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3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38)화(38/195)
#33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박수빈이 친근하게 대했던 건 서채윤 후보라서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에 그렇다고 쳐도, 지금 와서도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짐작 가지 않았다.
“그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박수빈 씨 말대로 어쨌든 저도… 아예 속인 게 없지는 않으니까.”
“등급 속인 거 인정한 거예요?”
“전 B급 맞습니다만 어쨌든 시스템 프로필을 속이긴 했으니까요. 그리고 무기도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공격 스킬도 <스파크> 말고는 없고.”
“그럼 <스파크>를 활용할 수 있는 무기를 보면 되지요. 전류를 담을 수 있는 걸로. 검과 활, 완드, 혹은 근접 격투계를 위한 장갑 등 많은데 어떤 게 좋아요? 일단 한번 쭈욱 둘러보세요.”
박수빈이 팔을 끌어당겼다. 윤서는 어쩔 수 없이 아이템들을 구경했다.
‘노래하는 사냥꾼의 활’
등급: S급
환각 스킬이 부여된 이 활은 시위를 당기면 화살이 저절로 생깁니다.
화살을 맞은 몬스터는 랜덤하게 환각 스킬에 걸립니다.
화살 수 89/120
‘어스름의 낫’
등급: S급
이 거대한 낫은 사신의 낫보다 더욱 확실하게 몬스터의 목숨을 앗아 갈 것입니다.
내구도 100/100
‘포효하는 창’
등급: S급
10m까지 늘어나는 이 창으로 몬스터를 공격하세요.
범위 내의 몬스터들이 겁에 질립니다.
내구도 100/100
‘별똥별 지팡이’
등급: S급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이 완드를 선택하세요.
마력 소모를 줄여 주면서 유성우만큼 화려한 빛을 발산합니다.
내구도 100/100
‘벼락을 내리는 검’
등급: S급
이 검을 지닌 당신은 스킬 하나를 더 얻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벼락으로 당신의 적들을 징벌하세요.
벼락 횟수 81/100
“이 검 어때요? <스파크>와 어울리지 않나요?”
박수빈이 유리창 안의 ‘벼락을 내리는 검’을 가리켰다. 길이가 손목에서 어깨까지 오는 단검이었고 칼자루에는 노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길이와 생김새 때문인지 윤서는 자신이 예전에 사용하던 무기가 떠올랐다. 푸른 보석이 박힌 단검.
주로 단검 형태로 사용하긴 했으나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존재하는 넋’은 단검, 활, 스태프 등 모든 무기 형태는 물론 새, 다람쥐, 페럿 같은 작은 동물의 모습도 할 수 있었다. 전투 시가 아니면 넋이 원하는 형태로 있도록 해 줬는데, 비행이 가능해서인지 새 모습을 자주 했다.
말이 많은 녀석이었다.
삐유, 삐유 지저귀며 날아다니던 작은 새가 기억에 선명했다.
각성하고부터 늘 끼고 다니던 그것을 잃어버린 건 대던전에서였다. 그 사실도 대던전을 나온 뒤에야 알았다. 인벤토리라도 있었다면 넣어 놨겠지만…. 윤서가 정신을 잃더라도 알아서 잘 따라오던 놈이라 더 잘 간수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중에 깨어난 뒤 그걸 잃어버렸단 걸 알았을 때의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대던전에서 많은 걸 잃었는데…. 팔다리가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윤서는 그것 외의 다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무기는 안 쓰겠습니다. 옷이나 보러 가죠.”
그는 아까보다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출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박수빈이 얼른 뒤를 따르며 윤서를 설득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앞으로 S급 던전에 가실 거란 말이에요. 저번 B급 던전과는 차원이 달라요. 올해만 해도 S급 던전 공략하다가 죽은 사망자가 우리나라에서만 수십 명이라고요. 아무리 윤서 씨가 S급이라지만 무기는 있어야 해요.”
“…S급 아닙니다.”
“아무리 S급 아닌 척하는 B급이라지만 무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방어구 진열실로 안내나 해 주세요.”
“윤서 씨.”
박수빈이 윤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지금은 단호했다.
“힐러인 저도 무기는 갖고 있어요. 윤서 씨는 전투 경험이 별로 없어서 모르겠지만 무기는 정말 중요해요. 제 말을 들으세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목숨 걸고 싸워 온 윤서야말로 무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서는 그 녀석이 아닌 무기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고, 대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도 있었다. 이 모든 걸 다 설명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단 무기는 던전 진입을 앞두고 그때 고를게요. 일단 방어구부터 보여 주세요.”
“꼭 무기 갖고 들어가야 해요. 약속입니다.”
“네.”
“그럼 손가락을 걸죠…. 손가락을 걸고, 손바닥 살결을 서로 맞댄 다음 손을 잡는 것까지….”
“박수빈 씨.”
“네.”
“닥치고 들어가죠.”
“네….”
***
둘은 방어구 룸으로 들어갔다. 헌터복, 유니폼, 방어구, 혹은 그냥 의복. 각성자들의 의류 아이템을 칭하는 표현은 여러 개가 혼용되었는데 특히 전투계 헌터들의 의복은 방어구라고 표현할 때가 많았다.
‘부유 망토’
등급: S급
부유 스킬이 없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망토는 당신을 중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겁니다.
