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6)화(46/195)
#40
“재미없는 던전에서 죽치고 왔더니 좀이 쑤셔. 같이 나가자.”
“저 바쁩니다.”
“뜨개질하느라?”
권지한이 윤서의 무릎 위를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윤서의 손은 이 와중에도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뜨개질도 해야 하고 TV도 봐야 합니다.”
“TV는 안 보는 것 같은데.”
“이제 막 켜려고 했어요.”
윤서가 얼른 TV를 켰다. 드라마 찾다가 꺼서 그런지 바로 리스트가 나왔다. 권지한이 나직하게 웃었다.
“아아. 너 드라마 좋아한다고 했지. 취미가 수백 개 되는데 그중에 드라마 보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윤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한테서 들었을지는 안 물어봐도 뻔했다. 박수빈의 저장명은 평생 ‘스파이’로 확정이다.
“제가 취미가 좀 다양한 편입니다. 그러는 권지한 헌터는 취미가 어떻게 됩니까?”
“얼굴에 안 궁금하다고 써 있는데 물어보는 이유는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야?”
“…….”
“난 취미 따로 없어. 그보다 재탕만 수십 번 했다던 그 드라마는 제목이 뭐야? 취미 없는 나도 이제 슬슬 취미를 만들어 볼까 하는데 영업 좀 해 봐.”
윤서가 살펴보자 권지한의 회색 눈에 정말로 흥미와 관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윤서는 속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러브 인 한강’입니다.”
“흠, 무슨 내용인데?”
권지한이 정말로 관심을 보이자 윤서가 대바늘을 내려놨다.
“전국 각지의 김치찌개 식당에서 펼쳐지는 암투와 모략, 사랑과 우정을 다룬 대하 김치찌개 드라마입니다.”
“대하 김치찌개 드라마….”
“참치김치찌개파, 꽁치김치찌개파, 돼지고기김치찌개파, 어묵김치찌개파 이렇게 네 파벌 중 대회를 통해 최고의 김치찌개 식당이 어디인지 가리는 내용인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명작입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이 엄청나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해 주는데, 자세한 건 스포일러이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관심 있으면 지금 1화 시작해 볼래요? 다시 보기 1,500원인데 제가 유료 멤버십 중이라서 무제한으로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어디가 이기는데?”
“결말 스포는 하지 않는다니까요. 한번 봐 보세요.”
“안 볼래. 제목부터 유치하잖아.”
뭐야?
윤서가 권지한을 노려봤다. 권지한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보는 듯했는데, 이제 보니 그 흥미는 드라마가 아니라 윤서 저를 향한 것이었다.
“‘러브 인 한강’은 물론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하는 사람은 있지만, 누구처럼 싸움이나 걸고 다니는 것보다는 덜 유치합니다.”
“싸움은 네가 걸고 있는 거 같은데.”
“왜 자꾸 너라고 하죠? 그쪽이랑 나랑 몇 살 차이인지 압니까?”
“형 소리 듣고 싶어? 싸워서 이기면 형이라고 불러 줄게. 원하면 존대도 써 줄 수 있어.”
“그냥 제가 그쪽을 형님이라고 부를 테니 안 싸우면 안 될까요.”
“안 되겠는데. 대화하는 지금도 싸우고 싶어서 미칠 것 같거든.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 싸우고 싶어. 지금 당장.”
권지한의 목소리는 뭔가 벅차고 웅장한 풍경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했다. 회색 눈에 금빛이 어른거렸다.
‘권지한’이 스킬 <가이아의 눈>을 사용합니다.
스킬 <거짓 기억>의 효력이 흔들립니다.
‘권지한’이 당신의 시스템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윤서는 미간을 확 구겼다.
“뭐 하는 겁니까.”
“뭐 하긴. 혹시나 해서 간파 스킬 써 본 거지. 네모 박스는 여전하네.”
권지한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오늘이 정 싫으면 언제 싸울까? 내가 약속이 있어서 다음 주는 안 되고. S급 노랑 던전 다녀온 다음에 싸울래?”
무척 신이 난 말투에 휘어진 눈매와 즐거움 가득 담긴 눈동자는 꼭 새로 얻은 장난감을 얼른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어린애 같았다.
윤서는 반 뼘 정도 엉덩이를 옮겨 싸움광과 멀어졌다.
그동안 싸움을 피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이쪽은 계속 거부하고, 권지한은 계속 싸움을 거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소문이 퍼지면 그게 더 피곤하고 곤란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알겠어요. 대련합시다.”
“그거야 당연하고. 언제 하냐니까.”
“싸울 때는 그쪽과 저, 둘만 싸우는 걸로 하죠.”
“당연하지. 셋이서 하는 취미는 없어.”
“제대로 들으세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우리 둘만 만나서 싸우자는 겁니다.”
“좋아. 나도 관객이 많은 건 싫거든.”
“싸움이 끝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싸움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누가 이기고 졌는지 결과만 얘기해요. 어떤 스킬을 사용했는지도 말하면 안 됩니다.”
권지한이 여전히 웃음기 있는 눈으로 윤서를 지그시 쳐다봤다.
“조건이 많네. 내가 그러겠다 하고서 안 지키면 어쩌려고?”
“계약서를 쓸 거예요.”
“…계약서?”
권지한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윤서는 스킬 창을 확인하느라 권지한의 회색 눈에 흥미가 감도는 걸 보지 못했다.
