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3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36)화(36/195)
#31
그들은 자작나무 숲을 나와 에우로페 길드 소유의 오래된 저택으로 향했다. 한국과는 달리 추운 겨울이지만 저택 내부는 봄처럼 따뜻했다. 도등수는 그레이스가 준비되길 기다리며 먼저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한쪽에서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있었고, 벽난로 앞에서는 휠체어에 앉은 누군가가 불을 쬐고 있었다. 그녀 역시 에우로페 길드 로브를 걸친 채였다. 그녀가 도등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영어였다.
“석영 부길드장이군. 안녕하신가.”
“라 비지나 헌터.”
도등수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라 비지나도 고개를 까딱하고는 휠체어 버튼을 누르고 다가왔다.
대던전에 들어갔다가 살아남은 리벤저 중 하나인 라 비지나.
S급 각성자이자 강한 공격 스킬을 가진 라 비지나는 대던전을 나오고 정신 착란 증세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잘랐다. 힐러의 치유 가능 시간이 훌쩍 지나 발견되었기 때문에 휠체어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S급이니만큼 뛰어난 자가 치유력으로 반년 만에 아킬레스건이 회복되었고, 라 비지나는 이번엔 양 발목을 절단해 버렸다.
라 비지나는 우울증, 공황 장애, 피해망상,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 각종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미 생존 리벤저 두 명이 정신 질환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에우로페 길드는 그녀도 전철을 밟을까 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덕분인지 여전히 정신은 불안정했지만 그날 이후로는 또 자해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의족도 거부한 채 휠체어에 앉아 표정 없는 얼굴로 세상을 관망할 뿐이었다.
“서채윤은 찾았소?”
단단한 말투로 보아하니 라 비지나는 오늘은 정신이 멀쩡한 상태인 듯했다. 시기를 잘못 잡으면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기 힘들기에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딱 보니 못 찾은 얼굴이군.”
“알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도등수는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집어 차를 또르르 따라서 라 비지나에게 건네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그 좁은 나라에서 아직도 찾지 못하다니 석영도 별거 없군.”
“대한민국을 떠났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얼굴을 아는 라 비지나 헌터께서 좀 도와주면 빨리 찾을 텐데 말이죠.”
“말했다시피 난 계약에 얽매여 있어서 그에 관한 건 얘기할 수 없소.”
라 비지나의 푸른 눈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쳐 왔다.
“계약이란 게 없었으면 얘기해 줬을 겁니까?”
“글쎄.”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열심인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도등수가 원망을 담아 묻자 라 비지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그레이스가 들어왔다. 여전히 창백한 낯빛의 에우로페 길드장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들어와 라 비지나와 도등수 사이에 앉았다.
도등수는 아까는 그레이스가 받은 예언이 작년처럼 최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니 더 최악인가 싶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우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등수는 몇 분 정도 기다렸다가 결국 먼저 입을 뗐다.
“그레이스 길드장, 말씀해 주십시오. 신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신께서는….”
그레이스를 가호하는 신들은 자애의 신, 빛의 신, 희망을 품은 신, 호수의 신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주 계시를 내려 주는 신은 자애의 신으로 2년 전과 방금 계시도 그 신이 내린 것이었다.
“신께서 하신 말씀은 작년과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도등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년 전, 그레이스는 달빛 아래에서 호수에 몸을 담근 채 유유히 떠다니던 중 계시를 받았다.
‘대던전이 다시 나타나리라.’
아포칼립스 시기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수많은 리벤저의 목숨을 앗아 갔던 대던전이 앞으로 2년 안에 다시 발생한다는 계시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앞에는 끔찍한 풍경이 떠올랐다.
검게 물든 하늘과 산처럼 쌓인 사람들의 시체, 완전히 멸망해 버린 지구의 모습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계시의 위험성을 고려해 세상에 바로 공표하지 않고 소수에게만 알렸다. 각국의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 그리고 몇몇 길드장들. 특히 세계 1위인 석영 길드의 유준철에게는 계시를 받고 가장 먼저 알렸다.
즉시 그레이스와 만나 그녀의 말이 진짜임을 확인한 유준철은 빠르게 움직였다. 대던전 대항을 위한 정예 팀을 만들고, 대던전 공략법을 얻기 위해 서채윤 추적 팀을 만들었다.
라 비지나는 던전에 들어갈 상태도 못 되고, 정신도 불안정하다. 간혹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대던전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는 있으나 그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대던전 공략에는 300년이 걸렸소….’
이런 얘기나 하고 있으니…. 사실상 대던전 공략법을 알고 있는 이는 서채윤뿐인 것이다.
