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5)화(45/195)
#39
‘완벽하게 비길 자신도 없는데.’
윤서는 각성한 후로 능력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자신감이 가득했다. 각성하자마자 자신이 세상의 상위 1%에 드는 강한 각성자라는 걸 알았고, 실제로 다른 이들이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몬스터나 던전도 윤서에게는 심심풀이보다 못할 때도 많았다. 물론 대던전이야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지만…….
지금도 윤서는 자신의 특성이나 스킬, 능력치가 상위 0.01% 안에 들 거라고 확신했다. 가이아 스킬까지 보유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대던전에서 치유 내성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얻었다. 스스로는 결함이라 여기지 않더라도 엄연히 그것은 치명적인 단점이 맞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면 잘린 팔다리도 복구할 수 있는 힐러가 있는 세상에서 권지한이 대련 중 조심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완벽하게 비긴다는 것은 즉 상대를 완벽하게 압도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처음엔 권지한을 완벽하게 압도할 자신이 있던 윤서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권지한의 진화라는 특성과 L급 스킬 <가이아의 눈>을 생각하면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최대한 싸움을 뒤로 미루면서 다른 서채윤 후보를 필사적으로 밀어 주는 수밖에 없어.’
윤서는 어제 오후 늦게 박수빈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스파이
윤서 씨, 추가로 정예 2팀에 들어가는 헌터 두 명이 결정됐다네요.
스파이로 저장명을 바꿔 놓은 박수빈이 이번엔 역으로 윤서에게 정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윤서는 메시지를 받고 가만히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이름이 올라오지 않았다. 왜 감질나게 말을 하다 말지? 미간을 좁히고 화면을 보자 박수빈의 글이 떠올랐다.
스파이
^^
가증스러운 웃음의 의미를 윤서는 보자마자 이해했다. 읽씹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윤서는 손가락을 움직여서 메시지를 보냈다.
누군데요?
스파이
홍의윤 헌터와 화심 헌터라고 하네요.
스파이
휴가 끝나면 2팀 대기실도 북적북적해지겠어요.
그래도 우리 점심 같이 먹는 겁니다?
네 같이 먹죠.
스파이
후후 제 정보는 좀 유용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스파이
맡겨만 둬요 ㅎㅎ
태재식과는 감시 때문에 연락하지 못하니 앞으로 박수빈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싶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저에게 호의적이니까.
‘후보 중에선 홍의윤을 밀어야지. 화심은 안 돼….’
화심을 떠올리니 이제는 아예 뜨개질도 미뤄 두고 싶었다.
사실 윤서는 조용한 하루가 위태로워지는 걸 억울해할 권리가 없었다. 그는 정체와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게 맞으니까.
다만 화심은 정말로 C급이니 무척 억울할 터였다….
주변에서 ‘당신 실력 숨겼지!’라고 할 때마다 얼마나 복장이 터지고 답답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예 헌터로 발탁되어 앞으로 S급 던전에 다녀야 한다는데 C급인 화심으로서는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윤서는 화심이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서러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윤서는 S급 던전에서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화심을 지키고, 다치지 않으면서도 아슬아슬 위태로운 연출을 해 가며 싸워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서는 TV를 꺼 버리고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넓은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그는 두 손으로는 열심히 대바늘을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 던전의 최대 공로자 시스템을 몰랐던 건 전적으로 윤서의 실책이었다. 이제 던전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쿠키 굽기, 낚시, 등산, 러닝, 뜨개질… 이런 거 말고 가이아 시스템 공부하기, 스킬 수련하기 같은 유언이나 남길 것이지. 유언들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윤서는 머릿속으로 아직 처리하지 못한 유언들을 헤아렸다.
아직 18개나 남았다.
그래도 301개에서 10년간 많이 줄인 것이다.
윤서는 너무 죽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대던전에서의 참혹한 광경이 떠오르는 게 지긋지긋하고, 편안해야 할 잠이 악몽으로 끝나는 것도 이젠 싫었다. 수많은 희생을 뒤로하고 살아남아 삶을 연명해야 하는 게 구역질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얼른 이 삶을 끝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301명의 어처구니없는 유언들 때문에 그는 죽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가야 했다.
아니, 심지어 대던전을 막 나왔을 때는 유언이 299개였다. 그런데 생존 리벤저 두 명이 죽기 전 윤서에게 연락하더니 유언을 남기고 죽어 버리는 바람에 301개가 되었다.
그땐 정말 황당했다. 그 끔찍한 대던전에서 함께 간신히 살아 나온 사람이 윤서의 번호는 어떻게 찾았는지 연락해서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것 같다. 채윤아, 너한테 유언을 남기겠다. 대격변 전 나는 본래 직장인이었다. 그러니까.’
나 대신 직장인이 되어서 성실하게 일해라.
정말 뭣 같은 유언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생존 리벤저도 전화를 해 오더니 윤서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밥 먹을 때는 20번씩 꼭꼭 씹어야 한다.
