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3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35)화(35/195)
#30
“모르는 척하지 마. 너 태재식이랑 만나서 대화했잖아. 그때 이 임시 팀이 사실은 서채윤 후보들이란 걸 들었을 텐데.”
“…그거 비밀 아니었어요? 이렇게 밝혀도 됩니까?”
“어차피 까발려진 거 아는데 뭐.”
취조실 밖에서 유준철이 이마를 짚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권지한은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전 서채윤이 아닙니다. 석영은 완벽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어요.”
“사실 네가 서채윤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어쨌든 우리로선 정체를 숨긴 S급을 하나 더 얻은 걸로도 충분한 결실이니까.”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실패했네요. 저 거울 앞에 계실 석영 길드장님한테도 잘 말해 주시죠. 열심히 취조해 봤지만 윤서는 B급 나부랭이가 맞다고.”
“저 형은 이미 네가 S급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말할 필요 없어. 나는 네 정체를 알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 빼곤 다 멍청하더라고. 너만은 제발 멍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간파 스킬로 네 스킬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줄줄 읊어야 인정할 거야?”
윤서가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권지한의 말이 맞다. <가이아의 눈>을 가진 사람한테 난 평범한 B급 헌터예요, 라고 말하는 건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혀 놓고 과자 안 먹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S급이란 걸 손쉽게 인정해 버릴 수도 없었다. 아직 권지한을 제외한 이들은 반신반의한 듯하니 우길 수 있는 데까지는 우겨 볼 작정이었다.
“아무튼 축하해.”
권지한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이 분명했다. 윤서가 무척 불길한 것을 본 것처럼 질색하는 얼굴을 했고, 그 얼굴에 권지한이 웃었다.
“넌 이제부터 퍼펙트 1팀이야. 정예 중의 정예로 뽑혔으니 자랑스럽게 여겨도 돼.”
“…….”
윤서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망할 최대 공로자 시스템이 떴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라 윤서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엿 같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 집에 가면 드라마 ‘러브 인 한강’ 5화를 재탕하고 자야겠다…. 아니…. 그 드라마로도 지금의 망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퍼펙트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 앞에 기자들이 몰려올 것이고, 이웃은 윤서가 새벽까지 드라마를 보다 잔다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기자에게 까발리며, 낙엽 길드원들은 ‘윤서 씨는 항상 무덤덤한 얼굴로 공깃밥을 다섯 그릇씩 시키고는 했죠’라는 인터뷰를 할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특히 박영범과 고희원이 비타민 주사를 맞은 반짝반짝한 얼굴로 화보 촬영을 하면서 윤서의 하루하루를 미주알고주알 떠벌릴 걸 생각하니 배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제가 퍼펙트에 영입됐다는 걸 외부에 알릴 겁니까?”
“S급 각성자가 추가됐다는 사실은 공사를 떠나서 전 세계적인 이슈잖아. 도저히 안 알릴 수가 없겠는데.”
“말장난하지 마시죠.”
윤서가 웃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S급 각성자가 추가됐다고는 절대 알리지 못하는 거 알아요. 그쪽 혼자만의 증거 없는 추측일 뿐이니까.”
“흐음.”
S급은 세상에 단 열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다. 한 명이 더 있다는 말을 증거 없이 함부로 내뱉었다간 아무리 발화자가 권지한이라도 세계가 뒤집힐 일이었다.
“제가 퍼펙트에 들어갔다는 걸 외부에 알리지 마세요. 굳이 팀원 한 명이 추가됐다는 걸 알리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겠지만 그게 나라는 건 영원히 숨겼으면 좋겠습니다.”
“아하, 계속 조용히 살고 싶다?”
권지한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빈정댔다.
“사람들은 나한테 오만하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세상에서 제일 오만한 건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거만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감히 나도 그런 희망은 품지 않는데.”
윤서는 권지한의 비아냥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알기에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그래도 그게 네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건 없지. 대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뭘 원합니까?”
윤서가 전혀 기대되지 않는 표정으로 권지한을 올려다봤다. 권지한은 시니컬하게 비아냥거릴 때는 언제고, 즐겨 하는 게임 업데이트가 막 끝난 아이처럼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나랑 싸우자. 싸워서 날 이기면 네 소원을 들어주지.”
“…….”
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의 평온했던 10년은 사라졌음을 직감하는 한숨이었다.
***
아직 어스름이 낮게 깔린 하늘, 풀잎에 맺힌 이슬도 채 사라지지도 않은 새벽녘.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깊은 숲속 호숫가 주위로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긴 회색 로브를 입었는데 로브에는 왕관을 쓴 황소 머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포칼립스 이후 탄생한 유럽 연합의 1위 길드인 에우로페 길드의 엠블럼이었다.
“이제 나오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쉿, 조용히 하세요.”
이곳의 유일한 남자가 입을 열자마자 에우로페의 부길드장이 바로 주의를 시켰다. 남자의 신분도 어디 가서 조용히 하란 말은 듣지 않을 위치였지만 지금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석영의 부길드장 도등수였다. 그는 유럽의 S급 던전 레이드에 파견되었다가 공략이 끝나자마자 에우로페 길드의 긴급 전갈을 받고 이곳에 왔다.
