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3)화(3/195)
#02
“헌터님, 명함 주시겠습니까?”
“…예.”
잠깐 멈칫한 윤서가 명함을 꺼내 건넸다.
낙엽
윤 서 대민 지원 팀
각성자 파견
던전 레이드
실드 트랩
몬스터 부산물
헌터
서울시 여의도 342번지 낙엽 5층
010-0000-0000
항상 당신의 옆에…
낙엽
낙엽 길드의 명함은 깔끔하지 못한 편이다. 명함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윤서가 몇 번을 건의했지만 허세 넘치는 길드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헌터 명함은 처음 받아 봅니다.”
집주인이 황송해하며 명함을 구경했다. 만약 그 어떤 길드 소속이든 다른 헌터의 명함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이 명함이 얼마나 구린지 알게 될 터였다.
“헌터님도 헌터 네임이 따로 있으신지요?”
“전투계가 아니라서 헌터 네임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문제 있으면 그 번호로 연락 주세요.”
“가시려고요? 어떻게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일이 밀려 있어서. 더운데 들어가세요.”
“어유, 바쁘시구나. 그럼 어쩔 수 없죠….”
무척 아쉬워하는 집주인과 헤어지고 윤서는 건물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탔다.
“운전자 윤서, 인식 완료. 목적지를 지정해 주세요.”
자동 생체 인식이 완료되고 AI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윤서가 U패드를 확인하여 다음 주소를 입력할 때였다.
기저씨
길드장 기상혁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윤서는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뭡니까.”
– 길드장한테 답하는 첫 마디가 뭡니까가 뭐야, 뭡니까가.
“왜 전화했냐고.”
– 어허, 윤서. 말이 짧다? 내가 어릴 때 결혼했으면 너만 한 아들래미가 있었어.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 잠깐, 끊지 마!
통화 종료까지 다가갔던 손가락이 멈췄다.
– 트랩 설치 끝났으면 지금 바로 여의나루 대정증권으로 좀 가줘. 긴급 유지 보수 의뢰가 들어왔다.
“하청입니까?”
– 레인보우 길드 하청이야. 지금 너희 팀 두 명이 가 있는데 걔네들만으로는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으니 너라도 가서 도와야겠다.
윤서가 피식 웃었다. 꼭 무슨 팀원이 많은 것처럼 말하는데, 낙엽 길드는 총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소형 길드로 길드장 한 명, 던전 공략 팀 다섯 명, 경영 팀 세 명, 대민 지원 팀 세 명이었다. 즉 대민 지원 팀은 팀장 박영범과 팀원 고희원, 윤서가 끝이었다.
“지금 바로 갈게요. 10분 걸립니다.”
– 응. 그리고 너 오늘 회식 꼭 와라. 전체 회식인 거 알지? 중요 공지 있어.
“귀찮은데.”
– 이 자식, 또 말 짧게 하고….
“공지는 문자로 주시든가 지금 말하세요. 집에서 토끼 같은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 김치찌개나 만드는 괴상한 드라마 말이냐?
윤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러브 인 한강>은 괴상하지 않은데요. 이 드넓은 우주에서 김치찌개를 만드는 이들은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는 심오한 작품입니다.”
– 아, 그래. 괴상한 건 너지. 김치찌개 끓이는 게 전부인 드라마를 내용도, 대사도 다 외울 만큼 보고 또 보고.
“그럼 이만.”
– 아! 야! 야. 끊지 마. 회식 일찍 끝내 줄 테니까 공지 듣고 집에 가서 보면 되잖아.
“정말 일찍 끝내 줄 거죠?”
– 당연하지. 너 무서워서라도 일찍 끝낸다. 젠장, 이 길드는 길드장을 쭈구리로 여기는 인간들밖에 없….
말이 끊겼다. 망설임 없이 통화를 종료한 윤서는 이후의 일정을 내일 빈 시간에 추가했다.
“찹쌀아, 대정증권 본사로 가 줘.”
“네, 주인님. 여의나루 대정증권 본사로 출발합니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길드장은 아마 지금 욕을 엄청나게 하고 있을 테지만 다시 연락해 오지는 않았다. 윤서가 받지 않으리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콧수염
우리 딸 그림 실력 좀 봐라 ㅋ
경영 팀 김대리
윤서 씨도 오늘 회식 오세요?
박지긋지긋
곧 기일인데 이번에도 안 올 거야?
윤서는 이왕 핸드폰을 꺼낸 김에 밀린 연락을 확인했다. 중요한 연락은 없었고, 길드 단체방이 시끄럽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무시했다. 다만 박주황에게서 온 메시지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응 일이 바빠서.. 미안
❯
그날 출장 잡혔다
❯
미안 못 가게 됐
❯
윤서는 거절의 말을 이리저리 표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대화창을 나갔다. 10년째 가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불참이려니 할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옥상에서 노동하느라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기일이라는 단어에 더욱 가라앉아 버렸다.
‘벌써 이 시기인가.’
늘 생각하지만 시간이 참 빠르다….
