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화(4/195)
#03
“어이, 작은 구원자. 너 지금 자려는 거냐?”
막 늪지대에 들어섰을 때였다. 몬스터들과의 일전을 끝내고 친구와 함께 쉬고 있던 윤서에게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대뜸 시비를 걸었다. 윤서가 뭐라 하기 전 옆의 친구가 먼저 나섰다.
“아저씨, 김형태 헌터 맞죠? 채윤이 가만두세요. 피곤해요.”
“이 녀석 또 나서네. 네가 작은 구원자 매니저라도 되냐.”
“‘작은 구원자’라고도 부르지 말고요. 채윤이가 그 별명 질색하는 거 알잖아요.”
“본인은 입이 없나. 자꾸 대변인만 나서고 말이야. 그 가면은 또 언제 벗을 거야? 가면 안으로는 우리 존나게 노려보고 있는 거 아니냐, 엉?”
내용은 시비였어도 어투나 눈빛은 장난기만 가득했다. 진짜 싸움을 걸면 윤서도 응하려 했으나 그게 아니기에 그저 무시하면서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노골적인 무시에 아저씨는 열 받는다며 괴성을 질렀고, 친구가 얼른 윤서의 앞을 막았다.
“김 씨, 우리 에이스 가만 놔두고 와서 잡몸 처리나 거들어요.”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작은 구원자랑 이도민은 누워서 자잖아.”
“서채윤이랑 도민이가 밑에서도 늪에서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우리도 면목이 있으면 좀 자게 두자고요.”
“어이, 김형태. 빨리 안 튀어와?”
“우리 에이스 깨우면 죽어요, 아저씨.”
“아우, 씨. 다들 나한테만 난리야.”
아저씨는 투덜거리면서 멀어졌다. 친구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옆에 앉았다. 윤서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잠들었다.
***
아저씨가 죽은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다 타들어 간 하반신에 입으로는 연신 검은 피를 내뿜고 있는 김형태가 윤서의 손을 붙들었다.
‘채…윤아.’
당시 윤서는 가면이 깨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내놓고 다녔지만, 본명은 알려 주지 않은 상태였다. 친구가 죽은 이후였기 때문에 그의 본명을 부를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
윤서는 더는 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를 끌어안았다. 곰 같았던 몸은 이제 말라서 뼈가 도드라졌고, 그의 눈은 이미 흐릿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너… 인마, 남들은 잡몹 처리하는데… 쿨럭, 너는 처자기만 하고…. 가면도… 어? 그렇게 버릴 거면 나 주라니까… 큿. 내가 나가서 비싸게 팔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힘겹게 손을 들었다. 윤서는 얼른 그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어린애였는데…. 쿨럭.’
아저씨는 이제 눈도 거의 뜨지 못했다. 윤서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무언가를 삼키고 또 삼켰다. 눈물을 흘리면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할 것 같아서 울지도 않았다.
‘나는 곧 죽는 거지? 채윤아….’
‘…….’
‘나한테 소원이 있는데, 네가 대신 이뤄 줘라.’
‘…….’
‘채윤아, 나가면….’
아저씨는 유언을 남겼다.
국밥 100그릇, 후추 뿌려서 먹어 줘.
정말이지 눈물이 쏙 들어가는 어이없는 마지막 말이었다….
‘아저씨, 난 그 어처구니없는 마지막 말도 유언이라고 지켰어요. 지킨 정도가 아니라 질릴 정도로 먹었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내 머릿속에서 그만 좀 맴돌란 말입니다.’
윤서는 언젠가의 아저씨처럼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햇빛이 아직도 쨍쨍해서 눈썹 부근에 손날을 대고 작게 그늘을 만들었다.
“낙엽에서 오신 분입니까?”
대기하고 있던 대정증권 직원이 곧장 윤서에게 다가왔다. 윤서는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표정을 수습했다.
멀리서 마력 감지만 해 봐도 알 정도로 레인보우 길드의 실드 트랩은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져 있었다.