내구도 90/100
‘아디오스 브레이슬릿’
등급: S급
근접 격투계인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스킬 사용 없이도 콘크리트 벽을 부숴 보세요.
내구도 100/100
‘딥다크 헤르메스’
등급: S급
이 구두를 신으면 당신은 치타와 같은 속력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내구도 100/100
몇 가지 방어구를 살폈지만 윤서는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비슷한 용도의 아이템이나 스킬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빈이 윤서의 표정을 살폈다.
“또 마음에 드는 게 없나 보네요.”
“네, 석영 수집력이 별로네요.”
박수빈은 재미난 농담을 들은 듯 웃었다. 실제로 윤서도 농담한 게 맞았다. 이 정도 리스트라면 석영은 단지 1위 길드인 게 아니라 세계를 지배해도 될 만한 길드였다.
“이런 곳에서 독점하고 있으니 낙엽이 비리비리했죠. 부길부 빈길빈이 따로 없군요.”
“하하.”
박수빈은 부길부 빈길빈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리 내서 웃었다.
“이제 낙엽이 석영이고 석영이 낙엽이니까 좋아해 주세요.”
“길드원들이 보면 좋아하긴 하겠네요.”
윤서가 시큰둥하게 말하고 나가려 하자 박수빈이 얼른 팔을 붙잡았다.
“마음에 드는 거 없어도 어차피 공짜인데 아무거나 하나 들고 가는 게 어때요?”
“공짜로 주는 게 아니라 대여해 주는 거잖아요. 그리고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 싫습니다.”
“인벤토리에 넣으면 되죠.”
“저 인벤토리 작습니다. 그거 칸 늘리려면 경험치 필요하다면서요. 전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경험치가 없어서 말이에요.”
경험치가 130억이 넘게 쌓여 있는 윤서가 시치미를 뚝 뗐다.
“앞으로 S급 던전 자주 다니다 보면 금방 쌓일 거예요. 무기는 포기했지만 방어구는 절대 포기 못 해요. 몸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착장해야 한다고요.”
“박수빈 씨, 제 주 스킬이 뭔지 잊었습니까?”
“…물론 윤서 씨의 실드가 굉장하다고는 들었지만.”
“이런 방어구를 걸치든 맨몸으로 싸우든 저한텐 큰 차이 없습니다. 어차피 전 실드 속에 있을 테니 그냥 편한 옷 입겠습니다.”
“윤서 씨가 S급 던전을 안 들어가 봐서 그래요. 제발 경험자의 말을 들으세요.”
박수빈은 그 뒤로도 어떻게든 설득하려 해 봤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윤서는 끄떡하지 않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배고픕니다.”
“어휴….”
결국 윤서는 아무 아이템도 가지지 않은 채 빈손으로 구내식당에 올라갔다.
석영의 구내식당은 메인 메뉴가 세 가지 있는 뷔페식 식당이었는데 시간이 일러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윤서는 오늘 메인 메뉴인 양고기스테이크, 가락국수, 채소비빔밥을 전부 갖고 왔다. 거의 5인분은 될 법한 양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윤서는 양고기스테이크부터 입에 넣었다. 두 볼을 부풀린 윤서를 보며 박수빈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스무 번 꼭꼭 씹어 먹은 윤서는 다음엔 국수를 공략했다. 면발을 후루룩 삼킬 법도 한데 윤서는 이번에도 우물우물 꼭꼭 씹었다.
박수빈은 늘 지켜봐 왔기 때문에 윤서의 식습관을 알았다. 어지간히 바쁘지 않는 한 스무 번씩 꼭꼭 씹어 먹는 건강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났을 무렵 박수빈이 말했다.
“윤서 씨는 참 잘 먹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요. 살 안 찌는 체질이죠?”
“박수빈 씨도 많이 먹는 건 마찬가진데요.”
“저는 윤서 씨보다 덩치가 크잖아요. 이 정도는 먹어 줘야죠.”
“저 작은 키 아닙니다.”
“윤서 씨 작다고 한 적 없어요. 제가 크다고 했지.”
늘 심드렁한 윤서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드라마, 하나는 키였다.
누군가 ‘러브 인 한강’ 재미없는데 왜 보냐는 말을 내뱉으면 윤서의 심드렁한 얼굴은 바로 딱딱하게 굳고, 예쁜 입술로는 ‘러브 인 한강’이 내포한 어떤 심오한 의미를 또박또박 쏟아 낸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 단위가 아니었다. 하루, 이틀 단위도 아니었다. 1년, 2년 단위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러하니 재미없다는 말을 내뱉은 이는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키의 경우는 드라마보다는 나았다. 누군가 윤서에게 ‘옷 사이즈 몇 입어요?’라고 물으면 윤서는 ‘저 작은 체격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키는 176cm로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S급치고는 체격도 가냘프고 작은 키가 맞았다. 보통 S급은 성인이 각성하더라도 성장판이 다시 열려 체격이 훤칠해지는데 이상하게도 윤서는 S급으로 각성하고도 딱 4cm만 더 크고 말았다.
마른 듯 보이지만 비율이 좋은 데다가 생각보다 탄탄한 몸을 지닌 남자인지라 윤서가 S급이라는 걸 모르는 낙엽 길드원들은 왜 그가 체격에 콤플렉스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예민하게 반응해 오는 게 귀여워서 일부러 체격을 언급하며 놀리고는 했다. 특히 박영범과 고희원이 심하게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