도등수는 긴장한 얼굴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호수, 그 중앙에서 얇은 로브만 걸친 채 수면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레이스 엘리시아.
에우로페 길드의 길드장인 그녀는 예언자 특성을 지닌 S급 각성자였다.
‘나도 예언자나 됐으면 좋았을 텐데.’
도등수도 세상에 몇 없는 특성을 지닌 S급 각성자이긴 했다. 다만 그는 전투계가 아니었고, 잔심부름 처리에 특화된 스킬을 가졌기 때문에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느라 바빴다.
‘탐정 같은 거 되지 말고 일찍이 종교에 귀의할 걸 그랬어. 그럼 각성할 때도 힐러나 예언자나 뭐라도 됐겠지.’
대격변 이후 인류는 가이아 시스템과 각성에 대해 연구했고, 몇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1. 가이아 시스템의 가호 신들은 다차원의 상위 존재이다.
2. 던전 포탈은 프록시마 센타우리계의 골디락스존에 위치한 행성으로 이어진다.
3. 최소한의 마력을 지닌 자만이 각성 가능하며, 스킬 입수를 위해서는 신의 가호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진실을 도출해 낸 인류는 바로 각성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던전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몬스터는 계속해서 범람하는 반면 각성자의 수는 적으므로 인위적인 각성이라도 이뤄 내려는 것이다.
일단 각성에 필요한 최소 마력은 100마나라는 것까지는 알아냈고, 이 마나의 절대적인 양을 어떻게 늘리는지는 아직 연구 중이었다. 각성 연령대는 최소 14세부터 최고 89세로 평균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범위가 넓었으며 성별과는 무관하다는 게 현재까지의 정론이었다.
인류가 확신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악인은 각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살인, 강간 등 악질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 중에서 단 한 명의 각성자도 탄생하지 않았다는 게 이를 입증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각성 시 당사자의 재능이나 직업 관련된 특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가수는 음악과 관련된 신으로부터 가호를 받고, 음악과 관련된 스킬을 얻는다. 유명 가수가 대격변 때 A급으로 각성해서 노래로 몬스터들을 잠재운 일화는 유명했다. 마찬가지로 의사나 간호사는 치유사 특성과 치유 스킬을 얻고, 공예가는 아이템 제작 스킬, 군인은 전투 스킬을 얻는 식이었다.
‘나름 모태 신앙이었는데 계속 종교 믿을걸. 어쩌다 추리 소설에 빠져 가지고. 에이, 씨.’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잘나가는 탐정이었던 도등수의 경우에는 ‘이동의 자유’라는 특성과 함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텔레포트 스킬을 얻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여성 주교였던 그레이스 엘리시아는 예언자 특성을 지닌 S급 각성자로 각성했다.
예언자, 말 그대로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
그들의 미래 예지는 가호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이뤄진다. 계시라는 것은 즉 가이아 시스템을 통해 신들로부터 받는 메시지를 말하는데, 이들 예언자는 특정 조건만 갖춰지면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도 스킬을 이용해 신에게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예언자만이 갖는 특별한 능력은 바로 신들과의 ‘소통’이었다. 헌터들이 아무리 많은 가호 신을 가져도, 수천 번 던전에 들락날락해도 신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메시지를 받을 뿐 보낼 수단은 없는 일방통행. 그러나 예언자는 스킬을 이용해 신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다. 신들이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세상에 알려진 예언자는 단 다섯에 불과했는데 그레이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B급이 최고 등급이었다. 전무후무한 S급 예언자로 각성한 그레이스는 각성과 동시에 에우로페의 길드장이 되었다.
그녀는 S급 던전 발생과 던전 범람, 폭발 등을 예지해 오다가 2년 전, 어마어마한 예언을 하나 했다. 앞으로 지구의 미래를 좌우할 엄청난 내용으로, 신들이 이 예언을 하기 위해 그레이스를 각성시켰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석영이 정예 팀 퍼펙트를 만든 것도, 서채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도, 지금 석영 부길드장 도등수가 이곳에 와 있는 것도 전부 그 예언 때문이었다.
촤르르, 그레이스 주위로 물결이 둥글게 퍼져 나갔다. 그레이스와 신과의 소통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구불거리는 금발에 물기가 살짝 맺혔다. 그레이스는 조금 피곤한 낯으로 수면 위를 걸어왔다. 길드원들이 얼른 깨끗하고 부드러운 수건을 건네고 하얀 가운을 걸쳐 줬다.
도등수가 에우로페의 길드장에게 영어로 물었다.
“그레이스 길드장, 어떤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저번과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그레이스가 부길드장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도등수는 조금 안도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레이스의 표정이 1년 전 예언을 할 때만큼 안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인류의 멸망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이었으므로… 만약 이번에도 같은 표정이었다면 도등수는 체통 없이 울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