실드 트랩 유지 보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설치와 달리 보통 한 명이 한 시간 정도 손 보면 완료되는데, 두 명이 두 시간이나 매달렸는데도 30%밖에 복구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마력과 더불어 체력 또한 현저히 떨어져 거의 죽어 가던 박영범과 고희원은 윤서가 도착하자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왔구나, 우리 팀 에이스. 나 오늘 내로 퇴근 못 하는 줄 알았어.”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최대한 빨리 온 겁니다.”
윤서는 달려드는 둘을 가볍게 피하고 바로 트랩을 살폈다. 사실 살필 필요도 없었다. 50층에 달하는 고층 빌딩이기에 트랩 규모가 컸으나 윤서는 이미 주차장에 차를 댄 순간에 문제를 파악한 상태였다.
“부품 마력 주입 단계부터 잘못됐군요. 이대로면 한 달도 못 버팁니다.”
“역시 한눈에 알아보네. 분명 관리 부실이라는 명목으로 교체품 팔아먹을 생각이었겠지. 대한민국 5위 길드라는 것들이 씨벌, 썩을 놈들.”
“레인보우 그 새끼들 언제 한번 걸려서 뒤지게 돌 맞아 봐야 해요. 양아치 짓이 도를 넘었어. 다들 쉬쉬할 게 아니라 어디 제보해야 한다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대한민국에 용기 있는 각성자들 다 어디 갔어?”
“언론사에 제보해 봤자 소용없을 거고 헌터넷 같은 곳에 제보 영상 올라오면 좋을 텐데요.”
“우리가 용감한 고발자가 되어 보는 거 어때? 나 헌터넷 아이디 없으니까 희원 씨 아이디로 말이야.”
“팀장님, 헌터넷 가입 졸라 쉬워요. 제가 가입시켜 드릴게요. 팀장님은 용감한 고발자로 역사에 남을 거예요.”
“아, 깜빡했다. 이것 봐, 희원 씨. 나 핸드폰 렌즈가 깨져서 희원 씨 폰으로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아, 팀장님. 어쩌죠. 저는 아예 액정이 고장 나서.”
윤서는 스킬 <스파크>를 핸드폰 렌즈와 액정 부수는 데 쓰고 있는 두 사람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 판국에도 싸우는 데 쓸 마력은 남겨 놓은 모양이다. 윤서는 혀를 차면서 트랩으로 관심을 돌렸다.
사실 이 정도면 10초면 고칠 수 있지만….
그는 힐끗 시계를 체크했다. 4시 12분. 퇴근 시간은 여섯 시.
‘두 시간 동안 해야겠군.’
윤서는 마력을 끌어 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
실패했다. 목표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윤서는 다섯 시 삼십 분 됐을 때 트랩 수리를 완료해 버렸다. 퇴근 시간을 삼십 분 앞둔 직장인에게 시간 끌기는 정말이지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리 둘이서 두 시간을 매달려도 30%밖에 못 했는데. 으으으음.”
“예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빠르단 말이죠. 흐으으음.”
그 결과 윤서는 길드 회식 장소인 고깃집에 올 때까지 내내 박영범과 고희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아니, 정말 신기한 게 윤서 오빠가 맡은 건 A/S 신청도 거의 없잖아요. 그 석영 길드 설치 팀도 보수율이 20%라던데 오빠는 2%는 되나?”
“난 윤서 씨가 그 실력 가졌으면서 승진 마다하는 것도 신기해. 우리 길드 만들어지고 한 달 만에 들어왔으니 거의 창단 멤버나 마찬가지, 경력도 오래된 데다가 실력도 있고, 솔직히 윤서 씨가 팀장 마다한 덕분에 내가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난 지금도 윤서 씨가 원한다면 팀장 자리 내줄 수 있어.”
“직급 달면 다른 길드랑 협업할 때 미팅도 해야 하고, 클라이언트 접대도 해야 해서 싫다잖아요. 윤서 오빠는 그런 건 절대 못 견딜걸요. 앗, 오빠가 비사교적이라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오빠는 자세히 오래 볼수록 정드는 그런 타입이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윤서 오빠는 천재라는 거예요.”
“천재라기보다는 약간 힘을 숨긴 너드 같은 느낌?”
