 대화를 보는 거였다.
이 팀원들은 몬스터와 싸우지 않는 동료들이니까. 절대로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서 이상한 유언을 남길 리 없는 사람들이니까….
***
임시 팀이 공략할 던전은 양주 호명산 상공에 발생한 B급 던전으로, 기한 내 클리어 실패 시 폭발하는 타입이었다. 권지한도 동반하니 실패할 확률은 제로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호명산은 현재 전면 출입 통제되었다.
윤서는 산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석영 길드원의 안내를 받아 던전 포탈 앞에 도착했다.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타원형 모양의 남색 포탈을 보자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도 네이비인 게 어디인가. 대던전 포탈의 검붉은 색을 생각하면 이건 색도 아니었다.
포탈 앞은 석영의 던전 진입 팀 직원들과 임시 팀 팀원들로 북적였다. 임시 팀에서는 화심만 빼고 모두 온 상태였다. 윤서는 화심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길드장 유준철과 권지한은 대화 중이었는데 표정은 심각하지 않았다. 다만 권지한 혼자 못마땅하다는 듯 찡그리고 있었다.
“윤서 씨, 이제 오셨군요.”
임시 팀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매니저는 윤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는데 조금 신기하단 눈빛이었다.
“이렇게 입고 들어가실 겁니까?”
“예.”
“던전 공략용 복장이 아닌 듯한데….”
“던전에 들어간 적 없어서 헌터복이 딱히 없습니다.”
“아, 저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요. 길드 내에 방어구 팀이 있으니 클리어하신 후에 가장 먼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제 주 스킬이 실드 스킬이라 괜찮습니다. 이대로면 충분합니다.”
“예, 그러시다면. 일단 렌즈 착용하신 후 몸 풀면서 대기해 주세요.”
“렌즈요?”
“바디 캠 대신 렌즈를 쓰기로 했습니다. 한쪽 눈에만 편한 쪽으로 착용하시면 됩니다. 당연히 시스템 창은 렌즈를 통해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으니 걱정 마시고요.”
매니저가 렌즈 케이스를 내밀었다. 윤서가 뚜껑을 열어 보니 투명한 렌즈가 두 개 들어 있었다. 눈에다 뭘 넣어 본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첫 경험에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오른쪽 렌즈를 눈에 넣었는데, 렌즈는 의외로 쏙 들어가 자리 잡았다. 눈을 몇 번 깜빡였는데 시야도 변함없고, 이물감도 없어서 금방 적응했다.
윤서는 시스템 창 몇 개를 켰다가 껐다가 했다. 이 시스템 창은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는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어도 당연히 알았다. 인류 기술이 가이아 시스템을 넘어설 일은 없으니까.
윤서는 다른 헌터들을 살폈다. 어떤 이는 무표정하게 명상하고, 어떤 이는 긴장한 채 몸을 풀고, 어떤 이는 설렘 가득한 얼굴로 시스템을 점검했다.
헌터들은 각자 자신의 스킬과 특성에 맞는 의복 아이템을 구해서 그것을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박강이 걸친 남색 두루마기나 이마에 두른 붉은 테두리의 검은색 조영. 과연 개량 한복 스타일이었다. 윤서의 시선을 느낀 박강이 움찔움찔 눈치를 보더니 나무 기둥 뒤로 숨었다. 아직도 윤서를 한복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아는 게 분명했다.
이정인은 캐주얼 슈트 차림이었다. 귀에 걸린 십자가 모양 귀걸이는 아이템인 듯했다.
이제 보니 다들 아이템을 하나씩은 걸치고 있었다. 김진해가 어깨에 두른 숄. 남궁심해가 손목에 찬 밴드…. 그리고 홍의윤은 피어싱과 허리 벨트, 손목 밴드, 신발까지 모두 아이템이었다. 윤서가 육안으로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입고 가시게요?”
마침 눈이 마주친 이정인이 보조개를 띠며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사교성이 좋은 타입이었다. 누구는 소심해서 대화가 안 되고, 어떤 이는 너무 과묵하고, 어떤 이는 건방지고, 어떤 이는 까칠하고. 그 결과 이정인의 대화 상대는 대개 윤서였다. 윤서는 이정인에게 눈인사한 후 질문에 대답했다.
“전 아이템은 없어도 됩니다. 공격계도 아니고…. 실드 스킬이 있으니까요.”
“아이템 말하는 게 아니라, 옷 말이에요.”
“제가 헌터복이 따로 없어서요.”
“하하, 역시 낙엽은 특이하네요.”
“……?”
“이렇게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은 요즘은 입지 않잖아요. 인벤토리와 길드 아공간이 있으니까.”
아…. 그제야 윤서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봤다. 조끼를 포함해 상의에만 열 개, 하의에는 여덟 개의 포켓이 달린 옷을 구하고 의기양양했던 며칠 전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예전 헌터들은 이런 옷 많이 입었다는데. 윤서 씨,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옛날 사람 같네요.”
“제가 구세대 헌터들 팬입니다.”
윤서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오, 정말요? 누구 좋아하는데요? 저도 좋아하는 헌터 있는데.”
“말해도 모를 겁니다. 이정인 씨는 누구 좋아하는데요?”
“당연히 서채윤이죠.”
윤서가 움찔했다. 이정인이 가느다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서채윤은 우리 나이대 각성자들에겐 동경의 대상 아닌가요? 저는 정말 팬이거든요. 팬클럽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뭐야. 누가 서채윤 얘기 해.”
누군가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록 건방진 빨간 머리였으나 지금은 고마웠다. 이정인은 찰나 입가를 딱딱하게 굳혔다가 바로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홍의윤을 돌아봤다.
“아, 시끄러웠어요? 별 얘기 안 했는데.”
“서채윤이 뭐가 어땠다고.”
“제가 서채윤 헌터 팬이라서요. 동경한다고 얘기했죠.”
“흥, 몬스터 무섭다고 10년이나 도망친 겁쟁이를 왜 동경해?”
홍의윤이 신랄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커서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멀찌감치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유준철과 권지한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던졌다. 특히 권지한의 눈빛에 호기심이 담겨 있어서 윤서는 조금 불안했다.
“동경하려면 비겁한 겁쟁이가 아니라 목숨 걸고 꾸준히 몬스터와의 전투에 나서는 헌터들을 동경해야지. 개돼지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겁쟁이를 그리워할 거야?”
“물론 모든 헌터를 동경합니다만, 서채윤 헌터가 정말 겁이 나서 잠적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죠.”
“여태 모습을 안 드러내는 거 보면 뻔하지. 그 겁쟁이는 국가 유공자 연금만 타 먹으면서 배만 불리고 있을걸.”
“큰 부상을 입었다는 목격담은 듣지 못했나 보죠, 홍의윤 헌터?”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 명이 더 끼어들었다. 김진해였다. 유준철이 주시하는 사람 중 하나가 끼어들자 윤서는 심히 부담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