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7)화(47/195)
#41
권지한이 한 수 가르쳐 준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지라 윤서는 반성했다. 박영범이나 고희원이라면 추측하지 못했을 텐데…. 10년간 그 둘만 상대하다 보니 많이 허술해졌다. 가끔씩 이렇게 정체를 들킬 위기에 처해야 평소에도 경각심을 갖고 행동할 텐데 10년간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자꾸 무르고 허술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자, 이제 날짜 정하자. 언제 할래? 나는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만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맛있으니까…. 이번 S급 던전 클리어하고 나오면 그때 할까?”
“던전 클리어하고 그다음 주로 하죠.”
“좋아.”
권지한은 즐거운 얼굴로 U패드를 꺼내 스케줄표를 열었다. 윤서에게도 보인 반투명한 스케줄표에는 의외로 일정이 꽤 많이 적혀 있었다.
“29일 일요일에 하자.”
6일에 S급 옐로우 던전에 들어가니 공략에 걸릴 시간을 생각해 보면 적당한 텀이었다.
“좋습니다.”
권지한이 씩 웃으며 그날 일정을 추가했다. 윤서도 질세라 텅텅 빈 자신의 U패드에 싸우는 날이라고 메모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응.”
“권지한 헌터는 왜 그렇게 싸우려는 겁니까?”
“강해지기 위해서.”
대답을 망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더 즉답이었다.
“경험 축적을 위해서라는 얘기예요?”
“그렇지.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너 내 시스템 프로필 봤지?”
“…….”
윤서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봤다고 하기도, 안 봤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권지한은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내 스킬은 특이하게 레벨 업을 해. 레벨 업을 위해서는 경험치를 쌓아야 하고. 나보다 약한 것들과 싸우면 경험치가 쌓이지 않지만 나와 같은 등급과 싸우면 경험치가 소량 늘더군. S급 던전 보스와의 전투, S급 각성자와의 대련 같은 것들 말이야.”
“…저한테 이렇게 순순히 말해도 되는 겁니까?”
“너 친구 없어서 어디 얘기할 곳도 없잖아.”
“인터넷도 있는데요.”
“인터넷에 글 올려 봐. 누가 믿나. 다 소설인 줄 알걸.”
하긴 그렇다. 윤서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 끝없이 성장하는 스킬이라니….
“그럼 강해지려는 이유는 뭔데요?”
윤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권지한은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강해지려는 이유라….”
검은 동공을 감싼 회색 홍채에 언뜻 금빛이 이는 것 같았다. 스킬 알림은 없으니 잠깐 마력만 움직인 모양이었다.
윤서는 권지한이 뭐라고 말해 올지를 상상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서. 얼마나 성장할지 알고 싶어서. S급 각성자의 본능 때문에?
그런데 생각보다 권지한의 고민이 길어졌다.
‘이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하긴 이제 겨우 스물둘이니 강해지려는 이유를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을지도 모른다. 윤서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배려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고민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봐서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했어.”
당연한 거라니?
윤서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자 권지한이 느슨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요?”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지킬 책임이 있어. 강하게 태어났으면 약자를 보호하고 지키며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야 해. 너무 당연하잖아.”
윤서는 눈만 끔뻑였다. 환청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 정의로운 말이었기에 믿지 못했다.
“스킬 사용해 봐도 됩니까?”
“해.”
권지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스킬 <확신의 저울>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발언을 판단합니다.
확신 95 : 중도 5 : 의문 0입니다.
윤서가 입을 벌렸다. 세상에. 만약 내 눈앞에 그깟 사명감 때문에 위험한 곳에 자처해서 들어가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장 멱살 잡고 정신 차리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멍청이가 바로 권지한이었다.
그러나 권지한은 그 벙찐 얼굴을 보면서도 흔들림 없었다. 확신에 찬 눈이었다.
“왜 놀라지? 당연한 건데.”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신념을 갖게 된 거예요?”
“끔찍하다니.”
권지한이 피식 웃었다.
“말해 보세요. 누가 당신을 세뇌하기라도 했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노린 못된 사람에게 납치당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 좋아하는 빵 한번 제대로 사 먹지도 못하면서 학대받으며 일해 오기라도 했어요?”
“무슨 헛소리야.”
권지한은 다소 어처구니없어하더니 윤서의 걱정 가득한 진심 어린 얼굴을 보고 대답했다.