정말 뭣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이 뭣 같은 유언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고, 윤서가 바로 다시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로 죽었다는 기사가 떴다.
‘자기들은 죽어서 편해지고 나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윤서는 원통했다. 저도 라 비지나한테 유언을 남기고 죽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이 받은 유언 리스트를 프린트해서 건네주면서 이 유언들을 들어주세요, 라고 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라 비지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다니 어쩌겠는가. 윤서가 죽은 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수밖에.
하아.
윤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뜨고 있던 니트를 내려다봤다. 이건 린다 데이지라는 헌터의 유언이었다.
‘채… 윤아. 내 삶은 여기서 끝인가 봐….’
‘조금만 힘내세요. 살아서 가족 봐야죠.’
‘나는 틀렸어…. 채윤아, 마지막 소원이 있어….’
‘닥쳐요, 제발.’
손뜨개질로 니트 100장만 떠 줘.
이걸로 98장째의 니트였다. 저번 니트를 박영범한테 줬더니 고희원이 질투해서 이번엔 고희원이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겉뜨기, 안뜨기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자꾸 풀었다가 다시 떴다가 했는데 이제는 눈 감고도 뜬다. 꽈배기는 기본이고, 레이스 무늬나 나뭇잎 무늬 같은 것도 넣었다.
이번 고희원의 노란 니트에는 어깨 부분에 무늬를 줘서 요크 스타일로 뜨고 있었다. 실이 남을 것 같은데 그걸로 작은 가방이나 만들까 생각 중이었다. 아, 새로운 팀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선물을 해 줄까. 퍼펙트가 총 30명이라고 했으니까 실은 대충 열대여섯 개 정도면….
아니, 아니지. 무슨 열대여섯 개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유언만 끝나면 다시는 대바늘을 잡지 않을 건데.
윤서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 그때였다.
지잉.
U패드가 진동하더니 불빛이 들어왔다.
퍼펙트 1팀/2팀
차주 금요일 20:00
S급 옐로우 던전 공략 예정
차주 월요일 13:00
브리핑 참석 필수
퍼펙트 매니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드디어 던전 일정이 잡힌 것이다.
S급 옐로우라면 사망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는 위험한 곳이고, 퍼펙트가 지난주에 S급 그린을 클리어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정도 꽤 빡셌다.
하나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음 던전에 들어가기 전. 헌터들은 무기와 방어구를 점검하고, 아이템 경매장도 방문하며, 스킬 숙련을 위해 수련도 하면서 바쁘게 보낸다. 그 와중에 가족이나 연인과의 시간도 챙기고 취미 생활도 즐겨야 한다. 그래서 보통 중급 헌터들은 레이드 간격을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잡았다. 돈이 부족한 하급 헌터의 경우에는 몇 번이고 연달아 던전에 들어가고는 하지만….
오히려 고위 헌터들도 짧은 텀으로 던전에 진입할 때가 많았다. 시한이 촉박한 S급 던전이 발견되면 A급, S급 헌터들은 직전 레이드 시기와 상관없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정말 싫으면 철면피 깔고 거절하면 된다. 비난은 좀 받겠지만, 그렇다고 귀중한 고위 헌터에게 벌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급하게 들어온 레이드 일정을 거절하는 헌터는 없었다.
정의와 사명감 때문이었다. 내 불참으로 레이드에 실패하면 어떤 피해가 있을지, 얼마나 많은 이가 다치고 죽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받을지를 생각해서.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또다시 전투에 임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지. 정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건 그저 불공평한 책무일 뿐이야.’
만약 내 눈앞에 그깟 사명감 때문에 위험한 곳에 자처해서 들어가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장 멱살 잡고 정신 차리라 할 것이다.
‘권지한’이 스킬 <명왕의 밤>을 사용합니다.
당신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
갑작스러운 알림에 놀란 윤서가 문 쪽을 바라봤다.
양아치라고만 생각했지만, 사실은 해치를 10분이나 쓰다듬을 정도로 착하다는 권지한이 제가 왔음을 호전적인 알림 로그로 알리고 있었다.
***
윤서가 긴장한 채 잠시 기다리자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까만 머리에 귀에는 피어스를 한 잘생긴 남자가 윤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해?”
무슨 친구 대하듯 하는 인사였다. 윤서는 속으론 어이없었지만, 일부러 무심하게 반응했다.
“TV 보고 있습니다. 그쪽은 여기 왜 왔어요?”
“여기 퍼펙트 1팀 대기실이고 나도 퍼펙트 1팀이야.”
“휴가받았을 텐데요.”
“휴가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보다 몸을 좀 움직이고 싶은데.”
“그럼 그대로 문 닫고 수련장에나 가시죠.”
권지한은 윤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성큼성큼 걸어와 오른쪽 옆에 앉았다.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윤서의 우반신 근육이 잔뜩 긴장하고 털이 쭈뼛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