“가이아 시스템으로 맺는 계약서. 어길 경우 고통이 가해지는 강제 계약서입니다.”
“아하….”
권지한이 길게 탄식하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재미있네. 그런 아이템이 있다는 건 몰랐어.”
정말 몰랐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갑다는 어투였고, 웃음소리는 시원시원했다. 눈동자는 조금 떨렸는데 겁을 먹었다거나 당황스러움으로 인한 떨림이 아니라 극도의 흥분 탓에 떨리는 것이었다.
윤서는 좀 껄끄러워졌지만 이어서 설명했다.
“아이템이 아니라 <확신의 저울>이라는 스킬입니다. 물론 내게 이 스킬이 있다는 걸 타인에게 발설하면 안 된다는 것도 계약서에 쓸 거고요. 상호 합의하에 언제든 해지할 수 있습니다.”
<확신의 저울>은 상대 발언의 진위만 가려 주는 게 아니라 상대 발언을 강제로라도 지키게끔 하는 힘도 가진 스킬이었다. 윤서는 <확신의 저울>을 사용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확신의 저울> 전용 아이템 – 사용 가능한 계약서 2/10장
그중에 한 장을 권지한에게 넘겼다.
권지한은 [‘윤서’로부터 ‘<확신의 저울> 전용 계약서’를 받았습니다.]라는 로그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계약서를 손에 쥐었다. 이미 모든 조건이 적혀 있고 서명만 하면 되는 계약서였다.
“계약서는 똑같은 내용으로 2부 작성해서 나눠 가질 겁니다. 계약 내용은 차후 있을 대련에서 ‘윤서’가 이길 시 ‘윤서’의 신분을 비밀로 하는 것. 결투 시 서로의 스킬과 아이템을 알게 돼도 다른 이에게는 함구하겠다는 특약을 넣었고요. 만약 계약을 어기려고 하면 신체에 고통이 가해집니다. 두통이 심해진다고 하더군요. 질문 있어요?”
“계약서에 대해 설명하는 게 스킬 사용 조건인가 보네.”
“…맞습니다. 이제 서명하시죠.”
윤서가 대기실 테이블 위의 연필꽂이에 있던 펜을 권지한에게 휙 던졌다. 권지한은 가뿐히 받았다. 그러나 바로 서명하지는 않고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기만 했다.
“‘신분’이 정확히 뭐야?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해.”
“모호할 거 없습니다. 그냥 제 얘기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일부러 모호하게 넣은 윤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권지한은 얼른 서명하지 않고 계속 시큰둥한 표정만 지었다. 윤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겁니까. 약속했잖아요. 나랑 싸우기 싫어요?”
“존나 싸우고 싶지. 그런데 계약이 좀 불공평한 것 같아서. 너도 조건을 잔뜩 붙였으니까 나도 붙일래.”
“…….”
윤서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넘어가길 바랐지만 권지한의 말이 맞았다. 모든 조건은 윤서가 원하는 대로 적혀 있었고, 권지한이 이겼을 때 얻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뭘 원하죠?”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너랑 싸우는 것 하나뿐이라서 더 없어. 단, 이 계약서상의 조건이 유효한 건 네가 이겼을 때만으로 해. 네가 이기면 네가 어떤 스킬을 썼는지 함구하도록 하지. 하지만 내가 이기면 이 함구 조건은 사라지는 거야. 이게 싫으면 계약 안 해.”
권지한은 계약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하고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윤서는 한 번 헛기침하고 미끼를 던져 봤다.
“계약 안 하면… 그쪽이랑 안 싸워 줄 건데.”
“그럼 퍼펙트에 윤서라는 이름의 S급 추정 헌터가 들어왔다는 보도 자료를 온 세계에 뿌려야지.”
“…….”
협상할 때 이쪽이 열세라는 걸 드러내지 않는 게 좋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처음부터 윤서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사실 냅다 S급 추정 헌터 등장이라고 알리지 않고, ‘싸워서 지면 밝히지 않겠다’라는 제안이라도 해 준 게 감사했다.
“알았어요. 그 조건도 추가하죠.”
결국 윤서는 권지한이 말한 걸 계약서에 추가했다. 권지한은 시간을 더 끌지 않고 변경된 계약서에 시원하게 서명했다. 윤서도 서명을 마치자 둘에게 동시에 계약이 성립됐다는 알림이 떴다. 계약서는 저절로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확신의 저울>은 네 고유 스킬이야? S급?”
“C급 스킬입니다.”
윤서가 발뺌하자 권지한은 내내 웃고 있던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이미 뻔히 알려진 상황에서 계속 멍청이처럼 답답하게 굴지 마. C급이 내 <명왕의 밤>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쪽이 이 층 올라오자마자 펼친 그 스킬 말입니까?”
“너한테 알림이 떴나 보네.”
권지한이 다시 활짝 웃었다. 웃게 하기 참 쉬운 놈이었다.
“<명왕의 밤>은 범위 내에서 누군가 스킬을 사용하면 알림이 오는 S급 스킬인데 네가 <확신의 저울>을 사용할 땐 알림이 안 왔어. L급일 리는 없으니 S급에 효력을 높여 주는 아이템을 장착한 모양이지. 그리고 나는 이번에 <명왕의 밤>을 사용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알림을 숨기도록 했어. 그런데 너는 알림이 갔다는 스스로 말해 주네? 이건 S급 스킬인데도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으면 조금 더 말조심하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