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8)화(48/195)
#42
대신 그는 농담만 던지며 웃었다.
“나쁜 어른이네. 아직 어린 애한테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가 가치관이 잘못 잡히면 어떡하려고. 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악당으로 만들려는 거야?”
“그렇다고 제가 악당은 아닙니다. 약자를 괴롭히진 않아요.”
윤서가 조금 억울해져서 반박했다. 그저 전투에 나서지만 않을 뿐, 어쨌든 눈앞의 약자는 확실하게 보호해 주고 있다. 나름대로…. 임시 팀과 던전에 들어갔을 때도 몇 번이나 실드를 강화하지 않았던가. 실드 트랩 설치도 항상 등급을 향상해서 설치했고. 정의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악당도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눈앞의 약자를 진심으로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유언이라도 남기고 죽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얘기를 들을수록 너랑 더 싸우고 싶어져.”
“왜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
“네가 엄청나게 강할 것 같다는 느낌이 찌릿찌릿하게 오거든. 어중간하게 강한 사람이 너처럼 말하면 우스운데, 지금 내 기분이 우습지 않고 긴장감에 핏줄이 확 조여 오면서 흥분되는 걸 보면 너는 진짜 강한 모양이야. 이왕이면 나보다도 강하면 좋겠어. 난 경험치를 쌓고 더 강해져서 대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켜야 하니까.”
“…….”
그 말에 윤서는 뭔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굳이 대재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수상하게 여겨진 탓이었다. 위험도 아니고 그냥 재난이나 재앙도 아니고 대재앙? 이건 뭔가 있다는 직감에 윤서가 입을 열었다.
“그 대재앙이란 건….”
그때 엘리베이터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서와 권지한은 대화를 멈추고 거의 동시에 문 쪽을 쳐다봤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누군가 복도를 후다닥, 빠르게 내질렀다.
“윤서 형, 우리 템 시장…. 어, 지한이 형!”
잔뜩 신난 얼굴로 노크도 없이 대기실 문을 벌컥 연 사람은 수재희였다. 수재희는 권지한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형,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그새 더 잘생겨졌네요.”
“응.”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재희와 달리 권지한은 시니컬했다.
“어제 임시 팀 던전 클리어했죠? 후보자들은 어때요? 서채윤 님일 것 같다, 딱 감 오는 사람 있어요?”
“없어.”
“너무 단정 짓지 말고 잘 생각해 봐요, 형.”
“지금 임시 팀 중엔 없어. 확실해.”
“너무한다, 진짜. 사람이 희망을 좀 갖고 삽시다.”
재희는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그러다 권지한의 스케줄표 29일 일요일에 ‘D-DAY’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29일? 무슨 날인데요?”
“윤서랑 하는 날.”
“…네?”
“윤서랑 그날 하기로 했다고.”
한창 재미있는 대화를 하다가 맥이 끊긴 권지한은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스케줄표를 닫았다.
재희의 눈이 요동쳤다. 재희는 삐걱거리며 윤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긴 뭘 해?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라는 시선으로 보자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권지한 헌터랑 그날 하기로 지금 막 정한 참입니다.”
“…….”
재희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는 허공을 쳐다봤다가 다시 윤서를 쳐다봤다. 초점이 안 맞은 시선으로 그가 물었다.
“그…. 형들은 얼마 전에 처음 만났는데…. 너무… 이르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권지한 헌터가 말이 안 통하네요. 재희 헌터가 나 대신 설득해 줄래요?”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마.”
재희가 뭐라 대답하기 전 권지한이 툭 내뱉고는 바로 이어서 말했다.
“지금 찌릿찌릿하고 흥분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잖아. 사실 지금 여기서라도 눕히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어. 이 녀석이 지금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당장 덤볐을 텐데.”
“저것 보세요. 말이 안 통합니다.”
윤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두 남자와 달리 재희만 혼자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했다.
권지한이 윤서 쪽으로 긴 다리를 뻗었다. 구두로 윤서의 무릎을 툭 건드린 그가 말했다.
“윤서, 두 번째 날은 언제로 하지? 난 사실 매일매일 하고 싶지만 네 체력을 생각해서 일주일에 세 번으로 봐줄게.”
“두 번째는 없습니다. 29일로 우리는 끝입니다.”
“한번 하고 나면 계속 날 찾게 될걸. 만족시켜 줄 자신 있어. 너도 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여태 없었을 테니까 신세계를 경험할 거야.”
권지한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윤서는 권지한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아서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서 싸울 수 있는 각성자는 여태 없었으니까. 솔직히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심보다는 대련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컸기에 절대로 두 번째 대련은 없을 거라고 맘속으로 맹세했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혼자 다른 주제로 이해한 재희는 혼란에 빠졌다.