또한 실종된 지 한참 지난 지금도 권지한을 제외하면 세계 최강일 거라고 불리는 그이니 지구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줄 강한 전력이 될 터였다.
그렇게 2년간 정예 팀도 꾸리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계시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다니 도등수는 허무해졌다.
그 노력이 모두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그가 허탈감과 절망에 사로잡히려는 그때였다.
“하지만 제가 본 풍경은 달랐습니다.”
“예?”
“저번에 제가 본 광경은 괴물이 집어삼킨 지구였으나 오늘 제가 본 것은 지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청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검게 물든 하늘,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과 사람들의 시체, 매캐한 냄새와 끈적하게 피부에 들러붙는 공기.
처음엔 저번에도 봤던 멸망한 지구라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피자 다른 점이 있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대던전 안이었다.
인간과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가 죽어 버린 듯한 대던전에서 그레이스는 칠흑 같은 검은색의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출구 포탈인가 했는데 그 색이 너무 어두워 출구가 아님을 알았다. 그레이스가 저게 뭘까, 추측하며 보고 있던 중 누군가 그 검은 무언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망설이지 않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단 한 번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검은 것은 그 사람을 집어삼킨 후 사라졌다.
계시도 그걸로 끝이 났다.
“그게 대체….”
설명을 들은 도등수는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그에게 그레이스가 이어서 말했다.
“저번 계시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 두 개가 오늘 계시에서는 모습을 드러냈어요. 검은 것과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저는 그 검은 게 포탈이 아닐까 합니다.”
“검은 색상의 포탈이란 말입니까….”
도등수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이 깃들었다.
대던전의 포탈색은 레드-블랙이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을 섞어 놓은 색. 대던전 말고는 10년간 나타난 적 없는 색이기에 대던전이 레드-블랙 던전이 아니라 계속 대던전으로만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칠흑 같은 검은색의 포탈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것도 대던전 안에.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미래 예지 스킬은 현 상황이 이대로 지속될 때 가장 확률 높은 모습을 보여 줘요. 저번까지는 검은 포탈이 나타나지 않은 채 지구가 멸망하는 쪽이 가장 확률이 높았고, 이제는 그 검은 문이 열린다는 쪽이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만약 대던전 속에 또 다른 던전이 있는 거라면 저번에는 대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여 그 포탈을 열지 못한 채 멸망했으나, 이번에는 대던전을 클리어하고 그다음 단계가 진행되었다는 뜻이겠군요…. 그 포탈에 진입한 헌터는 단 한 명뿐이고.”
“맞아요.”
그러나 S급 블랙 던전의 공략자가 한 명이라면 어차피 결론은 지구 멸망 아닌가….
도등수가 폭풍 앞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뭐라고 좀 위로가 되는 말을 덧붙여 달라는 애원이 섞인 시선이었으나 그레이스는 경험하게 입을 다물기만 했다. 도등수는 이번엔 라 비지나를 바라봤다.
“라 비지나 헌터, 10년 전에 대던전 클리어 시에도 검은 포탈이 나타났었습니까?”
라 비지나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아…. 얘기를 들으니 기억나는군….”
도등수만큼 극적인 표정 변화는 없으나 라 비지나 역시 놀란 듯했다.
“그래…. 맞아. 내가 정말 정신이 온전치 못하긴 한가 보군. 그 일이 이제야 기억나다니…. 대던전 보스를 처리하자 검은 포탈이 하나 나타났고…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네.”
“사라졌다고요?”
“그래. 나는 보지 못했으나 사라지기 전 메시지가 떴다고 했지…. 어떤… 조건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아….”
라 비지나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더 떠올리려 하지 마세요.”
라 비지나가 다시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돌아갈까 봐 그레이스가 얼른 말렸다. 라 비지나는 그레이스가 내미는 차를 마시며 아픈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던 도등수가 그녀에게 시험 삼아 물었다.
“라 비지나 헌터, 대던전 공략 기간이 얼마나 됐다고 하셨죠?”
“300년 걸렸지…. 긴 세월이었소….”
도등수가 미간을 좁혔다.
저런 말을 내뱉는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어떻게서든 서채윤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이 이야기는 유준철 길드장과 권지한 헌터에게 먼저 공유하겠습니다. 만약 대던전에서 살아남아 던전 속 던전에 들어갈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권지한일 테니까요.”
“네, 저도 동의합니다.”
도등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얽히고설켜 복잡한 실타래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인류는 아직 가이아 시스템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나타난 지 고작 12년밖에 되지 않은 미지의 시스템이다. 지금은 던전 속 던전에도 이렇게 경악스럽지만 나중엔 던전 속 던전 속 던전 속 던전도 나타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인류는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