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2)화(42/195)
#37
보통 길드는 헌터들의 수련장을 지하에 두거나 아니면 아예 건물 밖 공터를 사들여 수련장으로 꾸미는데, 석영에서는 180층부터 200층까지를 수련장으로 마련해 놓았다. 지하에도 수련장이 있긴 하지만 S급 헌터는 195층에서 200층까지를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195층부터 200층은 퍼펙트 전용이고, 그중에서도 200층은 S급 전용이라 형도 오늘부터는 여기 사용하면 돼요. 헌터증 갖다 대면 S급 인식하고 문 열릴 거예요.”
“저 B급입니다.”
“아, 맞다. 그러게 귀찮게 왜 등급 속여 가지고. 그럼 형은 지하나 야외 이용해야겠네요. 야외도 충분히 넓으니 괜찮긴 할 거예요. 10월 등급 재산정 때 까먹지 말고 신청하고요.”
“수재희 헌터.”
윤서가 이름 석 자를 부르자 헌터증을 패드에 갖다 대던 재희가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윤서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S급 아니에요. 정말, 진짜, 절대로 아닙니다.”
번복하기 귀찮다고 그냥 넘겼다가는 정말 S급으로 확실시되어 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강조했다. 재희는 눈을 깜빡이더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이제 와서 왜 그래요. 형. 지한이 형은 S급 아닌 사람한텐 싸움 안 걸어요.”
“생각해 보세요. S급이라면 석영에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당장에 전 세계에 공표하고 열여덟 번째 S급이 생긴 걸 알렸겠죠. S급의 존재는 지구 인류 전체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권지한 혼자 날 S급이라고 착각하고 싸움 거는 겁니다.”
“지한이 형이 그런 착각을 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윤서는 차분하게 호명산 던전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첫 던전 진입 선물로 엄청 좋은 아이템을 받았다가 멋모르고 써 버렸고, 최대 공로자가 되어서 S급이라 의심받는 거라고.
“아, 하긴 첫 선물이 완전 랜덤이긴 하죠.”
재희는 떨떠름해 보였지만 윤서의 말에 일리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정말 거품 낀 거면 다음 던전 들어가기 전에 퍼펙트를 나가야겠는데요. S급 던전은 B급 헌터를 지켜 주면서 싸울 만한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저도 그러고 싶으니 수재희 씨가 잘 말해 주세요.”
“전 형이 약하다는 확신이 아직은 없어서….”
“아직도 제 말이 미심쩍습니까?”
“그럴 수밖에요. 보통 B급 헌터면 제 앞에선 제대로 말도 못 한단 말이에요. 제 패시브 스킬 때문에…. 그런데 형은 쫄기는커녕 ‘팀원1 씨’라며 되받아치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믿어요.”
재희가 툴툴거리면서 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패시브 스킬이 뭐길래 이러지? 아, 먼저 프로필부터 봤어야 했는데.’
윤서는 따라 들어가면서 뒤늦게야 <인류 도감>을 사용했다.
인류 도감 : 수재희, 20세, 남성
등급 : S급
(아이템 ‘달콤한 젤리’ 사용으로 소환수의 공격력이 향상됩니다)
(패시브 스킬 <해치> 사용으로 A급 이하에게 위압감을 발산합니다)
특성 : 소환사
(야성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짐승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킬 : <해치> A. <레메게톤> A
고유 스킬 : <구운몽> A, <장산범> S, <상자 속의 고양이> S
∗ 그 외 스테이터스는 던전에서만 열람 가능합니다.
‘패시브 스킬 <해치> 사용으로 A급 이하에게 위압감을 발산합니다…. 이거로군. <해치의 야성>과 비슷한 스킬인가.’
윤서는 조금 낭패스러웠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부터 수재희에게 위축된 듯 행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퍼펙트 팀원1 씨, 이제 저 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겁먹기는커녕 이딴 말이나 했으니 수재희가 왜 놀람과 신기함이 섞인 표정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됐다.
“여기 튼튼하긴 한데 공격 스킬 같은 경우는 위력 조절해야 해요. 형은 어차피 방어 계열이라 상관없겠지만요.”
수재희가 수련장 안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넓은 수련장은 사방이 S급 실드 트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확실히 튼튼한 곳이었다.
“외부 수련장은 범위 스킬 가진 사람 말고는 안 가니까 넓게 쓸 수 있을 거예요. 형 범위 스킬 많아요?”
“이 정도 넓이면 충분합니다. 수재희 헌터가 말한 대로 방어 계열이라 더 좁아도 상관없고요.”
“실드 스킬 뭐, 뭐 있어요?”
“<보호하는 베일>과 <세이프존>을 갖고 있습니다.”
윤서는 <거짓 기억>으로 꾸며 놓은 프로필에 적힌 스킬 이름을 말했다. 둘 다 일반 스킬이었다. 수재희는 ‘그리고용?’이라는 표정으로 초롱초롱 윤서를 쳐다봤다. 분명히 고유 스킬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눈빛이었다.
“…….”
윤서는 한숨을 옅게 내쉬고는 말했다.
“<수호의 궤>라는 스킬도 있습니다….”
“오오, 처음 듣는다. 몇 등급이요?”