지한이 형은 아직 스물둘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까지 찐 어른 남자였나? 대시하는 쪽은 지한이 형 같은데 윤서 형은 스물아홉 살이니까 윤서 형이 도둑놈인 건가? 어떻게 작년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애 앞에서 어떻게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지? 이게 어른인가? 이런 게 어른의 대화란 말인가?
“윤서, 너만 괜찮다면 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스태미나 포션도 있으니까 체력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하루 종일?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요. 그쪽이 날 상대로 3분은-.”
발끈해서 네가 날 상대로 3분은 버티겠냐고 말하려던 윤서가 입을 다물었다. 약한 척해야 하는지 강한 티를 내도 되는지 아직 갈피가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수재희도 있고….
그런 윤서의 생각을 읽은 듯 권지한은 느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두 번째 날은 안 잡을 거야? 나랑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많아. 얼른 예약해 놓지?”
“그럼 그 사람들과 하시죠. 단체로 하면 아주 보기 좋겠군요.”
윤서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다.
띠링.
권지한의 U패드에 메시지가 떴다. 발신자는 석영 길드장이었다. 마침 유준철에게 할 얘기가 생긴 권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얘기라는 건 물론 방금 윤서와의 대화였다. 계약서가 허락하는 부분에서는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다음 주에 보자. 수재희, 너도.”
권지한이 친한 이에게 하듯이 손까지 흔들었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던 수재희도 퍼뜩 놀라며 권지한에게 인사했다.
권지한이 나간 후 윤서는 다시 리모컨을 쥐었다.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대던전에서의 일까지 떠오르는 바람에 어서 빨리 힐링해야만 한다. 급하게 ‘러브 인 한강’의 ‘러브’를 검색하는 그때였다.
“윤서 형….”
수재희가 동경하는 연예인의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들은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와 옆에 앉더니 리모컨을 가져갔다.
“형…. 방금 그 대화….”
수재희는 몹시 더듬으며 말했다.
“제가 오해하는 거… 아니죠? 그, 그 얘기… 맞아요?”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요?”
“바, 방금 그런 대화를… 들었으니까….”
윤서는 수재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제와 같은 안락한 하루를 보내기 틀린 듯했다.
“그 얘기 맞습니다. 내가 말 안 했나요…? 아는 줄 알았는데.”
“안 했어요…. 안 했단 말이에요.”
윤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만났을 때 권지한이 싸움을 걸었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유감이라고도 하지 않았었나.
윤서는 저도 어제저녁 메뉴도 종종 까먹곤 하지만,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수재희가 일주일도 안 된 일을 까먹자 조금 측은해졌다. S급 각성자로서 목숨 걸고 위험한 던전 공략을 다니다 보니 뇌 내 메모리에도 부담이 갔던 걸까.
“두 사람이 그걸… 그걸 하는 사이라니…. 우와아….”
어째 그때보다 더 경악한 것 같았다.
“혹시 그날 형들이 그, 그거 하기로 한 거 저 말고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방금 막 정했기 때문에 재희 헌터가 처음입니다.”
박수빈이나 퍼펙트 팀원들은 권지한이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만 알고, 싸우기로 한 날짜는 모르기 때문에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않아 주겠어요?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까.”
“그, 그럼요. 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형들의 프라이버시는 목숨 걸고 지킬게요…!”
수재희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은 여전히 경악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어서 윤서는 안도했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었다.
***
서울은 대격변 때 대한민국이 멸망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지방보다 유독 심하게 엉망이 되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멀쩡하게 복구되었다. 복원 스킬을 지닌 각성자들과 기술 발달 덕분에 서울은 대격변 이전보다 더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윤서는 바로 그 서울의 중심부인 용산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방 세 개, 욕실 두 개에 넓은 테라스도 딸린 혼자 살기엔 꽤 넓은 신축 아파트였다. 본래 단독에서 살다가 4년 전 이사 왔고, 대출금 없는 순수한 매매였다.
윤서는 10년 전 서채윤으로 활동하면서 아이템일 것 같은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을 보일 때마다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아 시스템이 업데이트된 후 물건들을 감정하자 대부분이 아이템이었다. 윤서는 그것들을 전부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의 2/3를 이 아파트 사는 데에 썼다.
본래도 서울 집값이 비싸긴 했지만, 요즘 신축 아파트는 실드 트랩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32평짜리가 5, 60억은 했다. 대격변 전까지만 해도 5, 6천 원짜리 외식도 하지 않던 윤서였으나 집을 마련하는 데에는 아낌없이 썼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가면 꼭 돌아갈 곳부터 만들어. 보금자리 말이야.’
이 또한 당연히 유언 때문이었다.