“너드라뇨, 팀장님. 이렇게 잘생긴 너드도 있어요?”
“힘을 숨긴 미인이라고 하면 별로 숨긴 느낌이 안 들잖아.”
“그냥 힘을 숨긴 헌터라고 해 두죠.”
그간의 경험으로 대꾸하면 더 신나서 음모론을 펼칠 거라는 걸 아는 윤서는 묵묵히 고기만 뒤집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윤서의 정체를 진지하게 의심하는 게 아니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다들 무슨 얘기 해?”
불쑥 끼어든 이는 전날 C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돌아온 던전 공략 팀 박수빈이었다. 낙엽 길드에 들어온 지는 고작 1년 되었으나 뛰어난 친화력으로 금방 모두와 친해진 남자였다.
“아, 라스빈 오빠.”
“수빈이라고 불러. 사석이잖아.”
헌터 네임 라스빈, 실명은 박수빈인 그가 빙긋 웃었다.
전투계 헌터들은 헌터 네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헌터들은 실명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전투에 나서지 않는 헌터들을 굳이 ‘사무직 각성자’라고 말하며 멸시하고는 했다.
박수빈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낙엽 길드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인성은 뛰어난 이들이 모인 길드다. 윤서는 길드장이 어디에서 이런 자들을 영입해 오는지 신기했다.
“오빠,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
고희원은 옆으로 이동해서 박수빈의 자리를 만들었다. 박수빈은 밝은 갈색 곱슬머리를 살랑거리며 옆에 앉아 윤서를 향해 빙긋 웃었다.
“윤서 씨, 안녕.”
“안녕하세요.”
“또 말 높이네요. 서운하게.”
박수빈이 장난스럽게 눈매를 찡그렸다.
길드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윤서에게 묘하게 치대던 박수빈은 얼마 전 기어코 ‘우리 말 놓을까?’라는 제안을 하고야 말았다. 윤서는 존댓말이 편하다고 칼같이 거절했으나 박수빈은 끈질겼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능청스러워도 깍듯이 말을 높이는 윤서에게 멋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어서 결국 둘은 서로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아, 다름 아니라 우리 윤서 오빠가 오늘도 한 시간 만에 트랩 보수를 끝내 버린 거 있죠.”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빨리 끝냈어. 너무 신기해서 수상할 정도라니까.”
고희원과 박영범은 또 신이 나서 윤서의 활약상을 떠벌렸다.
“난 그렇게 말해도 몰라요. 트랩 보수를 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던전 공략이랑 비교해서 설명해 주세요.”
“우리도 던전 공략을 해 본 적 없어서 비유를 못 하겠는데.”
“두 분은 던전에 들어간 적이 아예 없어요?”
“각성 초기엔 들어갔었지만 공략에 기여하지도 못했고…. 딱 두 번 들어갔다가 두 번 다 실패하고 그 뒤로는 사무직으로 전향했지.”
“저는 세 번 들어가고 그만뒀어요. 던전 안 간 지 5년 됐는데도 아직도 무서워요. 던전 공략 팀 정말 존경합니다.”
고희원이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던전 공략 팀 팀원들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던전 공략 팀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낙엽 길드의 공략 팀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전투에 나서지 않는 헌터들이었다. 던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을 가진 이들은 곧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던전 내부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게 진짜인가요?”
“그거 가장 오래된 착각이에요. 시간 제대로 흐른다고요.”
“엄청 좋은 아이템이 든 보물 상자도 나온다는 소문은요?”
“아, 그건 맞아요. 그거 나오면 복권된 거나 마찬가지죠. B급 던전에서 S급 아이템이 나오기도 하니까.”
“주워 본 적 없어요?”
“우리 중엔 아무도 없어요.”
“주웠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한 헌터의 한탄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윤서는 화제가 전환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술을 들이켰다.
“윤서 씨는요?”
아, 아직 박수빈이 옆에 있었지. 윤서는 그에게 되물었다.
“뭐가요?”
“윤서 씨도 던전에 가 봤을 거잖아요. 적성에 안 맞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