윤서는 인터넷에 들어갔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커다랗게 ‘대던전 클리어 10주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10주년 기념일은 2주 후인데, 거의 세 달 전부터 온 세상이 난리였다. 매해 이 시기만 되면 난리이긴 하지만 올해는 10주년이라서인지 유독 심했다.
각성자 전용 뉴스에 들어가자 여기도 대던전 소식으로 한가득했다. 윤서는 영상 하나를 허공에 띄웠다. 윤서도 익히 아는 각성자 전문가들이 출연한 좌담회 영상이었다.
“10년 전 대던전은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죠. 대던전이 나타났던 날부터 클리어 날까지 3개월은 대격변 첫날 이후 지구상 인류가 가장 많이 사망한 시기였어요. 각성자들 대다수가 대던전에 들어가고 없는데, 던전은 여전히 계속 나타나고, 여기선 몬스터가 쏟아지고, 저기선 폭발이 일어나고…. 전 그때는 벙커에서 보낸 기억밖에 없네요.”
“맞습니다. 특히 지구 역사상으로 봐도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어요. 대던전 클리어 실패를 예상한 많은 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죠.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괴롭고 힘든데, 벌써 10년이 지났다니 믿기지 않네요.”
“저는 그때 지구가 이렇게 멸망하는구나 했어요. 정말 끔찍한 3개월이었습니다.”
‘끔찍한 3개월, 이라….’
메마른 눈으로 대담을 듣던 윤서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정말 끔찍하다는 게 무엇인지.
“던전 밖뿐만 아니라 대던전 안에서도 많은 리벤저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1,203명의 리벤저 중 생존 리벤저는 단 네 명이었어요.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국가가 우리나라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서 지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많은 헌터가 참전했지요. 서채윤, 이도민, 김미지, 이강진, 배수연…. 우리나라 각성자가 691명으로 과반수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나온 한국 각성자는 최연소 리벤저이자 리벤저의 에이스였던 서채윤 헌터뿐이었습니다.”
“실시간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정신을 잃은 채 나왔고, 그날 이후로 완전히 잠적했죠. 우리나라 정부와 헌터 협회는 물론이고 세계 헌터 연맹도 서채윤 헌터의 정체를 모른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서채윤 헌터의 정체는 가이아만이 아실 겁니다. 서채윤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었고, 대중 앞에 설 때는 항상 가면을 착용했으니까요. 그와 함께 대던전에 들어갔던 유럽의 라 비지나 헌터는 그의 맨얼굴을 알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해 제대로 된 대화가 어려울뿐더러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떤 스킬로 인해서 정체를 함구해야만 한다더군요. 결국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구원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정말 신비로운 헌터네요.”
“하하, 서채윤 헌터가 그 별칭을 싫어했다는 소문이 있죠. 자기는 작지 않다고 말이에요.”
“그런가요? 하긴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겠군요. 혹시 듣고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릴 테니 찾아와 주세요.”
영상 속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윤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자, 일단 알려진 사항만 짚어 보자면 서채윤의 성별은 남자, 지금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며, 12년 전, 초기부터 활동한 최초의 헌터 중 하나라는 것….”
윤서는 영상을 껐다. 급격히 피곤해진 그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10주년 때가 되면 여기고 저기고 다 서채윤 이야기긴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심했다. 사실 클리어 기념식을 7월 17일에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10년 전 대던전에 입장한 날은 7월 17일이고, 클리어한 날은 10월 2일인데 말이다.
“찹쌀아. 조명 좀 꺼 줘.”
“예, 주인님.”
차 안 조명이 어두워지자 윤서는 카 시트를 뒤로 눕히고 깊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잘 생각은 없었다. 분명 악몽을 꿀 테니까. 그저 눈을 감고 적막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월급 날이 사흘 남았네. 저번 달 핸드폰 요금은 6만 원이었지. 달에 만 원 더 내고 데이터 무제한으로 바꿀까. 드라마 무제한 앱 가입하면 통신비 할인해 준다던데. 집에 가면 김치찌개에 계란프라이 먹어야겠다. 후딱 먹고 운동 좀 하다가 드라마나 보자.
젠장….
윤서가 눈을 떴다. 계란프라이에 후추를 엄청나게 뿌려 먹던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였는데 모든 음식에 후추를 뿌려 먹었다. 죽기 직전 아저씨는 후추 뿌린 국밥 한 그릇 먹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을 들은 이들은 모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유언이 죄다 엉망진창이었어. 그 빌어먹을 유언들 때문에 아직도 죽지 못하고 있다니.’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비어 있는 걸 알고 또다시 한숨을 내뱉은 다음 마음속으로 ‘인벤토리’를 불렀다.
반투명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윤서는 항우울제와 공황 장애 약 등 각종 신경 안정제가 들은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입 안에 바로 털어 넣었다. 알약 서너 개를 물도 없이 한 번에 삼킨 윤서가 이번엔 인벤토리가 아니라 상의 주머니에 약병을 집어넣었다.
‘아, 죽고 싶다. 진짜….’
약을 먹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서, 언제, 무슨 생각을 하든 그들에게로 연결됐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서채윤이었던 과거는 여전히 윤서를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