“B급.”
“아,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네. 어차피 형은 등급 속이고 있는데.”
“…….”
“저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돼요?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할게요.”
“B등급입니다.”
“체, 치사해.”
물론 윤서의 <수호의 궤>는 S급이었다. 게다가 윤서는 모든 스킬 등급과 능력이 향상되는 아이템을 사용 중이어서 사실상 S+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스킬로 형 보호막 공격해 봐도 돼요?”
“네, 그러려고 온 거니까.”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실력을 어느 정도 내보이더라도 어쨌든 팀원의 전력 파악은 중요했다.
재희는 윤서를 벽 가까이에 세우고 넓은 공간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수재희’가 <해치>를 소환합니다.
쿠와아아아-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흰 털의 커다란 짐승이 소환되었다.
머리는 북슬북슬한 흰 털로 덮여 있고, 눈은 부리부리했으며, 코가 크고 입술은 두꺼웠다. 등은 딱 보기에도 칼날은 들어가지도 않을 듯한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반면 긴 꼬리는 비늘이 없고 털이 북슬북슬했다. 네 다리는 길고 굵었으며, 불꽃 모양의 갈기가 감싸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붉은색이어서 그런지 마치 다리가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아앙!
해치가 포효합니다!
당신에게는 영향이 없습니다.
수재희는 포효하는 해치의 앞에 서서 턱을 치켜들었다.
“어때요. 굉장하죠?”
“그러게요. 몬스터랑은 또 다른 느낌이군요.”
“차원이 다르죠. 해치는 신성한 동물이라고요. 그치, 해돌아.”
전혀 신성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해치에게 수재희가 다가가자 해치는 커다란 몸을 바짝 엎드린 채 혀를 빼꼼 내밀고 헥헥댔다. 덩치만 컸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후잉, 귀여웡. 우리 해돌이.”
크르. 크르.
“여긴 윤서 형이야.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인사해.”
크르르.
해치의 커다란 눈이 윤서를 올려다봤다.
윤서는 <해치의 야성>이라는 스킬을 입수하고 나서 해치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사람의 선악을 판단한다는 신화 속 동물. 뿔이 달렸다는 설도 있던데 눈앞의 해치는 뿔이 없었고, 둥글게 생긴 사자나 털이 수북한 개 같았다.
해치가 당신을 빤히 바라봅니다.
해치가 당신의 영혼을 감지합니다.
한껏 엎드렸어도 까만 눈은 윤서의 눈높이 위에 있었다. 윤서는 재희의 웃는 얼굴을 힐끔 봤다가 해치에게 손을 뻗었다. 흰 털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윤서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짱 부드럽죠.”
“그렇네요.”
“작게 만드는 스킬이나 아이템 있었으면 맨날 안고 데리고 다닐 텐데. 아쉬워요. 석영 아이템 제작부서에 소형화 아이템 만들어 달라고 계속 쪼고 있는데 성과는 없나 봐요.”
“소환하는 동안 마력 소모는 얼마나 됩니까?”
“제 소환수 중에선 가장 적어요. <구운몽>이라는 스킬이 있는데 그게 아홉 선녀를 소환하는 스킬이거든요. 겁나 강력한데 제 마력으로는 풀로 소환하면 15분이 최대라 유지하려면 마력 포션 빨아야 해요. <레메게톤>도 오래 소환하면 마력 딸리고. 그에 비해 해돌이는 포션 안 빨고도 한 시간은 소환해 둘 수 있어요.”
윤서는 재희의 마력 총량이 궁금했다. 스탯 창은 던전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인류 도감>을 사용해도 나오지 않았다. 던전에 들어가면 필히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와, 근데….”
재희는 해치의 털을 만지는 윤서의 손과 해치의 편안한 표정을 번갈아 보고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윤서가 자기 앞에서 겁에 질리지 않았을 때보다 더 신기한 걸 보는 얼굴이었다.
“형 되게 오래 만지고 있네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군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만져도 돼요. 계속 만져요. 그냥 전 해치가 이렇게까지 편안해하는 게 신기해서.”
“그래요?”
“네, 저 말고는 대부분 한 5초 쓰다듬으면 바로 으르렁거려요. 진짜 신기하네요. 형, 정말 착한 사람인가 봐요. 해치는 사람의 선악을 가릴 줄 알거든요.”
“…….”
윤서는 괜히 씁쓸해졌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니 정말 웃기는 말이었다.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10년이나 숨어 있던 사람이 어떻게 착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했을 때 세상에서 제일 오만한 건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권지한의 말은 옳았다. 윤서는 오만했고, 태만했다. 그렇기에 해치를 쓰다듬을 자격 따위는 없었다. 씁쓸해진 윤서가 손을 거두었다.
끄으응.
“형이 손 떼니까 애교도 부리네. 와…. 진짜 이런 사람 몇 없는데.”
“과장하지 마세요.”
“진짜예요. 지금까지 저 제외하고 가장 오래 만진 사람이 지한이 형 10분이었단 말이죠.”
“…누구?”
“지한이 형이요. 그 권지한 맞아요.”
“…….”
윤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한 사람의 손길만 허락한다는 해치가 권지한을 10분이나 쓰다듬게 해 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