“대격변 전 나는 가난한 꼬마였어. 학교에서 같은 반 애들은 날 급식 카드 쓰는 애라고 따돌렸고, 엄마는 일을 나가면 며칠은 돌아오지 않아서 지저분한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지. 그런데 희한한 건 난 한 끼도 굶은 적이 없다는 거야. 늘 챙겨 주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담임 선생님은 아침밥으로 먹으라고 주먹밥을 줬고, 동네 편의점 알바 누나는 급식 카드로 살 수 없는 도시락을 결제해 줬어. 옆집 아주머니랑 형은 틈만 나면 문을 두드려서 밥과 반찬을 주고 갔지.”
“…….”
“물론 착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어. 동네 양아치들은 툭하면 나한테 시비 걸고 때리고 다녔는데, 맞고 있는 나를 못 본 척 지나치는 어른들도 많았어.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약자겠지만, 내게는 강자들이었잖아. 어떤 강자는 약자를 모른 체했고, 어떤 강자는 약자를 보호했지. 나는 후자가 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이 지구상 모든 생명이 나보다 약한 것들이 되어 버렸네? 한숨은 좀 나오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켜야지, 어떡해. 이게 정의인데.”
정의.
윤서가 오래전 버렸던 단어가 어린 권지한의 입에서 나왔다.
권지한은 정의를 유치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난처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그러나 윤서는 흘러나오는 냉소를 참기가 힘들었다.
리벤저들은 모두 부질없는 정의를 외치다가 죽었다. 제 발로 대던전에 들어와 사지가 찢기고, 산 채로 불타고, 살점 하나 남지 않을 만큼 짓이겨졌다. 고통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나의 희생이 세계를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죽었다.
윤서도 처음에는 그들과 같았다.
거대한 괴물의 발톱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 정의로운 행위라는 신념이 있었다. 비록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세상을 위해 몸 바쳤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싸우고, 다치고, 살아남고, 다시 싸우고…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있는 건 시체의 산이었다.
정의를 부르짖다가 허무하게 죽은 사람들.
국밥을 찾던 아저씨도, 낚시와 등산을 좋아하던 형들도, 피아노가 취미라던 누나와 러닝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누나도.
‘채윤아.’
언제나 상냥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던 친구도.
윤서의 정의는 이도민이 죽었을 때 무너졌다.
영웅 대우를 받으면 뭐 하냔 말이야. 이미 다 죽었는데. 전부 죽고 없는데. 무엇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거야? 목숨은 강자나 약자나 단 한 개뿐이고, 모든 이의 삶은 똑같이 하나뿐인데. 왜, 정의로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어야 했던 거야. 대체 그들이 말하는 사명감이라는 건 뭐냔 말이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게 옳은 일이라면, 강하고 정의로운 자가 희생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은 일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이런 게 정의라면 난 더는 정의롭게 살지 않겠어.’
그곳에서 서채윤은 그렇게 결심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제가 어떤 표정인데요?”
“날 엄청 비웃고 있는 것 같아. 내 대답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권지한의 잿빛 눈이 윤서를 직시했다. 윤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 맘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인가요. 그쪽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단지 저는 아주 유치하고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해서 웃음이 나왔을 뿐입니다. 더불어 오만하기도 하고요. 세상 사람을 이끈다니….”
윤서가 입꼬리에 미소를 내걸었다. 그 미소는 아주 염세적이었다. 퍽 기분이 나쁠 법한 비웃음에 권지한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윤서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어차피 S급이란 건 오만하게 굴게 되어 있어. 약자의 고통을 방관하는 오만함보다는 약자를 이끌겠다는 오만함이 낫지 않아?”
“글쎄요. 그게 그거 같군요.”
“그래서, 너는 전자야?”
“네.”
핍박받는 약자를 방관하는 오만한 자냐는 질문에 윤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이나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담담한 갈색 눈을 보며 권지한이 한 번 더 물었다.
“왜?”
단순한 질문이었으나 단순하지 않았다. 윤서는 시선을 느끼며 TV 속 드라마 리스트들을 쳐다봤다.
“정의라는 건 강자에게 불공평한 책무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단어일 뿐이니까요.”
“…….”
“세상은 본래 공평하지 않습니다. 불공평은 우주에 별이 태어나고 폭발하고 다시 별이 태어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오직 인류만이 이것을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별이 태어나고 폭발하는 현상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죠. 우주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강하게 태어난 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게 부당한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아. 그래서 네가 강한 능력을 숨기는 거로군.”
“맞습니다. 더 이상 희생하긴 싫거든요.”
윤서는 이때 말실수했다. ‘더 이상 희생하긴 싫다’는 말은 과거에는 희생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윤서는 스스로의 실책을 눈치채지 못했고, 권지한은 바로 캐치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윤서가 자각하게끔 만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